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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14
    장애인과 전투경찰(5)
    풀소리
  2. 2005/09/09
    삼성교통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으로 출범하다.(1)
    풀소리
  3. 2005/09/07
    벌초
    풀소리

장애인과 전투경찰

국회를 나서는데 국회 대문 안에도, 대문에도 전경이 쫙 깔렸다.
'뭔 일이랴~.'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 규칙적인 고함소리가 들린다. 뭔 소린지 정확치는 않지만 소수가 모여 고함을 지르는 것 같다. 전경은 새카맣게 모여 있다.(전경 제복도 시커멓다.)

 

뭘까?



가까이 다가가니 전경들이 대열을 갖추면서 지르는 고함소리다.
"꽥. 꽥."

 

전경들이 지르는 소리를 들으면 어떨 땐 오리 소리로(산오리 화나겠다.), 어떨 땐 돼지 소리로 들린다.(돼지들도 덩달아 화내려나.) 짜증나는 건 이러나저러나 똑같지만 말이다.

 

<#> 장애인들의 평화적인 집회/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연설하고 있다.

 

뭔 일일까 하고 둘러보니 장애인들 집회다. 대부분 휠체어를 타고 있다.
그렇담 장애인들 막으려고 전경들이 새카맣게 모였단 말인가.
기가 막힌다. 그들이 뭔 힘이 있다고 집회에 참여한 인원보다 몇 배나 전경이 깔렸다는 말인가. 그리고 장애인들 보호입법을 해달라는 게 물리력으로 막을 일인가.

 

<*> 집회 참석자들보다 훨씬 많은 전경들

 

마침 연사가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다. 노회찬 의원이 하는 말이 오늘 자신의 발의로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이 법사위에 상정되었다고 한다.
집회 순서를 보니 문화행사도 있고, 평화적인 집회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법도 상정되었으니 일정부분 축제 분위기도 있다. 그럼에도 경찰은 온통 거리를 메우고 있다.

 

<*> 전경 닭차들의 꼬리가 보이지도 않는다. 미친놈들!

 

사무실로 돌아와 있는데 밖이 시끄럽다. 내다보니 이건 또 뭔가. 수십대의 경찰차가 시위대 통로를 남기고 둘러싸고 있다. 아까 국회 앞에서 집회를 열었던 장애인 동지들이다.

 

저들은 뭐가 그리 무서울까.
이동할 권리를 달라.
노동할 권리를 달라. 는 그들의 요구가 무리한 것인가.



<*> 개미떼 같은 전경에 비해 집회 참석자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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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교통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으로 출범하다.

 지난 8월 30일 진주 삼성교통의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출범식이 있었다. 5월 22일 파업을 시작한 지 꼭 101일 만이다.

▲ 출범식 행사 빵빠레가 울리고, 폭죽이 터졌다.




100일. 청주 우진교통의 180일 파업에 비하면 길지 않지만 결코 적은 날짜라고 할 수는 없다. 모두가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단 한푼의 월급도 없이 100일을 버틴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며, 가정경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삼성교통은 누적된 임금체불로 그 고통은 배가되었으며, 조합원들 대부분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였고, 일부 조합원들은 파업기간 동안 가정이 파탄나기도 하였다.


악덕 자본가 1명 때문에 200여명의 조합원과 직원, 1,000여명의 그 가족, 그리고 30여만 명의 시민들이 피해를 봤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아무리 자본이 주인인 자본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청에 몰려가 항의하는 조합원과 가족들/ 악덕 사업주 박성칠을 몰아내고 우리들을 살려내라!


출범식은 시작 전부터 흥분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100일 파업으로 단련된 조합원들은 행사 준비에도 일사분란하다. 음식을 준비하는 조, 내외빈을 맞이하는 조, 무대와 행사장을 정리하는 조 등등...


행사 시작 전 구호 외치는 조합원들.


오늘 삼성교통지부 동지들은 투쟁조끼를 벗고, 말끔한 유니폼인 양복바지에 와이셔츠로 갈아입었다. 내일 모래면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거리로 나간다. 더욱 친절하고, 더욱 책임성 있는 자세로 우리는 시민들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주장하고 원해왔던 완전 공영제는 아니지만 공영제로 운영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시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자체와 정부에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버스를 왜 공영제로 운영해야 하는지, 공영제로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투쟁가를 힘차게 부르는 조합원들


축하하러 온 민주버스 조합원 동지들과 버스노협 동지들은 축하의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교차하는 것 같다. 어찌됐든 억압과 착취의 자본이 사라진 현장은 생기로 넘친다. 우리는 가장 좋은 서비스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우리 노동은 시민들에게 또는 우리 삶으로 새는 곳 없이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거리 행진하는 조합원들/ 고난의 언덕을 넘어 오늘 우리는 자주관리기업을 만들어냈다.


100일 동안 투쟁을 선봉에서 이끈 비상대책위원들이 소개되었고, 일선에서 활동해온 조장들이 소개되었다. 모두 감격에 겨워했고, 또한 오늘을 만든 자부심이 배어있는 것 같다. 김권수 비대위원장은 감격에 겨워 연설의 말을 이어가기 어려워했다. 오늘의 감격과 자부심을 영원히 간직한다면 앞으로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능히 헤쳐나갈 것이다.

 

비대위원들 앞에서 김권수 비대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가족들은 기대와 안도와 기쁨이 교차하는 것 같다. 100일 동안 거리에서 싸우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있음에도 조합원 전원이 연행되기도 하고, 간부가 구속되기도 했다. 조합원이 연행되고 난 텅 빈 거리는 늙은 어머님을 비롯해 아내와 아이들 등 온 가족들이 채웠다. 연행자들을 구출하는 경찰서 진격에도, 시청으로 진격에도 가족들은 오히려 선봉에 섰다. 비록 미완의 승리지만 오늘 우리의 승리에는 가족의 힘이 무엇보다도 컸다.



경찰서 항의집회/ 조합원들을 연행해간 경찰서로 몰려간 가족들과 조합원들


인사에 나선 황일남 위원장은 제일먼저 가족들의 노고에 감사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우리가 완전 공영제의 모범을 세우고, 질 좋은 서비스로 시민을 대해 우리가 옳았음을, 버스 완전 공영제가 옳음을 진주뿐만 아니라 전국에 알리자’고 역설했다.


인사말 하는 황일남 위원장


이사진이 소개되고, 김해린 대표이사의 대회사가 있었다. 엄숙하고 엄정한 자리인 만큼 즉석 연설을 피하고 연설문을 작성해왔다. 김해린 대표이사는 비록 삼성교통에 근무하지는 않았었지만 버스노동으로 정년을 맞으신 분이고, 버스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던 분이다. 김 대표는 자주관리기업의 대표이사로 추천을 받고도 계속 고사한 바 있지만 누구보다도 사명감을 가지고 삼성교통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다.


고사지내는 김해린 대표이사


현판식과 고사를 마치고, 오색천 끊기를 마치고, 드디어 버스에 시동을 걸었다. 대표들을 태우고 진주시내 한바퀴를 돌면서 삼성교통이 자주관리기업으로 거듭났음을, 진정한 시민의 발 역할을 할 것임을 온 시민들에게 알릴 것이다. 얼마 만인가. 100일만에 버스를 몰고 거리로 나섰다.


차고지에서 출발하는 시승버스


이제 본격적으로 축하연이다. 삼성 투쟁에 처음서부터 끝까지 함께 한 새노리 동지들과 맥박 동지들의 흥겨운 공연과 노래가 이어졌다. 조합원들과 가족들은 술잔을 부딪치고, 흥겹게 노래부르고 춤을 췄다. 자본이 사라진, 자본가의 압박이 사라진 노동현장은 이렇게 흥겹다. 술판이 춤판이 되고, 춤판이 노래판이 되고, 쟁반을 꽹과리 삼으면 또 어떠랴. 우리는 즐겁기만 하다.


흥겹게 춤을 추는 가족들과 연대 온 동지들


흥겨운 와중에 사회를 맡은 김행규 조직국장은 양구중 전 지부장을 무대로 모셨다. 오늘 자주관리기업을 출범하기까지 누군들 사연이 없으랴. 200여 조합원과 1,000여명의 가족들 모두는 온갖 어려움과 사연이 가득하리라. 그렇지만 어디 양구중 전 지부장 만하랴.

양구중 전 지부장은 삼성교통을 민주버스로 최초로 조직변경을 한 지부장이다. 회사의 탄압에 맞서다 정체 모를 테러(자동차 사고)를 당해 영안실로 실려갈 정도로 생명이 위독했었다. 긴 투병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심지어 기억까지 말이다.


연설하는 양구중 전 지부장


그런 양 지부장이 살아났다.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말도 똑바로 할 수 있다. 마이크를 잡은 양 지부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감격의 눈물이 묻어났다. 사회자는 언젠가 꼭 삼성교통에서 함께 일할 것을 다짐했다. 그렇다. 사람이 사람을 책임지고, 위로하고, 연대하는 것이 진정한 사람 사는 사회다. 억압과 통제만이 사회인양 하는 무리들에게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고, 만들어 가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그런 사회를 작지만 삼성교통이라는 공간 안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노래하고 춤을 추는 조합원들과 가족들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위로하는 노래자랑이다. 어디다 저런 끼들을 숨기고 살았을까.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못하는 것이 없고, 거칠 것이 없다. 앞으로 이렇게 후련하고 기쁜 일들만 있어라.


그러나 우리는 방심할 수 없다. 적은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다. 밖에 있는 적은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안에 있는 가장 큰 적은 방심이고, 망각이다. 회사가 정상화되고, 생활이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 회사와 1,000여명의 가족보다 자기의 이익을 크게 내세우는 이가 나올 수도 있다. 교묘한 논리로 조직을 혼란에 빠뜨리는 동지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자. 우리가 무엇 때문에 땡볕에서 투쟁하고, 얻어터지고, 외쳤는지를 잊지 말자. 가족들이 우리를 믿고 함께 하여 여기까지 왔음을 잊지 말자. 앞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항상 지난날을 오늘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

 

 

지난 투쟁의 나날들/ 우리와 달리 저 초롱한 아이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누구보다도 원칙적이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칙을 지킬 것이고,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민주주의를 실천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고, 오늘의 환희를 기억할 것이며, 조합원과 가족, 아니 10만 버스노동자의 미래를 위해 헌신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출발이다. 삼성교통 자주관리기업 출범 만세!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께

 

 

 

 

▲ 편지를 읽고 있는 전솔잎(18세)양/ 조합원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모두 울렸다.

요즘 정말 많이 힘드시죠? 날씨도 점점 더워져가고 지치신 아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1년 전, 집안사정으로 아빠의 월급이 반밖에 나오지 않았을 때, 전 그때가 제일 힘든 줄 알았어요. 그러나 반밖에 나오지 않는 월급마저 한 달씩 날짜가 미뤄질 때마다 점점 불안해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참 행복했던 것 같아요. 희망이 보였으니까요.

그 희망을 상상하며 우리 기뻐했고, 그 빚을 다 갚고 난 후 우리 가족은 사고 싶은 물건들… 한 달에 조금이나마 저축할 생각을 하며 정말 설레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잖아요. 그런지도 얼마 안돼서 1개월, 2개월, 3개월째 월급이 체불되었을 때 우리 가족의 생계에 위협이 시작되었고 저에게도 더할 나위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인문계고등학교를 다니는 저로선, 비싼 책값, 비싼 등록금, 사사로운 모의고사비, 두 달 세달 밀려 한꺼번에 나오는 급식비 등등 빨리 내지 않는다고 여러 선생님께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항상 독촉장을 받는 저는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습니다.

혹시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기하도 하면 어쩌나… 뒤에서 험담하진 않을까. 아침에 눈을 뜨고 난 후 첫 번째로 생각한 것은 학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혹시 또 독촉장을 주진 않을까 불안에 떨며 학교엘 갔는데 정말 하루하루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지 않는 회사를 원망하고 또 원망할 수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전 내색할 수 없었어요. 제가 이만큼 힘든데 아빠는 오죽 하시겠어요. 파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빠는 적극적으로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며 시간과 돈과 몸과 마음 모든 것을 투자하셨어요. 전 아빠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삼성교통 파업을 부정적으로만 보시는 분들이 있을 때마다 전 아빠를 자랑하며 정확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죠. 오늘 차 없는 거리에서 시위하는데 참석해 줄 수 없겠냐고… 전 그때 친구와 함께 있었어요. 부끄럽다며 거절했었어요.

그 뒤로 가시방석에 않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정말 불편했어요. 그래서 잠깐이라도 참석할까 해서 갔는데,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고 숨어서 지켜봐야만 했어요. 제 자신에게 부끄럽고, 마음이 너무 너무 아팠고 눈물이 나서 도저히 그 모습으로 나설 수 없었어요.

집회하고 행진하고 삭발식을 한다는 소리는 누누이 들어왔지만 제 눈으로는 처음 봤습니다. 아빠가 그렇게 고생하시는 줄 모르고 전 철없이 굴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아빠가 무척 새까맣고 작아보였습니다.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듬직하고 강인하게만 보였는데… 이제 아빠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먼저 흐릅니다. 무서울 게 없는 우리 아빠가 삼성교통의 악덕 사업주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고 계시니까요.

아빠… 사랑하는 우리아빠… 조금만 더 힘내세요.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세요. 조금만 있으면 우리도 남들처럼 웃으며 지낼 날이 오겠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들을 이렇게나 많이 헤쳐 왔는데 우리도 이젠 행복해야죠. 돈 때문에 원망하고 우는 날들을 이젠 끝내기로 해요.

그리고 진주 시장님 아저씨, 우리 삼성교통 가족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나 계시는지요. 시장님께서 적극 나서신다면 삼성교통 문제가 빨리 해결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파업에 돌입한지 한 달이나 됐는데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하루 빨리 시장님이 나서서 삼성교통 문제를 해결하시어 진주에서 정말 존경받는 시장님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전솔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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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지난 일요일 벌초 다녀왔다.
날씨는 적당히 흐리고, 며칠 사이에 견주면 조금 낮은 기온이었지만 풀을 깎는 동안에는 땀은 비오듯이 흐른다.

 

아버지 산소에서 바라본 풍경/ 고향동네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고, 멀리 남한강 자락이 보인다.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해도 집을 나선 건 6시가 되어서였다.
6시 40분 김포공항 앞에서 함께 가준 형님과 만났다.
가다가 아침을 먹고, 약간의 장을 봐도 9시면 고향 충주까지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길은 생각보다 밀렸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88도로에서 중부고속도로를 들어서자마자 밀리기 시작한 길은 중부3터널이 지나서야 풀렸다.
올해는 추석이 이른 관계로 벌초할 날짜가 며칠 되지 않아 한꺼번에 몰렸나보다.

 

고향 언저리에 들어서니 골짜기는 골짜기대로, 큰길은 큰길대로 벌초 온 이들이 타고 온 차들로 빼곡하다. 내 고향동네에 이렇게 많은 차가 오기는 아마 처음일 듯 싶다.

 

벌초 전진기지(?)인 8촌 형네집에 이르니 벌써 10시다. 예초기를 빌리려니 이미 큰집 형님이 가지고 가셨다고 한다. 어쩔 수 없지. 낫으로 하는 수밖에.

 

예전에 팔아버려 선산은 이미 남의 산이다. 우리 소유였을 때 큰산에 아무 곳에나 산소를 쓸 수 있어서였는지 무덤은 띄엄띄엄 떨어져 있고, 걸어서 한바퀴 돌고 오는 데만도 한나절이 걸리는 거리다. 더욱이 벌목을 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길은 작은 나무들과 풀들로 우거져 헤치고 가기도 힘들다.

 

낫으로 깎는 일은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땀은 눈을 찌르고, 팔은 후들거린다. 허리는 끊어지는데도 돌아보면 제자리다.

 

산 위에서 본 고향동네/ 멀리서 보니 아름답기만 하다.

 

벌초는 길에서 가까운 할아버지(할머니 합장) 산소로부터, 아버지, 증조할아버지(할머니 합장) 순으로 한다. 사실 아버지 산소까지 벌초하면 대강의 일은 끝난 셈이다. 증조할아버지 산소는 큰 편이지만 잡풀이 별로 나지 않아 벌초가 쉽기 때문이다.(잔디 등이 잘 자라고, 잘라줘야 할 잡풀이 별로 없다.)

 

아버지 산소 벌초를 끝내고 마을 쪽을 봤다. 멀리 남한강이 보인다. 물이 흘러오는 곳을 보고 쓰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데, 그 물을 보려고 이렇게 높이 썼나보다고 동행한 형님은 말씀하신다.

 

증조할아버지 산소는 벌초할 것이 별로 없지만 거리가 멀어 본격적으로 등산을 해야 한다.
우리는 걷기 쉬운 능선길로 올랐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고향동네가 아름답다. 난 고향에 대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는데, 멀리서 바라본 고향동네는 아무런 사연도 없다는 듯이 아름답기만 하다. 사람도 그럴까? 한 발 멀리 떨어져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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