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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9
    당원번개(2)
    풀소리
  2. 2008/09/03
    내 것(10)
    풀소리
  3. 2008/08/27
    추억(16)
    풀소리

당원번개

진보신당 고양시위원회는 당원이 벌써 464명이다.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능을 뽑내는 재기발랄한 당원들이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차윤석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의욕이 큰 만큼 마음부담 또한 큰가 보다.

 

지난 토요일(6일)

진보신당 고양시위원회 당원 총번개(?) 모임이

풍동 애니골에 있는 YMCA수련원에서 있었다.

 

이번 당원 총번개는 전체 당원들이 편안하게 모이는 첫번 째 자리였다.

그동안 당원들 설문조사 등을 참고하여 차윤석 의장이 제안하였고,

500여 조회수와 31개의 덧글이 달리는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으며 열렸다.

(http://chiiim.net/1bbs/zboard.php?id=equal&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17)

 

물론 열화와 같은 성원이 곧 열화와 같은 참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참여가 예상을 조금 밑돈 것은

전날 있은 2035모임의 진한 술자리탓이었다는 후문이 바람처럼 돌기도 했었다.

 

뒤풀이 모습/ 저 장작불에 고구마와 옥수수도 구워먹었다. - 낡은 디카라 플래시 성능이 좋지 않아 플래시 없이 찍었더니 조리개 열린 시간이 길어 사람의 움직임이 그대로 남았다.

 




캠파이어 시작

 

 

불길이 잦아들자 불앞으로 좀더.../ 우리가 부로농원에서 키운 수박을 자르고 있다.

 

 

삼삼오오


여성모임도 빠질/쏘/냐/


아이들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모닥불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군고구마와 군옥수수가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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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

1.

마음은 입국을 거절당한 디아스포라처럼 막막하고 허허롭지만,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2.

오늘은 나의 연례행사 중 가장 힘든 일을 마쳤다.

벌/초/

 

오르내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유격훈련이 되는 곳,

그 길고 긴 산길을 지나기만 해도

거미를 비롯한 무수한 곤충들이 몸 속에서 스멀거리는 곳...

 

한 때 나의 소유(10살에 상속을 받았으니까)였던 산,

내 유년의 추억이 온전히 배여있는 동네...

 

그러나 그 기억에 대한 미련이나 애뜻함이 마치 사막처럼 말라버린 나의 마음처럼

지금은 그곳에 발붙일 땅 한평 없는 곳...

 

아버지 산소 위 능선에서 바라본 내 고향  인다락(樂)

 

 

3.

그러나 허허로운 술잔이 오히려 나를 채워주고 있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라...

미워한다면 미워한다고 하라...

기억이 소중하면 소중하다고 하라...

 

사진 속으로 되짚어본 고향마을이 새롭게 보인다.

뭣 때문에 애써 외면하려 하는가...

소유가 아니라도 기억은 온전히 내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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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1.

1990년 1월 22일은 내게 있어 특별한 날이다.

역사적인 전노협의 창립일이기도 한 이날은

내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해 상근을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전노협 결성식(1990. 1. 22)

 

 

전날 전야제가 열리던 밤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렸었다.

나는 출근준비를 이유로 전야제에 불참했고,

대신 성수동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마셨다.

 

한참 술을 마시는데 옆에서 어떤 청년이 혼자서 흘쩍거리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궁금해서 왜 우냐고 물었더니

여자 친구가 영남 사람인데, 자기가 호남사람이라서 여자쪽에서 결혼을 반대한다는 거였다.

그 시절이 그랬다.

 

 

 

2.

상근을 시작하기 불과 반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그것이 사회주의자에게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 몰랐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한

고르비 동지의 페레스트로이카 성과의 부작용 정도로 생각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 8)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년만에

소/비/에/트/가/ /무/너/졌/다.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이었다.

소비에트의 붕괴는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주의혁명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의 붕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절망한 많은 동료들이 현장을, 조직을 떠났다.

어떤 이는 천년의 팍스 아메리카시대가 올 것이라고도 했다.

 

돌이켜보면 소비에트 붕괴가

나를 노동운동 언저리에 계속 있게 한 커다란 이유 중 하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붕괴의 절망 속에서 난 일종의 '오기' 또는 '책임감' 비슷한 것이 생겼다.

천생 리버럴하니 오기나 책임감이 조직에 쓸모있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철거되는 레닌 동상/ 현실로써 혁명이 우리의 가슴 속으로부터 철거되는 느낌이었다.

 

 

3.

이제 퇴직할 시간이 임박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꽤 긴 시간이었다.

 

내 성향이 노동(노조)운동과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도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 낸 사표다.

 

사표를 내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임원과 내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표를 내고 나서 내가 오해한 것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돼버린 뒤였다.

 

어쨌든 사표는 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어쩜 내심 바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퇴직이 임박하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무거운 짐이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노동(노조)운동이 침몰하는 상황에서 낸 사표는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도피'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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