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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2
    헌책방(4)
    풀소리
  2. 2008/10/06
    가을 부로농원(4)
    풀소리
  3. 2008/10/04
    선비답게 산다는 것(6)
    풀소리

헌책방

1. 나는 책은 될 수 있음 책방에서 사려고 노력한다. 인터넷 서점을 통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할인도 해주지만 나처럼 책방에 들러 책을 사는 사람이 줄지 않으면 주변 책방들이 더 천천히 없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ㅎㅎ 얼마나 많이 사본다고...) 그래도 헌책방을 둘러보는 건 내겐 늘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 된다. 과거에 한번 보고싶었지만 어느 결에 무심코 지나쳤던 책들, 샀었지만 잃어버렸거나 빌려주고 못 받은 책들, 나왔는지도 몰랐지만 '이런 책도 있었어?' 하고 깜짝 놀란 책들... 2. 며칠전 집 근처에 있는 헌책방에 들렸다. 내 수업 부교재로 쓸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서가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살만한 게 없어 이제 포기할까 하는 찰나 명문당에서 나온 3권짜리 '사기열전'이 보였다. 촌스러운 표지하며, 활자체 하며 참으로 오래됐겠꺼니 했다. 그래도 헌책방에는 3권짜리가 셋트로 있는 경우가 드물기에 집어들었다. 그러나 순간 아차했다. 지갑에 있는 돈을 다 쓰고 겨우 5천원 남았었기 때문이다. 가격을 보니 권당 2,000원이다. 주인에게 흥정(?)을 붙여봤다. 이거 5,000원에 주실 수 있나요? 5,000원에 주긴 아까운 책인데... 이번에 산 3권짜리 '사기열전' 3. 집으로 오는 마을버스를 타자마자 책을 폈다. 내가 당장 읽어야 하는 곳을 폈는데, 펴자마자 오자가 나왔다. 황태자나 우리나라의 경우 세자를 가르치는 선생에 해당하는 벼슬이름인 洗馬가 '세마'가 아닌 '선마'로 나왔다. (洗자는 '씼다'라고 할 때는 '세', '깨끗하다'라고 할 때는 '선'으로 읽는데, 벼슬이름은 '세마'라고 읽는다.) 이크. 고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명문당에서 나왔고, 문학박사에 전직 대학교수가 번역을 해서 적어도 요즘 나오는 것보다 오자가 적을 줄 알았는데... 몇년도에 나왔길래 이래 하고 들춰보니 1986년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고, 자료 정보화가 덜 되었던 시기라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도, 이거 학생들 시켜 번역시켜놓고 대충 손질해서 낸 거 아냐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오자가 있음 있는데로 앞으로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나온 책들과 비교해보면 틀린 부분이 도두라져보일 것이고, 그 부분을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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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부로농원

1. 부로농원 농사도 어느덧 마무리로 접어들고 있다. 배추와 무, 알타리 등이 자라나고, 김장을 할 때 쯤 남은 파랑 함께 수확을 하면 채소 농사는 끝날 것이다.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알타리 무/ 무우순 삼아 먹으니 그 맛이 이채롭다. 토란을 캐고, 들깨를 베고, 고추를 마져 따고 잎을 채취하면 이들 일년 농사도 마무리 될 것이다. 좀 더 추워지면 내년 봄을 위해 마늘농사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늦가을에 심어 짚이나 톱밥을 덮어두고, 이른 봄에 덮은 짚이나 톱밥을 태우면 그것을 양분삼아 올라오는 마늘대궁. 생각만 해도 멋있을 것 같다. 무우와 열무와 배추/ 배추는 진딧물이 너무 많다. 미생물 발효제 EM을 뿌려줬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2. 부로농원 주변에는 올해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알밤 풍년이다. 알뜰하게 줍는다면 집안에서만 줍어도 몇 말은 너끈할 것이다. 조금 발품을 판다면 주변 야산에 지천으로 널린 알밤이 좋은 먹거리, 놀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올 해는 이상하게 알밤을 줍지 않았다. 내가 줍지 않으니 남들에게 권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알밤줍기를 핑계로 만들어지는 술자리를 내심 피하고 싶었던지도 모르겠다. (술자리를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눈치가 보인다. 사실 노조를 그만두어도 술자리는 넘칠 듯이 많다. ㅎ) 부로농원 안의 밤나무/ 알밤이 엄청 떨어지는 이런 아름들이 밤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도 이곳을 내집처럼 드나들며 알밤을 줍는 이들 때문에 주인들은 밤구경을 제대로 못한다. 부로농원 안에 있는 밤나무들에서는 밤을 줍기 어렵다. 이곳을 주 타겟으로 하루에도 3-4차례 밤을 주으러 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들은 밤나무 밑 키작은 철쭉 밑으로 토끼굴처럼 길을 만들어 말끔하게 주어간다. 지난 연휴기간 동안 작년 생각에 부로농원 옆 야산 밤나무가 많은 곳으로 갔다. 그곳은 아직 사람들 손을 별로 안 탄 상태였다. 그러나 알밤들이 이미 떨어진지 오래라 벌레를 먹은 것이 너무 많았다. 밤나무들을 올려다보니 밤송이가 거의 남지 않았다. 알밤도 철이 지났다는 얘기다. 부로농원 혜택을 주변 이들에게 조금씩 나눠줘야 하는데, 앞가림 제대로 못하는 이 머슴은 마음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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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연수원에 다니면서 소학 과제물(숙제) 하나가 매월 독후감 한편씩 써내기다.

숙제로 내주신 읽을 책 목록 중에 원당도서관에는 안대회 선생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 한권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때로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선비답게 산다는 것 - 안대회내 아버지는 3년간의 병원생활 끝에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아래와 같이 여쭈었고, 그리고 할아버지는 역시 아래와 같이 답하셨다고 한다.“이제 머슴을 둘 수도 없는데, 아버님이 농사일을 하실 수 있겠어요?” “선비가 못하는 게 뭐가 있겠느냐.” 그리고 나서 곧바로 쟁기질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 할아버지 연세가 60이셨다. 그때까지 농사일이라곤 해보지 않으셨던 분이다. 선비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참 많이 들어왔지만, 위의 얘기는 ‘선비’ 또는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내게 있어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그렇지만 난 지금도 선비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이해를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선비답게 살겠다는 굳은 의지도 없었다. 그럼에도 안대회 선생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을 고른 것은 순전히 강렬한 기억과 기억에 따른 궁금증 때문이었다.물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난 어떤 이를 ‘선비’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책이 ‘선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천착한 것이 아니라 선인들의 일화 중 나름 선비답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하여 일화를 모아논 것이니, 책을 통하여 ‘선비란 무엇인가’를 찾는 다는 것 또한 몇 조각의 모자이크 퍼즐로 전체 그림을 유추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 같다.그렇지만 ‘과연 선비답다’ 하는 일화를 중심으로 책을 묶었으니, 가장 기억이 남는 일화를 따라가는 것이 나름 선비의 삶을 이해하는 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남는 일화를 따라가 보자.토정 이지함 선생이 안면도에 살고 있으면서 계룡산 자락에 살고 있는 친구 고청(孤靑) 서기(徐起)에게 척독(尺牘, 짧은 편지)을 보냈다."요새 학문에 진척이 있으신지요? 여기는 자식 놈이 감기를 앓고 있는데, 상태가 심해 걱정입니다. 내일 조카를 데리고 탐라를 가려는데, 선생께서 동행할 뜻은 없으신지요? 그래서 편지 올립니다."나는 깜짝 놀랬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더욱 놀랬다. 왜 놀랬는지는 미호(渼湖) 김원행이 제자 담헌(澹軒) 홍대용에게 자기가 대단히 좋아하는 글이라며 보여주며 들려준 얘기로 대신하겠다."오늘날 사람은 교외에 나가는데도 반드시 날을 잡고 양식을 장만한다고 법석을 떤다. 그러고도 병이나 어떤 사유를 대며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다. 그런데 토정 선생은 바다 건너 섬에 들어가는데도 자식의 중병은 염두에 두지 않을 뿐더러 천 리 길을 가면서 약속을 내일로 잡았다. 하룻밤 사이에 말과 식량을 어떻게 마련하겠느냐? 하지만 고청 선생은 망설임 없이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두 분의 행동이 물정에 어두운 사람의 일로 보일 것이다만, 나는 이 편지에서 그 분들의 호쾌한 결단을 보았다!"얽매임이 없다는 것이 어디 좋기만 하랴. 그러나 결단할 때 마치 아무런 얽매임이 없는 것처럼 흔쾌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요, 나도 그렇게 되고픈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다산 선생은 정조 19년(1795년) 충청도 청양의 금정찰방(察訪, 驛을 관리하는 종6품 문관 외직)으로 좌천된 뒤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퇴계의 편지글 한 편을 일고 그 독후감을 써서 모아두었다고 한다. 이때 다산의 나이가 34세이고, 퇴계선생이 돌아가신지 200년이 지난 다음이다. 이글들은 나중에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란 이름의 책으로 묶였다고 한다. 선현을 존경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이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하려는 다산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존경을 우러나오게 한다.1760년(영조 36)~1812년(순조 12) 기간을 사신 이옥(李玉)이란 문인이 있다. 이분은 전(傳)을 23편이나 지어 연암 박지원과 견줄 만한데, 작품이 보다 많고 등장인물과 사건이 훨씬 다양하며, 민요시는 다산 선생과 견줄만한 대단한 문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로는 이단적인 문학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귀양을 가고, 인정받지 못하는 등 억압받고 불우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분은 26세가 되는 1784년 제야에 ‘문학의 신(文神>’에게 제문(祭文)을 올린다."아! 똑같은 봄이건마는 연꽃과 국화를 만난 봄은 반드시 머뭇머뭇하며 꽃을 피우기 어려우니 일찍이 피는 오얏꽃에 비교할 수 없다. 이것이 어찌 봄의 잘못이랴! 연꽃과 국화가 봄을 저버린 결과다. 가만히 생각하니 낯이 뜨겁고 창자에 열이 나서 차마 더 말을 늘어놓을 수 없다. 바라건대, 그대 문신은 나를 비루한 놈이라 여기지 말고 바보 같은 성품의 나를 한 번 더 도와서 예전 습성을 씻어버리게 해달라. <하략>"이옥은 문학에 대단히 정진한 분이다. 당시 과거에 뽑힌 글들이나 이름난 글들을 매우 하찮게 여길 정도로 자부심 또한 대단했던 듯싶다. 그러나 문체반정을 관철하려는 정조임금의 정책에 도전하였으므로 당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다. 위의 제문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과 불화하는 세상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넘쳐 보인다.옛사람은 벗을 어떻게 사귀었을까? 그리고 벗의 의미를 어디에 두었을까? 연암(燕巖) 박지원이 우정을 나누게 된 큰 인연에 감사하는 내용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늦게 태어나지 않아 한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또 그대가 얼굴에 칼자국 내는 흉노족이 아니요, 내가 이마에 문신하는 남만 사람이 아니라 한나라에 같이 태어났지요. 그대가 남쪽에 살지 않고 내가 북쪽에 살지 않아 한마을에 같이 살고, 그대가 무인이 아니고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 함께 선비가 되었지요.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구차하게 해야 하거나, 억지로 상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해야 한다면, 차라리 천 년 전 옛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일백 세대 뒤에 태어날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인연도 인연이지만, 연암은 서로 뜻이 통하는 벗이 있다는 걸 감사하는 마음을 ‘천 년 전 옛사람’이나 ‘일백 세대 뒤에 태어날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거’이라는 비유와 대비시켜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선비의 갈림길」 편(編)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편은 대단한 문인으로 똑같이 당대의 명성을 한 몸에 받았으나 세상과 불화하여 사약을 먹고 죽어갔지만, 후세의 평가가 정 반대로 엇갈리는 김안로와 유몽인에 대한 글이다.김안로는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좌의정에 까지 이르고 아들이 왕의 부마가 되는 등 권세를 한없이 누렸지만, 무수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조선이 끝날 때까지 복권되지 못하고 권간(權奸)으로 낙인찍힌 자이다.어우야담(於于野談)의 필자로 유명한 유몽인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무고를 당하여 사사(賜死)되었지만, 신원(伸寃)되기 전에도 전라도 유생들이 따로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양했을 정도로 문명을 날리고, 존경받았던 분이다.유몽인은 광해군 시절의 집권당인 북인(北人)이었지만, 인목대비 유폐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과 집권당의 정책에 반대하여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인조반정이 나고 나서 북인을 포함해 많은 관료들이 출세를 위해 반정세력에 줄을 서려고 애를 썼지만, 유몽인은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참소를 받아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당시 취조를 당할 때 변병하지 않고, 시(詩) 한편을 취조관에게 주었다고 한다.七十老孀婦 칠십먹은 늙은 과부 端居守閨壺 규방을 지키며 단아하게 사는데 家人勸改嫁 사람들이 개가를 권하며 善男顔如槿 무궁화처럼 멋진 남자를 소개했네 頗誦女史詩 여사의 시를 제법 외웠고 稍知妊姒訓 어진 여인들의 가르침을 배운 몸이 白首作春容 백발에 젊은 티를 낸다면 寧不愧脂粉 분가루가 부끄럽지 않겠소<과부의 노래(寡婦詞)>란 시다.결국 이 시를 빌미로 처형되었고, 훗날 광해군의 신하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를 지킨 신하라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광해군 정권의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반정세력에 아부하거나 삶을 구하고자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詩 한편마저도 선생의 고아(高雅)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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