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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시험 감독

조용하게 학교만 다닐 줄 알았던 가문비가

지난 1학기 초에 난데없이 표 대결까지 해서 3학년 8반 반장이 되었을 때,

가문비 엄마 왈,

"야, 반장 엄마들 학교 와라, 이러는 거 싫은데, 어쩌자고 반장을 했어?"

가문비는,

"그냥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왜 그러셔?"

 

그러고 나서 학교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반장이며 회장 엄마들이

서로 전화도 주고받고 하면서 아이들 뒷치닥거리를 하는 낌새는 여러번 봤었다.

 

그 중에 하나가 시험기간에 가서 시험감독을 하는 일인데,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 10월 4일부터 6일까지란다.

아내는 10월 5일(바로 오늘!)에 시험감독을 하는 걸로 턱 하니 이름까지 올랐는데,

이번 주부터 서울로 출근을 하고 있으니

졸지에 그 노릇이 나한테로 넘어왔지.

 

오늘 오전은 여차저차하여 휴가를 청한다고, 사무실에 연락하고 나서

이틀째 스쿼시된 몸을 끌고 학교로 갔다.

 

09:00-09:45 사회

10:00-10:45 기술, 가정

11:00-11:45 수학

 

오늘의 시험시간표는 이랬다.

1학년 8학급, 2학년 9학급, 3학년 10학급, 모두 27학급의

반장, 부반장, 회장, 부회장 등등의 감투를 쓴 아이들의 엄마들이

당번을 정해서 매일 27명이 모이고

선생님들과 짝을 이루어 시험감독에 들어가는 것인데,

오늘도 남자는 나 혼자였다.

안내말씀을 주시던 무슨 주임선생님께서는 나를 보더니

아빠들이 감독을 하면 더 좋겠다고 하고, 엄마들도 맞장구쳤다.

 

시험감독을 맡은 선생님은 자기가 담임을 맡고 있는 학년은 제외하고

학부모 감독도 자기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년은 빼고 반 배정을 한다.

나는 1교시 2학년 7반, 2교시 2학년 8반, 3교시 2학년 9반이었다.

 

내신성적을 여러모로 반영하기 때문일까,

시험분위기가 거의 입시와 진배없다.

정해진 45분 동안에 문제를 풀고 답은 OMR카드에 적어서 내는데

문제지에는 연필로만 쓸 수 있고

OMR카드에는 빨간펜으로 표시하고 나서 컴퓨터용수성사인펜으로 최종 표시하고,

주관식은 검정이나 파랑 볼펜으로 쓰도록 정해서 칠판에 인쇄물로 커다랗게 공지해 두었다.

 

우리 때는 답안지 빨리 작성하고 나면 그냥 나가곤 했었는데

그럴 수도 없다. 문제를 일찍 풀면 엎드려 자는 수밖에 없다.

시험지 나눠주고 10분만에 엎드린 아이,

시험시간이 2분 남았는데 OMR카드를 두번이나 새로 청하는 아이,

시험시간 내내 단 5분만 깨어있던 아이,

한 반에서는 OMR카드를 25분 지나고 나서 나누어주었는데

그 사이에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버린 아이,

연신 코를 훌쩍이거나 연필로 장난질을 하거나

여하튼 각자의 개성들이 틈틈이 시험시간의 정적을 깨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에 45분 내내 교실 뒷편에서 서 있는 것이 내 임무였다.

 

그냥 멀쩡하게 서서 45분씩 견디는 거, 이거 중노동이더라.

3교시쯤 되니까 허리도 뒤틀리고 다리도 뻐근한 것이

앞에서 서 있는 선생님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로구나.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학교 식당에서 20여명의 엄마틈에 홀로 끼여서

짬밥까지 먹고 집으로 왔다.

(교장선생께서 밥먹고 가라고 아예 지키고 있더라)

그냥 뻗어서 잠이나 자면 좋겠는데

오후 일정도 만만치 않다.

일단 사무실에 가서 출근신고는 하고 보자.

 

참, 쉬는 시간에 교감선생님이 학교 폭력에 관한 짧은 보고/안내를 했는데,

가문비네 학교는 학교폭력이 별로 없고

특히 요즘 여중생들이 담배를 많이 피는데 그것도 덜하다,

다만,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한 곳이라서

시험을 앞두고 인근 상가 등지에서 도벽이 발동하여 파출소로 잡혀가는

아이들이 있다, 엄마 아빠가 박사라고 10대 아이들까지 박사는 아니니까

아이들 시험치는 기간에 너무 스트레스 주지 말고

좋은 점수 받으라고 압박하지 말기 바란다,

백일장 같은데 가자고 해도 공부에 영향 있을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게

이 학교 분위기다, 너무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는 것 같다,

대충 이런 얘기였다.

 

학부모 시험감독은 왜 하는지 잘 이해는 안되지만

가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듣는 건

흥미로울 때가 있다.

 

방금 가문비가 뒤이어 집에 왔다.

학부모들이 시험감독을 맡으면 무슨 컨닝예방효과라도 있냐, 물었더니

친구들이 그냥 좀 부담스러워한다고 그런다.

하긴,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엄마가 내려다 보고 있으면

선생님이 보고 있는 것하고는 또다른 부담이 될 것 같다.

 

아무튼, 반장 딸 덕에 별 일을 다해 본다.

한국의 학부모들은 아이들 학교 일에는 참 고분고분하단 말이야.

 

(시험 분위기 망칠까봐 사진 하나 못찍었다. 2학년 7반 교실 칠판에

 "지나친 욕설하지 말기"라고 적혀 있었다. 음, 요즘은 지나치지만

않으면 욕설쯤은 허용된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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