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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유서] 에 관련된 글.

 

=미디어충청(http://cmedia.or.kr)에 오늘 기고한 것.....

 

 

민주노총 지도부 조문 유감

다시 두 통의 유서를 아프게 읽으며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40대의 후반에 작고한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은 죽음이 갖는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서서 죽음을 애도하는 정치, 사회적인 근원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며, 그의 육체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추모의 열기는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뜨겁고, 또한 그의 죽음이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더욱 커지거나 줄어든다. 젊은 연예인의 자살이나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나, 그런 의미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니까 지금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한 국민적 추모의 열기는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의 급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열광하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큰 충격이고 슬픔일 수 있으며, 누구라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애도할 수 있다. 비록 모양새는 자살이지만 많은 국민들은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을 괴롭혀서 살해’했다고 믿고 있으며 서슴없이 그렇게 말하고들 있다. 더 부패한 정권이 전직 대통령의 ‘옥에 티’를 압박하여 못 견디게 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대중적인 공분은 이명박 정부 아래 자신들이 15개월여 동안 겪은 핍박과 굴종의 경험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응축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죽은 대통령의 유령이 현실 정치를 움직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2004년 탄핵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를 심각하고 강력하게 양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른바 인물 중심의 ‘3김 정치’ 시대를 종식하고 탈권위주의의 시대를 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내부의 공고한 시스템으로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은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를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봉하 마을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 아닌가. 양 극단의 사이를 채우고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 특히 노동운동진영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급변하는 흐름에 동요하거나 휩쓸리지 말고 중심을 제대로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수년간 민주노조진영은 상층부의 잇따른 비리와 성폭력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혁신해야 할 대상으로 부각되었고, 정부와 언론의 민주노조 죽이기 공세는 끝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그 집요한 공격이 일정하게 성공한 것일까, 현 시점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조운동은 안타깝게도 노동자 민중의 희망이 아니며, 미래의 대안도 아니다. 이러한 때, 범국민적인 추도의 열기가 아무리 뜨겁더라도 노동운동진영이 그것에 편승하여 섣불리 부드러운 화해의 손길을 내밀다가는 악수와 공감을 얻기는커녕 내부의 상처를 헤집고 억울함에 사무치는 통곡소리를 더욱 크게 할 뿐이다.

“한 소중한 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늘, 그것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크게 진척시킨 전직 대통령인데, 애도 성명도 내지 말고 조문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혹여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범국민적인 추모의 열기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떤 누구라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진영이나 민주노조진영이 조직의 이름을 걸고 죽음에 대한 예의를 빌미로 자기 조직의 정체성을 해치는 행위를 합리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역대 정권에서 죽어간 수많은 혼백들을 일일이 불러대지는 않더라도, 용산참사로 숨진 시민들 5명의 비통한 외침과 정권의 탄압에 자결로 맞선 노동자 박종태의 처절한 절규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온 국민의 애도에 둘러싸인 전직 대통령의 영전에 국화꽃 한 송이 더 바치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외롭게 떠돌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영혼을 달래고 그 뜻을 기리고 이 땅 위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나는 민주노조운동의 간부들에게 ‘특별한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와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가 남긴 유서를 다시 읽어 보라고 감히 권한다. 온 국민이 애도하는 ‘특별한 사람’의 유서에는 한 개인의 상처와 고통만이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이 땅을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있다. ‘특별한 사람’은 국익을 내걸고 이라크 파병을 감행하고, 비정규악법을 강제하고, 한미FTA를 밀어붙였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단이 국익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는 국익의 근본이 노동자 민중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것을 죽음으로 실천했다. 나는 감히 주장한다. 유서를 통해서 나타난,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의 자세로 견주어 보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지만 ‘특별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개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난 이 땅 소수의 ‘특별한 사람’보다 다수의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이끌고 가는 것이라고 또다시 확인한다.

노파심에 한마디 더 하겠다. 혹시라도 민주노조의 이름으로 봉하 마을에 가거들랑, ‘특별한 사람’에 대해 남몰래 보냈던 경외심은 버리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과 함께 하는 새로운 투쟁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단단히 벼리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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