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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1/27
    헥산의 추억?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5/01/21
    15시간의 회의...(10)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5/01/14
    회의에 산다(4)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5/01/07
    택시의 위력?(2)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5/01/07
    규칙적인, 아주 규칙적인...(10)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5/01/06
    스타 과학자 만들기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5/01/03
    새해인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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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1/02
    하늘에 구름 한 점(2)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5/01/02
    정리(4)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4/12/30
    내가 한 말(2)(3)
    손을 내밀어 우리

헥산의 추억?

어제 아침부터 오늘 새벽 2시까지

안산에서 연맹 중앙집행위원회(수련회-사업계획, 재정대책 등등),

새벽 4시까지 술마시기,

아침에 영등포로 달려가서

낮 1시까지 공공연대 회의(워크샵-사업평가, 계획 등등),

점심먹고는 모처럼 과기노조 동지들과 어울려 보려 했더니

어제 오늘 쌓인 일이 장난이 아니다, 곧장 사무실로 왔다.

 

잠시 짬을 내어

여러 게시판을 둘러보고 나니

내 게시판이 휑뎅그렁하다.

 

흔적이나 남기지.

마감을 한참 넘겨서

어제 새벽에 휘갈겨 써보낸

<네트워커> 원고가 편지함에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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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

 

무색무취의 유기용제. 공업용 세척제와 타이어 접착제 등의 소재로 쓰이는 물질. 신체에 직접 노출될 경우 호흡기를 통해 독성이 침투하여 신경장애를 일으킬 수 있음. 독성이 강하여 인체에 흡수될 경우 신경·호흡기·소화기 및 각종 장기에 장해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유기용제를 제조·취급하는 사업장에서는 환풍기 같은 각종 안전시설 설치 및 보호구 착용 등이 의무화되어 있음.

 

태국 노동자 8명이 집단으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다발성 신경장애’(일명 앉은뱅이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 원인물질이라고 하는 노말헥산(n-Hexane)에 대해서 일반적인 사항을 간추려 읽었다. 노말헥산, normal Hexane, 노르말헥산, 그렇게 소리내어 읽어보니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 되살아난다. 식물을 추출해서 새로운 약리활성물질을 찾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나는 메탄올, 벤젠, 클로로포름, 헥산 따위의 용매들을 벗삼아 실험실에서 지냈다.

 

학원 실험실은 새내기 혹은 예비과학자들에게 24시간 편의점처럼 언제나 활짝 열린 공간이었다. 연이은 실험과 시험에 짓눌린 몸으로, 밤이면 그 곳에서 술도 마시고 잠도 잤다. 실험실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를 깔고 누우면 이따금 옆 실험실에서 도망친 흰쥐들이 가슴팍에 올라타서 사람을 놀라게 했다. 거기에 넘치던 것들이 헥산과 같은 유기용매들이었다. 발암성이 높은 벤젠조차 환기장치를 갖추지 않은 곳에서 대충 쓰곤 했으니, 헥산쯤이야 참으로 만만한 물질이었다. 실험실 안전과 유기 용매의 독성에 대해서는 교과서적인 경각심만 있었을 뿐 실험실의 환경은 70년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는’ 대한민국 88년 올림픽의 영광이 무색하게, 꽃다운 열다섯 나이의 문송면은 수은중독으로 숨지지 않았겠나.

 

그 때 우리는 간혹 낄낄대며 농담처럼 얘기하곤 했다. 나중에 누군가 암에 걸려 죽으면 실험실에서 마신 용매들 때문이라고. 그 말이 씨가 되었을까, 나의 두 선배는 나중에 교수가 되어 실험실로 복귀했는데, 한 선배는 간 기능이 난데없이 크게 떨어졌고 또 다른 선배는 몇 년 전에 젊은 나이로 돌연 세상을 등졌다. 건강하고 쾌활했던 선배의 사인이 간암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련하지만 정겹고 열정적이었던 실험실의 추억을 뚫고, 클로로포름과 벤젠고리의 기억이 섬뜩한 죽음의 무게로 나를 덮쳤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발성 신경장애라는 낯선 딱지를 달고 온 노말헥산을 만난다. 나에게 헥산이라는 이름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앉은뱅이로 만든 원인물질이기에 앞서서, 연구실에서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이 땅의 과학기술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안전불감증의 선연한 징표이다. 대덕연구단지만 하더라도 최근 2년 사이에 잇따른 폭발사고로 인하여 젊은 학생과 연구원들이 죽거나 혹은 크게 다쳤지만, 아직은 기억할만한 하나의 사건일 뿐, 사회적으로 미연에 방지해야할 재난은 아닌 듯하니 말이다.

(2005.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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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간의 회의...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가 속리산 유스타운에서 있었다.

20일 오후 1시에서 21일까지 한다고 공고가 되었었다.

1시부터 연맹 대의원 사전모임을 갖고자 했는데

전국에서 모여들다보니 2시나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이수호 위원장이 유회를 선언한

21일 새벽 5시 30분까지 무려 15시간 30분을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대강 이렇다.

 

사전토의 1시간(14:00 - 15:00)

식전행사(투쟁보고) 1시간(-15:30)

기념행사 30-40분(-16:00)

 

그러고서 10분쯤 쉬기로 했다.

전체 대의원 785명 중에서

참석한 대의원만 538명으로 보고되었으니

7-8백명 참석자들이 하나밖에 없는 출입구를 통해서

로비나 복도에 나가 담배를 피거나 차를 마시고

돌아오는 시간만 얼추 30분 걸렸다.

즉, 10분 정회는 실제로 30분 동안 쉬는 것이다.

 

긴급안건이 2건 발의되었다.

17시 45분쯤 서울대병원지부에서 상정한 건을 표결에 부쳤고

494명 중 223명 찬성으로 과반수를 얻지 못해 폐기되었다.

18시 35분쯤 공공연맹에서 제기한 iT연맹 승인 건을 표결에 넘겼는데

493명 중에서 221명이 찬성하여 역시 폐기되었다.

 

저녁을 먹었다.

줄이 너무 길어서 몇명이서 나가서 먹었다.

자연산버섯전골,

능이, 싸리 등등 오랜만에 만나는 버섯들이 감칠맛났다.

 

좀 늑장을 부려서 8시에나 들어왔나,

저녁시간 전에 현장에서 또 하나 긴급발의되었던 것이

집행부와 제안자 사이에 대강 합의처리되었던 모양이다.

 

이때부터 심의안건으로 들어갔다.

사업평가 보고 결산 승인 건, 22시 5분쯤에

사업평가에 대한 전면수정안이 표결에 부쳐졌고

467명 중에서 129명만 찬성했다.

토론이 계속되어 여러 수정안이 제안되어 다루어진 다음에

평가보고와 결산 승인건은 436명 중에서 327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23시경, 사실상의 첫 정회가 있었다.

30분 걸려서 다시 속개되었고, 사업계획과 예산을 다루었다.

50억모금이 구체적인 계획도 부족하고 실천력도 의심되니까

폐기하자고 한 제안이 425명 중에서 172명 찬성으로 폐기되고,

10주년 기념행사 사업비에서 1억을 빼서 지역본부 교부금을

증액하자고 한 것도 역시 422명 중에서 172명 찬성으로 폐기되고,

2호 안건 전체를 422명 중에서 295명이 찬성해서

통과한 시간이 새벽 1시 45분쯤.

 

쉬자고 누군가 제안했지만, 의장은 요지부동 계속한다.

앞자리에 앉아서 줄곧 지켜봤는데

이수호 위원장 표정에서 피곤함이 역력히 배어나는데,

억지로 강행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2월 총력투쟁에 관한 건이 3호 안건이었다.

3시 20분까지 공방이 이어졌고,

비정규연대회의에서 제안되었던 하루파업계획은

399명 중에서 불과 77명만이 찬성했다.

원안이 통과된 것이지...

 

3시 20부터 다시 정회하지 계속하자가 맞붙었고,

그동안 기자실에서 쉬고 있던 TV카메라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정회론을 의장의 권한으로 잠재우고

이 날의 최대 쟁점인 사회적 합의건에 대한 제안설명이 있었다.

또 정회하자, 효율적으로 회의진행해달라, 공방이 있었고,

결국에는 40분간 그 공방 하다가 4시쯤 정회를 한다.

 

정회 중에 잇따라 중집위 또는 산별대표자회의가 약식으로 열렸고,

5시쯤 되어서 제안된 내용이

성원은 오락가락하지만

현재 상태로 회의를 심도있게 논의하는 것은 무리니까

28일쯤 속개하자는 안이 대표자들 사이에서 제시되었다.

 

연맹 대의원들이 따로 모였는데, 의견이 모아질 턱이 있나.

새벽 5시 20분에 속개된 회의에서는

의장의 정회 및 28일 개최에 대한 협조요청에 대해

성원부터 확인해달라는 주문이 제시되었고,

의장이 성원을 확인하도록 한다.

 

성원을 확인하는 도중에, 의장의 애처로운 말씀들,

"지금 들어오시는 동지, 대의원 아닙니까?"

"예, 또 한명!"

 

그러나 최종 확인된 숫자는 380명이었다.

 

의장, "정확히 확인했나요?"

 

그렇게 새벽 5시 30분에 끝났다.

사무총장은 사무처 성원들로 하여금

남아있는 대의원들의 명찰을 앞으로 거둬내도록 지시했고

몇몇 대의원들이 이에 질세라, 명찰 거둬서 도망간 사람들

인터넷에 공개하라고 했고, 누군가는 징계발의하겠다고 나오기도 했다.

 

나?

명찰 그대로 목에 걸고 나왔다 왜.

 

민주노총 대의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존중도 없이

짜증과 분노와 욕설과 억지와 집착과 승부욕으로 요지경이 된 회의,

그 감상문을 차분히 올릴 시간을 찾아가기 전에

일단

연맹 사무실에 돌아와서

서글펐던 시간의 기록들만 우선 남긴다.

 

주절주절

설레설레

 

별로 졸지도 않고 자리를 뜨지도 않고

그 긴 시간을 불편한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버텼던

나와 모든 동지들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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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 산다

1/3, 첫 출근, 상집회의(임원/상설위원장/사무처), 대청소

1/4, 취임식/시무식, 모란공원 참배

1/5, 처.실장단 회의, 실별 브리핑(총무, 대협, 교선, 정책)

1/6, (사무처 개별 면담)

1/7, (저녁, 김천행, 할머니 제사)

1/8-9, (처가 식구들 우르르 놀러오고...)

1/10-11, 임원.사무처 수련회(안산), 회의, 회의, 분임토론, 회의

1/12, 중앙집행위원회(48명 중 41명 참석, 초유의 일이라?), 실별 브리핑(미조직비정규실)

1/13, 처.실장단 회의, 민주노총 조직혁신위원회 전체회의, PSI-KC대표자회의

1/14, 실별 브리핑(조직실), 민주노총 중앙위원회 예정

 

지난 열흘이 대강 이렇게 흘렀다.

앞선 회의결과를 정리하기도 전에 또다른 회의가 이어지고,

회의와 회의 사이로는 결재서류가 연이어 몰려든다.

공식회의가 아니더라도 회의에 준하는 간담회나 약식모임도 틈틈이 있으니,

그야말로 회의하다가 하루를 보내는 듯하고,

나를 제외한 7명의 임원(위원장, 수석부위원장, 5명의 부위원장)을

집회, 이취임식, 교육, 투쟁사업장 방문, 분과/지역본부 대표자회의 등등으로

행사의 성격과 임원들의 역할과 특성을 고려하여

제대로 배치하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다.

쪼들리는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일,

올해 사업계획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

임기 초반에 꼭 해야 하는 이런저런 일들,

일과 중에는 차분하게 준비하고 논의할 틈이 없으니,

밤은 밤대로 새벽은 새벽대로 맘이 바쁘다.

그나마 각각 2시간 남짓되는 출퇴근 시간의 사색(?)과 메모, 숙면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내 머리는 벌써 쑥대밭처럼 엉망이 되었을 터.

 

그래도 사무실에 주로 있는 나는 좀 나은 편인가,

오늘은 광주 전남지역 투쟁사업장을 두루 방문하고

늦은 시간에 서울로 돌아온 위원장께서 전화로 하는 말씀,

이렇게 맨날 길에서만 시간 보내고 쌓인 일들을 언제 하노?

푸념보다는 즐거운 비명으로 듣기로 하고, 한마디 했다.

-그래서요, 토요일까지 회의를 잡은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가급적 토요일은 재택근무로 때우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 실장단회의에서 해야할 일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다 보니

도저히 안되겠더라, 그래서 긴급하게 토요일 아침으로

임원.실장단 회의를 소집했고, 그 얘기를 위원장에게 했더니

=토요일까지 처장이 서울로 오는 건 너무하지 않아?

-괜찮아유~, 느즈막히 시작하지요, 뭐. 아침 10시에 합시다.

 

투쟁하는 데도 자주 가고 집회도 열심히 가고

이러저러한 현장에도 자주 가서 조합원들 얘기도 많이 들어야

사무실에서 하는 일도 생동감있고 회의도 현실감이 더해질텐데,

이러다간 정말 회의만 하다가 2년 임기 다 채우는 거 아닌가 몰라.-.-;;

내 역할이 익숙해지면 조금은 나아질려나 아주 곤두박질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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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의 위력?

어제 서울에서 술마시고

과기노조 동지들과 곧바로 대전으로 가서

때마침 당의 신성동분회 모임을 하고 있다길래

얼콰하게 취한 당원 동지들한테 새해 인사도 하고

택시를 타고 곧바로 집에 갔으니

내 차는 대전역 주차장에 있고

아침에도 할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할 판이라,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서

가방 메고 도시락가방 들고 아파트 입구까지

총총걸음으로 뛰어갔지.

아침 손님들을 기다리며 줄줄이 늘어선 택시,

그 맨앞의 차에 타고 대전역이요 했다.

어제 말했다시피 우리 집에서 대전역까지는

승용차로 20분 남짓 걸리니까

7시에 택시를 탄 나는 당연히 7시 33분차를 탈 심산이었거든.

근데 이게 뭐야, 아침마다 길을 막아서던

음주단속 경찰도 없는 길을 마구 달려서

대전역 앞에 내려서 시계를 보니 7시 12분일세.

히야, 12분 걸렸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7시 19분차를 느긋하게 기다려서 탔다.

연맹 사무실에 도착하니 9시 10분 전,

이게 택시의 위력이로구나.

고마워했어야 하나, 천천히 달려도 된다고 말려야 했나.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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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인, 아주 규칙적인...

고3때, 나는 참 부지런한 자취생이었다. 아침 6시쯤에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서는 연탄불(여름에는 석유곤로, 곤로 아세요?^^) 위에 밥냄비를 얹어놓고 주로 국어책을 읽었다.

아직도 구절구절 기억하고 있는 시와 수필 나부랭이들은 그 때 반복해서 읽다가 보니 그냥 비석에 글자 새기듯이 머리에 새겨진 것들이다.

 

도시락을 두 개 싸서 학교에 갔다. 시골 엄마나 대구에 사시던 이모님이 해다 주신 밑반찬이나 내가 서둘러 만든 감자볶음이나 콩자반 따위가 도시락 반찬들이었는데, 친구들은 내 반찬들을 맛있다며 집어 먹곤 했다. 본고사 세대라서, 종로학원이나 대성학원 문제지들을 얼마간의 돈을 내고 받아다가 모의시험을 치르곤 했지만, 나머지는 거의 수업에 충실한 모범생이었다. 가끔, 시내버스에서 자주 보곤 하는 이웃 여고의 이름모를 여학생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뿐이었지만-

 

그 고3 이후로 내가 얼마간이라도 규칙적으로 생활한 날을 떠올려 보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문무대 입소 9박 10일, 농촌활동 9박 10일 정도 여러 차례, 약사면허시험을 준비하던 대학졸업 직전 약 15일동안, 신병훈련소에서의 4주 훈련기간, 지금 기억하기로는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특히 작업반장으로 농촌활동을 했을 때, 새벽까지 평가회의며 분반회의를 빌미로 잠도 안재우고 다시 이른 아침에 들로 산으로 강행군을 했더니, 1학년 후배들이 발바닥마다 매직으로 내 이름을 커다랗게 써넣고는 아침저녁으로 보란듯이 밟아대며 불만을 표출하곤 했다. 그 후배들의 장난기어린 표정들이 생생하고, 지금도 가끔 그립다.

 

그것 말고는 대체로 불규칙한 생활 그 자체였다.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야간당직약사로 근무하던 시절, 하루는 처방전에 따라 조제하고 병동에 약 대어주느라 잠을 설치고 다음날은 술마시느라 잠을 설치면서, 48시간 주기의 생활을 1년 반이나 했었는데, 낮 생활은 오늘과 내일이 일치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일터에 들어와서도, 퇴근 이후 시간은 그렇게 불규칙할수가 없었다. 그 시간들을 사람을 만나고 떼지어 공부를 하기도 하고(^^) 술을 퍼마시면서 보냈다.

 

 

 



2005년 1월 3일부터, 내 생활리듬이 크게 바뀌었다. 공공연맹 사무처장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한마디로 대단히 규칙적인 패턴을 띠게 된 것이다. 적어도 아침시간만 보면 특히 그렇다.

 

아직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얼마든지 변화무쌍하게 흘러갈 수도 있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고3 이후로 아침 6시에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오, 96년에 처음 위원장 노릇을 하면서 건강을 챙긴다고 꼬박꼬박 아침 7시에 수영장을 간 적도 있긴 했다.

 

일어나자마자 전기압력밥솥에 밥을 한다. 밥이 되는 사이에 세수를 하고 가방을 간추리고 아침거리(이번주는 토마토 계란탕 2번, 생식 2번)를 장만해서 먹고, 보온도시락에 밥과 반찬을 넉넉히 챙겨넣고, 잠깐 컴퓨터를 켰다가 7시가 되면 집에서 나온다. 이 시간에 대전역까지는 승용차로 20분쯤 걸린다. 내가 늦어도 타야 할 KTX는 7시 33분에 출발한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이용할 수 있는 주중정기권은 자유석 요금의 50%를 할인하지만 편도 9400원꼴이다. 자리를 잡고 수첩을 펼쳐 하루 일정을 미리 살펴보고 간밤에 빠진 메모들을 간추리고, 관련한 자료들을 대충 읽어본다.

 

그것도 잠시, 천안역과 광명역 사이 어디쯤에서는 잠들어 있는 내가 있다. 그러면 서울역에 금세 도착하고, 지하 서울역으로 종종걸음으로 내려간다. 서울역에서 시청앞으로 1호선을 타고 가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뚝섬역에 내려 공공연맹 사무실까지 가는데는 35분 남짓 걸린다. 그러니까 9시 10분쯤이면 나는 대전에서 서울로 훌쩍 날아가 있는 것이다. 물론, 9시 회의가 있을 때는(매주 목요일) 7시 19분차를 타야 안심할 수 있고, 아침 8시에 회의가 있는 날은(매주 월요일) 아침 6시 20분 차를 타야 넉넉하게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다.

 

날마다 다른 도시를 전전하던 과기노조 위원장 시절과는 달리 주로 사무실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무처장 노릇은 나로서는 심신의 부담이 덜하다. 아직은 사적인 전화를 걸 틈도 없고 문자 메시지가 와도 제 때 답장하지도 못할 정도로 초보 사무처장 업무에 바쁘고, 담배를 피지 않으니깐 그 시간쯤의 휴게시간에도 인색한 처지이지만, 새로운 일들에 대한 흥미로움과 호기심으로 날마다 즐겁다.

 

일과가 끝나면 다시 서울역으로 가서 아침과는 역순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이 부분은 날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 주만 하더라도, 월요일은 집으로 오는 KTX에서 도시락을 까먹었고, 화요일은 산오리, 술라, 스머프님들과 더불어서 소주를 한잔 마시고 기차를 탔고, 수요일은 월요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오늘은 퇴근하고서 과총지부 조합원간담회에 갔다가 동지들과 술 한잔 마시고 함께 승용차로 대전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에는? 하루를 건너뛰면서 내 도시락 반찬과 아이들 아침 반찬을 만드는 시간이 주로 새벽 1시를 전후한 즈음이다. 오랜만에 도시락을 싸들고 나가 보니까 맨날 사먹는 밥과는 또다른 편안함과 맛깔스러움이 있어서, 특별한 일(수련회, 외박 등등)이 없으면 도시락은 꼭 싸가려 하는데, 그럴려면 반찬만들기가 늦은 밤이라도 중요한 일거리임에 틀림없다.

 

잠은? 대체로 2시와 4시 사이 어디메쯤에 잠자리에 든다. 4시를 넘기면 그냥 밤을 홀딱 새고 곧바로 출근해야 하지 않을까 충동에 휩싸인다. 지난 연말에는 서울 집회를 앞두고 그러다가 까무룩히 잠이 들어 지각을 한적도 있었지.

 

앞으로 2년동안 이래저래 변신을 거듭하겠지만, 적어도 늦은 밤과 아침 일정은 크게 달라질 상황은 없을 듯하다. 남은 문제는, 그 사이 어떤 시간에 내 몸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것이냐 하는 것이겠지. 오늘 집에 와서 아내에게 들은 얘기가 다시 생각난다. 서울 본청에 근무하는 아내의 직장 선배가(나보다 나이가 한두살 많은) 부고를 냈길래, 지방청까지 부고를 내다니 참 부지런하군, 하면서 그냥 넘겼다가 오후에 봤더니 그 선배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이더라고...

 

화요일 시무식에서 참석자들이 가장 많이 했던 덕담이 건강에 관한 것이었고, 나는 사회를 보면서 끝무렵에, 다들 건강을 가장 강조하는데, 개인이 건강해야 실천력이 생기고, 실천을 통해서 이 사회를 건강하게 바꾸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지금 몸이든 마음이든 건강함을 지키며 살고 있는지, 지키고자 하긴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없이 쓰다보면 글이 꼭 엉뚱한 곳으로 치닫는단 말이야.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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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과학자 만들기

연초에 <네트워커>에 보낸 글입니다.

서울로 출퇴근한지 4일째,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올리고 싶은데 일은 바쁘고,

블로그는 너무 썰렁하고,

해서 뒤늦게 올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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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관심이나 말 한마디가 기술적 판단이나 객관적 인식을 제압하고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등장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1995년 여름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LA에서 연출한 ‘깜짝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나라도 행융합 개발연구를 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쳤고, 그해 정기국회에서는 ‘차세대 초전도 행융합연구개발 사업(일명 KSTAR)’에 10년간 2천억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조차도 행융합연구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했다가 사실상 포기한 뒤였고, 사업계획에 대한 타당성 검토조차 충실하지 않아, 과학기술자들의 반대 여론도 컸지만, 결국은 대통령 뜻대로 되었다. 결과는 예측했던 대로 성과없이 끝났고, 책임지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

복제소로 이름을 떨친 황우석 교수에 대한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에 대한 최근 논란도 귀추가 주목된다. 과학기술부의 ‘최고 과학자 연구지원사업’은 사실상 황 교수를 위해 만들어진 사업이라는데, 2005년 한해에만 황 교수의 연구실 건립 100억원 등 무려 2백65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지원대상에 대한 공개적인 선정과정도 없고 더구나 윤리적인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는 황 교수의 연구분야에만 엄청난 연구예산을 지원하는 것을 놓고 정치권 일각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비판이 크게 일었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기술적인 검증이나 논리적인 이유보다는 언론플레이에 이은 노무현 대통령의 관심에 크게 힘입고 있으니까.

작년 10월에 과학기술부총리로 승진한 오명 과학기술부 장관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스타 과학자에 대한 지원이다. 그는 올림픽 대회 금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지는 체육연금처럼 과학기술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과학기술자를 대상으로 ‘과학기술공로연금제’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스타 과학자를 만들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국민들에게 환상을 심는 일은 대통령과 정부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대덕연구단지의 한 연구소에서는 기술료 수입 등을 제외하고 순수 연봉만으로 1억원이 넘는 첫 사례가 나왔다고 최근 발표했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연구소에서는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 연구자를 선발하여 연봉의 5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더 지급해서 1억원대의 연봉을 받는 과학자가 두 명 탄생했다. 한 언론은 ‘앞으로 여러 연구소에서 억대 연봉 과학자가 잇따라 탄생할 예정이어서 이공계 우수인력들의 출연연구기관 유입 현상을 직감케 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대체 왜들 이러느냐. 태릉선수촌을 본떠 과학선수촌이라도 세워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기세들이구나. 그러면 절로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도 높아진다고? 우수한 인재 한 사람이 수백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아서라, 이공계 기피는 날로 심해지고 연구현장은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고 있는데다가 우리 같은 ‘보통’ 연구원들은 언제 쫓겨날지 불안하기만 하단다. 문득, 이몽룡이 쓴 싯귀 하나 여기서 날 후려치는구나. 타령 장단에 맞추어, 金樽美酒 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 (그래도 꿋꿋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2005.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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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인사

조합원들에게 보내는 새해인사입니다.

 

 



 

새해 인사


2005년 새해를 맞아

조합원 동지들의 가정에 행복이 깃들고 일터에 신명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6대 위원장으로서 저는

이미 12월 17일에 규약에 따른 임기가 끝났지만

7대 위원장을 비롯한 새 임원진을 선출하지 못하여

2004년 12월 31일까지 위원장의 권한을 수행해 왔습니다.


새로 출범하는 7대 집행부가 새해 인사도 드리고

임단협이나 현안문제로 연초에도 투쟁하는 지부를 지원하는 것이 마땅할 일인데,

이렇게 제가 인사를 드리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동지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노동조합은

2004년 한해 동안 참 많은 일과 투쟁을 겪어 왔습니다.


12월 31일자로 한국섬유개발연구원지부가 임단협을 끝냄으로써

작년 초부터 본격화된 산자부 산하 지부들의 줄기찬 투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산업기술평가원지부를 포함하여 그동안 훼손되었던 조직을 복원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지부의 조합원들은 구랍 28일부터

무기한 전면파업에 돌입하여 해를 넘기고 있으며,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지부는 장순식 전위원장의 복직투쟁에 이어

임단협 결렬에 따른 조정신청으로 투쟁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용자는 일방적으로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노동조합의 교섭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마다 한국화학연구원 정문에서 힘있게 진행되었던

고영주 초대위원장 동지의 복직을 위한 출근투쟁은 새해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현안들을 고스란히 동지들에게 떠넘기고 제 임기를 마치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하기보다는 착잡하고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당분간은 위원장 직무대행 체제로 우리 노동조합이 운영되기는 하겠지만

투쟁이 있고 현안이 있는 곳에 대한 지원과 공동투쟁의 노력은

동지들께서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노동조합 집행부가 공석인 상황을 빨리 해소할 수 있게끔

7대 임원진 선출을 위한 다방면의 노력에도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십시오.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 삶과 투쟁의 현장을 지키고자 했던

저 이성우는 이제 우리 노동조합의 간부에서 벗어나서

2년 임기의 공공연맹 사무처장직을 수행하러 갑니다.


한결같이 노동조합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지켜왔던

4천여 조합원들께 무엇보다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현장의 조합원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있는 지부장들께는

민주노조의 깃발 아래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 노동조합의 일상활동과 투쟁에 헌신적으로 앞장서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2년을 함께 했던 중앙집행위원들과 사무처 동지들,

정말 고생하셨고 그 이상으로 고맙습니다.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와 뜨거운 열정으로 더욱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2년 동안 홀몸으로 객지에 와서 수석부위원장으로 온몸을 던졌던 곽장영 동지와

당분간은 6대와 7대 집행부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될 김영목 사무처장 동지께,

감사의 인사를 넘어 오래도록 간직할 동지애를 전합니다.


조합원 동지들!

몸과 마음이 두루 건강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거듭 빕니다.


노동자가 살맛나는 새 세상을 만드는 길 위에서

언제나 동지들과 함께 당당한 노동자로 살고 힘차게 투쟁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5년 1월 3일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6대 위원장 이성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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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름 한 점


 

내 삶이 언제나 푸른 하늘이기를 바란 적 없다.


내가 하는 일들이
나와 사람들의 시름 하나라도 덜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 삶도 환해지고
내 잠자리도 포근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 왔다.

잦은 실수와 모순 투성이 삶을 살고 있지만,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는 한
푸른 하늘에 보이는 구름 한 점도 내겐 희망이요 기쁨이다.

 

새해 첫날
해를 보러 가볍게 나선 길에
무리에서 홀로 떨어진 저 구름이 그렇게 반갑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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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새해 첫날밤이다. 구랍 31일까지 교섭 일정에 매달리는 바람에 오늘은 오전에 잠깐 갑천변을 달리면서 바람을 쏘인 것 말고는 하루 종일 지난 2년의 흔적을 지우는데 매달렸다. 우선 컴퓨터, 내가 남긴 작업 파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파일은 이동식 하드디스크에 옮겨넣고 내가 깔았던 자잘한 프로그램들은 모두 지웠다. 책상서랍, 제대로 활용도 못했지만 단체협약 부속합의서, 잡다한 문구류 따위가 가득차 있다. 비우고 버리고 옮기고, 몇 가지만 남겼다. 책장을 가득 채웠던 갖가지 자료들, 이건 언제나 골칫덩어리들이다. 그냥 버리기에는 괜히 개운치가 않고 하나씩 들여다 보면서 남길 가치가 있는 것들을 가려내는 것은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다. 오후 한 나절 끙끙거리다가 저녁 밥 먹고 다시 나와서는 지금껏 대강의 분류만 마쳤다. 일단 박스와 노끈으로 묶어서 한쪽 벽면에 쌓아둔 것, 아직 한번 더 챙겨보고 버리거나 챙기거나 할 것, 그렇게 두 무더기가 내 앞에 대책없이 놓여있다. 내일 잠깐이라도 나와서 마저 해치우기로 한다. 이렇게 보이는 것들이야 그냥 두거나 버리거나 하면 그만이지만 2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기록하지 못하고 남기지 못한 일들 속에 남부끄러이 녹아있을 내 과오와 불민과 미력함의 흔적들은 두고두고 반성과 깨달음의 심지로 삼을 일이다. 허허, 반성? 깨달음? 바쁘다는 이유로 아직 조합원들과 간부들에게 이별의 인사말도 남기지 못했고, 끝까지 정리하지 못하는 일들도 더러 남아 있는데, 매사 제 때에 말끔히 일을 정리하지 못하여 새로운 일거리들은 벌써 체증을 일으키니 또 다른 2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또 반성만 할 것인가. 에고, 오늘은 일단 집에 가서 자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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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말(2)

KIST지부, 24일 하루 경고파업에 이어서

28일 무기한 전면파업 출정식이 있었다.

잠을 설친 채로 일찌감치 출발하여 쉬지 않고 달렸고

홍릉에 도착하니 아침 9시였다.

 

11시부터 연맹 임원당선자 모임이 있었다.

KIST에서 우리 노조 현안문제로 부위원장과 의견을 나누다가

지각했다.

1월 일정에 관하여 대강 정하고,

연맹 총무국장으로부터 간략한 브리핑을 받았다.

 

지역신문사로부터 짧은 원고청탁을 받았는데

2시까지 안 보내주면 큰일난다고 하는 기자의 수선에

남들 밥 먹으러 간 사이에 급히 써서 보냈다.

 

오후 4시부터 양평에서 수련회가 있었다.

연맹과 총연맹의 2005년도 사업계획에 관한 짧은 토론,

새 집행부에 바라는 동지들의 의견을 듣는 시간들이 있었다.

 

29일 아침, 부지런히 차를 몰고 다시 연맹으로 간다.

현 임원(위원장, 수석부위원장, 사무처장)들과

새 임원당선자(위, 수, 사)가 한자리에 모여

2시간 가량 인수인계 시간을 가졌다.

 

인력과 재정은 넉넉하게, 일은 적게 넘겨받으면 좋겠지만

그 반대지요? 끝내고 나왔더니 한 동지가 웃으며 하는 말이다.

다음 주 일정과 준비 상황 몇 개 확인하고

점심은 먹지 않고 대전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에서 표준연구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현안문제에 대한 연구소의 입장을 전할 테니

잘 검토해 달라는 부탁이다. 서둘러 차를 몰았다.

화학지부 상집간부와 대의원들이 동학사에서 송년모임을

갖는다고, 꼭 오라는 전갈도 왔다.

 

그렇게 2004년의 마지막 한 주도 정신없이 가고 있다.

 

참, 이 포스트 제목이 "내가 한 말(2)"인데, 무슨 말을 했냐고?

양평 수련회에서 동지들의 얘기를 내내 받아적다가

마지막에 한 말이 대강 이랬다.

 

"내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소통의 문제이다.

 임원과 임원, 임원과 사무처, 사무처와 사무처 사이에서

 서로간의 원활한 소통을 돕고 일을 적절하게 나누는 것이

 사무처장의 몫이다.

 

 과기노조 위원장 노릇을 하면서 참 많이 얘기했던 것 같다.

 언제든지 조직에 대해 나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충고해 달라고. 그러나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내 생각을 솔직하고 충분하게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남들한테 비판만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문제였다.

 도대체 저 놈의 속내를 알아야

 내 맘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냥, 내 맘 열고 있으니 니 맘을 드러내라, 이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자.

 그래야 소통이 활발해지고 호흡을 맞출 수 있다.

 나도 좀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도와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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