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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도시 홍콩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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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일상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

아침강의를 놓치는게 거의 유일한 학업스트레스였던 학생 시절엔 절대 일어나지 않던 일

하지만 여행을 오면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새벽에 눈이 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길어질까

종일 이어지는 강의에 조심조심 졸게되지나 않을까

광동어 영어 만다린을 자유자재로 섞어 얘기하는 홍콩대 학생들과

오늘은 어떤 케이스를 놓고 토론하게 될까

 

홍콩의 공원도 베트남처럼 이 시간이면 모두 일어나 운동을 하려나

아시아의 도시들은 찾아가 본 곳마다 다른 매력으로 사랑스러웠지만

이곳 홍콩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6일째 쓰고있는 도미토리 침대를 정리하고 오늘은 조금일찍 나가 따듯한 죽이나 국수를 먹어야지

그리고 천천히 굴러가는 2층노면전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야겠다

 

일본도 잠시 살아 볼 이유는 충분한 곳이었지만, 역시 나에겐 동남아나 중국이 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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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7 07:19 2009/10/27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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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세상의 경계와 마음의 경계가 같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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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온님의 [미누와 함께 한 하루, 그리고 ] 에 관련된 글.

 

민족의식이라고 할만한 건 원래 희박했지만 내 나라 밖에서 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분명 직업상, 유럽 본부를 통해 들어왔다는 신분상 이점을 갖고 있지만) 외국인 - 정확하겐 한국인

이라는 게 발각(?)되고 나서 생기는 자잘한 일들을 겪으면서

내 나라에 살고 있는 흰피부 금발의 영어교사가 아닌 외국인들이 어떨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물게 병원 밖에서 그들이 믿는 일반적인 한국인(?)으로 날 대하는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느낄때면

정이 있다, 뜨겁다 좋게들 돌려 말하지만 참 직접적이고 거칠을 내나라 사람들의 태도를 그려보았다

 

말은 왠만큼 하고 알아듣는 건 다 알아듣게 되고부터는

미녀들의 수다 식의 외국인(이방인)이 아닌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자 하는 이들의 복잡한 처지를

그리고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건가 생각했다

 

어디서도 뿌리내리지 못한 마음이 되어 돌아가 잘 살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한가지는 더 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나도 그를 모르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지만,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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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9 20:44 2009/10/19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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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の名前,難し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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確かにキョンウォンって日本語でも英語でも発音しやすい名前でわないのだ。
この二つの映画が役に立てるかな、
 
 
 
「靑燕」は故ジャンジニョンの作品で又有名になってるけど私には韓国最初の女流飛行師であるパクキョンウォンの転記映画で記憶に残ってある。(彼女が本当に最初か親日かどうかのは別の話で、)
ミュージクビデオを見た人なら最後の「キョンウォン、サランヘ」が忘れは出来ないだろう。(私だけ?)
 
 
 
 
ジョインソン様の名演技が光る「霜花店」にはジュジンモの王位を採るために元から京元君が来る。何回も映画に言われる京元君が私の名前と一緒の発音を持ってた元のお子様だ。
日本に来たすぐ前に見た「霜花店」にも日本の歴史がちょこっと出るのだ。
こんなに近くにいるのに、こんなに歴史が纏わってつるのに実は殆ど知ってないのがこの二人の国だ。
 
 
 
Is my name difficult to pronounce?
 

 

Surely it’s not easy to pronounce [景媛] neither in Japanese nor in English.
I think these two films might help,
 
Deceased Jang Jinyoung’s [Blue swallow] is a story about the first female pilot in Korean history, Park Kyung-won. Korea was under Japanese rule, and her flight was partly supported by Japan, which made this movie notorious as the ‘a girl traitor’s story’. Personally I don’t care about that rumor, which is not important at all since we cannot judge a traitor-in-time now. Anyway at the end of the music video of [The west sky], main theme of this film, her lover yells at the sky [Kyungwona Saranghe! (I love you, Kyungwon!)]. And it’s an unforgettable scene, at least for me.
 
Director Yu Ha and Ju Jin-mo, Jo In-sung (& Song Ji-hyo, for I liked her ever since ‘some’, her debut film)! [Sanghwajum]is the last Korean movie I'd seen before I came to Japan. But even without that, it’s a memorable movie with two actors’ devoted(?) play. To usurp the throne from Koryo’s nominal king Yuen (Mongol) try to send ‘prince Kyungwon’, and yes, it’s my name. Hearing that name from many characters (sorry that the Jo In-sung didn’t say my name…) may help to remember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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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8 08:39 2009/09/1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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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alone, or daylife fo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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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호]혼자 걷는 길, 그 발걸음을 찬양하라
(고동 / 언니네트워크 회원 , editor@unninetwork.net)
 

매거진 채널[넷] FF의 준비호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언니네트워크 편집팀

"이번에 아시아를 6개월 간 여행했어요."
"누구랑요?"
"혼자서 다녔죠."
"허걱 진짜요?! 여자 혼자서 위험하지 않아요?"

 

혼자 하는 여행 얘기를 누군가(=여성주의자가 아닌 사람들. 특히 남자들.)에게 풀어놓으면 이처럼 항상 예상할 수 있는 대사들이 나온다. 여자 혼자 위험하지 않느냐, 난 무서울 것 같다, 그래도 혼자 그걸 감행(?)하다니 멋지다 등등.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발끈하기보다 왜 사람들은 혼자 다니는 것에 대한 (특히 여성이 혼자 다니는 것에 대한) 공포증이 저리도 대단할까 싶은 호기심이 앞선다.

그 공포증의 본질은 물론 '여성은 보호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관념, '아버지의 지붕 밑에서 안전하게 운신을 지켜야 하는 존재'라는 가부장적 문화의 선심(?)에서 비롯된다. 익숙지 않은 공간에 홀로 뚝 떨어졌을 때 여성이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비좁은 노파심, 여성이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힘주어 강조하는 그 놈의 못된 우월감 탓이다. 그렇지만 한번 길을 떠나면 의외로 수많은 '나홀로' 여성여행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 문제 없이 즐거운 여행을 심지어 아주 장기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물론 이건 여성(주의자) 여행자들이 아주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오래된 이야기이다. 여성은 충분히 혼자 여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수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짚어주었다. 이것을 막는 가부장들의 목소리도 열심히 반박 혹은 무시해왔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이 왜 혼자 여행하는지, 혼자 여행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좀 솔직담백하게 털어놓고 싶다.

 

사실 여성주의자가 혼자 여행해야 한다는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여성주의자들의 성격상(?) 자연스럽게 혼자 여행하게 되는 일이 많아질 뿐이다. 내 경우 생애 최초로 혼자 여행한 것은 스물 두 살 때 보름 간 스페인을 돌아다녔던 일이다.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의 공중전화박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에게 "나 혼자예요"라고 고백했던 일이 기억난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는 친구와 함께 간다고 거짓말을 했던 참이었다. 혼자 스페인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엄마는 식음을 전폐하셨다나 뭐라나.) 다른 이들과 일정과 동선을 함께 짜야 하거나 이것저것 간섭받는 일이 차라리 번거롭고 버거워서이기도 했지만 나에게 있어 홀로 여행한다는 것은 결국엔 일종의 테스트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길에서 "어린 동양 여자애"로 무시 당하지 않고 혼자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해야 했다. 혼자 식당에서 밥 먹는 일에 울렁증이 심하고 최악의 길치인데다가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나로서는 일종의 비위강화훈련의 일환이기도 했다.

 

스스로 진행한 훈련은 다행히 아무런 사고 없이 즐겁게 끝났다.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스페인 여행 이후로 혼자서 제법 많은 여행을 다녔다. 한 달 간의 베트남-라오스 여행, 휴가를 내서 잠시 다녀온 일본 여행, 그리고 긴 연휴가 있을 때 KTX를 타고 통영으로, 천안으로, 부산으로 쏘다녔다. 그리고 작년에는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 간 장기 아시아 여행을 다녀왔다. 나홀로 여행은 혼자 해냈다는 성취감과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더불어 중요한 것은 나의 위치를 스스로 끊임없이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혼자 길을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다가와 '좋은 데 데려다줄게'라며 손짓하는 오토바이 탄 남성들, 혼자라는 것이 '나 외로워요'를 온 몸으로 외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원나잇을 노리는 서양 남자 여행자들, 그리고 한국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을 고깝게 보거나 혹은 두려워 하는 한국인 남자 여행자 무리들, 성추행을 시도하는 인도 경찰관 아저씨들...이들을 만나는 일련의 경험들 속에서 나는 '너 따위 것들을 두려워할 쏘냐'라는 내공(?)을 쌓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맺기하는데 있어서의 전략들을 고민해볼 수 있었다. 길 잃고 헤매는 한국 남자 여행자 무리에게 오히려 길을 알려주는 선배 여행자로서의 통쾌함을 맛보기도 하고, 깊은 산 속에서 단 둘이 트래킹을 하다가 '라오스 남자친구 필요하지 않으세요?'라며 흑심을 내보인 가이드에게 호통을 치며 쫄게 만드는 스스로의 강인함을 확인함과 동시에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세계 공통으로 어떤 대상물로 역할하는지 다시 한번 성찰해볼 수 있는 계기를 가졌다. 그리고 동양인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현지 언니들과 스스럼 없이 친구가 되고 '알고 보니 너도 페미니스트였구나!'라는 '커밍아웃'으로 전세계 각지의 페미니스트 여행자들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경험은 여성주의자로 혼자 여행한다는 것이 때로는 위험하고 피곤할 일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경험의 스펙트럼을 통해 그보다 더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여성여행자들을 위한 커뮤니티이자 정보공유사이트인 저니워먼(www.journeywoman.com)은 '여성들은 평소 겪을 수 있는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고 자기 운신의 폭을 계속해서 인지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남성 여행자들보다 사고를 당할 확률이 작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성중심의 사회가 여성들에게 가한 제한의 틀이 여지 없이 전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또한 남성들이 말하는 '위험한 길'이 실은 나를 일개 '여자애'로 간주하는 한국의 일상 공간을 벗어나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는 '대안의 쉼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 여행하는 것이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것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당신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잘 해요'라는 당당함을 몸소 깨닫게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학하며 혼자 여행 갈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여성주의자 언니들, 어머니, 자매, 기타 여행길에서 만난 ‘여행자 유전자’를 지닌 다양한 여성들과 마음이 맞는다면 그 여행이 혼자이건 둘이건 열이건 무슨 상관이랴. 여행 3개월 째인 베트남에서 외로움에 지쳐 터덜거리며 까페에 들어가 앉았을 때 목격한 (복장(?)과 수다의 내용으로 봐서는 영락 없는) 3~40대 페미니스트 여행자 무리를 보며 나이가 들면 여러 여성주의자들과 장기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새로이 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여행 목적지를 상상하며 그리는 그림 속에는 여전히 나 혼자다. 더 부딪혀보고 만족스러울 때까지 내공을 쌓아서 ‘훌륭하고 든든한 여자어른’이 되는 장래희망을 실현하는 걸 한번 더 스스로 시험해볼 작정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타인과 여행하며 나 자신을 어느 정도 길들여야 하는 배려심이 여전히 고집스럽게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이유가 어찌되었건 아직까지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당분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긍정적인 해방감과 에너지를 선사하는 길을 떠나는 것이라면, 혼자 하는 발걸음이 그리 두렵지는 않으리라는 얼마간의 믿음이 쌓인 덕이다. 그리고 혼자 나서는 길에 마초들이 달려들고 험난한 여정이 지속되어도 언젠가는 동료 여성 여행자들을 만나 위안을 얻으리라는 기대감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그러니 나에게, 그리고 아직도 혼자 나서는 길을 두려워하는 많은 언니들에게 고한다. 혼자 떠나라. 온통 예측불가능한 멋진 가능성들, 그리고 돌아와 좀더 내공 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점.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 글을 퍼 가실 때에는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언니네 채널넷(www.unninet.net) 2009년 9월 특집 '언니들, 여행을 떠나다' 中

 

女性も一人で旅行できる者だと言ったらちょっとおかしいかな、

一人旅行の理由、予測できない素晴らしい可能性たち、戻って来るともっと成長している自分を発見する事になる、んだろうの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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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7 15:47 2009/09/1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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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図書館、一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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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降ってる火曜日、図書館食堂の窓の前に座って。
雨が降ってると言っても風に飛びられる軽い水滴で背の高い木の葉っぱが緩んでるのが少し感じられるくらいだけだ。
時間の過ごすのが早い、しかも勿体無い、と私は思う。
後四ヶ月、その時間が過しちゃうと私は何処かに行かなきゃ行けないだ。
眠り。。 主な決定の前には必ずすっこく眠くなる。 逃げたくなるのだろう。。
トウゼイ?なんにもやる気がない、仕事がないのもないのに今思い出すことは後いつかかの夢だけだ。
 
 
I can barely feel rain from the nodding leaves of tall Japanese cedar outside the 2nd floor window. So I can hardly say it’s raining, but it is raining at all.
Time goes too fast, and I want it so now. Yes I became a grandma.
4 months left. After 4 months I have to leave here, to go somewhere.
Feel sleepy.. Confronted to important point of life, I always feel sleepy. Like a little, feeble child..
Nothing I want to do now. There’re plans to be done, but all I can think of now is some cozy place to take a little nap, a little hide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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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5 15:38 2009/09/1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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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just climed one small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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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미뤄오던 일을 드디어 한 단계 마무리하고,  한 숨 돌리자。

 

ついに小さい坂を一つ登ったな、 ちょっと休もう。

 

 

양희은의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어쩌구 하는 노래가 매우 듣고 싶은 소나기 퍼붓는 저녁

 

町は町につなげている、この下り坂を降りると新しい坂が出るだろう。

 

 

쫌만 한 숨 돌리고, 다시 가지 뭐 ^^

 

いいよ、ちょっとたけ休んでからもう一度行こう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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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7 18:41 2009/07/27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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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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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본의 오봉마쯔리기간

계절마다 피고지는 꽃에, 쏟아지는 장마 비에, 가을 낙엽에, 겨울 눈에 맞춰 축제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여름은 마쯔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비와 오봉오도리로 전국이 들썩거린다

 

 

 

일본 불교의 3대종파 중 曹洞宗의 大本山이라는 우리병원 재단, 總持寺에서도 오봉마쯔리가 열렸다

절 안에까지 늘어선 야다이(포장마차), 화사한 유카타차림 소녀들의 손마다 링고아매(사과사탕)

오코노미야키, 야키소바, 다코야키와 맥주, 사와로 흥청이는 대본산과 스님들과 동네사람들

고바야시센세에게 빌린 유카타를 녹색 오비둘러 입으니 마쯔리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여자와 아이들은 대부분 유카타, 남자들은 반바지, 전통이 여자들에게만 강요되는 양상의 하나...?

 

 

 

사실 오봉마쯔리는 그 해에 떠나보낸 소중한 사람의 영혼을 불러서함께 놀고 먹고 즐기고

다음 해에 다시 만날 때까지 기억할 것을 약속하며 돌려보내는 행사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뒤늦게 생각하니 외할아버지께 죄송..  

이 덥고 습한 일본으로 불러서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을 빌 때, 절이나 신사에 기도할 때 즐겨 사용하는 5엔(五円,고엔=幸運,고엔=Coin,무슨관계?)을

불전에 던져 시끄러운 축제에 지쳐 자고있을지 모르는 부처님을 깨우고

괜찮으시면 잠시 와서 쉬었다 가시라고 빌었다  오시지 못하신다면 그곳에서라도 즐기시라고 

 

 

그림그리는 친구가 자신의 방식으로 그분을 보내는 모습

어떤 마음으로 땡볕더위에 한획 한획 그렸을까

 

축제의 마지막날인 오늘, 불러온 영혼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길을 밝히는 촛불길의 끝에서

제멋대로 부른 걸 용서해달라고, 다시 조심해서 가시라고 비는데

참 뒤늦게도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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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9 22:53 2009/07/19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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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늬우스가 걸려도 우리나라 극장에 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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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연 한 사람일까 늘 궁금했던 이미도씨의 얼굴을 드디어 네이뇬을 통해 (-_-;) 보고
  • 이미도씨의 책장을 슬쩍
  • 일본어 능력시험이 끝나고 어느정도 한숨 돌리고 나니 일본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 다음달 토플까지 해치우고 나면 찾아서 읽어볼까..
  •  
  • 월급받는 어학연수라, 나쁘진 않지만 일본에서 토플이라니 이 무슨 뻘짓인가..
  • 後ろ向きはバガの事、前を向こう。
  • 라고 일본은 한다니 (뒤돌아 보는 것은 바보짓) 팔자에 없는 어학연수까지 시켜주는 대학에 감사할밖에.. 근데 저 말 역사적으로도 일본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것 같지 않은가
  •  
  • 근데 정말인가
  • 얼마전부터 친구들에게 듣는 소식은 다 농담만 같고 인터넷에서 확인할때마다 속는것만 같다
  • 해외동포용으로 접속되는 인터넷에서만 보이는 순 뻥이 아닐까
  • 정말 대한 늬우스가 걸리는 극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 이번주엔 큰 맘 먹고 1800엔짜리 극장에 가줘야겠다  
     
     
     
    초당
    강용흘 | 범우사
    중학교 때 집에 이 책의 영문본이 있었어요. 읽기가 굉장히 어려웠죠. 그래서 부분부분만 이해했었는데, 내용을 깊이 있게 알아서라기보다는, 또는 이 책의 메시지에 제가 끌려서 깊게 관심을 가졌다기보다는, 영어 동화책 수준을 뛰어넘는 영어책 독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해준 책이었기 때문에 제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요. 1931년에 나온 책인데, 저자 강용흘님은 1921년에 고향인 함경도를 떠나서 미국으로 건너가요. 보스턴과 하버드 대학교에서 의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서양에 우리나라의 문화 또는 정신, 시조를 알리고 싶어서 글을 쓰시게 된 거에요. 어떻게 보면 번역문학가로서 선구적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세상에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다 운명 지어져 있다.’ 이런 말들, 어렸을 때 들었을 때에는 잘 와 닿지 않았었는데,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 제가 번역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문득 옛날 그때 제가 이 책을 만났던 기억을 종종 떠올리게 돼요. 개정증보판 형식으로 잘 번역, 출간이 돼있더군요.
  • 소설. 알렉산드리아
    이병주 | 한길사
    70년대 후반에 이병주라는, 타계하신 소설가의 이 중편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만 작가에게 빠져버린 거에요. 스케일이 얼마나 호방하던지…! 그래서 그분께서 쓰신 책이라고 하면 전부 찾아 다닌 거죠. 요즘같이 이렇게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약 100권 가까이 되는 책을 찾아서,, 종로서적을 비롯해서 서점마다 직접 발품 팔면서 찾아 다니면서, 읽게 되었어요. 그런데 너무나 재미있고, 서사의 힘이 굉장히 강하고, 문학, 사학, 철학 쪽 지식이 해박하신 분이셨기 때문에…책을 보는 내내 빠져들 수 밖에 없었지요. 최근 미완의 유작인 <별이 차가운 밤이면>이 출간됐는데,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는지 모른답니다.
  • Different Seasons 중 The Body
    스티븐 킹 | SIGNET
    이 책에는 네 편의 소설이 수록돼 있는데 라는, <스탠 바이 미>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중편소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스탠 바이 미>는 자막이 없는 상태에서 보았는데, 많은 부분 이해하지 못했었어요. 나중에 원작자가 스티븐 킹이라는 걸 알게 돼 찾아보니까… 이 책의 첫 문장이 “The most important things are the hardest things to say”에요. “가장 고백하기 힘든 것이 그 사람의 생에서 가장 소중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거든요. 내용을 아시겠지만, 네 소년이 각각 가족으로 인한 아픔이 있는데, 사라진 소년의 시체를 찾기 위해 이틀 동안 여행을 떠나서 돌아오기까지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과정,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성장소설이잖아요. 저도 방황하던 시절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고, 이 원작의 첫 문장을 접하고는,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하는 것이 족쇄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열쇠도 될 수 있겠구나’를 느끼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소년들처럼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게 됐던 것이지요.
  • 아웃라이어
    말콤 글래드웰 | 최인철 역 | 김영사
    이봉주씨가 서울 국제 마라톤에 출전했었을 때 중계를 보다가, 문득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들은 풀 코스를 완주할 동안 몇 걸음을 뗄까가 궁금해졌어요. 세어보니까 한번 완주하는데 약 25,000번이더군요. 그 때 이봉주씨는 마흔 살이었고, 마흔 번의 완주를 마친 의미 있는 경기였거든요. 다시 계산해보니 그분은 무려 백만 걸음을 뗀 거에요. 말콤 글래드웰은 모든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공의 법칙 외에도 일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는 분석을 해요. 하루에 세 시간씩 자기 분야에서 십 년간 노력을 한다는 (이렇게 하면 일만 시간 조금 상회하지만)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비틀스나 빌 게이츠나 그런 분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성공의 법칙을 깨뜨리는 분석을 하셨더라고요. 상식을 깨뜨리며 생각하는 저자의 발상, 참 놀랍지요. 그게 곧 창조적 상상이지요. 경영사상가임에도 이야기꾼으로서의 글 솜씨, 장난이 아녜요.
  •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 이미선 역 | 열림원
    이 책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모 신문에 제가 칼럼을 막 시작할 무렵, 청탁 받은 그 다음날까지 원고지 분량으로 20매,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관한 시사적인 내용을 담아서 글을 구성해야 했어요. 알아보니까 이 영화의 시사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시사회장으로 달려가 영화를 보고, 이 책을 바로 구입을 한 거죠. 영어가 꼭 들어가야 하는 칼럼이었거든요. 밤새 읽고, 다음날 오전에 원고를 보내드렸어요. 그런 인연으로 그 후 반 년 동안 연재를 하게 됐지요. 연재가 가능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고, 더불어 무척 감동받은 작품이어서 애착이 간답니다. 옛 소련의 침공을 피해 카불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고등학생 때 처음 읽은 영어 소설이 <분노의 포도>래요. 한 저널리스트가 영어로 글 잘 쓰는 비결을 묻자 영어 소설을 많이 읽는 ‘끽독가(chain-reader)’가 되라고 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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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9 22:03 2009/07/1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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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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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에든 이해가 느린 편이었다

 

놀라거나 겁에 질리거나 분노하는 감정은 빨랐지만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해서 '알게' 되는 빠르지 못했다

 

샹하이의 지하철 1호선에서 뭉이의 문자로 노무현 서거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알고

친구들과 사촌오빠의 문자, 전화로 대강의 진행상황과 사람들의 반응을 접했지만

샹하이 학회가 끝나고 돌아와 1주일여의 근신, 다시 센다이 학회로 정신없이 가고...

 

센다이 학회가 끝나고 언제나처럼 외국에선 부끄러운 교수님들과 헤어지고

金華山이란 외딴 섬으로 가 버스 안에서 Jason Mraz의 [Life is wonderful] 듣는데

세대에서 처음 선택하고 지지한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참한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나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돌아와 보름간의 출근

그동안 (다행인지) 접하기 어려웠던 인터넷을 들어와보니 반가운 메일은 당연히 없고

그나마 가끔 들어가보는 한겨레를 통해서 보이는 作態(라고 밖엔..)들이 참담했다

뭉이와 유키의 말마따나, 학생땐 가장 떠들었던 내가 막상 근 2년 서울 현장에 없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Jason Mraz [Life is wonderful]

...

It takes a thought to make a word                    
And it takes some words to make an action     

And it takes some work to make it work         
It takes some good to make it hurt
It takes some bad for satisfaction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wonderful
Ah la la la la la la life goes full circle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wonderful
Ah la la la la


It takes a night to make it dawn                      새벽에 되려면 밤을 지나야 하고
And it takes a day to make you yawn brother  하품을 하려면 하루를 지내야 되겠지 친구
And it takes some old to make you young       젊기 위해서는 나이듦을 알아야 하고
It takes some cold to know the sun                 태양을 알려면 차가움을 알아야하고
It takes the one to have the other                    하나를 가지려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해

And it takes no time to fall in love                    사랑에 빠지는 데는 순간이면 충분하지만
But it takes you years to know what love is      사랑을 알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지
And it takes some fears to make you trust       믿게 되려면 먼저 두려움이 있어야하고
It takes some tears to make it rust                  녹슬어 가는데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It takes the dust to have it polished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먼지로 덮여야 해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wonderful              아아아 삶은 아름다워
Ah la la la la la la life goes full circle                 삶은 돌고 돌지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so full of                       삶은 너무나..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so rough                      너무 거칠지만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wonderful                     삶은 아름다워
Ah la la la la la la life goes full circle                  삶은 돌고 돌지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our love                        삶이 우리의 사랑이지

Ah la la la la                                                   아아다 삶은 아름다워


It takes some silence to make sound
And it takes a loss before you found it
And it takes a road to go nowhere
It takes a toll to make you care
It takes a hole to MAKE a mountain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wonderful
Ah la la la la la la life goes full circle
Ah la la la la la la life is wonderful
Ah la la la 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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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7:56 2009/06/0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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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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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플렉싱님의 [<경찰의 야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에 관련된 글.

 

난 무슨 일에든 이해가 느린 편이었다

놀라거나 겁에 질리거나 분노하는 감정은 빨랐지만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해서 '알게' 되는 건

빠르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 다함께 보여짐당한(직역...) 꽃잎이나 80년 봄의 이야기에 먼저 흥분하고

연세대에서 있었던 1997년 신학기 첫 집회에 동료들중엔 먼저 참가해서 투쟁가를 배우고

이름도 잊지 못하는 '도원동' '다원용역(삼성 하청)'에 구타당한 철거민의 병원에 찾아갔던

그건 다

'직접 당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객기, 뿐이었을까?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분노와 공포의 감정이 앞섰던 것 뿐일까?

 

그 많던 똑똑하고 용감하고 재밌는 (치과)선배들이 각자의 병원으로 돌아가고 난 지금

그 때를 기억해서 술취하면 꺼내곤 하는, 나 사는 것도 별 다르지 않은, 내가 이상한걸까?

 

다르다고 말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때 내가 술자리에 잘난 '풍물'에 취해 겉멋에 들려 보였던 건 감정이 앞섰던 때문이겠지만

지금까지 그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 건

많이 느리지만, 느리게 공부하고 찾아보고 느리게 알게 되어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결국 떠날 때도 화려하게 떠났던 선배들처럼, 나도 나를 변호하고 싶은 것 뿐일지 모르지만

아니길 바란다고, 나도 당신들도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도...

 

 

 

...내가 알게 되는 것과 남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건 또 다른 경지

   이렇게 쓴 글을 보면 옮길 수 밖에.. [병존]이라는 닉 밖에 알 수 없는 분의 글...

  

 

우리 나라 최근의 문제는 대통령 하나 교체된 것으로 이렇게 돌변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이라는 좁디 좁은 대상을 향해 비난을 퍼붓지만, 사실 이토록 맥없이 한국사회가 기존의 극우 보수주의로 역행하게 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국민의 탓인걸요.
 
50년대의 반독재운동,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에 저항한 60년대의 투쟁들, 70년대 유신체제를 상대로 싸워온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운 민주화운동, 그리고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극적으로 성장한 노동계급이 80년대의 노동운동을 통해 기존 민주화운동에 합세를 하면서 이룩해냈던 극적인 성과들이 있엇지요. 무려 50년 간을 싸워왔잖습니까.
 
그런데, 그 성과를 90년대에 모조리 까먹은 결과가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수 십년 동안의 씨앗을 뿌려온 투쟁의 결과가 마침내 90년대 초반에 열매를 맺을 찰나, 기존의 민주화 운동에 중산층 노동계급의 거국적인 저항의 형태로 결정적인 뒷심을 심어줌으로써 6월 항쟁의 성립과 이후 수 년 동안 마침내 90년대 "문민정부"를 세우게 될 동력을 제공한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결정적으로 배신을 당하고 실질적인 '숙청'을 당한 10년이 바로 90년대이거든요.
 
1950년에서 2000년까지 50년 가까이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극우보수파는 5.16 쿠데타와 12.12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인/군사정권 출신 요인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지만, 80년대 민중적 저항 및 민주화 요구를 통해 실질적으로는 점점 군인출신 요인들은 도태되기 시작했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정치의 정점인 대통령에 세워두고 있으면서도 한국 극우보수주의의 정치적 기반은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통해 위상이 강화된 한국의 자본가들 및 전문관료층으로 대체되었더랬죠. 유신시대처럼 (일제 무단통치 시대를 연상시키는) 막되먹고 포악한 공권력의 행사가 힘들어지면서 (특히, 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래), 가급적이면 민중의 요구 중에서도 제도적이고 형식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개혁은 인정해주면서 '합법적인 통치'의 느낌을 주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하였고, 그 와중에 한국의 대자본 및 우파 민간정치인의 입김이 옛 군사정권의 무식한 군바리 녀석들의 우위에 서기 시작했지요.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우파에 서있던 것이 김영삼씨나 김대중씨가 이끌던 세력이고, 이들이 같은 운동의 좌파에 서있던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을 완전히 배신하고 배제시킨 상태에서 구 보수주의자들을 끌어안음으로써 행정 및 통치의 편의성 및 정치적 담합을 이루어나간 것이 90년대입니다. 새로운 세력으로의 교체라고 모두들 생각했지만, 실상은 민주화운동 우파가 구세력의 좌파와 담합한 것에 불과했거든요.
 
이미 도태되고 있었던 군사정권의 잔당들에 대한 생색내기 상징적 "퇴출의식"이 이런저런 청문회 및 전두환/노태우 재판이었고, 극우보수주의의 청산을 외치는 척 하다가 결국에는 1948년의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들을 끌어안은 것과 완전히 똑같은 형태로 기존 올드라이트 기득권 세력의 기반이었던 대자본을 끌어안고 1) 더 이상의 "민주화 운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2) 더 이상의 평등운동도 없으며, 3) 기득권은 상실되지 않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증하고 올드라이트를 안심시킨 것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사면이었지요.
 
이 것은 무엇이 비견될 수 있냐면, 프랑스 대혁명에서 초기에는 "제3계급"을 내세워 전 민중의 변화의지를 대변하던 혁명이, 이후 부르주아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자 상뀔로뜨와 하층계급을 배제하고 혁명을 그 단계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것과 완전히 동일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결과가 무엇인가요? 19세기 후반까지도 계속된 끝없는 혼란이지요. 여전히 살어서 준동하는 왕정주의, 신흥 부르주아지 정치권력, 보나파르티즘의 신봉자, 코뮌주의자 등이 어울려 미완의 혁명의 끝을 보기 위해 끝없이 투쟁하다가 결국, 현대 프랑스에 들어와서야 끝난 그런 싸움 말이지요.
 
어쟀든, 그 결과, 90년대 내내 벌어진 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일목요연한 한국 "386 정치권"의 "옛 민주화/노동운동 좌파 때려잡기 + 올드라이트와의 유착"입니다. 정말로 일목요연합니다. 예컨데, 90년대 초반에서부터 중반까지 진행된 것은 노동운동 기세 죽이기 및 학생운동의 해체작업이었습니다.
 
한국 학생운동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고, 여러가지 자충수를 두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국민의 신뢰를 잃고 붕괴했다.. 고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아요. 늘 문제가 된 것은, 레닌주의의 모델을 따라 만들어진 민주적 중앙집중제식 의사결정구조였고, 이것이 권력화되고 고착화되어 수많은 내부적인 비리와 부패를 불러온 것도 모두 사실입니다만, 무슨 군대레벨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고, 하부단위의 수 많은 대학 및 학생회가 다 그런 식으로 썩은 것도 아니었지요. 무엇보다도 당시 학생들에게 남아있는 자부심이라는 것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유일하게 직접행동에 나서던 것이 학생운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데, 저는 언제부터 제가 좌빨 빨갱이가 되었는지 구체적인 시점을 기억을 합니다.
 
아직도 잊어지지 않는 1997년의 추운 1월이지요. 그 직전까지만 해도 저는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나름 유복한 생활을 겪고, 무리없이 대학에 들어가 평탄한 미래를 꿈꾸었으며, 시위나 데모를 한답시고 맨날 학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요상한 노래나 불러대는 학생들이 TV에서 얘기하는 대로 모조리 북한 찬양론자에 김일성 맹신자들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1996년 겨울, 저는 한 여학생을 짝사랑하게 되었더랬죠. (그렇습니다. 언제나 남자의 역사는 ==; 여인의 향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OTL)
 
그래서 그녀가 가입했던 사회과학 동아리에 따라서 가입을 했고, 그 동아리에서는 줄창, 지겨운 책을 읽혔어요. 그리고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토론회를 가지면서 점점 제가 아는 상식이 얼마나 좁은지를 느끼게 되었지요. 무엇보다도, 내 생각은 하드와이어드 우파주의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아는 것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선배들이 얘기하거나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렇게 해서 긴가민가 하면서, 와싹 겁을 먹고 따라들어간 것이 1997년 1월달, 서울시 용산구 도원동의 철거투쟁 대책위원회 활동이었지요.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 사람은 보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나봅니다.
 
저는 우파적인 인간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은 제가 어떤 뚜렷한 정치적인 신념이나 이론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고, 그런 사람들 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저는 그냥 그게 자연스러웠거든요. 저는 정말로, 세상의 우파들이 얘기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즉, 문제가 있으면 경찰에 가고, 신고를 하고, 법적인 절차를 밟아가며 해결하면 되는데 왜 불법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난동을 피우고, 짱똘 던지고 화염병 날려대냐..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해 추운 겨울, 제가 눈으로 본 것은, 제가 알고 있던 세상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TV에 소개되지도 않고, 누구도 그 부조리를 고발하지 않고, 내가 직접 찾아가서 보지 않았더라면 꿈에도 상상 못했을 그런 처절한 폭력의 소굴이었어요.
 
항상 자랑스러운 한국의 기업이라고만 생각했던 삼성이 어떤 곳인지를 그 때 처음 알게 되었고, 한국 건설업계에 있어서 악명높은 "주식회사 다원용역"이라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들과 삼성측이 어떤 식으로 계약을 맺고 일을 벌이는지, 그에 대해 해당 구청에서 어떤 리베이트를 받아서 아무런 제재나 중재도 안한다는 사실,
 
민중의 지팡이라고 생각했던 경찰 아저씨들이 우리를 돕지 않는다는 사실.
 
험상궂은 깡패가 난입하여 억울한 사람들을 두들겨 패는 앞에서 등돌리고 서있던 전투경찰의 모습.
 
평생 살아온 곳을 재개발로 인해 떠나게 될 때 고작 400만원 현금으로 보상금을 준다는 것.
 
그리고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현금도 무엇도 아니고, 다만, 재개발 단지 근처에 저가의 임대아파트를 지어주어서 살던 곳 그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 그러나, 땅값 떨어진다고 그것을 거부하는 재개발 담당의 차가운 이야기... 땅값이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
 
그 단지 내에서 함께 투쟁하던 철거민 아저씨가 다음 날 새벽에 온 몸이 으스러진 채로 발견되어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된 사실.
 
경찰은 그 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
 
현장의 저 먼 입구에서는 끝없이 검은 벤츠와 그랜져 세단이 오가며 말쑥한 양복 신사들이 끝없이 우리를 보고 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것과 관계 없을 줄 알았던 내가 그 모든 것의 한 가운데 서있었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을 때, 어느 새 내 손에도 쇠파이프가 쥐어 있었다는 사실. "쳐들어온다"라는 외침이 나왔을 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람을 팬 적이 없기에, 무서워서 쇠파이프 몇 번 휘두르다가 그냥 등돌리고 도망가버린 사실. 다음 날 아침에 거울의 내 모습을 들여다봤을 때.. 깊은 수치심과 무력감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사실...
 
그리고, 재개발단지에 들어가 만났던 수 많은 주민분들.. 학생들을 환영한다며 음식을 해주시고, 잔치를 벌여주시고, 술과 안주를 주시고, 함께 인생얘기를 하며 때로는 잘 모르는 노래를 부르던 그런 분들이 모조리 연행되어 갔다는 사실.
 
무엇보다도 뼈저리게 느낀 것은, 그렇게 TV에서 주사파 북한찬양론자로 몰아가던 이 학생들 빼고는, 어느 누구도 이들을 돕지 않았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해도, 학생운동은 결코 그런 식으로 처참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으며 짓밟힐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96년대의 한총련사건을 기점으로, 매년 일어나던 연례행사였음에도 70년대 유신시절 이래 볼 수 없었던 정도의 엄청난 경찰력이 동원되어 무력으로 학내까지 진입하여 행사를 강제해산한 것.. 그 참혹한 사건이 오로지 한총련 탓으로 돌아가는 어이없는 언론보도.. 서로 다른 수위의 이념과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는 한총련 소속 대학을 전부 주사파로 몰아가는 돼지같은 서강대 박홍 총장의 얼굴...
 
그것이 결정적인 타격이 되어 이후로 학생운동은 계속해서 쇠퇴해갔고, 사회정의의 신념과 실천적 의지를 자랑으로 삼던 "실천하는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점점, 토익과 토플과, 구직학원으로 변해가게 되었지요. 매 해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정치니 사회정의니 하는 것은 그저 "구닥다리"라는 비웃음을 받았고요.
 
학생운동 뿐만이 아니라 이후 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벌어진 모든 노동쟁의에 공권력이 투입되었고, 모두 폭력으로 깨져갔으며, 그렇게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짓밟히고 있을 때 시민들은 무엇을 했나요. 박수를 치고 속이 시원하다고 외쳐댔습니다. 지하철을 무리하게 빨리 돌리던 관행에 반하여, 규정대로 역에 일정 시간 동안 정차했다 출발을 하는 지하철 "준법투쟁"에 반발하여 역무원의 멱살을 잡고 손찌검을 하던 시민들을 보면서 허탈했습니다.
 
매 번 투쟁이 실패하고, 주동자들은 잡혀가고, 남은 사람들은 전쟁에서 져버린 패잔병의 표정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 작업감시자가 지켜보는 아래 조용히 일터로 돌아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집에 돌아와서는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젊은 만큼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이었던 제 가슴에는 항상 울분이 있었지요. 전태일 열사는 무엇을 위해 그 옛날 스스로를 불사르고 떠난거냐고. 그가 스스로를 태워가던 그 시절과 지금 뭐가 변했냐고. 우리가 믿는 것이 정의가 아니냐고. 누구에게인지도 모르게, 그냥, 술을 마시고, 울면서, 계속 묻기만 했습니다. 투쟁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권력도 힘도 없는 자는 그대로 그냥 살아갈 수 밖에 없는게 민주주의냐고 말이지요.
 
근데 말이죠.
 
위에 말한 내용이 97년에서 99년 사이의 일입니다. 70년대 유신체제 시절의 얘기도 아니고, 80년대 노동운동 시절의 얘기도 아니에요. 겨우 10년 전의 얘기입니다.
 
옛 시절 투쟁은 목숨을 걸고 했다지만, 그래도 뚜렷한 목표와 희망이 있었지요. 70년대에는 박통을 몰아내고 민주적 정권이 들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80년대에는 그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 원수, 전두환과 노태우라는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6월 항쟁을 통해 무엇인가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다들 희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90년대 초반과 중반 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민주화 투쟁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등에 업고 들어섰다는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가 예전 박통, 전통, 노통 시절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시위와 데모를 짓밟았습니다. 수 많은 정치범을 양산한 국가보안법..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서 없어질 줄 알았던 그것이 그대로 버젓이 남아서, 90년대의 대형 희생물로 학생운돌을 죽여버리더군요. 그 다음에는 노동운동과 노동조합들이고요.
 
그렇게 보낸 90년대 초 중반이 지나자 찾아온 98년도의 IMF 사태. 위대한 보수주의의 역습...
 
도대체 해준게 무엇이 있다고 국가와 정부에 대해 그렇게 충성을 바치는지... 국민은 위대한 애국주의 열풍에 물들어 위정자와 경제인의 배임과 실패로 인해 찾아온 경제위기를 해소한답시고 시골 아낙네 손가락에서 금반지까지 뽑아다 주더군요. 그렇게 해서 모은 금이 누구 손에 어떻게 사라져버린건지는 예전에 타메를랑님이 올리신 글이 있었지요?
 
노동계급이 대한민국 역사상 언제 허리띄를 풀어본 적이 있다고... IMF 사태 벌어지자마자 "다시 허리띄를 졸라매야 한다"면서 대규모 구조조정 열풍이 불었지요. 말이 구조조정이지 기업 내부의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부패한 구조는 해소된 것 없이 인사구조만 변경되어 대량의 해고열풍을 불면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뉴스에 "홈리스"라는 단어가 나오게 만들었지요. 구조조정 하자면서 왜 재벌구조는 조정이 안되나요? 90년대 초반과 중반이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조직 및 동원력에 대한 타격이었다면, 90년대 마지막 몇 해 동안의 IMF는 다시금 결정적으로 살아남아 새 정권과 유착한 기득권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주도권을 돌려주는 결정타였습니다.
 
98년 이후 맞이한 4년 동안, 옛 군사정권 시절에 경제인 및 관료로써 주도권을 발휘하던 자들이 다시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98년의 IMF라는 사건이 있었다면 2002년에는 월드컵이라는 미치광이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이 맘때 쯤이면 학생 여러분들도 기억을 하실거에요. 아마 거리에 계신 분들도 많았겠지요. 그리고, 여러분들 중 많은 수는, 그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같잖게 보셨을거에요. 초를 치는 행위라고 보셨을 수도 있고요. 애국주의적 쇼비니즘이 2002년을 휩쓰는 가운데 다시금 몇 년 동안 무너져가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보다 강력해지는 보수주의의 열풍을 여러분 들 중 많은 수는 별 것 아닌 미풍으로 여기고 넘어가셨겠지요.
 
하지만 이해합니다. 어렸을 때니까요. 저도 어렸을 때는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90년대는 끝이 났습니다.
 
50년대의 반독재투쟁, 60년의 4.19 투쟁, 70년대의 반유신투쟁, 80년대의 민주화투쟁.. 그 장구하게 이어져내려오던 한국 민주주의 및 진보주의의 정신이, 한 때 동맹자였던 자들의 손에 의해 비열하디 비열한 토사구팽의 처지에 몰려 살해되어갔을 때, 우리 국민은 모두 침묵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눈에 보이지 않았는지, 아니면 보기 싫었는지. 지난 50년 동안 투쟁했으면 충분한 것 아니냐고 방심을 한 것인지, 어쨌든, 50년간 투쟁해오던 그 성과가 단절이 되어버리고, 다시금 극우들의 손에 권력과 헤게모니가 넘어가버린 가운데, 이제 우리 사회는 과거에 민주화를 돕던 두 튼튼한 세력 -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 이 사망해버린 가운데 다시금 시곗바늘이 뒤로 돌아가고 있지요.
 
촛불집회가 왜 실패했을까요?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순수"를 외칩니다. 외부 세력의 개입 따위는 없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이나 다른 "운동"자 붙은 사람들이 참여해오는 것에 대해 눈살을 찌푸렸지요. 우리의 투쟁은 순수하고 고귀하고 평화적이다. 구닥다리 폭력시위와 정치구호를 외치는 자들은 그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아십니까.
 
"순수"하기 때문에 촛불투쟁이 패배했다는 것을요. 이 세상에 "순수"는 없다는 것을요.
 
인간은 호모 폴리티쿠스. 이미 정권의 의지에 반하는 자신의 뜻을 폈을 때,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소신의 표망이며, 그렇기에 거리에 나서는 싸움은 정치적 투쟁의 첨단에 있다는 것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촛불투쟁은 제도권 정치 내에서 동맹자를 찾았어야 하고, 정권의 입장에 반대하는 그 정치적 대표자들을 통해 공론화되어,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고, 최후최종의 목표로 그 운동을 통해, 지지부진한 야당도 아니고, 독선적인 여당도 아니고, 국민의 의지를 아주 직접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정당의 설립이 되는, 극도로 정치적인 운동이 되었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평화투쟁은 평화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두 당사자간에서만 의미가 있지요. 그렇기에 평화투쟁은 폭력투쟁이나 정치적 투쟁의 "지저분한 어떤 모습"도 보지 않을 수 있는 대신에, 그 소망과 의지를 기득권이 무시를 하면 그대로 투쟁은 끝나버린다는 약점이 있으니까요.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만약에 말이지요, 지난 90년대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역으로 쇠퇴하기 않고, 기존 정치권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진보정당을 수립하는데 성공했더라면 촛불투쟁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라는 단물에 취해 그토록 많았던 제도권내 정치인들이,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오히려, 자신들이 예전에 투쟁을 해왔던 그 뜻을 잊지 않고, 김영삼씨와 김대중씨의 배신행위에 분노하여 다시 재야로 내려왔더라면. 소멸하지 않은 그 투쟁의 힘이 한국 사회 내에 강력한 산별노조의 수립과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직접적으로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대안적 진보정당의 수립에 힘을 실어줬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촛불집회에 정치세력으로서 유의미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진보정당은 바로 호응하여 그것을 통합적인 반정권 정치운동으로 이끌어내었을 것이고, 오늘날 이명박이라는 꼭두각시를 내세우고 있는 보수세력의 초대형 한국형 "갸쿠코스(逆 course)" 행보를 저지할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힘을, 우리들은, 우리 국민은, 지난 10년 전, 90년대에, 그대로 죽여버렸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이것이 이명박 한 개인의 문제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요. 우리의 탓은 없다. 우리 말을 안 듣는 꼴통 지도자 한 명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의 잘못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시계바늘을 뒤로 돌린다고요?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한국 사회의 시계바늘은 이미 1990년대 부터 멎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뒤로 돌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80년대 보다는 조금 쯤 더 확장된 언론의 자유, 인터넷 게시판에서 익명성의 힘을 발휘하여 욕지거리나 내뱉고, 위협조차 되지 않기에 정부에서 모니터링 따위 할리도 없는 우리 게임동호회 게시판에서의 힘 없고 말만 많은, 투표권이 없거나, 투표권 있어도 놀기에나 바쁜 수 많은 어린 학생들이 맘대로 지껄일 수 있는 그런 코딱지만한 자유에 취해 한국 사회가 진보했다고 믿을 때.. 우리 사회에 근대화의 문제니, 노동운동이니, 학생운동이니 따위는 이미 옛일이며, 우리는 선진국에 진입하여 선진국형 조합주의와 합의에 근거한 합리적 의견수렴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헛소리를 내뱉을 때...
 
그렇게 허망한 환상에 취해있었을 때 부터 시계바늘은 뒤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 몇 년 동안, 90년대의 재보수화의 광풍을 타고 엄청나게 강화되어 있던 보수 기득권은, 이번 기회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하자마자 이미 오래 전 부터 뒤로 돌아가고 있던 시계를 대중의 눈 앞에 전면으로 보여줬을 뿐입니다. 법률 몇 개 폐지하고, 뉴라이트 특강 따위 벌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온 사회가 뒤로 돌아간다고요?
 
그럴리가 없지요.
 
이미 뒤로 돌며 걷고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이명박이라는 한 개인과, 그를 지지하는 정당의 재집권만으로 역사와 시대의 흐름을 뒤로 돌리려는 오만방자한 수작이 먹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방조한 죄인은 바로 어느 누구도 아닌, 90년대를 침묵 속에서 방조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공범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싸운다던 사람들과의 투쟁전선에서 이탈을 택했을 때.
치켜든 주먹을 내려놓고 작은 성공에 안주하기 시작했을 때.
사회적 연대를 외치던 수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묵살했을 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조용히, 눈을 감고,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무시를 했던 우리야말로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지지하여 그들에게 투표를 한 사람들보다도 더욱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도움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아프리카 공산당의 어느 글이 올라왔을 때, 저는 그 얘기가 사실 다 맞는 말이라고 한 것이에요. 그 글을 쓴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수준만의 얘기를 하고 있지요. 게다가,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얘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본받을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그의 취지는 맞는 말이에요.
 
우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의미가 있을 정도로는요.
 
우리는 변화의 첫 물결을 보기도 전에, 주저앉았습니다. 90년대에 무거운 엉덩이를 땅에 붙인 이래, 다시 앉은뱅이가 되어 버렸지요.
 
 
그, 저주받을, 魔의 90년대에 말입니다.
 
 
Epilogue:
 
열쇠는, 늘 그렇듯, 수 십년 전 부터 논의를 해왔지만, 아직 단 한 번도 한국 사회에서는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진보정당의 집권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집권의 문제라기보다, 진보정당이 한국 정치에서 집권당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 많은 사회적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요.
 
한나라당은 90년대에, 김영삼씨의 신한국당이 구세력과 담합을 이루었을 때 부터 '진보'의 기치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올드라이트"라고 부를 수 있는 옛 기득권세력;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가장 강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인 동시에, 끝없이 군사정권의 잔재로 인한 약점을 지니고 있지요. 기실, 한국사회에서 '뉴라이트'라는 얘기가 나온 것이야말로 원래는 한나라당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의 정치적 보수파에서 구시대적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는 '존경받을 만한 인텔리적인 보수주의정당'으로 쇄신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우습게도, 올드라이트가 워낙 강성하기에 외려 '뉴라이트'는 진실로 지적인, 인텔리적인 보수주의를 뜻하기 보다는 현재 '올드라이트로의 복귀'에 지나지 않는 엉성한 것이 되어버렸지만요.
 
민주당은 정치적 지향점이나 그 구성성분으로도 사실 한나라당과는 큰 차이가 없고, 단지 한나라당의 집권에 반대하는 정당이라는 것만 살아남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사실 역설적으로, 문민정부를 제치고 집권한 김대중씨의 국민의 정부가 하는 짓은 문민정부와 전혀 차이가 없었던 시절부터 그 몰락은 예상된 것입니다. 김영삼-김대중 라이벌 의식으로 인한 정당간의 경쟁만 있을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반발한 세력들이 이탈하여 열린우리당을 만든 것이고, 이미 보수적으로 흐르고 있던 한국 사회의 흐름에서 이례적인 대중주의적 반향을 통해 노무현씨가 당선이 되었지요. 그러나, 중도우파 정도로 산정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마저 큰 흐름에 있어서는 한나라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역시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삽질을 거듭하는 것이지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열은, 한국 진보정당운동사에 있어서의 오랜 구태를 재현하는 듯 합니다. 그나마 몇 번의 선거에서 기염을 토하여 수 십 년 만에 진보정당 의원들이 국회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음에도, 지속되는 탄압, 여전히 너무나 미미한 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장님에 귀머거리에 가까운 국민들에게 있어서 "대안적 정당", "진보적 정당"은 극복하기 힘든 거부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한나라당에 반대를 한다면, 그들의 정책과 완전히 대극에 서있는 것은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입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한나라당에 반대를 한다면서 대안으로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이 거론되면 사람들은 입을 닫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정말로 '대안'에 속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막는 것일까요?
 
보스정치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굵직굵직한 옛 "보스"들 -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혹은 박정희의 후광을 업은 박근혜.. - 이런 종류의 인물이 아닌, 진정한 '평민'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일까요?
 
아니면, 그 정책에 대한 반발일까요?
 
사실, 어떤 정당이 내놓는 정책이, 그 정당이 집권한다고 당장 현실이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서 수위를 조절해가며 가능한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집권해본 적이 없어서 정치를 못할 것이라는 얘기는 집권한 번 해 본 적 없는 문민의 정부를 버젓이 뽑아준 것을 보면 말이 안될 뿐더러, 정책이 과격하다는 것은 더 말이 안되지요. 애초에 한나라당이 내놓는 미치광이 정책이 싫어서 그들을 반대한다면, 그것의 직접적인 대안으로 서있는 정책을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진보정당에 거부감을 갖으면서도, 한나라당은 싫다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한나라당 인물은 싫지만, 그래도 정책의 기본 기조와 수위는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것 보다 조금 덜 노골적이고, 서민들에 조금 덜 부담이 되는 그런 정도를 원하는 것입니까? 한국 정치적 구태의 반복입니다. 이 새끼들 싫다고 해서, 정당 이름만 다른 똑같은 놈들 다시 뽑아주고. 그 놈들에게 좀 맡겼더니 하는 짓이 똑같다고 해서 다시 이전 새끼들 뽑아주는 우매함.
 
변혁을 논하는 자들은
 
입에 변화와 쇄신을 담기 이전에, 한국 사회에서 오래도록 주류의 인식 속에서 핍박받아온 노선을 지지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를 먼저 스스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무노조주의라는 어이없는, 19세기에나 등장할법한 얘기가 마치 자랑인양 돌아가는 이런 사회에서, 1-100 사이의 저울이 오른쪽 100으로 기울은 것을 한꺼번에 50 정도는 왼쪽으로 옮길 기개조차 없이, 늘 해먹던 놈들과 비슷한 놈들만 찍어주면서 그 놈들이 정신을 차려주기를 바라는 것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
 
 
정치적 중립이다, 혹은 비정치화다... 이런 얘기를 하는 젊은 분들이 있지요.
 
하워드 진의 말입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요.
 
기득권과 저항의 사이에서 선택을 요하는 국면에서 중립을 표명하는 것은, 결국 기득권을 지지하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때리는 자와 얻어맞는 자 앞에서 "중립"을 표하는 것은, 비폭력이라는 숭고한 대의의 표명이 아니라, 때리는 자 앞을 막아서지 않겠다는 순응과 복종의 가장 비열한 표현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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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7:42 2009/06/0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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