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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 [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


이 책은 미이클 레보위츠가 쓴 책(메이데이, 2008)이다.

이 저자의 책은 이미 한 권 소개 된 바 있다, <자본을 넘어 : 맑스의 노동자계급 정치경제학>으로.

이 책의 번역은 그리 깔끔하지 못하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2,3,4장의 내용은 위에서 이미 소개된 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소개된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은 크게 2개의 운동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과정이며, 둘째는 노동자 계급 자신의 자기 생산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맑스의 <자본론>이 미완의 저작으로 첫째 운동과정인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 과정만이 기술되어 있을 뿐, 두 번째 운 동 과정의 노동자 계급 자신의 자기 생산 과정이 서술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이 둘째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이 둘째 과정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이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의 중심은 바로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자기 생산이야말로 새로운 여성과 새로운 남성, 즉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야 한다는 체 게바라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간의 생산의 현실화와 관련하여서 저자는 유고의 [노동자의 자주관리]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 자주관리는 7가지의 어려운 문제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그 7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기업 내에서 생각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의 분열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2. 판매가 하락할 때 노동자관리 기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상이한 기업의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에서 노동자관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4. 자주관리기업의 노동자들은 실업자들과 배제된 계층에 대해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

5. 노동자 자주관리체제에서 누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책임지는가?

6. 노동자관리기업들의 파산을 허용해야 하는가?

7. 어떻게 노동자관리기업들과 사회 전체 사이의 연대가 직접적으로 기업에 통합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이 기업의 이윤을 그 기업에 속한 개별 노동자의 이익으로 환원하고자 한다는 데에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는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이며, 이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가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을 개별 노동자의 이익으로 환원하게 될 경우, 첫째, 각각의 기업들 사이의 경쟁은 불가피하게 되며, 둘째, 노동자 계급 내에서의 빈부 격차가 발생하게 되어 노동자들의 분열이 가속화됨으로써, 셋째, 이 분열을 중재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 국가권력과 개별 노동자 사이의 적대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곧바로 노동자 계급 전체의 이익과 개별 노동자의 이익 사이의 적대로 표면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며, 이는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의 존재를 의문시하게 되어, 결국 이 자주 기업은 옛날 스탈린주의 식의 국유화로 넘어가게 되거나 아니면 자본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차베스가 주도하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의 혁명적 볼리바르 정책  49개 자체 내에도 깔려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볼리바르 정책이 완전한 반자본주의 정책이 아니라는 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네수엘라 자국의 산업과 농업을 지반을 다지기 위하여, 즉 베네수엘라 일국적 자본가 계급을 창출하기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면서도(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다)을 볼리바르 정책의 목적과 방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볼리바르 정책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은 기존의 국가에 대한 통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어떤 시인들의 아름다운 관념과는 반대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 국가는 이제 새로운 생산관계의 기초를 창출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국영기업의 형태로, 두 번째의 것은 각 지역의 협동조합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국영기업은 스탈린 식의 국영기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국영기업도 아니다.

또한 각 지역의 협동조합 형태는 스탈린 식의 협동조합도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각 아무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개별적인 소집단도 아니다.

이 두 형태는 사회적 생산기업EPS의 모습을 가지는데, 이 생산기업은 각각의 공동체들이 자신의 필요를 집단적으로 확인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만큼, 전체 공동체의 필요와 목적에 진정으로 기초한 생산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인간 능력의 완전한 발현이라는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사회주의는 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경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현재 베네수엘라가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이것이 저자의 말하고 있는 마지막 요지이다. 

 

*** 

일단 저자의 생각에 거의 대부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을 좀더 밀어부쳐서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새로운 인간주체의 형성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의 7가지 문제점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에서도 새로운 인간주체가 형성되지 못해 7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 노동자의 자기 생산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저자에게는 곧바로 새로운 인간주체 생산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새로운 생산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찰 없이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기 위한 변혁적 실천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 노조를 통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대 자본 투쟁으로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 주는 바이다. 오히려 자본의 내성을 강화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그렇게도 열심히 투쟁하는데도 맨날 패배이며, 위축되어 가는가?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곧 노동자의 노동력의 재생산, 새로운 생산과 맞물려 있다. 이 생산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는 자본-노동의 관계와 아주 유사한 관계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이 생산은 여성의 가사노동의 착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착취 관계 방식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노동자의 자기 생산 방식, 즉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자기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생산관계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 스스로 성별 분업 체계를 해체하고 ‘여성 되기’를 통한 여성 해방의 과정 없이는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이 기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여 그 국가를 통제하는 것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기초이자 전제(책 203쪽)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칫 오해를 살 만한 부분이 있다. 두 가지만 지적하도록 하겠다.

(1)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기존 국가 권력 장악이 목적으로 둔갑하는 경향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자신의 삶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인 돈이 그 자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의 경제주의 현상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열의 여덟 아홉은 좋은 대기업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 획득이 하나의 수단이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이 궁극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 권력 획득이 궁극 목적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권력 획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 형태로 환원될 위험이 아주 많아지게 된다.

(2) 도대체 어떻게 기존 국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간 주체 형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새로운 생산관계를 통해 새로운 인간 주체를 어디서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생산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이다. 기존 국가 권력 장악의 전제는 새로운 생산관계 창출 과정이며, 이 과정을 배제한 모든 논의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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