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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의 시고니 위버...

제목을 이렇게 달았는데, 시고니 위버라는 배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이라는 영화 속에서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여름 학기(보통 계절학기라고 말한다. 계절학기 강좌는 거의 강사들한테 안 주는데... 운 좋게 하게 되었다고 했는데...경제적으로  안 하느니 못한 것이 되었다^^) 기말고사 시험 문제를 내려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마루잡이로 끄적여 보려고 한다.

 

보통 에일리언의 영화를 해석하는 관점이 80년대 다이하드와 함께 남성성의 영웅화(이를 미국의 영웅화로 연결시킨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내가 주워 들은 바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 초점이 아주 다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문제는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즉 시고니 위버가 맡은 역할이 여성의 남성성쯤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인데...

지금 내가 생각하기로는 시고니 위버가 그 남성성의(가부장제 또는 성별 분업화 속에서의 성차로 해석된다) 사회를 해체하는  여성 전사 같다는 것이다.

에일리언은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 또는 거대한 남성성의 상징처럼 보이며, 그 에남성성을 여성을 숙주로 하여(이는 여성이 가족 내외에서 행해지는 모든 노동, 이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가 평가절하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생산하는 구조 속에서 그 재생산의 끈을 잘라버리려는 위대한 투쟁의 과정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에일리언을 죽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해체하는 것이며, 그 해체에는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 숙주라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죽임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성별 분업화된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을 해체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적 개인으로서 노동자(이는 대체로 남성으로 상징된다)는 그 자신 속에 착취라는 자본의 특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본(에일리언)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식들은 여성의 노동(시고니 위버의 몸)의 착취를 통해 자라나는 구조 속에 있다. 이 구조와 완전히 단절하려는 투쟁이

에일리언에 대한 시고니 위버의 싸움 속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좀더 시간이 된다면 에일리언 1에서부터 4까지 잘 들여다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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