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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문제에 관하여...쫑알쫑알...

요즘 선거로 대(?)한민국이 난리부르스가 아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둥 하면서 북풍으로 선거라는 배를 당선의 항구로 향하게

하려는 '당나라 당'의 '사대강 삽질'의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거기에 야권을 비롯한 진보 일부 세력들이 여전히 '비판적 지지'와 '현실성'이라는 망령을 등에 업고

'반엠비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될 놈을 밀어주자라는 비판적 지지와 현실성의 망령은 우리의 의식을 갉아먹고서

비판적 지지와 현실성 빼 놓고는 아무 생각 없는 '좀비'를 만드려고 하고 있다.

국민을 좀비로 만드려고 한다는 점에서 엠비나 반엠비나 '초록은 동색'이다.

 

뭐, 나란 인간은 90년 초반부터 투표 행위에 일체 참여를 하지 않았다.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는 둥, 사표를 만든다는 둥 하면서 힐난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살 물건이 없으면 사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맘에 들지 않아 투표를 하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투표하냐!!! 

그런데도 투표하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파쇼의 논리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도 시큰둥이다... 

한명숙을 찍던, 오세훈을 찍던, 노회찬을 찍던 찍는 사람 마음 아니겠나... 

근데 이번에도 난 찍을 사람 없어 안 찍을란다. 

 

교육감 선거도 있는 모양이다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교육과 관련해서 쫑알쫑알대기로 했으니 쫑알대보기로 하겠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교육과 관련한 커다란 두 개의 문제는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가(이것은 공교육의 위기로 일컬어지곤 한다)와

이에 맞선 공교육의 강화이라고 본다.

이 두 문제는 다음과 같은 위치를 점한다.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가의 반대는 공교육의 강화이다. 

그런데 정말 이 둘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것인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둘은 딜레마를 구성하는 쌍생아일 뿐이다.

어느 한 쪽을 택해도 교육문제는 점점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즉 적대적인 무한 경쟁 이데올로기에 저당 잡힌 세대들을 계속해서 길러낸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비판적 지지와 현실성이라는 망령이 판을 치게 만드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먼저 공교육과 관련해서 이야기해 보자.

공교육의 대표적인 기관은 일선 학교이다.

그러므로 공교육을 강화한다는 것은 학교 교육을 강화한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학교 교육을 강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공부를 열심히 시킨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공부를 열심히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대학입시라는 무한 적대적인 경쟁에서 살아 남아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입시는 어떻게 치루어지는가?

대학입시는 곧 적대 경쟁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 경재에서 살아 남는 자와 도태되는 자를 가르는 기준은

양적인 기준이 되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양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단시간 내에 많은 상품을 생산하여 최대 이익을 뽑아 내야 살아 남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적인 시스템은 누가 더 많이 짧은 시간 내에 단편적 지식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기억을 빠른 시간 안에 떠올릴 수 있는가이다.

이는 텔레비전의 퀴즈프로그램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학교 선생님들은 주어진 시간 내에 많은 단편적 지식들을 학생들 머리 속에 꾸겨 넣어야 하고, 

그 꾸겨 넣은 기억들을 단시간내에 떠올릴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니 학교 선생님들은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신경 쓸 수도 업고 신경 써서도 안 된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학교 선생님들은 이런 일 외에 노조 활동 등의 여타 정치적 활동 등을 해서는 안 되며,

수업 시간에 쓸데없이 이념 교육이니, 통일 교육이니 시가 어떻고 문학이 어떻고 예술이 어떻고 하는, 

대학입시와 하등 관계가 없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전교조 선생님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징계를 하고, 퇴출시키겠다는 협박을 하며, 

심지어는 무슨 연구기관에서 전교조 선생님이 많은 학교에서 대학입시 모의고사 성적이 낮게 

나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고 뉴스를 통해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럼 아이들은 어떤가? 

아이들 역시도 이런 시스템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공정택이 초등학교 때부터 일제고사를 실시한다는 것도 공교육의 강화 차원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공교육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일제고사를 보게 되면 아이들은 또 시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시험을 잘 봐야 하고,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즉 무한한 적대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사교육의 대표적인 장소인 학원에서 11시 12시가 다되도록 파김치가 된다. 

학교에 학원에 아이들은 시들어간다. 

재작년에 여고생 3학년들이 잠 좀 자자고 촛불을 들고 나온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공교육을 강화시키게 되면 정말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잘 들어가게 될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공교육의 강화는 결국 사교육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한 적대적 시스템인 대학입시에서 살아 남으려면, 

남보다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 단편적 지식을 꾸겨 넣어야 한다. 

아무리 학교에서 빡세게 한들 어차피 정해진 경쟁 내에서는 누가 잠을 더 안 자고, 

누가 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누가 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더 많은 단편적 지식을 꾸겨 넣을 수 있다. 

그러니까 공교육을 강화시키면 시킬수록 공교육은 황폐되며, 

사교육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교육 시스템이며, 

현재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다. 

 

제도권 교육, 아니 자본 계급의 교육 시스템에서 두 개의 축인 공교육과 사교육은 

상호 대립적이지만 상호 보완적이면서 통일적인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답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당면한 딜레마 상황인 것이다. 

오죽 했으면 진보넷 블로거 중 한 명께서 자식 교육을 포기하겠다고 하셨겠는가!!! 

 

우리의 대안을 공교육으로 잡는다면, 

우리는 무한 적대 경쟁이라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의 무능력에 다름 아니다. 

진보 운동의 위기가 왜 생겨나겠는가? 

유치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학교 교육에서 

무한 적대적 경쟁 속에서 살아 남는 법만 배운 젊은이들이, 

그리고 돈 버는 외의 활동을 다 쓸데없는 활동이라는 생각을 생활 속에서 체득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지는 뻔할 뻔자이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데올로기... 

이것이 슬프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이다. 

딱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때만 움직이며, 그 위협이 잠시 사그라든다고 생각하든가 

그런 움직임이 생존에 더 위협을 준다고 느끼면 얄짤없이 스톱 앤 고우 백이다! 

 

그러면 교육에 있어서 우리의 대안은 무엇이겠는가? 

이 대한민국 땅에서 사교육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저 꼴통 보수인 당나라 당도 공교육 강화를 외치고 있다.

공교육은 진보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공교육은 자본의 측면에서 볼 때의 공교육이기기 때문이다.

 

대안은 공교육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교육인데, 이는 곧 여성, 장애인, 소수자 인권 등의 소수자 교육이다.

우리는 이러한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며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 공교육, 사교육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계급 교육, 소수자 교육을 사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본의 생산을 위한 영역에서의 사교육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사교육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런 계급 교육을 위한 준비를 하고 그러한 교육을 시행하지 않으면,

우리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계급 교육, 소수자 교육은 현재 수준에서는 제도권에서는 실시될 수도 없고,

실시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교육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교육,

대다수의 민중들에게 현실적인 대안 교육이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요체는 자기 비판(이것을 북한 식의 자아비판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고 김수환 추기경이 말한 '내탓이오'와도 동일시해선 안 된다.

이 자기 비판은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질적으로 구별시켜 주는 계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만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의미를 가진다)과

이 비판을 바탕으로 하는 '산파술'로서의 상호토론이어야 한다.

이것은 맑스가 [포이에르바하 테제] 3에서 <교육은 그 환경 뿐만 아니라 교육자 그 자신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삶 속에서 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지금의 학교에서처럼 교과서를 가지고서 주입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오로지 일상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상의 삶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무한 적대적인 경쟁 시스템이라는 일상의 삶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할 <코뮌>에서의 일상적인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숨쉬며 맘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고 발전시켜 갈 수 있는 코뮌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동시에 이런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속에서 우리 자신 역시도 코뮌을 형성해 나갈 수 있다.

이 코뮌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인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적 토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곧 계급투쟁이며, 소수자 투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적 토대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이러한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현실적인 출발점은 노동자 계급의 임,단투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임금 투쟁, 단체협상 투쟁을 단순히 경제투쟁, 개량적 투쟁의 시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투쟁을 코뮌이라는 진지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투쟁의 서막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현재 이러한 투쟁이 개량적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개별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라는 측면에서만 고찰되고 실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립적이고 개별화된 임금 노동자의 임금 보전과 인상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노동자의 기본 소득 보장에 대한 논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러한 투쟁은 개별 노동자의 임금 인상 수준에서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전체와 민중 전체를 위한 수준에서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자본에게 착취 당했던 부분을 되찾아 개별적인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민중 전체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코뮌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기본적으로 자연 친화적이며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먼저 자연 친화적인 우리 농산물의 공급은 농민회와 연대하면 된다. 

농민회와 민주노총 사이의 직거래를 하면 된다. 

필요한 만큼 주문을 받아서 농민회는 필요한 만큼 농사를 지면 된다. 

여력이 된다면 농민회 차원에서 주말 농장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직접 흙을 만지고 농사를 짓는 수업을 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재원은 물론 민주노총 차원에서, 아니면 지역 노총 차원에서 

대자본 임단투 투쟁을 통해 마련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아이들을 자본의 교육 영역(제도권 교육)으로 완전히 넘겨서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방과 후에 자신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간은 다양하게 쓰일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을 일단 지역 차원에서 하나씩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마련하는 방식은 임단투 투쟁을 통해서 얻은 재원을 가지고,

노동 계급 스스로가 짓거나 임대하면 된다.

이 재원이 어떻게 쓰이는지와 관련하여 자본의 간섭을 단협을 통해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마련된 건물에 아이들의 공부방, 문화시설, 식당, 놀이방, 토론회 장소, 휴식 공간 등을 마련한다.

아이들은 이 공간 속에서 자신들의 코뮌을 형성하면서 자신의 문제에 대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지원책을 요구하고 스스로 집행해 나가는 학습을 한다.

물론 이러한 학습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제도권 교육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제도권 교육 대신 스스로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을 꾸려 갈 것인가의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한 선택을 통해서 부수적으로 군 입대를 하지 않을 수 있고,

이는 곧 전쟁 반대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의무 교육인 중학교만 마치면,

내가 알기로는 군대에 가지 않고, 공익 요원과 같은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 봉사활동 기관은 곧 자신이 학습했던 코뮌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건물 확보가 당장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경우에 과도기적으로 대학을 거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의 학생운동의 방향은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합법적으로 봉사 동아리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봉사 동아리의 형태는 학생 대중들과의 연계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학 내에서 방과 후에 아이들이 같이 먹고 같이 놀며 같이 공부하면서

또한 자신들의 코뮌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파업 파괴에 아이들이 이용되지 않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 생산은 기존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자극제가 될 것이며,

노동운동의 새로운 변태(허물 벗음), 새로운 변혁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노동자들은 자기 가족들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 자신의 조직을 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그러한 부모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며,

아이들은 그러한 부모를 격려, 비판하면서 함께 싸우는 동지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새로운 교육, 비제도권 교육으로서의 계급 교육은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교육 속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

다시 말하자면 <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자본과의 한판 싸움을 위해서, 즉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우리의 코뮌을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그들 스스로의 관계, 즉 코뮌 속에서 풀어나가게 되면,

우리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가족 이데올로기에 매몰될 필요도 없거니와,

우리 아이들에게 온통 신경이 팔려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억압적 삶을

살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가족 내에서의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코뮌-코뮌 구성원으로서의 동등하고 민주적인 관계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각자가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렇게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공산주의 삶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인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이라는

우리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떻게?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일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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