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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여성으로, 엄마로, 아내로, 딸로, 며느리로 살아가기

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3/23
    사랑이의 사진
    봄밤
  2. 2007/03/23
    동물원 다녀왔다.
    봄밤
  3. 2007/03/08
    사랑, 열감기 앓다
    봄밤
  4. 2007/01/25
    양순이와 이별
    봄밤
  5. 2007/01/23
    사랑이의 언니-양순이
    봄밤
  6. 2007/01/08
    작은 점이...
    봄밤
  7. 2006/12/10
    자본주의가 빼앗은 집의 평화1-층간소음
    봄밤
  8. 2006/12/09
    거참
    봄밤
  9. 2006/12/08
    첫글
    봄밤

사랑이의 사진

디카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흑.

생후 2개월, 3개월의 사랑이

얼마전 열감기에 앓아 열꽃 핀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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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다녀왔다.

사랑이 감기도 나았고 날도 푸근해져서 사랑이와 아빠와 동물원에 다녀왔다.

아직 동물이 뭔지 신기해하는 것보다는 그저 제 또래 아기들을 보고 더

좋아한다.

그래도 나들이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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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열감기 앓다

 

태어나서 지금껏 아픈 적이 없었던 사랑이가 열감기에 걸렸다.


그동안 엄마인 나는 내심 자랑스러워하면서 주변의 아픈 아기들이나 아기엄마들을 향해 '대체 애를 어떻게 보는 것이얌??' 하면서 으시댔는데.

오랫만에 회의자리에 가느라고 3월 1일 버스를 타고 전주에 갔다가 여섯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야 택시를 타고 익산 집으로 왔다.

 그 다음날부터 웬지 이유식도 잘 안먹고 그동안 밤잠을 잘자더니 밤잠도 자주 깨고 짜증도 부리는 거였다.

돌 전후에 그런 경우가 많다길래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다 일요일날 비바람이 몰아치는 저녁시간에 난데없이 아기 숫가락과 컵을 사러 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차에서 내리면서 업어서 얇은 담요 한 장으로 씌우든지 아기를 돌돌 말아서 엘리베이터까지 집까지 왔는데 그날은 아무 생각없이 점퍼도 안입히고 대충 안고 온 거였다.

한 두시간이 지나자 아기 이마가 뜨끈뜨끈해지기 시작했다.

보채고 울고 열은 38도를 넘고...

예방접종 하러 갔다가 처방받은 해열제를 오래두면 안된다길래 한 일주일? 열흘정도 지난 뒤에 버렸는데 어쩌나. 할 수 없이 옆집 사는 20개월된 아기 해열제를 빌려다가 조금 먹이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열은 계속되었고 아침이 되어 소아과에 갔다.

열감기라고 했다. 보통은 2-3일 열이 계속될 거라고, 두고 보자 그런다. 더 오래 가면 다른 병을 의심할 수 있어 검사도 하고 해야 할 거라고 했다.


항생제, 스테로이드연고라면 고개를 내두르던 나는 부디 별 이상이 없길 바라며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으로 생각하며 약을 먹였다.

오늘까지 만 4일째. 어제 저녁 정상 기초체온으로 내려오더니 다시 밤 10시가 넘으면서 38도, 37도를 왔다갔다했다. 그러면서 열꽃이 피었다.

새벽 1시가 되어서야 한참을 보채다가 잠이 든 사랑.

새벽 4시에 깨어나 6시 반이 되어서야 다시 잠이 든 사랑, 11시에 부스스 깨어났다.

품에서 떨어지려고 안하고 이유식도 안먹고 젖만 물고 늘어지는 사랑.

지금은 낮잠을 자고 있다.


가끔 보채면서 잠을 못잘 때, 기저귀 갈으려는데 사방으로 기어다닐 때, 애써 이유식을 만들었는데 한 입도 먹지 않을 때... 아기가 보챌 때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엄마도 있을까 하면서 나의 엄마자격을 의심하곤 했다.

대체 잘 먹이고 있는지, 잘 놀아주고 있는지, 얘가 잘 크고 있는지, 혹시라도 이따금 화를 낼 때 상처받지는 않는지 수없이 걱정하고 자책하게 된다. 그건 검색마왕 네이버도 해결할 수 없고 우리 엄마도 언니도 해결할 수 없는, 오직 내가 그것들을 마주하고 지켜봐야 할 일들이다.

누구처럼 아기의 행동 하나하나를 잘 관찰하고 잘 기록하는 엄마도 아니지만, 그런 엄마를 볼때면 여러 감정이 교차하면서 한숨이 나기도 하지만 그런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멀리서 달려와 안겨 부비는 아기를 보면 그동안 우리가 함께 해 온 시간이, 그 짧은 만남이 엄마와 아기의 전쟁아닌 전쟁이 아니라 존재들의 행복한 만남 그것이 아니었을까.

졸린다. 내가 힘들고 졸리면 또 아기에게 짜증내고 엉덩이를 때릴지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럴거다. 바라보기. 아기랑 마주보기. 마주침... 다시는 이 시간이 오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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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이와 이별

양순이가 우리 집에 함께 살면서 이제 내게는 또다른 집착의 대상이 존재하게 됐다.

양순이는 너무 어려서 사료를 불려서 이유식처럼 만들어먹였는데

멸치, 버섯가루를 내서 섞어 주면 잘 먹었다.

어디를 가든 양순이를 데리고 다니고 언제든 부비며 살았다.

단, 그건 주말휴일이나 저녁시간에.

양순이는 외로웠나보다.

우리가 없을 때 혼자 남겨진 양순이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우리집 옆을 지날 때마다

엄청 짖고 누군가 오기만 하면 크아~앙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를 드러냈다.

 

때로는 남편이, 때로는 내가 사는게 힘이 든다고 술을 마시고 와서는

양순이를 붙잡고 울곤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내게 우울증이 시작된 듯하다.

그땐 남편이 내 술마시는 모양을 수상히 여겨 술먹지 말라고 고작 닥달을 해대었다.

 

성명서를 쓰거나 피켓을 만들거나 선전전에 나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게

대부분인 일이 끝나기 무섭게 집에 들어온 나는, 집 앞 수퍼에서

소주 한병 또는 두병을 사들고 와서 컵에 따라 단숨에 마시고 나서 저녁을 지었다.

괜히 무서웠고 괜히 슬펐고 눈물이 났고 가슴이 아렸다.

 

그때 양순이는 나의 이 우울한 모습을 모두 보았고

순전히 나의 생각이겠지만 나를 어느 정도 동정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가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순이는 나보다는 남편을 아주 잘 따랐다.

그게 참 서운했다.

내가 술독과 우울의 늪에 빠져있을 때 남편은 노동조합 일로

내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는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어 일을 그만두고 영성수련원을 가고

결혼을 하자고 맘을 먹었고...결혼을 하고 이젠 다르게 활동을 해보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살아가다가...

사건이 터졌다.

그 전부터 진행되던 재판이 거의 일년을 끌었는데

내가 법정구속된 거였다.

남편과 양순이는 뭘 먹고 사는지, 똥오줌은 잘 치우고 사는지,

그 모든 잡스러운, 생의 대부분인 것들에 대해

걱정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때로 남편보다 양순이가 더 눈에 밟혔다. 작고 힘없으니까.

그렇게 우리가 길들였으니까...

마당에서 노는 양순이의 사진을 독방 한면에 붙여놓고..

우리가 함께 있던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양순이와 남편, 내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지는 않았구나, 느꼈다.

만약에 자식이 생긴다면 대략 이런 모습이겠구나...생각했다.

 

만기 일주일을 남겨놓고 가석방으로 나와서 만난 양순이는 누구보다 더 반가웠고

양순이도 나를 바로 아침에 만난 듯이 그저 좋아했다.

보드라운 털과 커다란 눈, 가냘픈 다리..

역시나 예전처럼 내 손을 잘근잘근 아프게 깨무는 양순이..

 

남편은 내 출소와 함께 회사를 정리했다.

동시에 그의 노동운동도 그렇게 정리되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그걸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피하고 싶었던걸까)

삶에서, 운동에서 커다란 성벽을 쌓아갔다.

 

우리 셋은 날마다 낚시터로 휴양림으로 바다로 도시락을 싸서 놀러다녔다.

그렇게 다닌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낚시터에서 만난 발바리와 양순이는 눈이 맞았다.

2004년 가을 내내 우리는 지치도록, 돈이 떨어질때까지 놀았고 양순이는

임신을 하고 강아지를 낳았다.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라고 운이 복이 그렇게 이름지었다.

전세 기간이 다되고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서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양순이는 더 신경질적이게 되었다. 내 우울증이 깊어갈수록 양순이는

더욱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화가 나면 양순이를 때리다가 또 화가 가라앉으면 미안하다고 했다가

남편이 보기 싫으면 또 양순이를 째려보다가 저것들이 똑같아 똑같아...

그렇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운이 복이는 낚시터 자기 아빠의 집에 다시 보내졌고, 그 뒤로 누군가의 집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그 눈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새해가 오고

남편은 막노동을 하고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아보기 위해

여기 저기 어슬렁댔다. 그러다 미술치료를 공부하게 되었다.

평생교육원과 연구실을 다니며 정말 신나게 공부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왜 이렇게 알 수 없는 기운에 휘말려 살고 있는지

조금씩 보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운차리지 못했다.

 

익산에 있는 한 단체에서 이주여성의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에서

잠깐 자원봉사도 했다. 애초 그 일을 '일'로 하고 싶었지만

그 곳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나를 받아들이기 껄끄러워해서

잠깐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미술지도를 해주고(사실 두세차례밖에 못했으니

지도를 해줬다는 것은 참 미안하고 어정쩡한 말이다.)

같이 놀아주었다.

남편은 전국 이곳 저곳으로 일을 하러 다녔고

나는 낮에는 그나마 인간답게 살았지만

저녁이 되면 철저히 혼자가 되었고 술에 만취하면 아파트 복도에서 저 아래

1층을 보며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 한 십층은 넘어야 되겠구나'

날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술김에 몇번은 죽을 뻔 했다.

 

그러다가 덜컥,

아기가 생겼다.

양순이와 우리들의 행복하고 슬프고 가여운 시간은 여기까지 였다.

아기가 생기자마자 나는 그동안 양순이와의 모든 시간은 뒤로한 채

양순이를 시댁에 보내자고 남편에게 제안했다.

시댁에서는 양순이를 싫어했고 양순이를 키울 누군가에게 보낸다고 했다.

 

아기도 생명이고 양순이도 생명인데...

아기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양순이를 그렇게 버렸다.

 

나중에 시아버지에게 들으니 양순이는 모악산 뒷자락에 사는

어떤 농부의 집에 보내져서 다른 숫컷 발바리 두마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했다.

 

핸드폰에 찍힌 양순이의 사진을 지울 수가 없다.

핸드폰 화면이 고장나서 폴더를 열면 화면이 어두워지지만

핸드폰을 바꿀 수가 없다.

아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울한, 잊고 싶은, 가엽고 불쌍한 내 기억을

그렇게 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위안이 된다.

 

피부병때문에 비싼 사료를 먹고 특이한 샴푸를 썼다.

귓속에 약을 발라야 해서 목도리처럼 넓게 두르는 챙(?)과 입마개와

약, 샴푸, 가위, 임신했을 때 먹었던 칼슘제, 양순이가 좋아했던

과자 ... 아직도 서랍에 그냥 있다.

고물고물 기어다니고 뽈짝뽈짝 뛰는 사랑이를 보면

양순이 생각이 더욱 난다.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억들..

 

양순이가 살아있다면 아프지 않고 잘 먹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서

넓고 넓은 산에서 맘껏 자유롭게 다니며 살기를.

죽었다면 다시 우리가 어디에선가,  꼭 이세상 아니어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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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의 언니-양순이

딸 사랑이 전에 또다른 딸이 하나 있었다.

 

세살 된 발바리인데 남편과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우리 셋은 같이 살았다.

2003년 봄에 남편(당시는 동거남)네 집에 갔다가 아침산책을 하던 중

새 파는 가게를 우연히 지나다가 구경이나 하자고 들어갔다.

그런데 주인 아저씨 친구가 맡겨놓았다는 강아지들이 종이상자 안에 있었다.

꼬물거리는 강아지들 대여섯마리는 우리 눈길을 쏙 잡아끌었다.

태어난 이,삼주일 정도 지났다는데 보송보송하고 작은 것들이

얼마나 이쁜지 헤벌레 바라봤다.

한참 고물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정많은 남편은 그 중 한마리를 돈을 주고 데려왔다.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마트 앞에서 나는 물건을 사고 나왔는데 나를 기다리던

남편이 이름을 지었단다.

그 당시에 시골소녀상경기? 뭐 그런 드라마가 유행했는데 장나라와 장혁이 주인공인

드라마였다. 가난하고 배운것없는 양순이(장나라)가 돈많고 거만한 장혁과 만나

잘~된다는 뭐 그런거였는데 마트 앞에서 어떤 애완견(말그대로... 염색과 치장, 옷으로 감은)

을 데리고 가던 아줌마가 "그 강아지 품종이 뭐예요?" 그러더란다.

남편은 "발바리래요~"대답했는데 아줌마는 말이 끝나기 전에 총총 사라졌다.

이름있는 애완견이 아니어서 서러움 받지 말고 양순이처럼 힘차게 잘 살아라~는

뜻으로 그 강아지는 양순이가 된 거였다.

집에 오는 길에 양순이의 집과 밥그릇, 샴푸, 빗, 사료 등 한살림 사왔다.

 

그때에는 마당과 옥상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을 때여서 이 녀석 엄청 신났다.

개 한마리 키우는게 아이 하나 키우는 것 못지않다는 걸 강조했고

똥오줌은 누가 치우냐, 목욕은 어떻게 하냐 뭐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남편은

그저 자기가 다 한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아무튼 양순이는 그 가게에서 엄청 얌전한 강아지였는데 형제들에 치인 탓이었는지

우리와 함께 살면서는 온갖 말썽을 다 부렸다.

 

(그런데 밖에서 키울 생각은 왜 못했을까. 곰곰...)

 

오늘은 여기까지만..히히

울 애기 사고치려고 한다...뭘 해도 예쁜 내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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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점이...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잘도 가는 시간.

컴이 고장났다. 바이러스 몽땅 먹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을 2주나 방치하다가

몇일 전에 치료했다.

미안타..부려먹을 때는 마구 부려먹고는...

 

딸 사랑이가 어느새 40주가 지났다. 나와 만난 지 벌써 80주.

몇년 전 원치않는 임신으로 두 번의 수술을 했던 나는 아기가 덜컥 생기자

두려움에 몸둘바를 몰랐다.

이번에는 잘 키우자 뭐 그런 생각과 아기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뒤죽박죽 되었다.

 

초음파로 본 5주의 아기는 아주 작은 점이었는데 이전에 수술하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더이상 작은 점이 귀찮은 혹처럼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한 때 내 몸에 깃들었던 작은 아이..예리한 쇳덩어리에 잘려나갔을 작은 것.

이번에는 안돼...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임신 사실을 모른 채 전날까지 술을 잔뜩 마셨던 나는 아기가 배 밖으로

나올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렸다.

임신 당시 나는 무기력과 절망속에 빠져 있었고 날마다 술로 시간을 보냈다.

낮에는 공부방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는 혼자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밤 9시나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 필름이 끊긴채 잠이 들었다.

남편은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어서 내가 이렇게 망가져 살고 있는지 몰랐다.

날마다 기억을 잃고 살다보니 혹시나 내가 술취해 있어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

임신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착란 증세까지 있었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난 후 혈액형 검사 순간까지 불안감으로 나를 잠식했다.

임신과 출산, 사랑이 성폭행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 세상에서

섹스와 성폭행이 동일시되는 이 세상에서 성폭행의 경험을 갖고 있는

내게는 그 불안감이 공허한 것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아무튼 작은 점만한 아기가 내게 오면서 내게는 커다란 변화들이 찾아왔다.

(계속)

참, 41주(10개월)에 접어든 지금 사랑이는 11kg, 76cm의 건강한 아기로 자라고 있다.

손가락 발가락 모두 정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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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빼앗은 집의 평화1-층간소음

이 아파트에 이사온 지 어언 2년하고도 1개월이 지났다.

그 전에는 단독주택 2층, 1층에서 살았다.

처음에 살던 2층 집은 너무 덥거나 춥거나 보일러가 겨울이면 고장나거나 했다.

그 다음 살던 1층 집은 화장실이 바깥에 있어

추운 겨울이나 장마철에 화장실에 가려면 잠을 깨기 일쑤에,

비오는 날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화장실 다니려면

화장실 전등 스위치가 낡아 전기를 먹곤 했다.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에는 전세금 없다고 배째라는 집주인때문에

남편도 나도 술만 부어대고 날마다 사정했다.

그러다 아파트~ 아파트~ 노래를 불렀고 결국

이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러나 이 아파트의 기억은 그리 좋지 않다.

층간소음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은 복도식 5층 짜리 집.

이 아파트는 400세대가 사는, 주로 저소득층에

젊은 부부에, 잠시 살다가 다시 이사가야 할 사람들이 많다.

6층에는 현대자동차 생산직에 근무하는 남자와, 그 부인인 여자,

그 자식들인 딸과 아들 이렇게 넷이 산다.

처음에는 무슨 천둥번개가 치는 줄 알았다.

창을 열면 날만 개운하다.

밤이고 낮이고 둥둥둥~ 퍽~드르럭~퉁 온갖 종류의 소음이 들려왔다.

편두통과 정서불안 같은 증상이 생겼다.

참다못해 한달이 지난 12월에 6층에 올라가서

"너무 힘들어서 병원에라도 가야할까보다"고 했다.

여자는 5살과 9살 남자, 여자 아이가 있으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시끄러우면 전화하란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더 심각해졌다.

그 집 여자가 한번은 "혼자 사세요? 남자 없어요?"

그러는 거였다. 참 어처구니없다.

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9시에나 들어오는 남편에게 얘기해봤자

공감은 커녕 나만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다.

그들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며 가봤자 헛수고라는 것이다.

그들보다 남편을 더욱 미워했다.

전화를 해도, 올라가봐도 서로 기분만 나빠진 채

더욱 시끄러워졌다.

그게 2년이다.

 

작년 8월 임신 3개월부터 아기낳을 때인 올 3월까지

그 스트레스는 말로는 다 못한다.

아기 엄마가 그러면 안되지..그건 소용없는 메아리일뿐.

 

그러다 3주 전에 정말 참을 수 없이 시끄러웠다.

죽이고 싶었다. 늘 그들이 한꺼번에 탄 자동차가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등

저주를 퍼부었지만 그 날은 정말 내가 무슨 일을 낼 지 몰랐다.

전화를 했다. 조카들이 놀러 왔단다.

나는 아무 일도 못했고 불안해서 왔다갔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가도

가슴이 벌렁거려서 살 수가 없었다.

아이를 안고 있다가 폭발했다. 한번도 그렇게 큰 소리를 내본적이 없는데..

욕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이 전화를 하고 올라갔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더란다.

내가 올라가면 단 한번도 그런 말을 한적이 없는데...

또 하나. 남편이 그 집 남자와 얘길 하자고 해서 복도에서 얘기하는데,

그 남자 첫 마디, "저는 현대자동차에 근무합니다."였다.

그래서?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대기업 노예로 사는게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인가??

암튼. 그동안 내가 화만 낸 것은 아니다. 집에서 차마시자고 연락도 해서

얘기도 해보고 올라가서 차도 마시고..

별별 짓 다 해봤다.

현대가족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여자, 만날 때마다 자기 남편의 연봉이 많아서 손해보는게 많다는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는다. 가엾다.

 

조금 전, 엄청 뛰어다닌다. 침대에서 뛰어 내리고 소리지르고 이 작은 평수 아파트에서

백미터 달리기라도 하는 것만 같다.

아이들은 뛰어 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적어도 나름의 질서가 필요하다.

 

이제는 아파트가 싫다. 땅을 밟고 살고 싶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먹이용으로 사육되어지는 닭들의 집 닭장이나

투기꾼, 자본가의 필요에 의해 구획, 정리되어지는 우리들의 집 아파트나

이건 너무 일방적이다.

 

편리함은 덫이다. 자본의 덫. 남성주의의 덫, 국가주의의 덫.

누구나 전기, 가스, 물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편의를 누려야 한다.

전기세 못내서 단전된 가구가 수백만 가구에 이른다는 것이나

비싼 기름값때문에 전기장판에서 자다가 불에 타죽은 노인들이나

비닐하우스에서 자다가 불에 타죽은 아기들의 얘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용인되는, 어쩔수 없는 가난 빈곤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상황은

어떻게든 뒤집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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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어제밤 우리 딸 사랑이를 재우고는 나도 좀 쉬어볼까 하는데 남편이 저녁을 조금밖에 먹지 않아 배가 고프단다. 누가 저녁 조금 먹으래? 하려다가 배가 많이 고파서 급하면 짜장면을 끓여먹고 좀 기다릴 수 있으면 국수끓여줄테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무 소리 않고 그냥 잔다. 그게 밤 10시 반이다.

눈좀 붙였다가 잠이 오지 않아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작은 방문을 부시시 열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남편 왈, "난 또 국수 끓이는 줄 알았네"

'아,거참 뭐냐고...아무소리 않고 잠만 잘 땐 뭐고 갑자기 11시가 넘어서야 국수 않끓였다고 입이 대자로 나와서리 지랄이야.' "난 자는 줄 알았지. 대답이 없길래. 국수 끓여? 이 밤에?"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투덜투덜.

진작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이지, 배고프면 국수 끓여 바치고 떡복기 해 바치는 무슨 자판기인줄 아시나.

 

참 절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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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글

아기를 낳고 두달쯤 뒤였나, 아기를 재우고서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했다. 처음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냥 이것저것 쓰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는데 웬걸 그것도 작은 둥지라고 뒷감당이 필요한 거였다. 날마다 들어가서 글쓰기란 애초 불가능했고 어쩔땐 한달에 한번이나 할까 말까 했다. 시간이 나면 잠자기 바쁘고 또 기저귀빨래 하기 바빴으니. 이제 시간을 좀 내어 보련다. 하고픈 말도 하고 말야.

사는 꼬라지가 이게 뭐니 싶다. 잘살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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