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왕곡마을을 둘러보고 해안길을 따라 작은 항구들을 차례로 지나다(2010년 6월 23일)

 
왕곡마을은 남달랐다. 비교적 규모가 큰 읍성마을들과 달리 작고 소박한 마을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한 집에 어울려 있는 모습에. 요란한 시설들도 없고 되레 변변한 안내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게 없으니. 적당히 나무그늘 아래 자리 잡고 앉아 책도 읽고 쪽잠도 자면. 길을 떠나기 쉽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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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는 큰 길을 버리고 샛길로, 동네 길로 접어드는데. 왼쪽으로는 송지호가 햇살을 반짝이며 일렁이고. 오른쪽으로는 고만고만한 텃밭이며 논두렁이 따라온다. 또 사람 그림자는커녕 개짓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은 목덜미로 흐르는 땀을 말끔히 식혀주니. 이거야 말로 숨은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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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렇게 오붓하게 걷고 나니 이번엔 쪽빛 바다가 기다리고 있는데. 백도라는 곳에서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소나무 밑 평상에서 꿀맛 나는 쪽잠도 자고. 교암이라는 곳에서는 맛난 김치찌개로 출출한 배를 채우고 바로 옆 천학정 바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기도 하고. 또 아야진항에서도 한 낮 햇빛을 피해 쪽잠을 잔 후 청간정에 들러 수평선만 바라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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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저 철조망보다 마음에 새겨진 철조망이 더 얽혀있겠건만. 어디나 경치 좋은 곳이면 바다를 가로막고 서 있는 철조망이 눈에 자꾸만 거슬린다. 그리고 여기저기 파 놓은 참호에. 초소와 군인들. 대전차 방호벽까지. ‘천안함 침몰’을 호기 삼아 전쟁 불사를 외치는 이 정권 아래서는 저 철조망이 더 튼튼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단 생각에. 또 난데없는 전쟁 드라마와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있으니. 이건 ‘6.25’를 상기하며 한판 붙어 보자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일까라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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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대로 머물 수만은 없어 쉬엄쉬엄 다시 길을 나서는데. 속초를 앞둔 봉포항에 이르러서는 무거워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다행히 싹싹하면서도 정겨운 민박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 동쪽 바다에선 보기 드문 저녁노을도 보고. 걷기여행 중 처음으로 밥도 해 먹으니. 기분만은 밤을 새도 모자란데. 아까부터 무거워진 몸과 마음 때문에 겨우겨우 허기만 때우고는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진다.     
 
둘째 날, 등대도 올라가고 갯배도 타고, 속초를 걷다(2010년 6월 24일)
 
늦은 아침에 커피까지 타 마시고 나니 그새 9시가 훌쩍 넘는다. 한 달 전만해도 이 시간이면 딱 걷기 좋은 날씨이었겠지만. 지금은 내리쬐는 햇빛이 벌써부터 심상치가 않다. 애초에 12시부터 3시까진 무조건 쉬기로 했으니. 오전에 걸을 수 있는 시간은 채 3시간도 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으면 땡볕에 걸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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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시내에 접어드니 기껏 한 시간 남짓 걸었나. 하지만 벌써부터 목덜미가 뜨끈뜨근하다. 잠깐 속초 등대에 올라 땀도 식히고 등대도 구경하니 다시 걸을 힘이 나긴 하는데. 이번엔 배가 ‘꼬르륵’. 색다른 먹을거리를 찾아 서둘러 갯배에 오르는데.
 
모 방송국 프로그램 출연진이 거의 도배가 되다시피 한 아바이마을은 이런저런 북녘 음식들이 입맛을 당기는 것 빼곤. 이방인, 아니 잠시잠깐 지나가는 이의 헛된 생각이겠지만. 조만간 놓일 다리와 함께 옛 추억이 사라지지나 않을런지.
 
여기까지 와서 대형 마트에 간다는 게 조금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한 낮 더위도 피하고 세 시간 남짓 책도 볼 수 있다는 유혹에. 애들 놀이방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단편소설도 하나 읽고. 방전된 충전지를 대신할 건전지도 하나 사고. 모처럼 이것저것 눈 구경도 하니. 여전히 뜨겁긴 하지만 아까보단 조금 낫다.
 
 
 
 
 
 
 
바닷가에 왔으니 해수욕은 아니더라도 발은 담가야겠는데. 마음 급한 피서객들은 벌써 수영을 즐기기도 하고. 바나나 보트에 몸을 싣고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외옹치항 못 미쳐 이름 모를 해변가에 신발이며 양말을 벗어들고 바닷물에 뛰어드니. 목덜미며 등 뒤에 흐르는 땀이 금세 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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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항구를 넓히느라 번잡스런 대포항에 이르니 번잡스런 만큼이나 사람도 참 많다. 그래도 그만큼 또 싱싱한 활어들도 많으니 쉬엄쉬엄 배를 채우기에도 딱 좋은데. 잠깐만 쉬었다 간다는 게. 벌건 대낮에 소주까지 곁들인 회 한 접시. 비릿한 바다 냄새, 어깨를 연신 부딪치는 사람들, 시끌시끌한 포구 모습에 술이 술술 들어간다. 
 
결국 뉘엿뉘엿 설악을 넘어가는 해를 오른편에 두고 겨우 삼십분 남짓을 더 걷질 못 한다. 그런데 가만, 여기가 어딘가 보니. 지난 번 느닷없이 달려와 바다구경을 하고 돌아갔던 물치항. 어째 낯이 익다, 싶었다. 그러나저러나 도로 시내버스를 타고 속초로 되돌아가니. 이거야 원. 술기운인지 노독인지. 몸이 천근만근이다. 겨우겨우 춘천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오르니 눈이 스르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지경이다. 
 
* 세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첫째 날은 왕곡마을을 들러 봉포항까지 약 19km, 둘째 날은 갯배도 타고 낮술도 마시며 느긋이 물치항까지 17km를 걸었다.
 
* 가고, 오고
두 번째 여행과 같은 방법으로 가고, 왔으니 그때를 참고.
 

* 잠잘 곳   

당분간 잠잘 곳 걱정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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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4 17:01 2011/12/2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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