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첫째 날, 꽃보다 할매, 할배(2013년 10월 5일)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큰 화제였던가. 할배들에 이어 누나들까지 나왔으니. 호감 가던 사람이 만든 거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대기업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점. 굳이 돈까지 안 줘도 몇 번씩은 나다닐 만치 돈 깨나, 시간 깨나 있는 연예인 할배들이 나온다 해서 마땅찮았다.
 
그래도 한두 번은 봤던 것도 같은데, 통 기억에 남질 않는다. ‘꽃보다 할배’라는 말을 만든 나PD에겐 미안하지만. ‘꽃보다 할배’들은 그들이 아니란 생각이 내내 맴돌았기 때문일 듯. 모처럼 걷기여행에 나섰던 오늘도 마찬가지. 이 세상 정말 꽃보다 아름다운 할배들, 할매들은 딴 곳에 있음을 알았으니. 
 
일단, 학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출출하다. 지도를 보니 면사무소까진 마땅히 요기할 만한 곳이 없어 보인다. 가방에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넣어오긴 했어도, 일단은 식후경이다. 게다가 높은 하늘, 뭉게구름 사이로 가을 햇볕이 따갑다. 밥도 밥이거니와 아무리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찌감치 벼 베기가 끝낸 논 한 가운데 우뚝 솟은 굴산사 당간지주는 보물치곤 좀 허술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듯하다. 달랑 안내문 하나가 전부니. 그렇다고 요란하게까진 필요 없겠으나. 이웃한 곳에 굴산사지와 부도, 석불좌상 등을 엮어낼 필요는 있어 보인다. 단순히 표지판만 세워놓는 걸 넘어서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스토리텔링인가 뭔가도 있으니.
 
바우길을 걸으며 한 시간 넘게 아스팔트길을 걷는 건 처음이다. 포도, 사과, 복숭아 과수원 들을 차례로 지나 널따란 양배추 밭 끝 금광초교까지. 발바닥이 다 후끈하다. 아무래도 잠시 쉬었다 가야지. 좀 더 가면 솔 숲길이니 내처 걸을 수도 있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 모르겠지만. 신발부터 벗고, 발 쭉 뻗고 드러눕는다.
 
교전교를 지나 농로를 따라 5분이 넘게 딴 길을 걸었다. 분명 숲길이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 이런 아스팔트길에서 왕복 10분길은 치명타다. 숨을 고르고 다시 걷는데, 이번엔 알림판 때문에 또 헤맨다.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제 길을 찾았을 터인데. 요상하게 한 길로 난 곳엔 표시가 잘 돼 있는데 갈림길엔 안 그렇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정감이마을 등산로에 접어드니 구름이 많아진다. 나무그늘 하나 없을 땐 해가 계속 등 뒤에서 쫓아다녔는데. 솔숲에 구름이라, 영 날씨가 그렇다. 그래도 딱딱한 길을 벗어났으니 발걸음만은 가볍다. 키 작은 소나무 사이로 길이 한참 이어지는데, 머리 위 송전선만 없었으면 금상첨화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밀양에 들어설 송전탑 아래선 전기 없이도 등이 켜진다고 한다. 대도시에서 대량 소비하는 전기 때문에 세워질 거대한 탑. 결코 우리 세대에 처리할 수 없는 핵폐기물을 전제로 해야만 하는 그 송전탑. 지금 머리 위에 있는 저 송전선은 몇 kV일까. 윙윙, 듣기에도 저리 소름이 끼치는데. 밀양은 오죽이나 할까.
 
누군들 얼마 남지 않은 삶, 한량하게 유람이나 하고 싶지 않을까. 매일 제 무덤이라 파 놓은 구덩이로 올라가는 할매들. 제 목멜 동아줄을 다시 묶고 또 묶는 할배들. 자식들, 손주들이 살 세상엔 핵폐기물을 남길 수 없다고. 한 평생 일군 땅과 집에서 떠날 수 없다고 외치는 그들이 새삼 ‘꽃보다 할매.할배’란 생각이 든다.
 
송전선 따라 난 산길을 한참 걸어 강동면사무소에 도착하니 때 마침 버스가 온다. 허겁지겁 올라 어디까지 가는 버스인가 하고고 보니, 바로 집까지 간다. 그제야 맥이 탁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는데. 그렇게 잠깐 졸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내릴 때다. 멀리 대관령 너머로 빨간 노을이 진다. 오늘 ‘꽃보다 할매, 할배’들은 안녕할까.
 
둘째 날, 철길, 습지, 사구, 바다를 차례로 걷다(2014년 6월 6일)
 
바우길 요 몇 구간은 두 번에 나눠 걷게 됐다. 집이 가까워서인데, 학교 앞에 사는 친구들이 지각한다는 말이 딱 맞다. 일찍 나서 중간에 밥 먹고 또 걸으면 넉넉했을 길을. 늘 느지막이 걷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아마 딴 데서 기차타고 왔으면 서둘렀을 테고. 모르긴 몰라도 정동진까진 갔어도 이미 갔을 것 같다.
 
풍호연가 길도 그렇다.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걷지만. 서울서 온 친구와 점심까지 먹고도 한 참이나 더 놀다 겨우 강동면사무소에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은 길을 따지자면 동네 한 바퀴 마실가는 셈밖에 안 되고. 이제 바우길도 두어 번만 더 걸으면 끝이니. 천천히 느끼는 것도 좋을 듯싶다.
 
유월치곤, 또 곧 있으면 넘어갈 해치곤 제법 따갑다. 그래도 금방 시원한 바람을 내주는 숲길로 들어서니 좀은 낫다. 언뜻언뜻 부는 솔바람이 언덕을 오르느라 흘린 땀이며, 따가운 등이며, 목덜미를 시원하게 하니까. 조금 심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솔숲을 내주는, 바우길만이 가진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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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숲길을 지나니 이번엔 왜 풍호연가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는 길이 기다린다. 바로 바람을 머금고 있는 드넓은 연꽃 습지가 펼쳐져 있는 것. 아직은 연꽃은커녕 연잎도 많지 않지만. 바다 쪽에서인지 산 쪽에서인지 부는 바람이 호수 위 연잎들을 휘감아 도는 곳. 이만하면 이름 한 번 제대로다.

찬찬히 습지를 둘러보고 다시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나면 모래언덕이다. 헌데 사구(砂丘)라는 이름만 남았지 다른 모래사장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동해안에 무려 30개가 넘는 해안 사구 가운데 그나마 생태.경관 보존지구로 지정됐다는 곳이 이러니. 당장 보기에도 안 좋고 야생동물들이 지나기도 힘든 저 절책부터 없애던가.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비릿한 바다냄새가 나는 안인항을 휘돌아 철길을 건너면 길은 산우에 바닷길로 연결된다. 막바지에 비릿한 바다냄새 대신 코를 쥐게 하는 악취와 길을 다 차지하고 다니는 대형트럭들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바람이 불고 연꽃이 피면 꼭 다시 걷고 싶은 길. 시원한 바람이 손등을 타고 간질간질 지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열여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풍호연가길은 17.5km이다. 시작은 6구간 굴사사지길 마지막 굴산사지며 끝은 8구간 산 우에 바닷길 시작인 안인항이다. 풍호연가길은 땡볕이긴 하지만 풍호마을 연꽃 밭에 연꽃이 한창 피는 8월이나,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바닷바람에 몹시도 한들대는 10월이 좋겠다.
 
* 가고, 오고
강릉 시내버스 노선을 참고.
 
* 잠잘 곳, 먹을 곳
시작하는 곳과 끝나는 곳 그리고 풍호마을 등에 식당이 꽤 있고, 안인항 주변엔 숙박할만한 모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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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1 16:31 2015/03/3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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