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뒷간에서 책을 보면 변비 혹은 치질에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뒷간에서 나와야 하는데 책 읽기에 빠져 있다 보면 일을 그르치기 일쑤기 때문일 테지요. 그럼에도 뒷간에서 읽은 책 맛은 담배를 끊기 전 뒷간에서 피우던 담배 맛 만큼이나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변비 혹은 치질에 대한 긴장 때문인지라 늘상 읽는 책들을 가지고 들어가기에는 긴 문장만큼이나 끊기가 힘들고 긴 장(chapter)만큼이나 길기만 합니다. 그래서 여기 이 두 권의 책을 뒷간 세면대 옆 한쪽에 놓아두거나 뒷간 가장 가까운 책장에 나란히 세워두고는 합니다. 둘 다 10분 이내에 읽을 수 있는 꼭지들로만 구성돼 있어 끊기도 쉽고 다른 책들에 비한다면 가볍기 그지없어 어디든 가져가기 부담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름난 이들이 한껏 멋 내서 쓴 글보다는 옆집 아줌마, 아저씨, 누나, 동생 혹은 우리 엄마, 아빠가 살면서 느낀 점들을 아무 멋도 내지 않고 쓴 글들이 더 많아 입에, 눈에 감칠맛 나기 때문이죠. 또 춘천으로 오고 난 후 가끔, 아주 가끔씩 도지는 물갈이에 딱 맞는 처방약이기 때문이랍니다.

 

2.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사무실을 영등포로 옮기고 난 후이니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네요. 매년 받아오던 건강검진에 또 위염과 십이지장염이 발병을 했다는 얘기를 의사로부터 들었더랬습니다. 매일매일 시달리는 스트레스에 불규칙한 식사, 한 번 시작되면 삼차까진 가야 정리되는 술자리, 20년 넘게 피워 온 담배. 의사말로는 되려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당장 담배부터 끊으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거 못 끊으면 병 못 고칩니다.” 짝지와 함께 병원을 나와 약국에 들러 위장약을 사고 나오는 길에 그때까지도 웃도리 호주머니에 곤히 모셔져있던 담배를 휴지통에 쳐 넣었습니다. 오늘부터 담배 끊는다! 담배를 끊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금단현상에 손을 떨다 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손을 댔다고 하던데, 어찌된 게 금단 현상은커녕 혹여 누가 옆에서 담배를 필라치면 구토까지 나오면서 싫어지니. 모르는 이들은 참 독한 사람이다, 이 말, 저 말, 말들이 많더군요. 아무튼 그렇게 담배 냄새가 싫어지기는 했지만 딱 한 군데, 화장실에서 만큼은 싫지가 않더군요. 아니 끊었다, 생각했던 담배가 그곳에서만큼은 생각이 나는 거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3.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을 보니 그세 또 2년이 지났네요. 다행히 담배는 끊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 해 가을은 지나온 절반의 삶과 앞으로 올 절반의 삶에 대한 고민으로 마주 앉아 많은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명확한 답을 찾진 못했지만 말이예요. 그리고 그 해 가을은, 함께 다녔으면 좋았을터인데 어째 시간이 허락치 않아 혼자서 귀농학교를 다녔더랬습니다. 엊그제 명예퇴직을 한 이로부터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이까지, 생협에서 필수교육으로 이수해야했던 이들로부터 부부가 함께 손잡고 온 이들과 말입니다. 또 아주 잠깐이기 했지만서도 벽제로 화천으로(벽제는 또 혼자였는데 화천은 다행히 짝지와 함께 했더랬습니다.) 땅을 일구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귀농길잡이>, <자연을 꿈꾸는 뒷간>, <내손으로 받는 우리종자>, <흙을 알아야 농사가 산다>, <소농-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와 같은 책들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귀농학교를 수료하면서는 귀농운동본부 회원으로 가입을 했습니다. 마음을 굳힌 건 아니었지만 일단 서울은 뜨기로 의기투합한 거였죠. 지금보다는 천천히, 단순하게, 자유롭게 살기로 한 겁니다. 하지만 또 무슨 일이 그리도 많았는지 언제 귀농학교를 다녔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지냈던 어느 날, 계절이 바뀌어 눈발이 내리던 그 날, 생각지도 못했던 책 한권이 집으로 배달됐답니다.

 

4.

춘천으로 이사한 지도 그새 1년이 훌쩍 지났네요. 그동안 잘 적응했나, 싶기도 하다가 이유 없이 싸우기도 하고 또 이유 없이 짜증이 나기도 하는 걸 보니 아직은 물갈이 중인가 봅니다. 그래도 5년 전 화장실에 갈 적마다 담배 대신 사무실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낡은 책장에서 꺼내든 <작은책>과 2년 전 서울을 뜨기로 의기투합하며 귀농본부 회원에 가입하면서부터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빠짐없이 배달돼 오는 <귀농통문>이 어느새 책장 한 켠을 빼꼭히 채우고 있는 걸 보니 이제 담배는 확실히 끊은 것 같기도 하고, 무작정 서울을 뜨기도 했으니 귀농에 한 걸음 다가왔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담배는 피운 기간만큼이나 끊어야 정말 끊었다, 할 수 있고, 내 땅 한 뼘 없어도 시골로 내려가 땅을 일궈야 의기투합을 이뤘다, 할 수 있으니 아직은 아닐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잠시 뒷간에 들어가 <작은책> 혹은 <귀농통문>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처음 마음 잃지 않고 되새김질하는 것. 그것 하나면 이 물갈이, 힘들지만은 않겠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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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8 11:06 2009/07/08 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