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경내에 들어서기 전 만나게 되는 승선교와 강선루>

 

첫째 날, 해가 꼴까닥 넘어갈 때까지 정신없이 선암사로(2006년 3월 25일)

 

정말 해가 꼴까닥 넘어갈 때까지 정신없이 걷고 나서야 겨우 선암사에 도착했다. 도중에 낙안읍성에서 한 시간 정도 머물며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는 했어도 시간이 이리 많이 걸릴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덕분에 길을 걷는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고 제법 높은 고개를 두 개나 넘으면서 제대로 쉬지도 않았다. 게다가 순천시에서 만든 관광안내도가 길잡이 노릇을 해주기는 하지만 걷고 있는 이 길이 오르막길인지 내리막길인지, 얼마나 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무척이나 답답했다.

 

후에「청연」이라는 영화 속에서 다시 볼 수 있었던 낙안읍성은 마치 잘 꾸며진 세트장 같았다. 재작년 제천 어디에선가 보았던 드라마 촬영장과 역시 재작년 부안 채석강 인근에서 보았던 불멸의 어쩌구처럼. 그래도 여느 세트장과는 달리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이 있어 그런지 ‘대체 이런델 왜 구경 오는 거지?’ 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느낌을 주기는 한데 딱히 그게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휴일을 맞아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사람들을 피해 성곽만 따라 걸으며 잠깐 잠깐씩 기웃거렸는데도 한 시간이 금새 지난다. 해서 천연염색을 한 갖가지 물품들을 파는 곳에서 따가운 햇살을 가릴 요량으로 모자를 하나씩 사서 머리에 얹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읍성을 지나자마자 고개다. 관광안내도를 보니 별다른 표시가 없어 금방 모퉁이만 돌면 내리막길이겠거니 하면서 걸은 게 꽤 됐는데도 아직 한참이다.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고 발걸음은 무겁지만 내리막길에서 쉬어가자며 고갯마루까지 쉼 없이 오른다.

 

두 번째, 율치재다. 헌데 이 건 좀 전에 넘었던 고개와는 또 다르다. 아래에서 봐도 만만치 않은 높이고 경사도 가파르다. 다시 안내도를 펼쳐드는데 이것 역시 어떤 표시도 없다. 아마도 차를 타고 여행하는 이들에게는 여기가 고개인지 고개면 얼마나 높은 고개인지가 별 필요가 없겠지. 길만이 아니라 관광안내도 역시 걸어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인색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어쩌랴. 마음을 단단히 먹는 수밖에. 하지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데 이건 매 앞에 장사 없는 격이다. 차길을 벗어나 산길을 오르기도 했지만 고갯마루까지는 숨을 헉헉거리며 그렇게 한 참을 더 올라야 했다.

 

죽학삼거리까지는 줄곧 내리막길이다. 고개를 넘자 왼편으로 호수도 보이나 크기도 작고 볼 것도 그다지 없다. 다만 길 양편으로 죽(竹)이 많아 틈틈이 죽 구경에 한눈을 판다. 그러고 보니 간간이 마주했던 마을들 이름에 ‘죽’ 한 글자씩은 꼭 들어간 것 같으니 사방이 ‘竹’인가 보다.

 

선암사 입구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간지 한참이고 길게 헤드라이트를 켜고 지나는 차 이외에는 오가는 사람도 없다. 어둠 속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서둘러 묵을 곳을 찾아 나서는데 걷기여행 중에 처음 보는 찜질방까지 있어 그리 어렵지 않다.

  

       

<선암사 경내에서 만난 풍경>

 

둘째 날, 선암사 뒤깐구경과 굴목재 오르기(2006년 3월 26일)

 

오늘은 요전에 초당과 백련사를 이어주는 만덕산 오솔길을 걸었듯이 선암사와 송광사를 이어주는 조계산을 넘는 오솔길을 걸어야 한다. 거리상으로는 6.8Km밖에 되지 않으나 선암사 굴목재와 송광사 굴목재, 이 두 고개를 넘어야 하므로 오솔길을 걷는다기보다는 등산을 한다 해야 옳을 듯한데, 등산화도 준비하지 못해 걱정이다.

 

승선교, 달마전, 원통전 등을 품고 있는 단아한 자태의 선암사는 어느새 터뜨린 벚꽃과 목련들의 꽃망울들로 아름다움 그 자체다. 또 이름 모를 나무들에 돋아난 파릇파릇한 새순들은 또 어떤가.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그러다 돌담길을 걸으며 한껏 봄 내음을 맡기도 한다. 그리고 볼일이 없을지라도 세상사를 잊기에 알맞은 곳이지만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선암사 ‘뒤깐’도 둘러본다. 하지만 뒤깐은 본래의 용도보다는 사람들의 사진기와 비디오카메라 속에만 담겨지고 있어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송광사 스님들, 이제 어디서 해우(解憂)를 하실런지.

 

선암사 뒤편으로 이어진 대나무 숲과 편백나무 숲을 지나니 오르막길이다. 마음을 다잡고, 신발 끈도 단단히 조여 묶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30분도 채 안돼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내려오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조금만 오르면 굴목재 정상이라고 하는데 아래에서 보니 가파른 오르막길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시간은 충분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준비를 너무 하지 않았나 보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기를 쓰고 오르기보다는 내려갈 길을 걱정하고 있으니.

 

결국 1시간 넘게 올랐던 길을 다시 되짚어 내려왔다. 무리해서 더 가다가는 무릎과 발목이 고장 날 듯해서다. 아쉽지만 조계산 등산은 다음번으로 미룰 수밖에. 어제 하루해가 꼴까닥 넘어갈 때까지 정신없이 걸었던 길을 버스를 타고 거꾸로 거슬러 순천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서울 가는 버스는 있으려나?

 

* 다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벌교에서 낙안읍성까지는 평탄하고 한가로운 길이나 이후 선암사까지는 두 개의 큰 고개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고개 너머로는 주암호를 끼고 걷는 매우 호젓한 길이다. 벌교에서 죽학삼거리까지는 857번 지방도로를 따라 걷는다. 걸은 시간 약 7시간. 20km.

- 둘째 날 : 선암사와 송광사를 이어주는 조계산의 선암사굴목재까지 산행. 걸은 시간 약 4시간.

 

* 가고, 오고

서울에서 벌교까지는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지 않으면 하루를 그냥 다 길 위에서 보낼 수 있으니 가능하면 강남터미널에서 6시 10분에 출발하는 순천행 첫차 또는 영등포에서 07시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해야 한다. 가격은 우등고속이 26,200원, 무궁화호는 22,000원이고 시간은 열차보다 고속버스가 30분 가량 빠른데 대략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우리는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첫차를 놓치고 6시 40분에 출발하는 우등고속버스를 이용했다. 순천에서 벌교는 터미널 앞 또는 기차역 앞에서 수시로 오가는 시내버스를, 선암사에서 순천은 선암사 입구에서 출발하는 직행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 잠잘 곳

낙안읍성에는 초가집에서 체험민박을 할 수 있다. 선암사 입구는 요란한 관광지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으나 민박, 음식점 등이 다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찜질방도 하나 있다. 벌교에서 선암사까지 가는 길에는 읍성 주변을 제외하고는 음식점은커녕 변변한 슈퍼하나 찾기 힘드니 생수나 간식거리는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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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11:10 2009/05/12 11:10

둘째 날, 선소마을에서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까지(2006년 2월 12일)

 

 <방조제로 사라진 갯벌에 예당평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떠 마당으로 나오니 어제는 밤이라서 보이지 않았던 바다 풍경이 민박 집 담 너머로 가득 들어온다. 언젠간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풍경이다. 디카를 꺼내 이리저리 렌즈에 담아보려 하지만 아무리해도 다 담기지 않는다. 그저 우리들 눈으로 담아두는 수밖에. 집 밖에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뒤로 두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은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까지 가야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거리다.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때문에 선소마을을 유명하게 해준 공룡알 화석지는 구경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줄곧 바다와 나란히 이어지는 이 아름다운 길을 땅만 보고 걷을 수는 없어 군데군데 바다풍경을 보라고 놓여져 있는 의자에 앉아 푸른 바다를 바라보느라, 사진기를 꺼내느라, 걸음걸이는 자꾸 늦어진다.

 

강진에서 마량으로 이어지는 23번 국도가 이름난 해안도로라면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845번 지방도로는 이름나지 않은 해안도로다. 하지만 23번 국도가 세심정과 양이정을 오르는 길을 빼면 바다와 나란히 이어지고 있지 않아 해안도로라는 이름이 무색한데 비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야말로 해안도로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줄곧 바다와 나란히 이어지고 있으므로.

 

한참을 그렇게 바다와 나란히 걷다 해평리를 끝으로 바다와는 이제 당분간은 작별이다. 지금은 넓은 간척지로 바뀌었지만 전에는 그곳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던 해평리의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을 시작으로 이제 땅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기에.

 

해평리는 마을 입구에 나란히 서있는 돌장승이 유명한데 바삐 걷느라 구경하지 못한다. 또 당초 득량을 거쳐 예당, 벌교로 가는 길을 잡았는데, 시간 절약을 해볼 요량으로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는 넓은 간척지를 가로지르는 길로 접어든다.

 

쉬지 않고 30분을 걸었는데 아직도 들판의 중간이다. 참 넓기도 하다. 재작년 들렀던 부안의 해창갯벌도 이만큼이나 할까? 아니 더 넓겠지. 가뜩이나 세찬 바람에 난감지사인데, 갯벌과 함께 숨쉬고 있었던 엽낭게며, 콩게며, 백합이며, 조개들이 자꾸만 떠올라 싱숭생숭하다.

 

예당역 인근 골목길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식당에서 간만에 제대로 된 밥상을 마주한다. 내친김에 조성까지 가서 점심을 먹을까도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쉬지 않고 걷느라 발도 아픈데다 바람 마저 더 거세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 저녁 맘씨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 덕에 오곡밥을 먹기는 했어도 오늘 아침도 또 빵으로 때웠으니 속이 허한 게 당연하지 않은가.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는 무조건 2시까지 쉬기로 했는데 오늘은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신발 끈을 조여 묶는다. 당초 일정에서 많이 늦어져서 그렇다. 그래도 영화 속 간이역 같은 예쁜 모양의 예당역에서는 잠시 기찻길을 걸어보기도 한다. 바뿐 가운데 느끼는 여유다.

 

예당에서 벌교로 이어진 2번 국도는 걷기여행을 하면서 처음 걷게 되는 4차선 도로다. 헌데 이런 길은 겉보기에야 시원하고 넓게 뚫려있다 뿐이지 걷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좋지 않다. 질주하는 차량들을 위해 길을 냈기에 차도만 넓을 뿐이고 갓길은 매우 인색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정표 하나는 잘 정비되어 있어, 얼마나 걸어왔는지 또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 수는 있다. 하니 걸어서 여행을 할 요량이라면 4차선 이상으로 넓게 뚫린 국도보다는 지방도로를, 그리고 군도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물론 걸을 수만 있다면야 산길이나 흙 길이 더 좋다는 것은 잔소리다.

 

한참을 4차선 도로의 인색하기 만한 갓길에 바짝 붙어 걷다가, 아예 경운기가 다니는 옆길로 새기도 한다. 그래도 지루하고 힘들기는 매한가지인데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꼬막을 판다는 간판을 내걸은 상점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제야 벌교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하지만 해가 뉘엿뉘엿 산머리에 걸려 있는 걸 보니 벌교에 도착하더라도 「태백산맥」의 무대로 잘 알려진 현부자네 집, 소화다리, 철다리, 김범우의 집, 남도여관 등은 구경하지 못할 듯 하다. 아쉽지만 다음 여행으로 미뤄두는 수밖에.

 

땅거미가 조금씩 내려앉기는 해도 햇살의 따가움은 여전하다. 길에서 잠시 옆으로 비껴서 어제, 오늘 무지무지 고생한 다리를 서로 주물러 주기도 하면서 쉬엄쉬엄 걷는다. 해가 지기 전에 벌교에 도착해야 하는데.

 

 

 

* 네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수문해수욕장에서 율포를 지나 해안도로인 845번 지방도로를 따라 선소마을까지 약 21km. 걸은 시간 약 5시간.

- 둘째 날 : 선소마을에서 예당까지는 845번 지방도로를, 여기서부터 4차선 2번 국도를 따라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까지 약 28km. 걸은 시간 약 7시간.

 

* 가고, 오고

세 번째 여행 때까지와는 달리 서울에서 광주까지는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하는 첫차를 이용했다. 시간상으로는 밤에 이동하는 것 보다 세 시간 정도 차이가 났으나 전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무리하게 이동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 벌교에서 서울은 열차편이 있기는 하나 아침 9시 26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 딱 한 대뿐이라서 가까운 순천으로 나가는 것이 편하다. 순천에서는 고속버스와 열차가 자주 있다.

 

* 잠잘 곳

수문과 율포에는 숙박할 만한 곳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율포에서 득량까지는 우리가 묵었던 선소마을 이외에는 숙박 할 만한 곳도, 식사를 할 만한 곳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득량과 예당에는 모텔과 펜션이 몇 있다. 예당에서 벌교에 이르는 길은 4차선 국도로 오가는 차도 많을 뿐더러 매우 빠른 속도로 질주를 하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 식사를 할 만한 곳은 곳곳에 많은 편이며, 벌교는 숙박과 식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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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12:48 2009/05/03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