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선소마을에서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까지(2006년 2월 12일)

 

 <방조제로 사라진 갯벌에 예당평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떠 마당으로 나오니 어제는 밤이라서 보이지 않았던 바다 풍경이 민박 집 담 너머로 가득 들어온다. 언젠간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풍경이다. 디카를 꺼내 이리저리 렌즈에 담아보려 하지만 아무리해도 다 담기지 않는다. 그저 우리들 눈으로 담아두는 수밖에. 집 밖에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뒤로 두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은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까지 가야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거리다.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때문에 선소마을을 유명하게 해준 공룡알 화석지는 구경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줄곧 바다와 나란히 이어지는 이 아름다운 길을 땅만 보고 걷을 수는 없어 군데군데 바다풍경을 보라고 놓여져 있는 의자에 앉아 푸른 바다를 바라보느라, 사진기를 꺼내느라, 걸음걸이는 자꾸 늦어진다.

 

강진에서 마량으로 이어지는 23번 국도가 이름난 해안도로라면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845번 지방도로는 이름나지 않은 해안도로다. 하지만 23번 국도가 세심정과 양이정을 오르는 길을 빼면 바다와 나란히 이어지고 있지 않아 해안도로라는 이름이 무색한데 비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야말로 해안도로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줄곧 바다와 나란히 이어지고 있으므로.

 

한참을 그렇게 바다와 나란히 걷다 해평리를 끝으로 바다와는 이제 당분간은 작별이다. 지금은 넓은 간척지로 바뀌었지만 전에는 그곳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던 해평리의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을 시작으로 이제 땅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기에.

 

해평리는 마을 입구에 나란히 서있는 돌장승이 유명한데 바삐 걷느라 구경하지 못한다. 또 당초 득량을 거쳐 예당, 벌교로 가는 길을 잡았는데, 시간 절약을 해볼 요량으로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는 넓은 간척지를 가로지르는 길로 접어든다.

 

쉬지 않고 30분을 걸었는데 아직도 들판의 중간이다. 참 넓기도 하다. 재작년 들렀던 부안의 해창갯벌도 이만큼이나 할까? 아니 더 넓겠지. 가뜩이나 세찬 바람에 난감지사인데, 갯벌과 함께 숨쉬고 있었던 엽낭게며, 콩게며, 백합이며, 조개들이 자꾸만 떠올라 싱숭생숭하다.

 

예당역 인근 골목길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식당에서 간만에 제대로 된 밥상을 마주한다. 내친김에 조성까지 가서 점심을 먹을까도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쉬지 않고 걷느라 발도 아픈데다 바람 마저 더 거세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 저녁 맘씨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 덕에 오곡밥을 먹기는 했어도 오늘 아침도 또 빵으로 때웠으니 속이 허한 게 당연하지 않은가.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는 무조건 2시까지 쉬기로 했는데 오늘은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신발 끈을 조여 묶는다. 당초 일정에서 많이 늦어져서 그렇다. 그래도 영화 속 간이역 같은 예쁜 모양의 예당역에서는 잠시 기찻길을 걸어보기도 한다. 바뿐 가운데 느끼는 여유다.

 

예당에서 벌교로 이어진 2번 국도는 걷기여행을 하면서 처음 걷게 되는 4차선 도로다. 헌데 이런 길은 겉보기에야 시원하고 넓게 뚫려있다 뿐이지 걷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좋지 않다. 질주하는 차량들을 위해 길을 냈기에 차도만 넓을 뿐이고 갓길은 매우 인색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정표 하나는 잘 정비되어 있어, 얼마나 걸어왔는지 또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 수는 있다. 하니 걸어서 여행을 할 요량이라면 4차선 이상으로 넓게 뚫린 국도보다는 지방도로를, 그리고 군도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물론 걸을 수만 있다면야 산길이나 흙 길이 더 좋다는 것은 잔소리다.

 

한참을 4차선 도로의 인색하기 만한 갓길에 바짝 붙어 걷다가, 아예 경운기가 다니는 옆길로 새기도 한다. 그래도 지루하고 힘들기는 매한가지인데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꼬막을 판다는 간판을 내걸은 상점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제야 벌교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하지만 해가 뉘엿뉘엿 산머리에 걸려 있는 걸 보니 벌교에 도착하더라도 「태백산맥」의 무대로 잘 알려진 현부자네 집, 소화다리, 철다리, 김범우의 집, 남도여관 등은 구경하지 못할 듯 하다. 아쉽지만 다음 여행으로 미뤄두는 수밖에.

 

땅거미가 조금씩 내려앉기는 해도 햇살의 따가움은 여전하다. 길에서 잠시 옆으로 비껴서 어제, 오늘 무지무지 고생한 다리를 서로 주물러 주기도 하면서 쉬엄쉬엄 걷는다. 해가 지기 전에 벌교에 도착해야 하는데.

 

 

 

* 네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수문해수욕장에서 율포를 지나 해안도로인 845번 지방도로를 따라 선소마을까지 약 21km. 걸은 시간 약 5시간.

- 둘째 날 : 선소마을에서 예당까지는 845번 지방도로를, 여기서부터 4차선 2번 국도를 따라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까지 약 28km. 걸은 시간 약 7시간.

 

* 가고, 오고

세 번째 여행 때까지와는 달리 서울에서 광주까지는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하는 첫차를 이용했다. 시간상으로는 밤에 이동하는 것 보다 세 시간 정도 차이가 났으나 전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무리하게 이동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 벌교에서 서울은 열차편이 있기는 하나 아침 9시 26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 딱 한 대뿐이라서 가까운 순천으로 나가는 것이 편하다. 순천에서는 고속버스와 열차가 자주 있다.

 

* 잠잘 곳

수문과 율포에는 숙박할 만한 곳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율포에서 득량까지는 우리가 묵었던 선소마을 이외에는 숙박 할 만한 곳도, 식사를 할 만한 곳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득량과 예당에는 모텔과 펜션이 몇 있다. 예당에서 벌교에 이르는 길은 4차선 국도로 오가는 차도 많을 뿐더러 매우 빠른 속도로 질주를 하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 식사를 할 만한 곳은 곳곳에 많은 편이며, 벌교는 숙박과 식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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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12:48 2009/05/03 12:48

강진만이 오른편으로 보이는, 잠시 돌아가는 길(2005년 10월 2일)

  

<전날 머물렀던 월출산 자락>

 

갈림길이다. 영암과 나주를 거쳐 광주로 가는 길과 장흥과 보성, 그리고 벌교를 거쳐 구례로 가는 길. 앞의 길은 우리보다 앞서서 혼자 고성까지 걸었던 한비야씨가 택했고, 뒤의 길은 나중에 알게 된, 역시 혼자 길을 떠났던 까탈이씨가 또 먼저 걸었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걷기에 좋은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번갈아 가며 기다리고 있을 뿐일 터이고, 아쉬운 것은 둘 모두를 걸을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까탈이씨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기로 한다. 다만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또 뭐 그리 바쁘게 위로만 올라가야 할 이유가 딱히 없기에 강진만을 오른편을 두고 잠시 돌아가기로 한다. 누군가는 마랑향으로 이어지는 이 23번 국도를 두고 ‘횡재한 길’이라고 부를 정도로 꼭 놓치지 말기를 당부했으므로.

  

오전 9시, 강진 읍내를 벗어나자마자 해남 땅에서 한 번 맛을 봤던 <경치 좋은 길 시작>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안내판 너머에는 어떤 길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을까? 잔뜩 기대된다.

 

  

<강진에서 마량항까지 이어진 23번 국도>

 

오른편으로는 구강포 넘어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좌우로 자리잡고 있는 만덕산이 저 만치서 손을 내밀고 왼편으로는 고만고만한 산들이 머리를 내밀며 우리 앞을 나선다. 길 양옆으로는 제 철 맞은 코스모스가 줄지어 서있고, 가을바람은 등줄기의 땀을 날릴 만큼 충분하다.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쬐고 추수를 앞둔 벼들은 황금색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런 이건 횡재가 정도가 아니라 꼭 걸어야 할 길 목록에 넣어야 할 것이다.

  

오늘 길잡이 노릇은 <강진군관광안내도>가 톡톡히 한다. 첫 번째 여행 때에는 이런 관광안내도가 있는 지 몰라 걸어야 할 길, 잠잘 곳 등등을 인터넷과 여행관련 책 등을 통해 준비를 했었다. 헌데 이렇게 준비 하다보니 숙박지는 숙박지대로 따로 메모를 해야했고, 지도는 지도대로 프린트를 하던가 지도책을 가져가야 했다. 그러다 강진터미널 매표소에서 이 놈을 발견했는데 이 놈은 숙박지면 숙박지, 음식점이면 음식점, 게다가 지도까지 한 장에 모두 담고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나중에 알기는 했지만 군 홈페이지에 신청을 하면 집까지 보내주니, 우리처럼 걷기여행을 하고자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씩은 준비해야겠다.

  

칠량 면소재지를 조금 지나 길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는 「모범음식점」 금강휴게소가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만나게 된 유일한 식당이다. 낮 12시가 조금 넘었으니 요기를 채워야겠는데 역시나 5천 원에 15가지나 되는 백반이 있어 주문하기가 쉽다.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밥그릇을 비워내고는 식당 한 구석에 발을 쭉 펴고 누워 또 2시까지 무조건 쉰다.

 

세심정으로 가는 오르막길, 숨은 조금씩 가빠지는데 차에 받쳐 죽은 뱀의 시체가 눈에 들어와 갓길 바깥쪽으로 바짝 붙어 걷느라 힘이 든다. 그래도 고갯마루에서는 강진만의 넉넉함을 한껏 볼 수 있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헌데 양이정으로 오르는 길에 죽어 있는 생명이 또 보인다. 바짝 말라붙어 있어 뚜렷한 형체는 알아볼 수 없지만 이번엔 다람쥐인 것 같다.

 

월 평균 71마리, 하루 평균 2.4마리의 야생동물이 차에 받쳐 죽는다는 ‘로드킬(road-kill)’이 벌써 두 번째다. 언젠가 신문에서 2004년 말 현재 전국 도로연장이 총 10만 278km인데 반해 동물들의 이동통로는 고작 2,760m라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난다. 자기 편하자고 산, 땅, 강은 다 파헤쳐 길을 내면서도 이리도 생명체들의 길을 내는데는 인색한 것인지.

 

양이정을 뒤로 두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멀리 해안가 도로를 따라 많은 허수아비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가까이서 보니 어느 것들은 창을 쥐고 있기도 하고, 화살을 쏘는 자세로 있기도 하고, 화포로 무장하기도 했다. 또 딴 것들은 장수복을 입기도 했고, 수군복을 입기도 했고, 승복을 입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도 있고, 남자들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장면을 재연한 것이라는 안내판이 있기는 한데, 어째 만들어진 모양새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 허수아비들과 함께 어린애들처럼 장난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논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길을 걷고 있는데 이런, 지도에도 없는 해안도로를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바람에 실려오는 갯내음에 이끌려 바다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길도 확인하지 않고 걸은 것일테다. 그 바람에 구경하고자 마음먹었던 고려청자박물관이며 도요지, 청자촌, 그리고 당전부락 입구에 있다는 500여 년 된 푸조나무 등을 지나치고 말았다.

  

<가우도(駕牛導) 너머 멀리 초당과 백련사가 자리잡고 있는 만덕산이 보인다>

 

멀리 만호성(萬戶城)이 보이니 저 고개만 넘으면 마량항(馬良港)이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넘었다. 마지막 힘을 낸다. 당초 이번 걷기 여행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강진에서 관산까지 가는 것이었는데 어제 하루 월출산의 이쪽 저쪽에 자리잡고 있는 무위사며, 월남사지터며, 금릉경포대며, 강진다원 등을 둘러보느라 마량항이 마침점인 된 것이다.

 

마량항 방파제를 따라 바다로 고개를 돌리니 까막섬이 코앞이다. 하루 종일 번갈아 가며 따라오던 죽도, 가우도, 비래도, 내호도, 외호도에 이어 우리와 함께 이곳에 멈춰선 까막섬이.

 

* 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강진만을 오른편으로 두고 강진 읍내에서 칠량면, 대구면을 거쳐 마량항까지 이어지는 23번 국도를 따라 약 25km. 걸은 시간 7시간.

  

* 가고, 오고/잠잘 곳

서울에서 강진까지 교통편은 첫 번째 여행 때와 같다. 첫날 머물렀던 월출산 경포대 근처에는 민박에서부터 최근 지어진 펜션까지 다양하게 있으며, 둘째 날 걸었던 강진에서 마량항까지 23번 국도변에는 음식점은 몇 있으나 숙박할 만한 곳은 없다. 다만 마량항에는 숙박시설과 식당이 잘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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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23:16 2009/04/30 2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