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만이 오른편으로 보이는, 잠시 돌아가는 길(2005년 10월 2일)

  

<전날 머물렀던 월출산 자락>

 

갈림길이다. 영암과 나주를 거쳐 광주로 가는 길과 장흥과 보성, 그리고 벌교를 거쳐 구례로 가는 길. 앞의 길은 우리보다 앞서서 혼자 고성까지 걸었던 한비야씨가 택했고, 뒤의 길은 나중에 알게 된, 역시 혼자 길을 떠났던 까탈이씨가 또 먼저 걸었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걷기에 좋은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번갈아 가며 기다리고 있을 뿐일 터이고, 아쉬운 것은 둘 모두를 걸을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까탈이씨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기로 한다. 다만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또 뭐 그리 바쁘게 위로만 올라가야 할 이유가 딱히 없기에 강진만을 오른편을 두고 잠시 돌아가기로 한다. 누군가는 마랑향으로 이어지는 이 23번 국도를 두고 ‘횡재한 길’이라고 부를 정도로 꼭 놓치지 말기를 당부했으므로.

  

오전 9시, 강진 읍내를 벗어나자마자 해남 땅에서 한 번 맛을 봤던 <경치 좋은 길 시작>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안내판 너머에는 어떤 길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을까? 잔뜩 기대된다.

 

  

<강진에서 마량항까지 이어진 23번 국도>

 

오른편으로는 구강포 넘어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좌우로 자리잡고 있는 만덕산이 저 만치서 손을 내밀고 왼편으로는 고만고만한 산들이 머리를 내밀며 우리 앞을 나선다. 길 양옆으로는 제 철 맞은 코스모스가 줄지어 서있고, 가을바람은 등줄기의 땀을 날릴 만큼 충분하다.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쬐고 추수를 앞둔 벼들은 황금색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런 이건 횡재가 정도가 아니라 꼭 걸어야 할 길 목록에 넣어야 할 것이다.

  

오늘 길잡이 노릇은 <강진군관광안내도>가 톡톡히 한다. 첫 번째 여행 때에는 이런 관광안내도가 있는 지 몰라 걸어야 할 길, 잠잘 곳 등등을 인터넷과 여행관련 책 등을 통해 준비를 했었다. 헌데 이렇게 준비 하다보니 숙박지는 숙박지대로 따로 메모를 해야했고, 지도는 지도대로 프린트를 하던가 지도책을 가져가야 했다. 그러다 강진터미널 매표소에서 이 놈을 발견했는데 이 놈은 숙박지면 숙박지, 음식점이면 음식점, 게다가 지도까지 한 장에 모두 담고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나중에 알기는 했지만 군 홈페이지에 신청을 하면 집까지 보내주니, 우리처럼 걷기여행을 하고자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씩은 준비해야겠다.

  

칠량 면소재지를 조금 지나 길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는 「모범음식점」 금강휴게소가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만나게 된 유일한 식당이다. 낮 12시가 조금 넘었으니 요기를 채워야겠는데 역시나 5천 원에 15가지나 되는 백반이 있어 주문하기가 쉽다.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밥그릇을 비워내고는 식당 한 구석에 발을 쭉 펴고 누워 또 2시까지 무조건 쉰다.

 

세심정으로 가는 오르막길, 숨은 조금씩 가빠지는데 차에 받쳐 죽은 뱀의 시체가 눈에 들어와 갓길 바깥쪽으로 바짝 붙어 걷느라 힘이 든다. 그래도 고갯마루에서는 강진만의 넉넉함을 한껏 볼 수 있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헌데 양이정으로 오르는 길에 죽어 있는 생명이 또 보인다. 바짝 말라붙어 있어 뚜렷한 형체는 알아볼 수 없지만 이번엔 다람쥐인 것 같다.

 

월 평균 71마리, 하루 평균 2.4마리의 야생동물이 차에 받쳐 죽는다는 ‘로드킬(road-kill)’이 벌써 두 번째다. 언젠가 신문에서 2004년 말 현재 전국 도로연장이 총 10만 278km인데 반해 동물들의 이동통로는 고작 2,760m라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난다. 자기 편하자고 산, 땅, 강은 다 파헤쳐 길을 내면서도 이리도 생명체들의 길을 내는데는 인색한 것인지.

 

양이정을 뒤로 두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멀리 해안가 도로를 따라 많은 허수아비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가까이서 보니 어느 것들은 창을 쥐고 있기도 하고, 화살을 쏘는 자세로 있기도 하고, 화포로 무장하기도 했다. 또 딴 것들은 장수복을 입기도 했고, 수군복을 입기도 했고, 승복을 입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도 있고, 남자들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장면을 재연한 것이라는 안내판이 있기는 한데, 어째 만들어진 모양새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 허수아비들과 함께 어린애들처럼 장난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논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길을 걷고 있는데 이런, 지도에도 없는 해안도로를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바람에 실려오는 갯내음에 이끌려 바다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길도 확인하지 않고 걸은 것일테다. 그 바람에 구경하고자 마음먹었던 고려청자박물관이며 도요지, 청자촌, 그리고 당전부락 입구에 있다는 500여 년 된 푸조나무 등을 지나치고 말았다.

  

<가우도(駕牛導) 너머 멀리 초당과 백련사가 자리잡고 있는 만덕산이 보인다>

 

멀리 만호성(萬戶城)이 보이니 저 고개만 넘으면 마량항(馬良港)이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넘었다. 마지막 힘을 낸다. 당초 이번 걷기 여행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강진에서 관산까지 가는 것이었는데 어제 하루 월출산의 이쪽 저쪽에 자리잡고 있는 무위사며, 월남사지터며, 금릉경포대며, 강진다원 등을 둘러보느라 마량항이 마침점인 된 것이다.

 

마량항 방파제를 따라 바다로 고개를 돌리니 까막섬이 코앞이다. 하루 종일 번갈아 가며 따라오던 죽도, 가우도, 비래도, 내호도, 외호도에 이어 우리와 함께 이곳에 멈춰선 까막섬이.

 

* 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강진만을 오른편으로 두고 강진 읍내에서 칠량면, 대구면을 거쳐 마량항까지 이어지는 23번 국도를 따라 약 25km. 걸은 시간 7시간.

  

* 가고, 오고/잠잘 곳

서울에서 강진까지 교통편은 첫 번째 여행 때와 같다. 첫날 머물렀던 월출산 경포대 근처에는 민박에서부터 최근 지어진 펜션까지 다양하게 있으며, 둘째 날 걸었던 강진에서 마량항까지 23번 국도변에는 음식점은 몇 있으나 숙박할 만한 곳은 없다. 다만 마량항에는 숙박시설과 식당이 잘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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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23:16 2009/04/3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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