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마량항에서 천관산 입구까지(2005년 10월 22일)

 

강진에서 마량항에 이르는 23번 국도. 누군가는 이 길을 ‘횡재한 길’이라 했지만 실은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이름난 길로 꽤 많은 사람들이 지났다. 물론 차를 타고 지나기보다는 천천히 걸으면서 느끼기에 더 좋은 길이기는 하다. 헌데 이 좋은 길이 마량항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다시 천관산으로 향하는 길. 지번은 77번으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길.

  

지난번과는 달리 이제는 철이 지난 코스모스들과 제철을 맞은 억새풀들이 길 양옆에 줄지어 서 있다. 오른쪽으로는 멀리 남해바다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숨었다 하며 약을 올리고, 높고 파란 가을 하늘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거기에 알맞게 부는 가을바람이 걸음을 가볍게 하니, 이건 분명 또 다른 ‘횡재'다.

 

<마량에서 관산으로 가는 77번 국도 변> 

 

마량항에서 출발한 시간이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12km가 조금 넘는 거리인 대덕읍에 11시가 안 되어 도착했으니 이 속도에 몸이 익숙해졌나보다. 다만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그 흔한 주유소 하나, 음식점 하나 보이지가 않아 급한 볼일을 참아가면서 오는 바람에 길을 걷는 여유를 느끼지도, 지나치는 마을들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또 폐교를 개조해 천연염색을 하는 곳도 지났는데 이 역시 지나쳐왔다.

 

대덕읍은 제법 큰 마을임에도 마땅한 식당을 찾기가 어렵다. 대충 빵으로 때울 까도 했는데 아침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배속의 요란함이 그리 하지 못하게 한다. 다행인지 어쩐지 모양새만큼이나 맛도 그다지 좋지 않은 허름한 식당에서 주린 배를 채운다.

 

오늘은 천관산 아래에 머무른다. 대덕읍에서 천관산 아래 방촌문화마을까지는 10km밖에 되지 않아 3시밖에 안 되어서 도착했지만 이곳에는 이것저것 ‘보물찾기’ 놀이를 할 만한 것들이 꽤나 있어서 부러 일정을 그리 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숨어있는 고인돌 군이며, 길 양옆에 마주보고 나란히 서있는 남, 여 장승, 집성촌인 장흥 위씨 마을에 흩어져 있는 고택(古宅)들과 천관산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장천재()는 훌륭한 숨은 ‘보물’들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참에 하루 더 머무르며 30만평에 달한다는 천관산 가을 억새 물결도 구경하고, 산 이쪽저쪽에 흩어져 있는 문학공원, 돌탑, 문학비 등도 찾아보고, 동학농민전쟁의 최후 혈전이 치러졌던 석대들과 이 전투 이후 살아남은 농민군이 마지막 항전을 벌인 옥당리도 들러 묵도라도 올려야 할 것이나 시간이 허락지 않음이 아쉬울 뿐이다.

 

둘째 날, 천관산 입구에서 수문해수욕장까지(2005년 10월 23일)

 

어제와는 달리 읍내를 지나자마자 길게 이어진 고갯마루에 이어 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이들을 싫은 차들이 연이어 질주하는 바람에 걸음걸이가 더디다. 그래도 길가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구경에, 빨갛게 익어 가는 감나무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헌데 이 좋은 풍경 뒤로 ‘쌀 협상 무효’, ‘WTO 반대' 구호가 쓰인 대나무 깃발이 자주 보인다. 또 오가는 트럭과 트랙터에도 ‘殺農반대’ 깃발이 꽂혀 있고, 읍, 면소재지에는 어김없이 농민회에서 야적해 놓은 쌀가마들로 가득하다. 쌀 개방에 대한 농민들의 항의 표시다.

 

<한 시간 가량 낮잠을 즐겼던 관흥삼거리 쉼터에 걸려 있는 ‘WTO반대’ 깃발. 이번 여행에는 이런 깃발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용산면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수문과 율포를 거쳐 벌교로 가는 길을 걷기 위해 또 옆길로 샌다. 마량에서부터 쭉 함께 한 길을 따라 곧장 간다면 장흥읍으로 나갈 수 있지만.

 

안량우체국 앞 사거리까지는 식당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뱃속은 요란하기만 한데 뾰족한 수가 없다. 별 수 없어 사거리 슈퍼에서 늦은 점심을 빵과 우유로 때우고는 18번 국도를 따라 수문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종려나무가 열 맞추어 사열하고 있는데 색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 빼고는 그다지 볼거리는 아닌 것 같다. 허나 우리를 돌아가게 한 이유 중에 하나이니 소개할 수밖에.

 

일제시대에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로 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다 더위에 지쳐 목욕을 했더니 몸이 가뿐해지고 병도 완치되어 이후에 해수욕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수문에 도착하니 어느새 득량도(得粮島) 넘어 해가 수평선에 목을 걸치고 넘어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색다른 색과 맛을 내는 해물수제비를 국물까지 깨끗이 비워내니 짙은 어둠이다.

 

장흥으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시간이라도 때울 요랑으로 모래사장에 내려서니 까짓 하루 더 있을까, 유혹이 생기는데,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아쉬움만 남기고 차에 오른다.

 

 

* 세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마량항에서 대덕읍을 지나 천관산 아래 방촌문화마을까지 억새와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77번 국도를 따라 약 21km. 걸은 시간 7시간.

- 둘째 날 : 77번과 18번 국도로 바꿔가며, 방촌문화마을에서 용산삼거리, 안량사거리를 거쳐 수문해수욕장까지 약 25km. 걸은 시간 8시간.

 

* 가고, 오고

첫 번째, 두 번째 여행과는 달리 서울에서 광주까지는 새벽 2시에 출발하는 심야고속 마지막 편을 이용했다. 요금이 열차보다는 3,000원 정도는 더 비싸지만(무궁화 기준) 조금이라도 잠을 편하게 자면서 이동하고자 한다면 버스가 훨씬 낫다. 게다가 마량항까지 운행하는 4시 50분 직행버스 첫차도 바로 이용할 수 있다. 수문에서는 일단 장흥으로 나와야만 광주가 됐던 서울이 됐던 움직일 수 있는데, 서울행 고속버스는 하루 세 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데다가 오후 4시가 막차다. 결국 광주로 한 번 더 나와야 쉬이 서울로 올라올 수 있는데 다행히 장흥에서 광주로 나가는 차편은 꽤 늦게까지, 꽤 자주 있는 것 같다.

 

* 잠잘 곳

마량항에서 방촌문화마을까지는 대덕 읍내를 제외하고는 식사할 만한 곳이 전혀 없다. 대신 숙박은 인근 관산 읍내에 모텔과 여관이 몇, 그리고 장천재로 가는 길목에 천관산관광농원과 우리가 하루 밤 묵었던 담소원이 있다. 방촌문화마을에서 수문해수욕장까지 가는 길은 음식점은 다수 있으나 비수기에는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다. 또 숙박을 할 만한 곳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대신 수문해수욕장에는 음식점과 숙박할 만한 곳이 다양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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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23:55 2009/04/30 23:55

강진만이 오른편으로 보이는, 잠시 돌아가는 길(2005년 10월 2일)

  

<전날 머물렀던 월출산 자락>

 

갈림길이다. 영암과 나주를 거쳐 광주로 가는 길과 장흥과 보성, 그리고 벌교를 거쳐 구례로 가는 길. 앞의 길은 우리보다 앞서서 혼자 고성까지 걸었던 한비야씨가 택했고, 뒤의 길은 나중에 알게 된, 역시 혼자 길을 떠났던 까탈이씨가 또 먼저 걸었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걷기에 좋은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번갈아 가며 기다리고 있을 뿐일 터이고, 아쉬운 것은 둘 모두를 걸을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까탈이씨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기로 한다. 다만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또 뭐 그리 바쁘게 위로만 올라가야 할 이유가 딱히 없기에 강진만을 오른편을 두고 잠시 돌아가기로 한다. 누군가는 마랑향으로 이어지는 이 23번 국도를 두고 ‘횡재한 길’이라고 부를 정도로 꼭 놓치지 말기를 당부했으므로.

  

오전 9시, 강진 읍내를 벗어나자마자 해남 땅에서 한 번 맛을 봤던 <경치 좋은 길 시작>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안내판 너머에는 어떤 길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을까? 잔뜩 기대된다.

 

  

<강진에서 마량항까지 이어진 23번 국도>

 

오른편으로는 구강포 넘어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좌우로 자리잡고 있는 만덕산이 저 만치서 손을 내밀고 왼편으로는 고만고만한 산들이 머리를 내밀며 우리 앞을 나선다. 길 양옆으로는 제 철 맞은 코스모스가 줄지어 서있고, 가을바람은 등줄기의 땀을 날릴 만큼 충분하다.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쬐고 추수를 앞둔 벼들은 황금색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런 이건 횡재가 정도가 아니라 꼭 걸어야 할 길 목록에 넣어야 할 것이다.

  

오늘 길잡이 노릇은 <강진군관광안내도>가 톡톡히 한다. 첫 번째 여행 때에는 이런 관광안내도가 있는 지 몰라 걸어야 할 길, 잠잘 곳 등등을 인터넷과 여행관련 책 등을 통해 준비를 했었다. 헌데 이렇게 준비 하다보니 숙박지는 숙박지대로 따로 메모를 해야했고, 지도는 지도대로 프린트를 하던가 지도책을 가져가야 했다. 그러다 강진터미널 매표소에서 이 놈을 발견했는데 이 놈은 숙박지면 숙박지, 음식점이면 음식점, 게다가 지도까지 한 장에 모두 담고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나중에 알기는 했지만 군 홈페이지에 신청을 하면 집까지 보내주니, 우리처럼 걷기여행을 하고자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씩은 준비해야겠다.

  

칠량 면소재지를 조금 지나 길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는 「모범음식점」 금강휴게소가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만나게 된 유일한 식당이다. 낮 12시가 조금 넘었으니 요기를 채워야겠는데 역시나 5천 원에 15가지나 되는 백반이 있어 주문하기가 쉽다.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밥그릇을 비워내고는 식당 한 구석에 발을 쭉 펴고 누워 또 2시까지 무조건 쉰다.

 

세심정으로 가는 오르막길, 숨은 조금씩 가빠지는데 차에 받쳐 죽은 뱀의 시체가 눈에 들어와 갓길 바깥쪽으로 바짝 붙어 걷느라 힘이 든다. 그래도 고갯마루에서는 강진만의 넉넉함을 한껏 볼 수 있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헌데 양이정으로 오르는 길에 죽어 있는 생명이 또 보인다. 바짝 말라붙어 있어 뚜렷한 형체는 알아볼 수 없지만 이번엔 다람쥐인 것 같다.

 

월 평균 71마리, 하루 평균 2.4마리의 야생동물이 차에 받쳐 죽는다는 ‘로드킬(road-kill)’이 벌써 두 번째다. 언젠가 신문에서 2004년 말 현재 전국 도로연장이 총 10만 278km인데 반해 동물들의 이동통로는 고작 2,760m라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난다. 자기 편하자고 산, 땅, 강은 다 파헤쳐 길을 내면서도 이리도 생명체들의 길을 내는데는 인색한 것인지.

 

양이정을 뒤로 두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멀리 해안가 도로를 따라 많은 허수아비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가까이서 보니 어느 것들은 창을 쥐고 있기도 하고, 화살을 쏘는 자세로 있기도 하고, 화포로 무장하기도 했다. 또 딴 것들은 장수복을 입기도 했고, 수군복을 입기도 했고, 승복을 입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도 있고, 남자들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장면을 재연한 것이라는 안내판이 있기는 한데, 어째 만들어진 모양새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 허수아비들과 함께 어린애들처럼 장난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논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길을 걷고 있는데 이런, 지도에도 없는 해안도로를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바람에 실려오는 갯내음에 이끌려 바다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길도 확인하지 않고 걸은 것일테다. 그 바람에 구경하고자 마음먹었던 고려청자박물관이며 도요지, 청자촌, 그리고 당전부락 입구에 있다는 500여 년 된 푸조나무 등을 지나치고 말았다.

  

<가우도(駕牛導) 너머 멀리 초당과 백련사가 자리잡고 있는 만덕산이 보인다>

 

멀리 만호성(萬戶城)이 보이니 저 고개만 넘으면 마량항(馬良港)이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넘었다. 마지막 힘을 낸다. 당초 이번 걷기 여행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강진에서 관산까지 가는 것이었는데 어제 하루 월출산의 이쪽 저쪽에 자리잡고 있는 무위사며, 월남사지터며, 금릉경포대며, 강진다원 등을 둘러보느라 마량항이 마침점인 된 것이다.

 

마량항 방파제를 따라 바다로 고개를 돌리니 까막섬이 코앞이다. 하루 종일 번갈아 가며 따라오던 죽도, 가우도, 비래도, 내호도, 외호도에 이어 우리와 함께 이곳에 멈춰선 까막섬이.

 

* 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강진만을 오른편으로 두고 강진 읍내에서 칠량면, 대구면을 거쳐 마량항까지 이어지는 23번 국도를 따라 약 25km. 걸은 시간 7시간.

  

* 가고, 오고/잠잘 곳

서울에서 강진까지 교통편은 첫 번째 여행 때와 같다. 첫날 머물렀던 월출산 경포대 근처에는 민박에서부터 최근 지어진 펜션까지 다양하게 있으며, 둘째 날 걸었던 강진에서 마량항까지 23번 국도변에는 음식점은 몇 있으나 숙박할 만한 곳은 없다. 다만 마량항에는 숙박시설과 식당이 잘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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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23:16 2009/04/30 2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