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초겨을 걷기에 앞서 부석사에 오르다(2010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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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얼마나 많은 절들이 의상대사와 관련이 있을까. 지난 번 걷기 때 들렀던 낙산사도 그렇고. ‘배흘림기둥’으로 알려진 무량수전 서쪽 편에 있는 바위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신라 때 지어진 화엄종(華嚴宗) 근본도량(根本道場)인. 잔뜩 구름 낀 하늘 탓에 모처럼 나온 여행이 도무지 흥이 나지 않고. 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서야 겨우 만날 수 있는 부석사(浮石寺)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쪽이 무량수전에서부터 시작해 삼층석탑, 석조여래좌상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재를 갖고 있으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반면. 다른 한쪽은 소박한 절, 바다에 떠 있는 부석이 오히려 설화와 더 어울리나 다른 절에 가려져 있다는 점에서 꽤나 대조적인 듯하지만. 영주에 자리 잡고 있는 부석사나 충남 서산 부석에 있는 부석사나. 모두 이름도 같고. 의상(義湘)과 선묘(善妙) 사이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애틋한 사랑(?)을 창건설화를 갖고 있다는 점 모두 같다. 이쪽, 저쪽마다 조금씩은 다르고 조금씩은 윤색됐긴 하지만 이를테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의상은 지장사에서 지엄법사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정진했다. 이때 지장사 아랫마을에 살던 선묘가 의상을 흠모하게 됐는데 의상은 이를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려는 의상 앞에 선묘가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하지만 의상은 이미 출가한 사람으로 불가함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묘는 자신도 불교에 귀의해서라도 스님 곁에 머물겠다며 애원했다. 그러나 의상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며 거듭 만류했고 이에 낙담한 선묘는 배를 타고 떠나는 의상을 따라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선묘는 의상이 무사히 고국에 닿을 수 있게 대룡(大龍)이 된 것이다.”와 같은 얘기들을 말이다.
 
보름만 일찍 왔더라면 마지막 단풍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아니 다 떨어진 노란 단풍이라도 밟으며 오를 수 있었을 것을. 단풍나무고 은행나무고 잎이 남아 있는 게 없다. 하지만 늦게 온 만큼 더 고즈넉한 경내를 즐길 수 있고, 무량수전 기둥에 기대어 척척 겹쳐놓은 산등성이 너머를 오랫동안 볼 수 있었으니. 몸은 피곤하고, 또 절을 나서면 먼 길을 가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그래도 기분은 조금씩 나이진다.
 
둘째 날, 황사와 바람에 지쳐 겨우 소돌에서 멈추다(2010년 12월 4일)
 
예전엔 섬이었으나 지금은 육지와 연결된, 사시사철 송죽이 울창해 이름 붙여진 죽도(竹島)를 둘러보기 위해 등산로(?)에 오르니 엊저녁 묵었던 숙소에서 보던 바람과는 생판 다르다. 밤새 황사가 온다니 강풍이 불겠다니 하는 예보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설마 했고. 이러다 아침 내내 방구석에 있을 것 같은 불길한 마음을 떨치고 나오긴 했지만.
 
이거 심상치가 않다. 가까이 보이는 파도도 그렇고 멀리 내다보는 바다도 그렇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불어서인지 영, 바람이 세지 않을 듯한데. 바다와 가까운 산책길을 걸을 때부터 심상치 않던 게 결국 죽도정(竹島亭)에 오르는 길에 접어드니, 허걱. 자칫 잘못하면 날아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도 여기서 좌절할 순 없지. 가보는 데까지 가보는 거다. 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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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황사, 바람에 걷기가 힘들지만 바다만큼은 눈부시다> 

 
그렇게 죽도를 한 바퀴 돌고 본격적으로 길을 나서니 바람이 아까보다 더 심한 게 아닌가. 게다가 황사가 다 지나지 않았는지 목도 따끔따끔하다. 모자에 마스크, 겨울옷까지 완벽하게 바람을 막았다 싶은데도 여기저기 바람이 들이친다. 게다가 걷는 방향과 같기라도 하면 달려갈 듯 발걸음 나도 모르게 옮겨지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좀 낫지. 맞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이건 눈도 뜨기 힘들고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그야말로 난감지사다. 그래도 꿋꿋이 앞으로 나간다. 점심때가 지나면 바람이 좀 잦아들겠지, 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길이 있을 거란 짐작만 갖고 수풀을 헤치다, 또 해변을 따라난 길이 있을 거란 짐작만 갖고 을 철책을 따라 가다, 결국 건너야 할 나무다리가 철책 너머 있는 걸 보고는 되돌아오길 30여 분. 그렇게 바람 뚫고 길 헤매며 겨우겨우 남애항에 도착하니. 배꼽시계 벌써 지났고 화장실이 급해 허겁지겁 들어간 식당에 겨우 시킨 게 물회라니. 한 여름 그 많은 항구를 지나면서 거들떠도 안 봤던 걸 여기 와서 시키고 나니, 참 어이없다. 게다가 그 세찬 바람 속에 생고생을 하며 와 몸은 으슬으슬 추운데.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셈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시킨 음식이고 이미 차려진 음식이니 먹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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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한 사람은 맛나게 먹었지만 한 사람은 비릿한 맛에 수저를 통 들지 못했다. 게다가 겨우 몇 숟가락 뜬 음식이 찬 거라 길을 다시 나서니 추위가 되레 전보다 더하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바람도 아침보다 더 거세다. 아무래도 이러다 일 나겠다, 싶다. 그래 어쩔 수 없다, 싶어 발걸음을 멈추고 슈퍼에 들러 빵이랑 우유를 사들고 버스정류장에 서니. ‘소돌’이란 글자가 보이고, 다행히 강릉까지 가는 버스도 있다. 또 당초 강릉 사천항까지 걷고자 했지만. 소돌도 강릉이고 하니 다음 번 시작도 여기면 괜찮을 듯. 저만치 오는 강릉 시내버스에 주저 없이 오른다. 
 
* 여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인구항에서 강릉 주문진 소돌까지 약 10km.
 
* 가고, 오고
걷기여행 전날 영주에 있는 부석사를 들렀는데 다행히도 강릉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어 번잡스럽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주문진이나 인구항 모두 강릉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속초방면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면 되니 어느 곳에서 출발하든지 일단 강릉으로 가야 할 듯. 차 시간도 자주 있는 편이고 또 늦게까지 있으니 계획 세우는데 그리 어렵지 않음
 
* 잠잘 곳
괜한 걱정이 화를 부를 듯. 너무 많은 정보가 때론 마음을 상하게도 하니 현지에서 물어물어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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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3 09:13 2012/05/23 09:13

사용자 삽입 이미지심심한 7번 국도, 해 넘어 도착한 곳 인구항(2010년 9월 18일)

 

꼭 한 달만이다. 날씨가 좋아 걷기로 했지만 곧 추석이고. 길게는 9일 가까이나 되는 연휴인지라 길이 많이 막힐 것 같아 연휴 시작에 갈까, 연휴 끝에 갈까 고민도 됐고. 이제 막 마르기 시작한 고추도 하루, 이틀은 더 바싹 말려야 안심이 될 것 같아 어쩔까 걱정도 됐지만. 또 며칠 전부터 속도 좋지 않고 조금만 무리해도 피곤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잠만 쏟아지고 있지만. 이런 저런 일을 생각하다보면 언제 또 가려나 싶어, 이렇게라도 걸어야 운동이 되려나 싶어. 일단 가자, 새벽차를 탄다.

 

오색령을 넘어갈 때까진 썩 기분이 좋질 않았다. 또 이 이유 없이 싸우다 그리됐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꽤나 재밌었을 듯싶다. 보기엔 웃기지도 않는 걸로 둘이 싸우는 가 싶더니, 잠깐 섰다 가던 원통터미널에선 급기야 울기까지 하고. 그러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는데 뭐가 좋은지 웃고 떠드니. 지겹기만 하진 않았을테다.   

 

새벽에 나선 탓에 세 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왔는데도 양양에 도착하니 10시도 못됐다. 하루 종일 걸어 남애항이나 인구항까지 가고자 계획을 세웠는데. 둘러가고, 돌아보고 가도 대충 20km정도니 무리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느긋한 마음에 찬찬히 길을 나선다. 어딜 가도 읍내는 구경하지 않는 법인데. 터미널 주변이긴 해도 이곳저곳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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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이나 걸었을까. 전날 미리 사 놓은 김밥에 과일까지 바리바리 싸 가져와 버스 안에서 주섬주섬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 국도를 벗어나 오랜만에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호젓함을 느끼려면 아무래도 뭘 먹지 않으면 안 되겠다. 헌데 이 아침부터 밥하는 데가 있을까. 한참 휴가철이라면 걱정 없겠지만. 어딜 가나 때를 놓치면 밥 한 끼 먹기도, 하룻밤 묵어가기도 쉽지 않으니. 그래도 선사유적지 근처에 가니 아침밥을 하는 곳이 있어 청국장에 밥 한 그릇씩 뚝딱. 든든히 배를 채운다.

 

먹었으니 이제 힘을 내 길을 걸어야겠는데. 동해안 일주여행 하면 으레 떠오르는 길. 7번 국도. 하지만 그 7번 국도는 옛 명성에 통 걸맞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느리게 내려가던 그 2차선 길은 다리미질 한 것 마냥 일직선, 게다가 바다는 저 멀찍이 떨어져 있어. 걷기엔 참 재미없고 심심하기만 한데. 당분간은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힘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나. 잔뜩 구름낀 흐린 날씨지만 벌써 노랗게 패인 벼들과 울긋불긋 코스모스들이 있어, 그 보는 재미에 겨우겨우 나간다. 또 수산항과 동호리에선 등나무 아래, 쉼터 의자에서 오랫동안 이 얘기, 저 얘기 이야기꽃을 피우며 쉬엄쉬엄 가니.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한 여름 불볕더위 못지않은 햇볕을 피해 쉬었다가, 선선한 가을바람에 또 걸었다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메밀전병에 막국수 한 그릇씩 후루룩 말아먹고는 다시 7번 국도 위에 서는데. 좀 전에 걷던 지방도하고는 달리 널찍한 갓길이 있어 둘이 나란히 걸을 수도 있지만. 바람과도 같이 질주하는 차들 때문에 손잡고 걷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뒤꿈치를 보며 걷다. 하조대에 이르러서는 안 되겠다, 바다에 발 담그고 한참을 놀다. 절벽위에 선 하얀 등대 보러 삼십분 넘게 되돌아가는 길을 걷기도 하고. 이리저리 심심함을 달래보니 아까보단 낫다.

 

그래도. 기사문항을 지나고부터 다시 만난 이 널찍한 도로. 게다가 흐린 날씨 탓에 다섯 시도 안 됐는데 어둑어둑. 두 번을 갈아 타야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어찌됐든 인구항까진 가야 하기에. 열심히 걷기만 해야 해서. 참 재미없는 걷기다. 하지만 어째, 죽을 힘 다해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결국 지나는 포구마다 그저 눈길 한 번씩만 돌리고. 조금만 돌아가면 이 심심한 길을 벗어날 수 있겠건만. 자동차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걸 보며 급한 마음에 거의 뛰다시피. 다행히 조기 눈에 보이는 곳이 인구라고는 하지만. 겨우 숨 한번 돌려 쉬고 또 걸어. 겨우겨우, 강릉 가는 시외버스 표를 끊고 나니 금세 어둠이 짙게 깔리는데. 피곤함에, 배고품에, 맥이 탁 풀린다. 

 

* 다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양양 읍내에서 인구까지 약 23km.

 

* 가고, 오고  

춘천에서 양양은 한계령을 넘어가는, 홍천, 인제, 원통 등을 거쳐 가느라 시간이 다소 걸리는 시외버스를 타거나 미시령 터널을 지나가는, 중간에 들르는 곳이 없어 조금 빠르긴 하지만 속초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인구에서는 도로 양양으로 나오는 것보다는 강릉으로 가서 무정차 춘천행 시외버스를 타는 게 좋다. 양양에서보다 늦게까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주 있기 때문이다.

 

* 잠잘 곳

역시 널린 게 먹을 곳, 잠잘 곳이다. 너무 많아 탈이라면 과한 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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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7 12:10 2012/03/27 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