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뱀사골에서 오도재 아래 촉동마을까지(2006년 4월 29일)

 

남원에서 출발한 뱀사골 행 시외버스는 지리산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가만히 보니 오늘 오후 내내 걸어야 할 길이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뱀사골에서 산내까지는 지리산의 장대한 산세를, 그러면서도 푸근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큰 산 만큼이나 큰 계곡, 큰 나무들이 있어 걷기 좋은데, 때마침 입산금지기간이라 인적마저 드물다.

 

<정말 소박하고 아담하다: 실상사 경내> 

 

산사라고 하지만 절 뒤로 보이는 지리산 자락이 아니라면 산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너른 들판에 자리잡고 있는 실상사는 여느 절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찌보면 아무렇겠나 버려 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절간 풍경도 그렇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특별하게 경계 삼지 않은 것도 그렇고, 여느 절의 일주문과는 다른 일주문이 보여주고 있듯이 공동체적 귀농의 중심에 있는 것도 그렇고, 절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불거진 눈이며, 뭉툭한 코, 투툼한 입을 갖고 있는 석장승 얼굴에서 우리네 민중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렇다.

                                                                                                                               

절 구경을 마치고 오도재를 향하는데, 인월에서 시작해 이곳 실상사를 지나 함양까지 이어진 이 길이 느림의 상상력을 쏟아내고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얼마 전 실상사 인근 마을주민들은 국도건설을 반대하는 나섰으니,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땅을 무조건 파헤치는 방향으로 길을 내지 말자면서, 지금의 길을 조금만 폭을 넓혀 보행자와 자전거, 농기계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자고 했단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4차선의 길로 넓혀지거나, 산이 뚫리거나, 다리가 새로 놓이지 않고, 농군들을 위한 갓길만이 넓어지게 됐으니, 사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는 길을 내려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큰 발걸음이다.

 

오도재로 오르는 길은 1023번 지방도로는 오가는 차도 없어 무척 한적한 길이다. 오른편으로는 뱀사골, 백무동, 칠선 등에서부터 흘러온 물들이 모여 제법 큰 계곡을 이루며 따라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오랜만에 신발까지 벗고 물장난이다.

                                                                                                   

오도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드니 그새 5시가 넘었다. 당초 오도재 정상아래 촉동마을에 자리잡은 ‘아원농원’에서 머물려고 했는데 그만 연락처를 가져오지 않아 어찌해야 할지. 더구나 농원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 하루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것저것 물어볼 수라도 있으련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촉동마을까지 간다면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한참을 지도를 보며 어쩔까 하지만 답이 없다. 결국 밤길을 걷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출발이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해는 점점 짧아지고 길은 점점 가팔라 오는데 촉동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버스정류장이 있어 다음 마을이 촉동인 거는 알겠는데 당체 끝간데 없이 오르기만 하고 마을은 보이지 않는 거다. 씩씩대며 또 한참을 오르는데 인심 좋게 생기신 아저씨 한 분이 차를 멈춰 놓고는 우리를 불러 세운다.

 

“어디꺼정 가는고? 날이 지는디. 타소”

“죄송한데요. 저희는 걸어서 여행하는 중이거든요. 혹시 이 근처에 민박할 만한 곳이 어디 없나요?”

“걸어서 여글 넘는다꼬? 어허. 어째쓰까나. 어. 민박이라꼬? 일단 타소. 저 위에 올라가면 뭐가 있긴 있거든”

“예”

 

모르겠다. 일단 트럭에 오르고 본다. 헌데 이런. 코앞에 민박을 겸한 식당이 있는 거 아닌가? 다시 내릴 수밖에.

 

“아저씨 고맙습니다”

 

여기가 촉동마을인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인심 좋게 생기신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맞이한다.

 

“저 죄송한데요. 여기 아원농원이라고 혹시 아시나요?”

“아. 알죠. 우리 마을 사람인디. 거그 갈라고 허요? 거그는 어떻게 아셨지? 요그 길 따라 쭉 올라가믄 마을이거든요. 그 마을 위쪽에 아원농원이 있어요. 마을 들어가기 전 다리에서 왼쪽 길로 쭉 올라가면 되는디”

“예. 감사합니다”

 

어찌할까 잠시 고민이다. ‘방 값은 하루 밤 묵으시는 건 3만원이며 갖고 계신 어떤 물건으로도 숙박 값 지불 가능하며, 하루 4시간 품앗이에 하루 숙식제공 등 모든 수단도 환영입니다. 진보 활동을 하시는 분은 무료로 쉬어 가시길 바라며 제가 담은 술로 대접도 해드리고 싶습니다’라며 손길을 기다리는 아원농원에 하루 머물며 살아가는 이야기와 술맛을 볼까, 이것도 인연인데 여기 물레방아 산장에서 하루 머물까. 이미 해는 지고 있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결국 나중 인연을 따르기로 한다. 다만 인심 좋은 아저씨 덕에 고갯길 100여 미터를 거꾸로 걸어 내려갔다 다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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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4 00:08 2009/06/14 00:08

지리산을 넘다(2006년 4월 16일)

 

어제는 밤이 꽤 깊어서야 천은사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 일정은 몸도 마음도 무척 피곤해 웬만하면 피하려했는데 오후 늦게 서야 “또 가자!”며 나선 바람에 그리된 것이다.

 

햇살이 창문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자마자 일어났는데도 7시 밖에 되지 않았으니 해가 길어지긴 길어졌나보다. 번갈아 가며 세수를 하고 아침 뉴스를 보니 낮은 기온에 바람까지 강하게 분다고 한다. 최대한 짐을 가볍게 한다고 겉옷을 준비해오지 않았는데, 걱정이다. 신발 끈을 조여 매고 민박집을 나서니 정말 바람이 장난 아니다. 이러다 지리산을 코앞에 두고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천은사 구경이라도 하고 갈 생각으로 산길로 접어드니 한결 바람이 가셔진다. 다행이다.

 

09:08 천은사

천은사를 둘러보고 나니 출출하다. 절 입구 슈퍼, 인심 좋은 아주머니 덕에 맛난 갓김치와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비록 차를 위해 닦여진 길이지만 지리산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간다. 햇빛이 정면에서 얼굴을 내리쬐고 있어 무척이나 따갑다.

 

<지리산 하면 으례 화엄사나 실상사를 떠올리지만 천은사는 이에 견줄만 한 숨겨진 보물이다>

 

10:07 해발 600m

산 아래는 벚꽃이 이미 졌고 나무마다 파란 잎새들이 달려있지만 이곳은 이제야 새순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구불구불 고갯길을 한참 올랐지만 아직은 거뜬하다.

 

10:35 해발 700m

바람이 거세진다. 아무래도 옷을 너무 얇게 입은 것 같다. 산행을 위해 두터운 옷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가파른 오르막에 이젠 숨도 조금씩 차 오른다.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른다.

 

10:45 해발 800m

10분만에 100m를 더 올랐다. 그만큼 길이 가파르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300m만 오르면 된다’며 힘을 낸다. 평지 길에서는 콧노래도 부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지금은 둘 다 땅만 보고 걷는다.

 

10:58

아찔한 벼랑끝 굽이 길을 돌아서니 해발 900m다. 이런 길이 아니더라도 운전대를 잡는 게 무서운 우리들로서는 어찌 이런 길에 차를 끌고 갈 수 있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곳곳에 ‘이곳은 올 해 추락사고로 0명 사망, 00명 부상’ 플랑카드가 걸려있고, 어떤 것은 사고 당시 사진까지 걸어놨는데도 말이다.

 

11:13 시암재 휴게소

두 고개만 돌아서면 시암재인데 바람이 점점 거세 진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쓴 모자가 오히려 바람 때문에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시암재 휴게소에 도착하니 저만치 발아래 구례 땅이며 하동 땅이 보이는데, 어디선가 난데없이 바람에 날려온 똥 묻은 알록달록한 휴지들 덕에 경치구경은 뒷전이고 모처럼 목젖이 보일 만큼 크게 웃는다.

 

11:29 해발 1,000m

천은사를 출발한지 2시간 20여분만에 해발 1,000m에 도달하다. 하지만 기쁘기보다는 ‘무엇 때문에 이 높은 곳에까지 길을 내었을까?’라는 생각뿐이다. 남원~정령치~심원의 지리산 진입로와 달궁~성삼재~천은사의 일주도로 덕분에 노고단이 쉬이 열리기는 했지만 지리산의 생태계뿐만 아니라 조용했던 인근의 마을들까지도 덩달아 세상을 향해 열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위는 시암재에서 성삼재를 향해 바라본 모습이고 아래는 반대로 성삼재에서 시암재를 본 모습이다>

 

11:44 해발 1,100m

천 미터를 지나고 나니 천백 미터는 그저 안내판에 적힌 숫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11:55 성삼재 휴게소

드디어 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다. 멀리 굽이굽이 지나온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헌데 이곳은 봄철 입산금지에서 벗어난 유일한 곳이라 그런지 노고단으로 오르려는, 화엄사계곡으로 내려가려는 등산객들로 매우 혼잡해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요기만 하고 서둘러 달궁으로 향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13:25

일곱 번째 여행만에 드디어 전라북도로 들어선다. 작년 6월 첫 여행을 시작했으니 근 1년여만에 남도를 벗어난 셈이다. 그동안 사고 없이 이곳까지 온 것에 대해 감사해주고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또 앞으로의 여행에서도 지금까지와 같이 아무 탈 없었으라는 기원도 해본다.

 

15:20 뱀사골입구 반선마을

구례에서부터 시작된 861번 지방도로를 따라 지리산을 넘어온 길을 되짚어보니 20km가 넘는다. 평지 길이면 5시간으로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지만 꾸불꾸불한 산길을 오르고 내려오면서도 6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참 장하다. 계곡물에 발까지 담그고 시원하게 주무르며 전주로 나가는 시외 버스를 기다린다.

 

* 일곱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구례에서 시작되는 861번 지방도로는 성삼재를 지나 전라북도로 넘어가면서 굽이굽이 돌아 실상사 입구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천은사에서 뱀사골입구 반선마을까지 약 20km를 걸었다. 걸은 시간은 약 7시간.

 

* 가고, 오고

구례까지는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가 다니며, 뱀사골에서는 전주나 남원을 경유해야 서울로 올 수 있다. 뱀사골 차편은 뜨문뜨문 있는 것도 문제인데, 시간마저 제 멋 대로니 사전에 꼼꼼히 확인해야 함은 물론이고 웬만하면 버스정류장 한쪽 의자에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 잠잘 곳

천은사 인근과 성삼재 너머 ‘하늘아래 첫 동네’ 심원마을에는 민박이 몇 있으나 시암재와 성삼재 휴게소를 제외하고는 민박, 음식점이 전혀 없다. 다만 성삼재 넘어 심원마을, 달궁, 반선까지는 군데군데 휴게소를 겸한 매점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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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1 17:33 2009/05/31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