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번역한 이(문애희)는 열여섯 명의 남성 작가와 아홉 명의 여성 작가의 단편소설 40편을 아랍 사회에서 한국 사회로 내보낸다고 합니다. 마치 유수프 이드리스의 작품에서 40일 이후에 출생 신고서를 작성하러 처음으로 집 밖을 나오는 아기 엄마들처럼 말이지요. 그래요. 엮은이의 말처럼 제목부터가 조금은 낯선 <천국에도 그 여자의 자리는 없다>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 출생 신고를 마쳤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아랍, 이슬람의 역사와 사회를 소개하는 딱딱한 책들이 여럿 나오기는 했지만. 그이네들이 쓴, 그이네들의 문화와 생활양식, 관습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고등교육을 마치고 또 유럽에서의 생활을 거쳤거나 하고 있음으로 인해 어쩌면 조금은 굴절된 시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랍 문학이 첫 울음을 터뜨린 것이지요.

 

2.

처음엔 이게 맞고 저게 틀리다, 쉽게 판단했던 것 같은데. 곰곰이 따져볼수록, 또 알려고, 이해하려고 할수록 이건 잘 못된 것이다, 저건 맞는 것이다, 판단한 것이. 정해진 잣대로, 그것도 누군가의 눈으로 들여다 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와 같이 외국인에게도 베일 착용을 요구해 영공에 진입하는 순간 베일을 꺼내어 쓴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때에 따라서는 꽤나 폐쇄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느닷없이 벌어졌던 프랑스에서의 히잡 벗기기나 국제축구연맹이 최근 히잡 착용을 금지함에 따라 이란 여자 축구팀이 유스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들은.

 

혹 여성 억압과 극단적 근본주의의 상징이라는 획일화된 잣대로 ‘철퇴’를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가이 듭니다. 물론 남편이 죽도록 때려서 친정으로 가도 다시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오직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그럴께요’라는 단 한마디만을 알고 있었던 그녀(나왈 알쓰으다위 <천국에도 그 여자의 자리는 없다>), 겨우 열세 살밖에 되지도 않은 그녀를 취하기 위해 아내의 돈으로 아들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거나(푸아드 알타카를리 <사그라드는 등잔>), 아직 사춘기에도 이르지 않은 소녀와의 결혼은 2백 디나르라를 요구하는 소녀의 아버지와 백 디나르라를 되받아치는 ‘나’의 아버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흥정일 뿐(마이파 압드 알라흐만 <아니싸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이며, 형부의 아이를 학교 화장실에서 낳았던 그녀 역시 채 열네 살도 채 되지 않았다(라일라 알우쓰만 <벽이 찢어지다>는 얘기들을 읽어 내려가고 있노라면. 통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은. 또 무척이나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사회구나, 공감이 됩니다만은.  

 

3.

아랍 혹은 이슬람 사회라고 하면 거의 즉자적으로 어딘가 모르게 암울하고 그늘진, 그리고 폐쇄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물론 이런 느낌이 아랍, 이슬람 사회에 대해 이해하려 하거나 알고자 하려는 의지가 배제된 채 서구, 더 정확히는 9.11 이후 급속도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이슬람 혐오주의에 오염된 우리 언론 탓이 클 것입니다. 또 막대한 자본이 투하된 헐리웃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랍인, 이슬람인들에 대한 묘사, 여기에 덧칠된 정체불명의 이러저러한 정보들이 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랍, 이슬람 사회에 대한 왜곡된 느낌들의 배경에는 미국과 유럽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놓고 보는 이른바 서구 중심주의의 역사관 혹은 사회관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이러한 역사관과 사회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좁디좁은 우리의 지적 인식 수준과 아랍, 혹은 이슬람 사회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위한 내재적 접근을 통 허락하지 않는, 아니 시도조차 하지 않는 모습들이 이런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근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일까요. 「열린책들」에서 묶어낸 현대아랍문학선 <천국에도 그 여자의 자리는 없다>는 비록 소설이라는 문학적 시선이긴 하지만 아랍, 이슬람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라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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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1 13:42 2010/05/01 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