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기경이 기어이 일을 내고야 말았더군요.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이 자연을 파괴하고 난개발의 위험을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는 안 했다”며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개발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천주교 최고 의결기구인 주교회의가 지난 3월에 발표한 4대강 사업 반대 선언을 완전히 뒤엎은 겁니다. 게다가 정 추기경은 “4대강 문제는 토목 공사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다룰 문제지 종교인들의 영역은 아니다”라고 했고, “4대강이 올바로 개발되느냐 안 되느냐는 결과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고 합니다. 허 참, 이 정도면 이거 주교회의가 제 일도 아닌 일에 나선 셈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괜한 짓거리를 한 꼴인가요.  
 
2. 
자승 총무원장의 발걸음은 갈之자입니다. 애당초 4대강 반대에 앞장선 봉은사 명진 스님을 내쫓기 위해 ‘좌파’라는 딱지를 꺼내든 한나라당에는 입도 뻥긋 못하다가. 아니 G20을 앞두고 결국엔 쫓아냈지요. 그리고서는 예산안 날치기 때 템플스테이 지원 예산이 삭감되자 정부, 여당 의원들의 사찰 출입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냈는데요. 일부에서 돈 갖고 장난치니까 이제와 뒷북친다는 말에 또 발끈. 불교계의 정부, 여당 규탄이 예산 삭감 때문이 아니라 4대강 강행을 위해 국민과 소통을 포기하고 서민예산을 모두 삭감한 데 따른 것이라 뒤늦게 해명하고 나섰는데요. 아무리 봐도 이건, 술에 취한 사람이 제 갈 길을 바로 가지 못하고 이쪽으로 한걸음 저쪽으로 한걸음, 꼭 그 모습 아닙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3.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는 지역적이면서 지구적이란 점에서 문제의 규모가 매우 크고 복잡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로 인해 그 해결책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구요. 그렇지만 계속되는 지구환경의 붕괴 또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를 보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반면 위기의 극복을 과학기술에 의존한다는 건. 인류라는 종(種)이 무한한 물질문명을 추구함으로써 푸른 지구별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점을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지요.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유대교, 자이나교 등등의 세계 종교들은 확실히, 자연관을 형성하고 자연 속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한 시각들을 창조하는 수단이 되어 왔음(p.7)에 틀림없다는 점을 인정하다면. 생태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중요할 것 역시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경 위기, 생태 위기를 반성적으로 지적하고 해석하는 목소리들 가운데 종교 전통들이 가지는 울림은 단연코 크고 넓기 때문이지요. 또한 이 종교철학들이 비록 물질문명과 함께 커왔으나 그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삶과 세계관을 형성해오기도 했으니까요.
 
민들레책방에서 펴낸, 메이 리블린 터커와 존 A. 그림이 엮은 <세계관과 생태학: 종교, 철학, 그리고 환경>은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전통들, 세계관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에 대한, 지구에 대한 생태학적 윤리의 더욱 폭넓은 해석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런 전통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생태학적 시각-에코페미니즘, 과정철학, 근본 생태론, 생태 지리학-들에 대한 간략하지만 핵심을 짚어내는 열정 또한 보여줍니다. 다양한 전통적 세계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녹색의 시각을 소개하면서도. 근대 계몽주의의 심성을 넘어서야만 이 지구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중요한 원칙을, 아니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고집스레 얘기하면서 말입니다.
 
4. 
지난해 5월,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장, 원불교 중앙교구 교구장, 한국 기독교교회 협의회 회장,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이 “가장 선한 것은 강물입니다”라며 4대강 사업을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장 선하고 뭇 생명의 근원인 강의 마음을 생각해 4대강 사업을 중단하고 정말 어떤 방식이 이 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국민 모두를 살리는 길인지 다시 한 번 냉철하게 검토하고 연구해 줄 것을 제안’했지요. 하지만 2MB 정부는 지금까지 이 제안에 대해 검토, 연구는커녕 모르쇠, 막무가내, 밀어붙이기, 날치기로 응대했습니다. 누가 봐도 댐일 보(堡) 건설만 해도 벌써 공정률이 70%를 넘었고, 천문학적인 사업비가 들어가는 예산안을 재작년에 작년에도 날치기 처리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추기경은 주교회의 결정사항을 제 맘대로 해석하고, 아니 왜곡하고 나섰고. 총무원장은 한나라당과 2MB 정부에게 눈에 가시 같은 사람이었던 명진 스님을 내쳤으니. 아무래도 이 책, <세계관과 생태학>은 누구보다 먼저 추기경과 총무원장이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야 자승 스님의 갈之자 걸음도, 정진석 신부의 교언영색(巧言令色)도 바로잡힐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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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5 14:09 2011/02/05 14:09

1.

책을 번역한 이(문애희)는 열여섯 명의 남성 작가와 아홉 명의 여성 작가의 단편소설 40편을 아랍 사회에서 한국 사회로 내보낸다고 합니다. 마치 유수프 이드리스의 작품에서 40일 이후에 출생 신고서를 작성하러 처음으로 집 밖을 나오는 아기 엄마들처럼 말이지요. 그래요. 엮은이의 말처럼 제목부터가 조금은 낯선 <천국에도 그 여자의 자리는 없다>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 출생 신고를 마쳤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아랍, 이슬람의 역사와 사회를 소개하는 딱딱한 책들이 여럿 나오기는 했지만. 그이네들이 쓴, 그이네들의 문화와 생활양식, 관습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고등교육을 마치고 또 유럽에서의 생활을 거쳤거나 하고 있음으로 인해 어쩌면 조금은 굴절된 시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랍 문학이 첫 울음을 터뜨린 것이지요.

 

2.

처음엔 이게 맞고 저게 틀리다, 쉽게 판단했던 것 같은데. 곰곰이 따져볼수록, 또 알려고, 이해하려고 할수록 이건 잘 못된 것이다, 저건 맞는 것이다, 판단한 것이. 정해진 잣대로, 그것도 누군가의 눈으로 들여다 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와 같이 외국인에게도 베일 착용을 요구해 영공에 진입하는 순간 베일을 꺼내어 쓴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때에 따라서는 꽤나 폐쇄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느닷없이 벌어졌던 프랑스에서의 히잡 벗기기나 국제축구연맹이 최근 히잡 착용을 금지함에 따라 이란 여자 축구팀이 유스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들은.

 

혹 여성 억압과 극단적 근본주의의 상징이라는 획일화된 잣대로 ‘철퇴’를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가이 듭니다. 물론 남편이 죽도록 때려서 친정으로 가도 다시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오직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그럴께요’라는 단 한마디만을 알고 있었던 그녀(나왈 알쓰으다위 <천국에도 그 여자의 자리는 없다>), 겨우 열세 살밖에 되지도 않은 그녀를 취하기 위해 아내의 돈으로 아들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거나(푸아드 알타카를리 <사그라드는 등잔>), 아직 사춘기에도 이르지 않은 소녀와의 결혼은 2백 디나르라를 요구하는 소녀의 아버지와 백 디나르라를 되받아치는 ‘나’의 아버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흥정일 뿐(마이파 압드 알라흐만 <아니싸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이며, 형부의 아이를 학교 화장실에서 낳았던 그녀 역시 채 열네 살도 채 되지 않았다(라일라 알우쓰만 <벽이 찢어지다>는 얘기들을 읽어 내려가고 있노라면. 통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은. 또 무척이나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사회구나, 공감이 됩니다만은.  

 

3.

아랍 혹은 이슬람 사회라고 하면 거의 즉자적으로 어딘가 모르게 암울하고 그늘진, 그리고 폐쇄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물론 이런 느낌이 아랍, 이슬람 사회에 대해 이해하려 하거나 알고자 하려는 의지가 배제된 채 서구, 더 정확히는 9.11 이후 급속도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이슬람 혐오주의에 오염된 우리 언론 탓이 클 것입니다. 또 막대한 자본이 투하된 헐리웃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랍인, 이슬람인들에 대한 묘사, 여기에 덧칠된 정체불명의 이러저러한 정보들이 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랍, 이슬람 사회에 대한 왜곡된 느낌들의 배경에는 미국과 유럽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놓고 보는 이른바 서구 중심주의의 역사관 혹은 사회관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이러한 역사관과 사회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좁디좁은 우리의 지적 인식 수준과 아랍, 혹은 이슬람 사회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위한 내재적 접근을 통 허락하지 않는, 아니 시도조차 하지 않는 모습들이 이런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근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일까요. 「열린책들」에서 묶어낸 현대아랍문학선 <천국에도 그 여자의 자리는 없다>는 비록 소설이라는 문학적 시선이긴 하지만 아랍, 이슬람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라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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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1 13:42 2010/05/01 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