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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14
    역시 대표성의 문제다
    평발

역시 대표성의 문제다

 

간단한 문제다.

 

100명이 사는 동네에서 대표를 뽑는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따른다고 하자.

 

산술적으로만 보자면, 51명이 넘는 지지를 얻은 쪽이 대표가 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이 다수제의 의미인 민주주의에 부합한다.

 

그런데, 후보가 3명이라고 하자. 박빙이다. 그러면 어느쪽이든 34명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이 역시 다수제의 원리에 부합한다. 어떤 나라에선 이를 다수의 지지로 만들기 위해 결선투표제라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한다. 그래야 다수의 지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몇 해전 프랑스에서 우익이었던 국민전선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선거연합이 일어났다. 이는 결선투표제의 결과이다.

 

지난 1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지난 총선의 대표성 문제를 제기했다. 정리된 표가 바로 옆의 것이다.

 

경기 안산상록을에서 당선된 홍장표라는 사람을 보자. 전체 유권자가 11만명인데 그를 지지한 사람은 1만명 남짓이다. 유권자의 13% 지지만으로 지역의 대표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사람 뿐인가? 수두룩하다.

 

이거 이상하지 않은가? 난 이런 제도를 민주주의라 배운 기억이 없다. 다수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13%의 지지만으로 지역 대표가 되다니, 이는 민주주의의 배반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는 것'도 정치적 의사표현의 방식이라 한다. 다시말해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행위로서 유효하려면, 행위의 영향이 나타나야 한다. 고작 13%의 지지만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해놓고도 '이거 잘못되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귀찮아서이건 정치적 목적에서건 투표 당일날 집을 나서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정치적으론 '샘샘'인 셈이다.

 

이들이 적극적인 정치행위로 '귀찮아서 투표하지 않은 사람'과 구별되려면, 일단 투표소엔 가야했다. 그리고 백지로 기표함에 넣던지, 아니면 고의로 무효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 표가 적어도 13%보다 많았으면, 아니, 그런 무효표가 1위와 2위의 격차보다 컸으면 선거자체가 무의미했다.

 

결국, 어떤 의미도 없는 정치적 행위(라는 자기위안) 덕분에 13%의 지지는 '적극적 의사표명 집단의 과반수'라는 의미를 획득했다. 여기서 나부끼는 것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자들은 발언할 기회가 없다는 깃발이다.

 

이런 구도하에서 최연희가 또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가 우리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만만세!

 

나는 기권이 아니라 무효표를 조직하는 운동이, 선거 보이콧이라는 명제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만 시골 내려가 자급자족하면 세상이 바뀌나? 그리고 이 놈의 민주주의에 대한 것부터 뜯어 고치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최소한 다수제라도 어느정도 반영될 수 있는 구조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에 반면, 지속적으로 풀뿌리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하다. 하지만 풀뿌리 운동을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상정하게 되면 지는 싸움이 된다. 이는 구조의 문제다. 구조는 거시적인 작동원리에서 부터 미시적인 조작체계까지 개입해야 바꿀 수 있다.

 

개인의 각성도는, 원칙적으로, 집단의 각성도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아무리 훌룡한 민주주의자가 있어도 지역감정이, 학연/지연이 판을 치는 집단에서는 힘도 못 쓰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뭐 하자는 거냐'고 짜증이 날테지만, 적어도 난 '선거제도'를 바꾸는, 절대 만만하지 않는 싸움을 시작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게 다른 어떤 주장보다고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우선적인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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