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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권함] 뉴올리언즈는(나아가 미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추리소설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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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황금가지에서 나온 <액스맨의 재즈>라는 책에 대한 서평이다.
 
 
*자세한 책의 정보는 http://aladin.kr/p/468pY
 
 
레이 셀레스틴 (지은이) | 김은정 (옮긴이) | 황금가지 | 2015-12-18 | 원제 Axeman's Jazz (2014년)
 
 
 
 
 
 
 
 
 
 
 
1. 매력적인 구성
 

"콩플로 폴리 포 파세 우앙가"


음모가 주술보다 더 강하다는 이 아이티의 속담이, 20세기 초반 뉴올리언즈의 재즈선율에 일렁거린다. 손으로 그려진 타로카드, 피로 쓰여진 예고살인 그리고 신문사에 보낸 살인자의 편지, 이 정도면 매력적인 연쇄 살인범의 조건이 갖춰졌다. <액스맨의 재즈>는 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긴장감이 이는 전개, 3개의 축으로 이어지는 추적의 실마리, 날줄과 씨줄로 엮이는 음모는 독자에게 골치 아픈 추리의 동참을 권유한다. 간만에 긴장감을 느끼며 한장 한장을 읽어갔고, 뒷 부분으로 가면서 줄어가는 페이지를 아쉬워했다. 적어도 이 책은 추리소설만으로도 일등품에 속하지만, 흑인차별이 심했던 뉴올리언즈의 사회상에 점차 이주민들이 밀려들면서 만들어진 이주사회로서의 맨 얼굴이 지나친 감정의 드러냄 없이 담담히 그려지면서 추리소설의 매력을 넘어선다. 

시작은 장례식이다. 축제와 같이 떠들썩하게가 아니면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흑인들의 죽음이다. 재즈가 유행이지만, 정작 재즈의 주인공인 흑인들은 가게에 들어갈 수도 없고 버스에서도 지정석에서만 앉아야 했던 뉴올리언즈에 도끼 연쇄살인범이 나타난다. 이 도시는 흑인들에게 "뉴올리언즈에 얼마나 증오가 팽배한지, 자신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표적이 되는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탈리아 마피아가 주름잡고 있는 도시, 이 연쇄살인범은 금주의 시대까지 유지해왔던 뉴올리언즈의 담합을 흔든다. 연쇄살인범을 핑계로 자신들에게 협력적이었던 마피아를 견제하는 시장과 이를 반전시키려는 마피아의 음모가 엮어지지만 도끼 연쇄살인범은 이 둘을 훌쩍 넘어 이 둘의 담합이 가능했던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큰 묘미는 눈에 보이는 갈등이 개인적인 갈등을 넘어서 사회적 갈등으로 드러나며 지금의 갈등을 넘어서 그 갈등이 만들어진 원점의 폭력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이면서도 사회과학 도서의 엄밀성을 드러내는 관점은 이 책이 주는 가장 강력한 매력이다.

흑인이지만 흑인처럼 보이지 않는, 탐정사무소의 여급은 탐정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연쇄살인범을 쫒는다. 이이는 명석한 두뇌와 추진력으로 사건의 본질로 진격하지만 너무나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폭력에 직면한다. 강직하고 원칙적인 형사는 비밀임무를 통해서 마피아와 내통하고 있는 형사의 비리를 밝혀낸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직속상관이었고, 그렇게 몰아낸 덕분에 상관의 자리에 자기가 자리 잡는다. 연쇄살인범의 출현은 경찰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사례가 되고 재선을 통해서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려는 시장과 경찰 내 기득권에게 '팽' 당할 처지에 놓여있다. 더구나 백인이면서도 흑인을 사랑해 가정을 꾸렸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처럼 살아간다. 연쇄 살인범을 잡지 못하면 자신의 자리가 흔들리고, 비밀로 유지되었던 가정도 깨진다. 여기에 후배에 의해 고발됨으로서 경찰이 아니라 죄수로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이 있다. 그동안 비리로 쌓아둔 돈으로 여생을 즐기려 하나 돈을 맡아 두었던 이의 범죄로 빈손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쇄살인범을 잡아서 마피아 보스가 준다는 돈을 받아야 한다. 

2. 범인은 바로 도시 그 자체

이 세 명이 각기 연쇄 살인범의 단서를 쫒아서 얽히고 설킨다. 그러면서 각각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따라가면서 하나로 모여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뉴올리언즈 라는 도시 자체>다. 물론 구체적인 범인이 있고 그것을 사주하거나 혹은 사건을 활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드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결국 그 군상들을 둘러싼 도시가 떠오른다.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기 몇 해 전에 외국인들이 자기들 소유의 작은 농장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어. ...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에 와서 빌어먹게 척박한 땅에, 그것도 작은 땅덩이를 경작한다는 게 어떻겠나. 게다가 아이들은 배고파하는데 내내 흑인들은 훨씬 잘 먹고 잘 사는 걸 지켜보게 된거야. 그들은 이런 상황을 수긍할 수 없었고 긴장감이 조성됐네."
 
이주의 땅인 미국은 태생적으로 원래 살고 있었던 사람, 먼저 이주한 사람, 나중에 이주한 사람 간의 갈등으로 또, 원해서 이주한 사람과 원치 않은 이주를 한 사람의 갈등이 내재된 나라다. <액스맨의 재즈>는 바로 이런 역사적 기원을 찬찬히 응시한다. 그것도 가장 오랫동안 흑인차별이 남아있던 뉴올리언즈, 미국 남부에서 등장한 도끼 연쇄살임범을 매개로 말이다. 

 

3. 책을 권함

 

워낙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통에, 그것도 황금가지의 <밀리언셀러클럽>에 대해서는 신뢰를 가지고 있는 탓에 주저없이 선택했다. 안타까운 것은 책의 표지로만 보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뉴올리언즈의 전경이나, 미시시피 강의 모습이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럼에도, 그저 도끼연쇄살인범 만을 기대하고 책을 집어들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어쨌든 책을 끝까지 읽어버릴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457쪽에 루카가 갑자기 마이클로 변하는 '이스터 에그'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시카고다. 그들이 맡게 되는 사건은 알퐁스 카포네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뉴올리언즈를 떠난 두 명이 의기투합을 한다. 물론 책의 본문에 나오는 루이스는 루이 암스트롱을 떠오르게 한다. 이런 소소한 장치들도 이 책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에 신뢰를 더한다. 연초 날씨가 추워 바깥에 나가는 것이 힘들다면, 보기만 해도 습기가 가득한 뉴올리언즈의 1910년대로 가보면 어떨까 한다. 재즈와 온갖 음식들과 연쇄살인범이 있는 곳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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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성장하는 경제, 빚에 구속된 민중, 빚짐의 연대가 가능할까?_<빚의 마법>에 부쳐

최근 갈무리에서 나온 <빚의 마법>(리차드 디인스트 저,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5)은 일종의 판플렛이다. 대개의 이론서가 갖기 마련인, 기승전전의 구조 대신 명확하게 기승전결의 구조, 특히 행동의 규범으로서 실천전략을 구체적으로 고민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판플렛의 목적을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것은 영미권의 문화연구자에게서 발견되는 평범한 것을 낯설게 하고, 익숙한 것을 뒤틀어 새로운 영토를 만들려는 문법 때문인데 그래서 그런 이론적 '건너뛰기'가 익숙치 않으면 글 속에서 길을 잃기 쉽상이기 때문이다(저자 스스로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서 이 책은 첫번째로 "말에 대한 작업"임을 밝힌 바 있다). 단적으로 빚과 빚짐의 구분에서 드러나는 이중적 의미, 그리고 채권과 구속을 의미하는 bond의 용례가 그렇다. 솔직히 읽기가 쉽지 않았고, 읽는 내내 문맥과 다양한 단어의 용례 사이에서 번민 했었을 번역자의 노고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그나마 정확한 번역이 애써 읽은 책의 전달한 바를 오독하지 않도록 한다는 점은, 이 책의 첫번째 장점으로 언급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1.

2014년 12월 말로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1,000조를 넘어섰으며 올 해 상반기에만도 100조가 늘어나, 올해 1/4분기 가계부채 총액이 1,100조를 넘어섰다.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은 이미 2013년에 160%를 넘어섰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가계부채 증가율은 7.3%로 가계소득증가율 2.6%보다 3배 정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소득보다 부채가 더 빨리 늘어나는 상태다. 정부의 정책도 한 몫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정체되어있는 소득수준을 빚의 확대를 통해서 만회하는 상태가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1장을 통해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구별하기 위해 브레너, 아리기, 하비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보충하는 의견, 즉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 빚은 생산성이나 수익성의 가장 즉각적인 압박으로부터 현재의 자원들을 해방시킴으로써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57)는 이런 빚의 체계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다. 브레너가 말하는 과잉투자로 말미암은 자본간의 치명적인 경쟁체제, 서구의 성장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에 대한 아리기의 해석, 사실상 강탈에 의한 축적 체계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본질을 언급하는 하비의 논의는 공통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본의 원치않는 상태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빚의 체제는 자본이 가지고 있는 곤란함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21세기로 건너온 자본주의는 화폐를 찍어내는 힘에 대한 믿음으로 구성된 신앙체계와 흡사하다. 그리고 이런 체계는 수학적 체계로서 세계의 불평등을 확인하는 지표로서 PPP 환율체계, 지니계수, 빈곤선의 적용에서 드러나듯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드러내는 '메타포'(83)일 뿐 실제로 그런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보여주진 않는다. 적어도 부자와 가난한 자의 존재 자체보다는 그 격차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련의 방식으로는 빚짐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저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빚짐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비교적 구체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103~109).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위해서는 "부자와 빈자라는 극적인 양극단에만 집중하는 대신, 우리는 소유한 자들과 빚진 자들 사이의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110) 저자의 분석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그동안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적 축적의 특징을 분석해온 다양한 시각에서 누락된 부분으로 부채의 체계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2.

""화폐권력"이 군대나 동맹보다 더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쟁 수단"이라고 주장한"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현재적인 경제적 (전쟁) 상태를 해석하는 열쇳말로 삼는 3장은, 빚의 체제가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혹은 최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강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대전이 가지고 있는 특징, 즉 보이지 않는 명령하는 자와 명령의 복종을 시민적 의무로 응답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칸트가 말한 영구평화를 위한  '환대의 구조'는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을 통해서 "세계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144)으로 변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경제적 위기를 둘러싼 정부의 대응은 곧 전쟁 시기에 강요되는 '위로부터의 관점'을 시민들에게 내면화되도록 강요한다. 이로서 "공공영역은 끝없는 전쟁을 위해 계획되어 왔으며, 이것이 지구화된 시장이라는 영구 평화에 다름 아님이 입증될 것이다."(155) 이런 상황에서 유엔을 통해 세계 빈국의 부채 탕감을 주장한 보노는 민주적인 대표의 체계와 과정을 우회한 방식(193)으로 부채 문제를 재상품화한다. 저자는 이 책 4장을 보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보노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알면서도 빈국의 부채 탕감에 미국이 나서도록 하기 위해 침묵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탈정치화된 부채탕감의 전략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실제로 이런 강자에 의한 시혜적인 방식으로서의 부채 탕감은 때때로 위기의 원인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 정치권력에 의해 이용되어 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시절 주요 공약 중 하나가 바로 가계부채탕감이었고 이를 위해 국민행복기금을 통한 채무청산을 실시를 추진했다. 물론 중간에 성실 상환자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일각의 반론에 부딪혀 축소되었지만 부채 탕감이라는 방식이 부채를 양산하는 구조에 대한 변화보다는 오히려 그런 체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효과로 활용된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부채탕감 문제는 보노라는 대중적 인물을 통해서 회자될 수 있고, 빚짐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대신 대규모 콘서트를 통해 도덕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부시와 같은 이의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특히 그렉시트를 둘러싼 유럽 좌파의 분열과 논쟁은 소위 유로화라는 화폐체계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힘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저자가 말하는 영구평화의 수단으로서 화폐권력을 언급하면서 이를 현재의 상시적인 전쟁상태와 길항시키고 있는 면은 사실상 시리자의 등장 이후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로권에 대한 논쟁이 단순히 독일 패권에 의한 제국주의의 한 단면이라기 보다는 부채의 체계로 상호 구속된 유럽 국가들의 대안없음을 보여주는 상징과 같다고 할 수도 있겠다.

 

3.

사실 부채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4장까지 이어지고 5장부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곤란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특히 들뢰즈의 한 단장에서 시작한 5장은 빚짐의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빚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라 빚짐 자체를 적극적으로 재전유하자고 제안한다. 이를테면 "창조적 선취의 고갈과 산 노동의 흡수를 위한 빚 기계는 시간의 완전한 역능을 최종적으로 움켜질 수 없다."(226)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자본에서 벗어날 필요에 대한 신념을, 그리고 다른 유대들을 공통으로 구축하려는 욕망에 대한 신념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은 빚짐의 강요에 대한 경험에서뿐이다."(227)

 

그리고 6장에서는 맑스가 자신의 딸에게 했다는 "한스 로클"(230~231) 이야기가 다루어진다. 자세한 내용도 없이 마법사였고 돈 문제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아주 많은 모험 끝에 이것들이 항상 한스 로클에게 되돌아 오는 이야기였다는 언급이 전부인 내용을 바탕으로 빚짐의 체제를 재전유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조망한다. 그리고 맑스의 주요 저작엣서 빚짐을 다루는 세 가지 방식을 분리하여 제시한다. 하나는 초기저작에서 나오는 철학적 접근법으로 "인간 사회성의 교환의 도구들로의 점진적 소외로서 신용 및 은행 체계의 진화"(247)에 대한 부분이다. 저자는 맑스가 신용을 본질적으로 "사회적 부의 소외"(248)로 이해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외의 해소, 즉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했듯 신용체계로부터 야기되는 사회적 부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이를 재사회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맑스의 빚에 대한 두번째 견해는 좀 더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알리바이(251)에 근거하고 있다. 이를 맑스가 말하는 필연의 왕국을 넘어서는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신용과 구분되는 빚 혹은 빚짐이 가지고 있는 적극성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 "신용이, 자본이 과거와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맹렬한 몸짓으로 이해된다면, 빚은 비동기적인 것, 즉 경제적 지배에 저항하는 모든 완강한 주장의 표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252) 그러면서 마지막 요소로 자본론 3권에서 제시되는 "(고도 금융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집합적 자유의 왕국을 성취하기 위해 행사해야 할 일종의 마법의 일면을 보여 준다"(253)는 관점을 재차 강조한다. 즉, 왜 우리가 지금의 빚짐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빚짐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빚짐의 상태를 구축해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5장과 6장에서 들뢰즈와 맑스의 단편에서 시작한 이론적 탐색이 성공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들뢰즈의 말이나 맑스의 말이 가지고 있는 권위가 어떤 실천적 함의를 가진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즉, 학자로서 풀어보고 싶은 아포리아 일 수는 있으나 이런 아포리아의 풀이가 구체적인 빚짐의 상태에 속박되어 다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에겐 와닿지 않는 작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이런 약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이 바로 7장이다. 나름 실천적인 대안의 모색이라는 차원에서 쓰여진 장으로 실제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저자는 "중층결정된 역사의 복합성을 향한 실천적 지향은, 우리의 공통적 힘들을 보존하고 증대하려는 계획적인 노력을 항상 이미 거기에 있는 체제에 대한 굴복의 단호한 거부와 결합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빚들을 결속시키는 법과 깨뜨리는 법 모두를 배울 것을 요구한다."(261)고 강조한다. 즉, 빚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빚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오히려 빚짐의 상태가 가지고 있는 다른 측면을 계발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빚의 양면성에 대한 것,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은 '우애'의 국면을 발견하는 맥락이다.

 

우리는 빚을 짐으로서 도덕적 책무에 연관된다. 실제 그것이 고리대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빚짐의 상태에 '스스로 들어갔다'는 알리바이는 고리대가 가지고 있는 범죄적 특징을 압도하는 도덕적 조건을 만든다. 일단 빚을 졌다는 구속이 절대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상호간에 질 수 밖에 없는 빚짐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구상하면 개인을 넘어선 집단적인 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너와, 그리고 우리가 당신들이 서로 빚짐의 상태로 연관되어 상대방에 대한 의무감을 가진다는 것은 사회적 연대감의 중요한 공감각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7장과 8장을 통해서 제시하는 실천적인 전략의 방향은 충분히 설득력있고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이런 빚짐의 상태가 더 끈질기게 자본에 의해 포획되는 맥락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빚짐의 상태를 역전시키는 방법이 일종의 '정신적 해방'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저자가 결론부분에서 제시하는 두 가지의 측면, 소액신용을 통한 기존 은행-대출 관행과는 다른 빚짐의 유대를 형성하는 방법과 희년 정신이 내포하는 "상징적인 명부에 있는 인간의 능력들과 힘들을 부패한 체계에 정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힘들로 이해"(304)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방안이다. 이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 스스로 말했듯 유누스의 소액금융이 지속적으로 자본에 의해 포획되어 왔다는 점, 그리고 저자가 이미 지적했듯이 희년 역시도 보노가 말하는 캠페인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굳이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빚짐의 체계를 체제 내에서 반체제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잠정적이나마 기존의 빚 체계를 단절할 수 있는 '이행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아쉽다.

 

5.

물론 마지막의 언급은 이 책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범위를 무리하게 확대하여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1,000조가 넘어서는 가계부채 시대에도 여전히 개인의 파산면책 조차 도덕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는 기가 막힌 자본주의적 도덕률, 그리스 민중을 일시에 빈곤으로 밀어넣은 유로존에 대하여 끝끝내 하나의 유럽을 외치며 '그리스의 책임'을 말하는 유럽의 좌우 컨센서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책은 이런 곤란함을 정확하게 직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성있고 읽는 내내 최근까지 벌어진 상황을 되짚어 가며 생각하도록 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좀 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밀어붙여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앞서 언급한 아쉬움은 저자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며 동참한 내 스스로도 함께 고민해야 되는 부분이라는 점 역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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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괴담형 범죄에는 스티븐 킹이 딱이지

*스티븐 킹의 <미스터 메르세데스>에 대한 서평

책을 받아보고 읽은 후, 머리 속으로 한 숨 돌리고 나온 서평의 제목은 "미생 탐정의 신고식"이었고 '전직 경찰이라는 모델은 흔한 방식이다. 역으로 경찰이었던 적이 없는 탐정도 흔하다. 하지만 경찰이었음에도 경찰이었던 경험을 우회하는 탐정은 흔하지 않다. 더더구나 실제 주인공이 탐정은 아님에도 탐정 소설을 표방하고 나온 소설은 흔하지 않다.'는 메모를 달아 놓았다. 실제로 이 책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경찰인데도 경찰을 피해다닌다. 그리고 사건의 결론으로 말미암아 이 전직경찰은 탐정면허을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호한 상태에서 끝이 난다. 결국 미생이다. 탐정소설은 커녕 전직 경철 소설 정도랄까.

1.
스티븐 킹의 탐정소설이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관심 요소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재간꾼이 어떤 이야기를 생각해냈을까? 무엇보다 일반적인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이 아닌 이상 어떤 탐정을 만들어 놓았을까가 가장 중요했다. 일단 호지스라는 전직 경찰은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는 정치적 올바름을 갖추고 있는 이이며(제롬이라는 흑인동료의 등장은 사실상 예상할 수 있는 클리세라고 할까), 무엇보다 "빌어먹을 기술문명"을 외칠 만큼 기술치이기도 하다. 뭔가 심심하다. 몸매도 근사하지 않고 딱히 눈길을 끌만한 재담이나 매력도 없다. 게다가 미국 탐정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이혼남이며 딸을 있다(왜 아들이 아닐까).이런 요소들을 결합시켜 보면 오히려 의아한 것은 제이미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어째서 호지스에게 매력을 느끼는가라는 점이다. 

2.
의아하지만,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탐정이 아니다. 그리고 주변 인물도 아니다. 병증상태의 범죄자도 아니다. 오히려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스티븐 킹이 지속적으로 잡아채 온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어떤 부분, 그러니까 개인의 병이 아니라 사회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한 통찰이다. 즉, 범죄가 만들어지는 현대 사회의 어떤 맥락이다. 기술은 발달하는데 이를 활용하기는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인터넷 선이 빠진 것도 모르면서 컴퓨터가 고장되었다 말하거나, 컴퓨터 비밀번호를 자신의 이름으로 만드는 등의 관행들), 파트타임으로만 구성된 노동의 체계로 인해 오히려 익명성이 높아진 사람들(컴퓨터 수리를 위한 순찰대나 아이스크림 차량을 모는 일을 병행한다)이 모여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들을 조금만 스티븐 킹 식으로 비틀면 하나의 도시괴담형 범죄가 만들어 진다. 여기에 기술 자체가 부르는 위험의 증가가 더해지면 공포를 더 커진다.

3.
그래서 초반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범죄의 이야기-도대체 실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벽 이슬을 맞으며 길에 줄 선 이들을 공격하는 잔인한이란-는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이 범죄가 이유가 있는 범죄가 아니라 범죄 자체를 위한 오락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상징이고, 범죄자와 이를 쫒는(혹은 쫒기는) 이의 병렬적인 이야기는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높이는 요소가 된다. 물론 제롬과 호지스가 주고받는 대화는 때때로 유쾌하지만 전반적인 회색톤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는 역부족이다. 맞다, 이 책의 이야기는 해결의 쾌감이 아니라 읽고 난 뒤에도 남는 쓴 맛이 주성분이다. 

4.
그렇다면 이 책은 시리즈물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스티븐 킹이 지속적으로 호지스의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을까. 그러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호지스는 해결하는 사람이지만 사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며, 충분히 지금의 사회는 수많은 도시괴담형 범죄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키를 복제한다는 발상과 같이 기술이 위험을 증폭시키고 범죄의 이유가 사라짐에 따라 증가하는 무작위성은 충분히 일상적인 공포를 안긴다. 그리고 그런 공포를 공포물로 한정시키지 않고 탐정물로 발전시킨다면 스티븐 킹 외에는, 그리고 그가 뒤늦게 만들어낸 호지스라는 인물 외에는 적임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 시리즈 물이라면 탐정물의 기본적인 요소인 제목의 연속성 역시, 범죄자의 별칭으로 이어져 간대도 놀라울 것이 없겠다. 이를테면 다음 편의 제목이 '미스 노키아'나 '미스터 갤럭시'면 어떤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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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벡의 유렵연합 조사

  

- 한겨레에서 운영하는 '훅'에 실린 울리히 벡의 '앙겔라 부시, 유렵을 불태우는가'에 대한 글

 

우선, 주요한 논점들과 생각.

 

(1) 이제 막 시작된 급진적인 긴축정책에 힘입어 쉽사리 사회소요로 번질 수 있는 강렬한 분노의 물결이 유럽 도처에서 쌓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금융투기 세력들은 계속해서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은 채 “국가 망가뜨리기 놀이”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사센의 분석에 따르면, 소비자 서비스의 영역이 생산 서비스의 영역으로 이전됨에 따라 모두다 자본의 이해관계를 내재화하게 된다. 결국 금융투기 세력이라고 불리는 그 수많은 군단이란, 결국 우리가 말하는 대중 자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본-노동이라는 전통적인 계급갈등은 자본대중과 노동대중 간의 내/외부적 계급갈등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닐까? 

 

(2) 오히려 금융위기는 이제 유럽 자체의 존재위기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 이유는 유럽 각국 정부가 – 물론 그 가운데 안젤라 메르켈 총리가 맨 앞에 서 있는데 – ‘위기를 활용하지 않은 채 그냥 흘려보내지 말라’는 유럽 정치의 근본원칙을 간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야말로 정치적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고 유럽을 더욱 튼튼하 존재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임에도 말이다.


유럽의 진보는 하나의 유럽을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유럽을 넘어서 정치적 유럽을 위한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벡의 주장에 대해, 한반도에 사는 나로서는 어떤 판단도 하기가 어렵다는...

 

(3)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상을 긴장시켰을 때, 정작 각국 정부를 칭송하는 목소리는 드높았다. 이들 정부는 아주 놀랍게도 세계경제를 앞장서 구해내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실질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파산한 은행을 도와주는 일은 결국 국가의 파산이라는 또 다른 위험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도처에 그리스가 널려있는 셈이다. 미국을 포함해 거의 모든 선진국가들은,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비치면서도 동시에 대체 쓴 약을 삼킬 의지가 남아있기나 한 지에 대해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산더미 같은 부채를 쌓아갔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국가파산 앞에서 각 나라들을 구해낼 것인가? 또 다시 육체 노동자가? 사무직 직원이? 아니면 실업자와 연금생활자가? 그것이야말로 사회적 의식은 물론이려니와 현실감각마저 깡그리 상실해버린 ‘시장주도 유럽’이 찾고자 하는 해답이다.


은행도와 주기, 경제위기에 따른 손실을 외부화하기. 세금으로 금융투기자의 손실을 보전하기. 모두다 가해자이고 모두가 피해자인 상황에서, 순수하게 이익을 보는 한 줌의 세력에 눈을 돌릴 여유가 있을까. 어느 책에서 프랑스의 전력공사를 민영화하는 방편으로 국민주 방식을 도입했다고 한다. 결국, 스스로 전기료를 높이면서까지 주가를 높일 수 밖에 없는 이 역설이란...

 

 

(4) 하지만 어느새 느닷없이, 협력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할 것인가, 칸트인가 아니면 파국인가라는 생존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칸트의 영구평화에 대한 이상은, 정치적 유럽의 오래된 미래인셈인데... 미제국에 대항하는 군사력으로서 유럽연합의 군사력을 옹호하는 데리다의 격문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착한 제국을 기대하는 것이 도덕적이고 윤리적 관점에서 타당할까?

 

(5) 그럼에도 문제의 핵심은 메르켈 정부가, 황색신문의 그리스 사냥이, 그리고 사법당국과 지식계층 엘리트들마저 마치 독일을 유럽으로부터 보호하고, 시샘 많은 유럽의 이웃나라들 – 자신들의 재정적자를 독일인의 돈주머니를 털어 해결하려는 – 의 부당한 침탈으로부터 독일의 성공모델을 지켜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온 양 독일의 일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곡해하고 강조하고 나선다는 데 있다. 


독일의 일국주의. 유럽없는 독일경제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아닐테고.. 결국은 정치적 효과를 노린 공세라는 것인데, 그것은 정치적 유럽으로 가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의 경제적 유럽에서도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인 셈인지. - 좀더 자료 조사가 필요하겠다.

 

(6) ‘독일 유로화(DE)’를 향한 메르켈 총리의 행보는 보다 큰 맥락과 잇닿아 있다. 경제이건 대외정책이건 혹은 독일군대의 해외주둔 문제이건간에 독일 총리가 대내적으로 하나의 민족국가를 강조하고 나설 경우, 이 말은 곧 프랑스인들이 말하듯이 ‘스스로 퇴보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유럽이라는 ‘유럽인’의 야망으로 구현되는 게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유럽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결속감을 갉아먹는 독일을 보여주고 있다.

 

 

 

벡이 앙겔라 '부시'라고 지칭한 것은 부시 전대통령의 정치적 비전이 독일 현 총리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것을 비꼬기 위한 것인셈인데.넓게 보자면, 신자유주의자로서 메르켈총리를 정치적인 포지셔닝을 하는 셈. 하지만 독일의 경우에는 -우리에게 일본이 그러한 것처럼- 일국주의가 그야말로 방어적인 국수주의로 읽히지 않는 데. 어쩌면 독일의 극우화 전 단계가 아닐까하는 섣부른 예단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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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llo] 알에이티엠의 전사, 어쿠스틱을 잡다

아는 사람은 알 테지만, 개인적으로 CD 북클릿에 모택동이나 체 게바라의 책을 읽으라고 권했던 RATM의 리더가 바로 톰 모렐로다.

 

최근 새로운 앨범을 냈다고 하는데...(사실 좀 되었다^^;;)

 

기분이 좋다. 얼마나 설득력있는 목소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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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투쟁300일]나는 어떻게 싸우고 있나?

참 긴긴 시간을 버틴 셈이다.

역시 많은 동지들이 떠나가고, 남은 자들은 끝까지 깃발을 놓지 않고 있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이들에겐 존경이 어울린다. 그리고 그들 앞에선,

이랜드비정규노동자와

나는 어떻게 싸우고 있나? 를 물어야 한다.

 

이랜드 재벌에겐 돈 한푼도 쓰지 않은 것으로 된 걸까?

주변 사람들에게 이랜드 파업에 대한 정당성을 역설한 것으로 된 걸까?

 

오히려,

그들을 KTX 여승무원들처럼 썩어빠진 노동운동의 장식물로 삼는 것 아닐까?

그들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린 정당하다고!

 

어제 한땐 예술가였다가, 이제는 노동자가 된 사람이 말했다.

바닥에 떨어지니 싸움이 생각나더라고.

싸우고 나니, 예술가란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더라고.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단지 그 뿐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현란한 수사도 이랜드 투쟁뒤에서 박수치는 일 밖엔

무엇을 했는가?

 

노동자가 결연함을, 심각함을 요구받는 자리라면

그건 어려운 자리이고 누구나 될 수 없는 자리이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에겐 강아지이고

아내에겐 토깽이이고

딸에겐 곰이듯이

 

노동자도 때론 웃고, 때론 소비자가 되며, 때론 주주가 되어 사용자가 되기도 한다.

중국의 땅을 사고파는 펀드의 소유자는 과연 노동자인가?

 

내가 과연 이랜드투쟁의 300일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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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스가 포스트락이라구요?

음...rache's라는 그룹이 있다. 음악을 하는.

 

내가 그들을 알게된 것은, 4년 전 당시 결혼 전 아내의 집에서 굴러다니던 앨범을 통해서 였다. "에곤 쉴레 헌정"이라고 쓰여있던 것 같다.(영어니까 뭐)

 

그러다 어제 퇴근하면서 잡지를 뒤적였는데, 레이첼스의 음악에 대한 글이 실려 눈여겨 봤더니, 음...

 

내가 아는 레이첼스와 그가 말하는 레이첼스가 어째 좀 어긋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주장인 바, 90년대 중후반부터 소위 '포스트 락'이라는 일군의 뮤지션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그동안 리프 중심의 락에서 벗어나 맬로디를 강조하는 소프한 락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평론가는 리프를 '남근적인 것'으로 치환했고, 그래서 '포스트 락'은 여성적인 락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뭐, 어느 종교단체에서 말하듯이 세상이 변화하는 '개벽'에는 음과 양이 교차된다고는 하지만, 락의 변천을 음양의 구분으로 살펴보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이해하는 락은 단순하다. 우선 전자기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힘이 넘치는 드럼! (이햐 무식한 주제에 내 생각을 쓰려니, 문희준이 생각나서 조심스러워 지누만) 하지만 내가 락을 정의하는 것은 딱하나, 보컬이다. 락은 레코딩 될 수 없다는 것이 어줍잖은 내생각인데, 왜냐하면 락보컬이야 말로 노래를 부르는 스테이지에서 받은 영감에 따라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이게 오지오스본을 좋아하는 이유^^;;)

 

그런 의미에서, 레이첼스가 락? 음...

 

건 모르겠고, 음악을 잘하는 건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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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쳄발라'라는 악기

 

난 그런 악기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맨날 글렌 굴드것만 듣다보니 식상해졌다. 그래서 뭐 유명한 연주가가 있나 싶어 웹서핑을 했더니, 웬 걸, 골든베르크 변주곡이 쳄발라라는 악기를 위해 작곡된 것이라는 설명이 있지 않나?(이는 어느 바흐 전기작가가 소개한 에피소드에 따르는 것이지만 더 알아보니, 신빙성이 떨어지는 아름다운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쳄발라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비도 오고, 점심먹고 산책도 못가니 뭐.

 

하프시코드, 클라브생, 클라비쳄발로라고도 하며 16~18세기가 그 전성기였다. 모양은 그랜드피아노와 비슷하나 피아노는 현을 해머로 치지만 쳄발로는 무두질한 가죽 등의 발목()이 재크를 건반의 뒤끝으로 밀어올려 현을 퉁긴다. 음 하나하나의 음절을 자유로이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음의 높이나 음질이 서로 다른 음렬()을 만들어 놓고 기구적()으로 이들을 여러 가지로 조합해서 소리를 내어 음질이나 음량의 대비감()을 얻는다.

(아! 당최 무슨 말인지 알길이 없다.)

표준형은 음렬이 4열, 건반이 2단이며 상단에는 보통의 음높이를 지닌 음렬과 8도가 높은 음렬이, 하단에는 상단의 음과는 음질이 다른 보통 음높이를 지닌 음렬과 8도가 낮은 음렬이 배열되어 있다. 음렬은 스톱(보통 페달식)으로 어느 한쪽의 음렬을 고를 수가 있다. 현 끝에는 펠트 등을 닿게 하여 여운()이 짧은 음으로 변화시키는 장치(류트 스톱)도 있다. 소형의 것으로는 버지널 스피네트라고 하는 같은 기구로 된 것이 애용되었다. 피아노는 쳄발로 제작자에 의해서 쳄발로 본체()를 사용해서 발명되었는데, 원리적으로는 쳄발로가 발전된 것은 아니다. 19세기에 부활되어 현재 독일의 노이페르트와 슈페어하케의 악기가 유명하다. <네이버 백과사전 중>

(난 끝까지 읽어봐도, 그게 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문이 불여일청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결국 들어보기로 했다.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쳄발라로 연주한 것이다. 참고로 내가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처음 접한 것은, 예전에 어떤 대중가수가 샘플링을 해서 사용했던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딱 그것만 화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짧은 공부로 보자면, 변주곡은 일종의 주제곡(여기서는 사라방드의 아리아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름만 익숙한 이 곡이 뭔진 모르겠다^^)에 대한 다양한 변주 그러니깐 기본적인 뼈대는 같지만 연주를 달리하는 것을 말한다(고 본인은 접수했다).

뭐, 음악이라는 게 들어서 즐거우면 그만이고 관심이 꽂히면 더 찾아보고 즐기면 되니깐. 사족이지만 나는 클래식 음악평론하는 사람이 참 무지막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연주자에 따라 이런 게 좋고 나쁘고 등 하는데, 뭐 나같은 사람이 그것을 다 찾아서 일일히 비교할리 만무하지 않나?

게다가 클래식은 찾기도 힘들다고!! 어쨋든, 나중에 더 공부할 셈치고, 이제가지 웹으로 찾아낸 내용들만 잊지 않기 위해 올려놔야 겠다.

1. 쳄발라로 연주하는 골든베르크 협주곡(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연주, 1953년 연주)

-1. 변주곡 1

 

-2. 변주곡 2

 

-3. 변주곡 3

 

2. 그 유명한 글렌 굴드의 변주곡 연주 모습 (변주곡 1에서 7까지. 그러니 앞의 3곡은 비교가 되겠군)

 

 

햐~~ 몰랐는데, 쳄발라라는 악기 되게 이쁘네. 뭐랄까 누군가 귀에다가 속삭이는 느낌같이 살랑살랑댄다고 할까.

암튼, 오늘은 쳄발라라는 악기를 알고 가는군.

참, 이런 뻘짓을 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진보신당' 화이팅!!(나름 열심히 선거운동중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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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경쾌한 피아노가 제격이다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는게 다 그렇지 않나? 참, 지금 나오는 곡은 '노영심의 학교가는 길'이다.

(돈되고 여유가 되면 노영심 앨범을 사주는 센스!)

아침 출근길에 비가 내리는 줄 모르고 나왔다가, 집에 얼른 가서 우산을 꺼내 왔다.

아직 애연가인 나는, 비오는 아침 출근길에 빼어든 담배가 참 좋다.

그리고 버스-전철-버스의 난코스를 대비하고자 라디오를 귀에 꽂는다. 이러저리 돌리던 채널에 잡힌 것이 바로 이 피아노 곡이다.

 

이 역시 어쩌다보니 듣게 되었고, 출근하는 내내 꽂혀 있다. 뭐 굉장히 이쁜 소품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역시 할일이 쌓여있고, 난 겁에 질린 체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안하고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고민중이다. 허허~~

그래도, 오늘은 노영심의 피아노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흐흐

다들 총선이 머지 않았다는데 분위기는 영 거시기 하다. 주변 지인들에게 나름 선전을 하고 있지만 글쎄다. 그냥 투표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분위기다.

진보신당을 알리려면, 투표는 반드시 해야 한다 라는 주장에 덧붙여 '왜 진보신당인가'를 덧붙여야 하는데, 앞의 것을 설득하고 나면 시간이 없기 마련이다. 그럼 정작 투표를 하러간 그 놈은 누굴 찍는 거냐구!!  뭐 알아서들 하겠지.^^

 

암튼 아침이다. 봄비다. 누군가, 나의 5시간을 사가서 '너 맘대로 그 시간을 쓰시요'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런 부담도 없이 뒹굴어 본 게 언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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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맞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늙으면 이래저래 괄시만 받을 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늙었기 때문이다.

 

 코엔 형제의 이번 영화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상찬이 쏟아 졌다. 뭐, 굳이 이 영화에 대한 어떤 소개도 보지 않고 덜컥 봐버렸다면, 오로지 코엔 형제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런 저런 영화평들을 찾아보았다. 영화에 대한 주변지식은 영화를 보기전보다는 본 후에 더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영화는 선입견 없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노쇠한 보안관이 지나치게 무력하게 나와 심란했고, 너무나 노련하고 완벽한 범죄자의 모습에 또 놀랐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모스'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사막에서 사냥을 하다가 돈 가방을 줒는다. 하지만, 그 가방엔 얽히고 설킨 주인'들'이 존재했던 것. 그 중 맹렬하게 모스를 쫒는 것은 안톤 시거. 바로 포스터 윗 부분의 눈깔 주인공 되겠다.

 

 그 와중에 연속된 살인을 추적하는 보안관이 있다. 토미 리 존스가 열연한 벨 아저씨.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모스는 죽어라 도망가지만 시거가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고, 그를 뒤쫒는 벨은 모스도 시거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모스는 죽고, 벨은 코앞에서 시거를 놓치고 만다. 이게 끝이다.

 

 



많은 영화평에서도 지적했던 것이 보안관 벨의 무능력에 대한 부분이다. 그도 그럴것이 시거가 공기 압축통을 이용해서 살인을 저지르는데, 벨은 이렇게 묻는다, "총구는 있는데 총알이 없을 수도 있나?"

 

아 참, CSI 였으면 담방 알아봤을 텐데. 시대 배경으로 보건데 1980년대 초반 정도가 아닐까 한다. 분명 영화 중간에 년도에 대한 단서가 나왔고, 내가 순간적으로 계산한 결과로는 1980년대 초반이 맞는데 .... 근거를 대라면 모르겠다. 영화를 다시 보지 않고선.

 

많은 평론가들이 벨 보안관의 쓸쓸함에 눈이 갔다면, 난 모스에게 눈이 더 많이 갔다. 왜냐하면, 무능력한 퇴역 해병이 좀더 나은 삶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에 짠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돈은 마약 판매에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에 누가 가져도 될 돈이었다. 그리고 초반엔 모스 아저씨가 너무나 잘 헤쳐나오신단 말이다.

 

그래서 속았다. 모스가 살아남을 줄 알았던 거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죽어버렸다. 풀장에 누워있는 여자와 노닥거리다, 화면이 바뀌고, 다시 돌아오니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모스 아저씨. 에구구.

 

원작이 소설이고 <국경> 3부작의 하나라는데, 아무래도 멕시코 국경 지대가 배경인 듯하다.

 

그리고 3대에 걸쳐 보안관을 하는 벨 보안관이 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범죄자 시거도 있다. 벨과 시거는 한 한차례도 만나지 못한다. 물리적인 접촉뿐만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서도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 만큼 시거에겐 벨이 안중에 없고, 벨에겐 시거가 '인식불가능한 대상'이다.

 

오로지 시거와 모스가 있을 뿐인데, 결국 절대 악인 시거가 승리한다. 왠지 인생살이 같다. 나쁜 운이 이기는 것과 닮았다는...

 

음...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말들이 있었는데, 쓰자니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하면 덧붙여야 겠다.(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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