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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21
    여전히 순결하신 당신에게...두번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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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5/17
    여전히 순결하신 당신에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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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2/19
    딴지일보와 프레시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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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4/28
    사퇴에 대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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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01/05
    상식이라는 이름의 몰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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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12/29
    [블로그파업] 4년 기다리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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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12/08
    주식투자를 하는 좌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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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8/08/18
    이강국과 프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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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8/04/24
    저기, 노동자의 힘은 뭐하는데에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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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4/21
    좌파몰락, 같은 길-다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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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순결하신 당신에게...두번째

marishin님의 [진보신당 말고 진보신당 당원들께] 에 관련된 글.

 

음... 역시 그렇다. 반응이 난데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예상보다 약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있다가 위의 글을 보고 어떻게든 지금의 느낌(고로 논리적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을 기록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지난 블로그 글에 대해서 간단하게 반응을 정리하면,


1. 정말 진보신당 답고, 그래서 싫다


2. 노심이라는 인물빼놓고 당원이나 있나


3. 결국 진보신당 지지지하라는 말인데 손발 쪼그란든다.


맞다. 나도 노빠나 유빠가 써놓은 글을 보면 손발이 쪼그라든다. 아마도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그렇다.


일단 트랙백 글에 대한 느낌에 들어가기 앞서 앞의 1, 2, 3의 입장에 대한 촌편을 하면,


1. 그냥 진보신당다워서 싫다는 데 할말없다. 어떤 대상에 ~답다라는 식으로 관용화를 시키는 것이 꽤나 폭력적인 방식이지만, 그도 그런 인생이니 놔두겠다. 다만 어떤 특징들이 다른 정치세력하고 구분되는 진보신당 다운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듣고 싶은데 뭐 관두자.


2. 노심 인물론이라. 난 좌파라고 인물론을 무작정 거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닌을 떠들어도 누가 레닌과 함께 망명을 함께하며 생사고락을 했던 동지들의 이름을 기억하나? 김일성도 마찬가지다. 쉽게 보면 브라질엔 룰라가 있고 베네수엘라에는 차베스만 있을 뿐이다.


문제는 노심이 그런 인물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일테다. 동의한다. 나조차도 용인이 안되서 '그러면 안됩니다'라고 하고, 때론 대놓고 싫은 티를 박박낸다. 하지만 난 2가지 점에서 노심에게 기대하기보다는 그들을 인정한다. 그래서 단순히 인물론만으로 노심을 비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1.  노심의 지난 역사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우스워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존중하며, 내가 스스로 그 궤적에 내 삶을 투영해 보았을 때 '난 그러지 못한다'에 올인할 수 있다.


-2.  노심의 진심이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약점도 있고, 나름 살아온 과정상 고집도 있고, 그것때문에 갈등하고 욕도 먹고 칭찬도 듣지만 진심은 진짜다. 김제동의 촌철살인은 개념의 증거가 되지만, 노회찬의 촌철살인은 가벼움의 증가가 되는 왜곡된 시선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진보신당에 노심만 있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신과 같이 노심만 보는 풍토가 이쪽이고 저쪽이고 많기 때문에 문제다라는 것이다. 스스로도 노심만 보면서 노심밖에 없다고 하면 이거 우스운 일 아닌가. 당장 진보신당 홈페이지를 가보면, 선거기간임에도 1인 주거권과 관련된 토론회가 열리고, 여성정책을 평가하는 토론회 등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청년노동권 사각지대 문제로 프로게이머의 노동권 문제로 기획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못 알리는 쪽이 잘못이라고?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을 노심의 입을 통해 알리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3. 결국 진보신당 지지하라는 거냐? 맞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것인데, 무지 잘난척하면서 세상의 고민은 다짊어진 놈이 투표날 등산을 가더라. 투표거부도 개인적 권리라나. 맞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게 편하게 살면서 왜 남들에게는 A부터 Z까지 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살라고 하는데? 


그래서 진보신당을 지지않아도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진보신당과 반엠비의 사이에서 갈등하는(글의 맥락에서 드러냈다고 보는데, 앞으로 명시적으로 표현해야 겠다) 사람을 염두에 둔 것이다.(글의 지평은 내가 만난 혹은 접한 이들이 경계를 이룬다) 그 밖에? 찍던지 말던지. 애초부터 내가 그들에게 뭔 할을 할 깜냥도 없을 뿐더러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욕먹어가며 화살표를 제시하기도 싫다. 다만 치사한 변명이나 하지 말라는 거다. 말뿐인 사회주의? 좋다. 말뿐인 혁명? 좋다. 당장 당장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작은 것들이 가시처럼 있는데, 그보다는 가시의 원흉을 찾아 없애야 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가시를 없애야 몸체를 볼 수 있다. 가시 너머에 몸통이 있다는 선험적인 판단은 지지하나, 그것을 가리키는 것만으로는 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뭐, 지난 10년간 반복되는 말을 내가 왜 하나 싶다. 걍~ 서로 하고 싶은대로 하자.


이제 트랙백을 해온 글에 대한 느낌을 밝혀야겠다.


진보신당이 아니라 진보신당 당원에게...라. 괴롭다. 도덕적인 개인과 비도덕적인 사회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니부어의 결론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사회엔 개인 차원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가 존재한다고, 즉 사회적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신당과 당원이 분리된다면, 그리고 훌륭한 당원과 훌륭하지 않은 당이 그렇게 선연하게 구분된다면 당의 논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테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의 구분이 아프지만 동의한다. 내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색하지만 난 그래서 분당이후 지속되어온 진보의 재구성이니 하는 것들이, 외부를 중심으로 사고되는 것에 반대해왔다. 진보신당의 외부는 그 자체로 구태인데, 이합집산을 제외한 어떤 재구성이 가능할까라는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외연의 확대가 아니라 정치의 논리, 운동의 이성을 재평가하고 재구축해야 한다는, 즉 잊혀진 혹은 새로운 '대의'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지난 2년동안 좌충우돌해온 것이 썩 나쁘진 않았다고 본다. 노심과 진보신당은 무주공산이 아니다. 그와 함께 어깨걸이를 하고 있는 적지 않은 당원들이 함께 걸어주기 때문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노대표의 조선일보 방문에 대해선 즉각적인 반발을 낳았고 내부적으론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대한 논란까지 확산되었다. 부산 등의 대연합에 대해선 이미 논란이 지속되고있고, 선거국면에서의 복잡한 정치지형과 어려운 판단의 지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난 갈등이 있는 조직을 사랑한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갈등을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진 않는다. 그동안 운동 자체 정치 자체, 즉 수단이 목적화된 경향성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운동을 만들것이다. 서울의 일년 예산도 모르고, 심지어 자치구 개수도 모르면서 서울선거에 대하여 훈수를 두는 소위 진보주의자들을 봤다. 그들의 로두스는 어디쯤에 있는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와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의 로두스는 바로 여기다. 


내가 참여를 말하는 것은 훈수 뒤에 숨어있는 정치적 계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순진함이 너무 음흉하다. 이상한가. 뭐라 딱 집어 설명할 순없지만 나의 촉이 그렇게 말한다.^^ 내가 민노당 분당했을때 삼일밤낮을 울었던 것처럼 이거아니면 안돼라고 하지 말고 적어도 '애정'이 있다고 자처한다면 뭐라도 해보라는 것이다.


난, 진보신당이 싫다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그래서 '뭐' 하겠다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본적이 없다. 적어도 자기편하자고 싫다는 말만 할 줄 아는 사람은 도덕적까진 몰라도 윤리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참, 부처님 잘오셨어요~~ 이 사바 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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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순결하신 당신에게...

양비론이라면, 이것과 저것 사이에 단차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저것보다 높은 혹은 우월한,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힘이 세다면,

양비론은 그야말로 양비론을 가장한 약자 죽이기가 된다. 


이상하게 소위 '진보운동'판이라는 곳에는 순결한 영혼이 많은바, 이번 민노당이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행태와 사퇴한 후보에게 살아있는 영혼을 부여하신 민주노총의 입장에 대한 시각에서도 그렇다.


내가 봤을때 모호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문제다.


쉽게 97년 이야길 해보자. 국민승리21이라는 듣보잡 단체를 만들어 진보진영의 후보로 권영길 대표를 내세웠다. 그때가 어떤 땐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가 되나 마나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국민승리21의 회원이자 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을 했던 나는 욕을 꽤나 먹었다.


아마 그때 김대중이 떨어졌으면, 나나 국민승리21은 역사의 죄인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2010년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은가? 불과 2년전만 해도 역사상 가장 실패한 정권에 불과했던 노무현 정권과 그 잔당들이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리고 수많은 진보연 하는 이들이 그들의 꽁무니를 쫒고 있다. 국민승리21의 유산인 민주노동당은 아예 투항했다. 


당연한 것이 당시 국민승리21의 못된 놈들은 이미 진보신당이라는 새사림을 차렸고, 당시 김대중을 찍었던 인간들이 민주노동당을 접수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민주노총의 뛰어난 능력? 민주노총은 자격도 안되는 진보정당 통합을 말하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노동자정치세력화가 뭔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를 바라보는 시선들인데, 다들 민도당에 거품물고, 민주노총에 비판한다. 그리곤 한마디를 붙이는데 '그렇다고 진보신당이 잘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대략적으로 이유를 꼽아본면,


- 진보신당도 야권연대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 부산이나 다른 지역은 민주당하고 단일화했는데 뭘


정도인데, 거참 속상하다. 이게 서두에 전제한 양비론의 전형적인 방식인데, 진보신당에게 아주 불리한 구도라는 거다. 문제가 많은, 그래서 동의할 수 없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등가에 놓으면, 선택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당선가능성이 높은 데로 간다. 


즉, 내가 의심하는 것은 그토록 어렵게 한명숙을 찍을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라는 점이다. 물론 혹자는 이쪽 저쪽 다 싫어서 아무도 안찍으련다고 한다. 뭐, 그도 방법이지만 투표장엔 꼭 가서 무효표로 만드시라. 집에서 탱자탱자 놀거나, 친구들이랑 등산이나 가면서, '난 이러저래서 적극적으로 투표를 거부한 거야'라고 마스터베이션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 판이, 민노당하고 진보신당하고 같은 놈 만들어서 뭉게도 되는 판인가라는 점을 고려해보자. 말로만 사회주의하자는 쪽 빼놓고, 현실정치에서 가장 변방의 외연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이번 선거한번으로 접을 것이 아니라면 그 한표를 통해 어떤 '의미'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다.


현재의 국면에서 한명숙을 찍으면, 그 시절 거리에서 섰던 스스로를 정당화할수 있는가? 게다가 그런 민노당과의 진보정치 재구성이라니... 손발이 쪼그라든다.


그래서 말인데, 정말 고민이라면 진보신당을 찍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진보신당을 접수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선거이후의 판짜기에 고민이 많은 진보신당 내부자 중 한명인데, 같이 해보면 어떨까하는 거다. 


뭐, 이 블로그의 글을 몇이나 보겠냐만은 되도 안는 순결한 분들이 창궐하는 걸 보니 역시 운동판엔 변한 것이 없구나는 생각이 들어 기록차원에서라도 남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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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와 프레시안...

한 때 딴지일보가 트렌드를 형성하던 시설이 있었다. 그리곤 김어준 총수의 외도. 그 다음부턴 그 똥코누르기 페이지가 나오는 딴지일보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목을 맸던 것은 프레시안. 익명에게 다중지성이라는 금관을 씌어주지 않고 기자의 이름이 또박또박 박힌 언론으로서 프레시안이 주로 방문하는 언론이 되었다. 해서 경향-프레시안 라인.

 

거기다 구독중인 '시사인'. 그런데 지난 주였던 고종석 선생이 칼럼에서 '딴지일보'에 대한 호감을 표명한 관계로 가끔 눈팅하다가, 당게시판에 심상정 인터뷰가 실렸다는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보았다.

 

이 정도면 포스팅을 하지 않겠는데... 오늘 유시민이 선거연합과 관련된 입장을 발표했고, 그것이 평소 RSS했던 것에 떴다. 그리곤 얼른 가서 읽어보았다. 

 

질감의 차이는 바로 '댓글'.

 

딴지일보의 댓글은 그야말로 노무현 살인 0적 중 1인으로 심상정이고,

 

프레시안의 댓글은 널 어떻게 믿냐로서 유시민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인터넷 언론사마다 이를테면 '구독자'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평소엔 드러나지 않다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휘발성 높게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딴지일보 댓글보다 프레시안 댓글에 공감이 갔던 것은 나의 정치적인 입장에 기인한 바도 있겠지만, 댓글의 수준문제였다. 뭐 맞춤법 맞추고 정중하며...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오프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온라인으로 한다는, 온-오프 일체형 댓글을 의미한다. 

 

온라인은 실질적인 인간관계의 다른 형식이지, 그것을 대체하거나 혹은 그것을 이원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나의 이데올로기다)

 

그런면에서 심상정의 인터뷰에 대해, 노무현을 갖다데는 사람한테는 최소한 자신에 대한 반성을 했던 '진보의 미래'를 읽어보지 않았냐고, 당신같은 사람이 인간 노무현을 두번 죽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고 진보의 확신에 대해 비웃는 사람에게는, 수십년간 한우물을 파왔던 바보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냐고 힐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노무현과 그 일당들은 어찌되었던 4년 동안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세금을 받아왔던 사람이며, 국민의 종복인 공무원 위에서 군림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훈장처럼, 유일한 경험처럼 내세우는 것을 보면 당연히 그 떳떳함의 이유를 물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오늘 만난, 서울 모 구에서 구청장만들기를 하고 있는 노빠 선생은 진보신당의 입장이 '혹독하다'고 평했다. 이유는 민주당보러 먼저 버려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았는데, 그들이 해왔던 정치는 언제나 +의 정치였지 -와 +가 발랜스를 맞춘 균형의 정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해서 손안에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설사 진보진영과 나누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나라당에 빼앗기는 것과 동일한 감정경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정치의 진정성을 말한다면, 적어도 지역정치의 진정성을 말한다면 나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 당파가 그 지역에 대해 그동안 얼마나 발언을 해왔는가라는 점이다. 평소의 관심은 전혀 없었던 이가 1년 동안을 학습용으로 허송세월 할 만큼 지방정치가 만만한 게 아니다. 평소 오세훈 시장에 대해서는 논평 한줄도 내놓지 못했던 민주당이 서울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지지율이라.

 

이에 대해선, 어제 노회찬이 내놓은 '진보의 재탄생'이라는 책표지를 보면서 아내와 다투었던 내용과 연관됨으로 다음 포스팅에서 메모해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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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에 대해

박승흡 민주노동당 대변인이 사퇴했다.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더 많은 편으론 '뭥미?'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사퇴의 시기 문제

솔직히, 단일화의 결과를 인정하기 싫은, 그래서 조승수를 찍지 않아도 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박승흡이 사퇴한 것 아닐까?

문제는 박승흡 개인이 아니라, 이번 단일화 결과를 인정하기 싫은 민노당의 본심이다.

종북주의? 그렇다면, 원내에서 민노당은 FTA를 추진했던 민주당과 어떻게 정책공조를 하나? 민노당이 볼때 종북주의 비판이 한미FTA추진보다 심각하다는 것인가?

분명, 박승흡의 사퇴를 두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이번 울산 선거에서 보이코트를 하는 세력들이 생길 것이다. 민노당 입장에서야 공식적으로 이를 막지도, 종용하지도 않을 테지만... 어찌되었던 득이 되는 셈.(내부의 불만을 분산시키면서도, 조승수가 안되면 금상첨화?)

2. 최고위원이자 대변인으로서의 문제

대변인은 당의 공식적인 입이다.

개인적으로 박승흡의 입장이 민노당의 대다수 입장과 동일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런 박승흡의 결정이 이후에는 진보신당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어 줄것이다.

진보신당 내부에서도 죽어도 민노당은 안돼라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이번 단일화에서 김창현으로 되었으면 그런사람들도 생겨나겠지. 하지만 절대 당직에 있는 사람은 그럴리 없다. 왜냐하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부터 어찌되었던 공동대응 요구가 지속적으로 있을텐데 미리 약점을 만들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런 점에서 박승흡 같은 사람의 행동은, 이후 진보신당이 공동대응 사업에 있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너네 당 내부나 반MB전선에 대한 입장을 통일시키고 오라"는 등) 반종북주의 세력도 배제하고 한미FTA추진세력도 배제하면, 민노당이 주장하는  반MB전선은 도대체 누구랑 하겠다는 것인가?

3. 결국 민노당의 문제

어찌되었던 위기의식이라고 본다. 문제는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서로에 대해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인데, 이런 사람이 민노당에 더욱 많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배경이다.

진보신당이야 비 민노당 경험자가 당원의 60%가 넘는 상황이기 때문에, 민노당의 경험에 발목잡힐 이유가 없고, 그 60%의 신규 당원들 역시 '민주노동당이 있었음에도 입당하지 않았던' 전력이 있는 관계로 민노당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민노당이야 분당을 경험한 다수이자, 당사자들이 남은 곳 아닌가. 어쨌든 트라우마가 더욱 깊을 것이다.

뭐... 솔직히 웃고 말았지만(박승흡을 영웅시할 내부의 분위기가 뻔하기 때문에... 솔직히 편견이고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곱씹어 보면서, 지금 들었던 생각들을 기록하기 위해 급하게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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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라는 이름의 몰상식

최근 언론노조 파업과 국회파행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흥미로운 논리가 발견된다. 해서, 당시 내가 말했던 내용을 기억을 위해 가다듬어 놓는다.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에 대해서 가장 대표적인 논리이자 상식으로 통하는 말은 아마도 "시청자의 권리"라는 것이라 본다. 최근 중앙일보도 방송이 재벌에 의해 장악되어 특정 계급의 이해만을 반영할 것이라는 마봉춘의 보도에 '그렇게 되면 시청자들이 보지 않을 것'이라며 반박했다는 글도 보았다.

이른바 '소비자 주권'의 논리.

어제 KBS 뉴스에서 이스라엘의 지상전 투입과 관련한 보도를 하면서 이스라엘 국방부장관을 인터뷰한 미국 언론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 방송이 바로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폭스뉴스다. 모든 매체가 모든 뉴스원에 대해 동등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만 존재하는 가정일 뿐이다. 이명박은 당선 직후 <동아일보>에만 인터뷰를 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았던가.

그동안 매체의 프레임 형성권에 대해 집중하면서, 조중동 찌라시와 같은 행태가 많이 언급되었는데 문제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조중동의 경우에는 사실전달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포기하면서까지 마타도어로 일관하는 비언론인 셈이기 때문에, '언론사의 다양한 입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이미 논외에 속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을 보는 이유다. 내 주변에도 '조선일보를 알기위해 조선일보를 본다'던가 '조선일보의 정보력을 넘어서는 언론이 없다'는 등 다양한 조선일보 찬양론의 버전들이 존재한다. 경제적 영향력이 바로 정보 접근의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왜 이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그것은 삼성이라는 대재벌의 영향력 때문이다. 비공식적인 정보의 집중을 바탕으로 '직접' 관료집단과 소통하고 있는 연구소의 능력을 누가 넘어설 수 있겠는가.

만약 마봉춘이 재벌의 금가락지에 넘어가게 된다면, 여타 지상파에 비해 막대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시청자로 하여금 '볼 수 밖에 없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은 시청자의 선택를 넘어서는 것이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이정도의 재벌방송은 모든 뉴스보도를 '자기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말해, "정부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이런 저런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보도한다면, 며칠 뒤에 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위해 이런 저런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상황이 그렇다면, 아무리 재벌이 소유한 마봉춘이 밉다하더라도 마봉춘을 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쉽게 생각해서 지금 이블로그를 보는 사람 중, 혹은 그 주변에서 여전히 조중동을 탐독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과연 그 사람들이 바보라 그럴까?

시청자의 선택권이란, 비대칭적인 정보량을 지닌 언론 매체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마봉춘의 예능화보다 내가 더 우려하는 것은 이런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언론노조의 파업을 비롯하여 시민들의 투쟁은, 시청자의 선택권을 지키기위한 싸움이다.


다음으로 다수결의 논리.

새해랍시고 김영삼 옹께서 입을 여셨는데, 최근 국회 상황에 대해 '다수결의 원칙'을 강조하셨다 한다.
나름 합리적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꽤나 다수결의 논리를 들어가며 현 국회의 상황을 비판하곤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뭐 이들에게 한나라당도 예전에 그랬어!라고 말하면, '그래서 그렇게 욕하는 한나라당과 똑같은 짓을 해도 된다는 것이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다수결의 정체에 대해서다. 물론 다수결은 소수의견의 존중, 다수결의 관철방식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소소한 제한들이 있지만, 일단 빼자.

국회의원은 국가를 구성하는 3개 주요한 기능 중 하나인 '입법행위'를 위한 대의자다. 유권자는 정치적 성향이나, 후보자와의 이해득실로 자신의 대의자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로 다수당과 소수당이 만들어진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 한나라당에서 "국민들이 만들어준 국정운영의 권한"으로 "엠비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심각한 모순이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다수결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것인데, 이명박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가진 것도 맞고 한나라당이 선거를 통해 다수당이 된 것도 맞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4년이나 5년동안 무슨일이든 '다수의 의지'를 표방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론조사가 참 많다는 점이다. 유권자의 48% 지지로 대통령이 된 이명박의 지지도가 30%라면 합법적인 권력 획득 이후의 권력운용과 관련된 정당성은 없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그들이 말하는 다수결로 보자면, 국민 중 30%만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또한 국민의 60%가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에 반대한다고 하는데, 민주주의의 원칙인 다수결에 따르면 이런 국민들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국회안의 다수와 소수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한나라당이 소수당이면서도 몽니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언론관계법만 놓고 보자면, 한나라당 국회의원 1명은 고작해서 0.6 정도의 국민대표성을 지니고 있고 야당의원들은 1.5에서 1.6 정도의 국민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한나라당 2명 정도 모여야 사람 1명 구실하면서 다수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을까?

조중동이던 한나라당이든 곧잘 이용하는(절대 자신들이 소수일때는 이용하지 않는) 다수결의 원칙은 제도의 원인과 결과에만 존재하는 반푼짜리 원리인셈이다. 과정 속의 다수결을 따져보면, 한번 다수가 지속적으로 다수인 적은 별로 없다. 그게 민주주의 아닌가 말이다.

신년을 맞이하여 보기 힘든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고민해서 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들이 말하는 상식이란 고작 상식처럼 보이는 비상식이자 몰상식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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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파업] 4년 기다리는 말

트랙팩님의 [[블로그파업] MB의 국회에 맞서자!] 에 관련된 글.

또라이당에서 그랬단다.

85개 법안을 발표하면서 불만있으면 4~5년 후에 선거를 통해 밝히면 될 것이라고...

 

고작 민주주의를 선거와 필요충분조건으로 생각하고 있음직한 그들의 돌머리에 경악하고,

잔말없이 4~5년동안 닥치고 살라는 그들의 엄포에 열받는다.

 

이명박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대통령으로 꼽힐 것이 분명한데, 박정희나 전두환의 나이브한 죄책감조차 없다는 점에서 가장 유력해 보인다.

 

4년에서 5년동안 국민들을 거리에 서겠끔 만들겠다는 오만한 또라이당은 그대로 박제하여 역사박물관에 보관해야 할 것이다.

 

덧글> 표현의 자유를 위한 눈은 마우스의 포인트 방향에 맞춰 흩날린다. 이를테면 왼쪽으로 드래그를 하면 왼쪽으로 눈발이 날린다.

 

해서, 5분정도 위쪽으로 죽어라 시도해보았는데 되질 않는다. 이런 웹상에서도 중력의 법칙은 끄떡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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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투자를 하는 좌파?

이른바 경제위기다. 사실상 맑스주의자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일상적인 국면 조차도 위기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라는 것이 모순에 의해 작동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착취를 통한 불평등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해서,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이른바'가 붙는다.

재미있는 것은, 몇 해전부터 인기였던 펀드니 주식이니 하는 돈벌이가 소위 자파들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야 그럴 여유가 없는 상황이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주변엔 처지도 안되면서 꽤나 무리를 한 사람도 있다.

나는 스스로 맑스주의자라고 믿는 사람이고, 해서 주식으로 돈을 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노동을 통해 생산되지도 않는 가치에 대해 돈이 오간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주식과 펀드는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그런 사기에 발 붙이고 있는 좌파들은? 꽤나 유능한 경제 전문기자인 이정환은 '좌파가 주식투자를 해도 좋은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좌파라면 주식투자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주식시장을 통한 부의 이전 또는 약탈에 저항해야 하고 불로소득의 유혹에 넘어가기보다는 노동자로서 당당히 노동의 가치를 찾기 위해 싸워야 한다. 자본의 연대에 맞서기 위한 노동자들의 폭넓은 연대를 모색해야 하고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공부해야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정환의 이런 지적에 동의한다. 실제로 얼마전 기륭전자 투쟁을 위해 방미투쟁단을 보내겠다고 했던 진보신당에는 노조원임을 자처하는 이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스스로 기륭전자의 주주라고 밝히면서, 진보신당의 투쟁이 자신과 같은 노동자들의 이익과 반하고 있다는 항의였다. 처음엔 웃었지만, 나중엔 분노했다.

생각해보라. 주식이라는 것은 미실현된 가치에 대해 미리 값을 매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회사가 장기적으로 100만큼 성장할 것인데, 현재 80 정도니 향후 20만큼 추가적인 가치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집값도 마찬가지 아닌가? 현재 1억 정도여도 장래에 1억 5천까지 뛸 수 있다고 믿음으로서 그 집을 1억 2천에 구입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이런 기대를 '신용'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바로 이런 '신용'에 문제가 생겼기때문이며,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앞으로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다'라는 체제의 자기기대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소위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의 자기 기대에 부응하는 주식과 펀드를 한다니... 몸따로 마음따로라는 말인가? 오히려 말로는 급진적이면서도 사실 집에 돌아가면, 주식현황판에 코박고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이런 치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땅가지고, 주식가지고 돈을 벌지 못하는 바보들은 여전히 바보로 남고 영약하게 자본주의의 기대치를 실현하면서 돈을 버는 이들이 칭찬을 받는 상황이 운동판에도 만개해 있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를 좀더 확대시키면, 우리가 생각없이 하는 행동들이 자본주의의 자기 기대를 실현시켜 주는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주식과 펀드도 그렇지만, 솔직히 작금의 경제위기에 대해 '경제위기'라고 칭해주는것 자체도 그런 맥락이 아닌가 생각된다. 위기는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인데, 스스로 위기 담론에 빠져들면 그들의 나쁜 패를 받아들이게 되는것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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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과 프락치

오늘 일간지엔 한국판 마타하리 사건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보도되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일제 말기와 해방공간 만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공간이 있을까 싶다. 한국판 마타하리라...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기사하나를 보자.
“여간첩 김수임 사건 조작 의혹”
 
한국판 마타하리’로 알려지며 6·25전쟁 직전 간첩혐의로 처형된 김수임(1911∼1950)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AP통신은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1950년대 자료를 보면 지금까지 알려진 김수임 사건은 실제와 차이가 있다고 16일 밝혔다.

특히 이 문서에는 그동안 김수임이 월북시킨 것으로 알려진 ‘독일유학파 공산주의자’ 이강국은 1953년 정전 이후 북한 당국이 ‘미국 간첩’으로 처형한 것으로 나와 있다.

미 육군 정보국 비밀자료에도 이강국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비밀조직인 ‘JACK(한국공동활동위원회·Joint Activities Commission,Korea)’에 소속되어 있었다.

‘여간첩 김수임 사건’이란 이화여전을 졸업한 미모의 인텔리 김수임이 미군 헌병대장 존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중요 기밀을 빼내 북측에 넘기는 등 간첩활동을 하다 1950년 3월 붙잡혀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다.

그러나 미 국립문서보관소 자료에 따르면 당시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정보에 접근할 수 없었다. 또 베어드 대령과 다른 미 육군 장교들은 서둘러 한국을 떠났다.

이에 따라 김수임은 한국 경찰의 고문을 받고 자신이 하지 않은 일도 허위자백한 것으로 미군 관계자들이 결론내렸다고 AP는 전했다


내가 이 기사에 눈이 간 것은 이강국 때문이다.


1. 이강국

내가 이강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강국연구와 출간되고, 그의 저서가 나오면서다.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그 때가 2006년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국내 정치학 문헌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이런 관심은 편집증으로 발전하고 있는 차다.

박치우, 신남철 등의 인사들도 이런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강국도 그 중 한명이다.  그는 경성제대와 독일베를린대학을 나온 인텔리 출신 공산주의자로 박헌영과 함께 남한 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장본인 중 한명이다. 1930년대엔 원산 등지에서 적색노조 건설운동을 하였고, 해방 후엔 건준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북으로 가서 초대 외무장관을 하곤 박헌영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적어도 난, 박헌영과 이강국의 처형을 정치적 살인이라는 견해로 해석했다. 이를테면 김일성 등 소련파가 박헌영 등 국내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활동가인 박헌영과 이강국의 문헌은 중요하다고 보았다.

2, 프락치

그런데, 최근 해제된 미국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이강국은 미국 스파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왜?

난 그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도 남쪽도 아니고 북쪽도 아닌, 미국의 스파이를 택한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참 소심한 인간인지라, 내중 안하던 블로그에 들어와 쓴다는 글이 이강국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괜히 쓸쓸해 진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3. 일종의 가설: 이상의 이념화가 빚은 참상

사람에 대한 일반론을 참 싫어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의 특수성이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인텔리 출신의 엄격한 이론가인 이강국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탄압에 이어 해방된 남한과 북한의 현실이 너무 '헐겁다'고 느꼈을 수 있겠다 싶은 거다.

유연함은 여유에서 나온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여유는 고사하고 자신의 신념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라 믿는다. 결국 원칙으로, 원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고 그런 선택이 현실에서의 적절한 타협이 아니라 현실부정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원하는 사회의 반정립인 미제국의 스파이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난 개량보다 원칙을 숭상하는 사람에 가깝다고 느낀다. 그리고 주변의 평도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원칙이 힘들어지면 개량보다는 전향을 선택하게될 가능성이 크다고 자각한다.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최근 촛불정국에서도 그렇고, 진보신당 내의 전진논쟁도 그렇지만 나의 원칙이 '무행동의 전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강국을 보면서, 그에 깜도 안되는 주제인 내가 심란한 까닭을 다소 억지스럽게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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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노동자의 힘은 뭐하는데에요?

<문화/과학>이라는 잡지가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과학적 문화정치를 주장했던 잡지로, 알튀세르 수용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곳이자, 한 때 들뢰즈주의자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솔직히 지금은 어떤 종합적인 정치색이나 이념색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쿄뮤니스트로 불리길 원한다는 정도?

 

그래도 이런 잡지는 <진보평론>이나 <녹색평론>처럼 '사주는 걸로 돕자'는 범주에 들어있는 잡지다. 내용의 동의 여부는 떠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니 말이다.

 

지난 달에 나왔던 <문화/과학> 봄호를 뒤늦게 사보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이유는 박성인이라는 사람이 쓴 '21세기 시대정신 구현할 21세기 사회주의 정당 건설'라는 글 때문이다. 다행이었다. 총선 전에 봤으면 밑줄그어가면서 보았을 텐데, 시점 상 지금보는게 '웃으면서' 볼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간단하게 보자. 글쓴 시점은 2월 3일 민주노동당 당대회가 무산된 후 분당이 가시화되던 시점이다. 이에 대해 박성인씨는 '대중조직 내부에서는 배타적 지지 방침을 둘러싼 격돌이 본격화되고, 사태의 진전에 따라서는 노동자 민중 진영 전체에까지 재편의 회오리가 몰아칠 것 같다'고 전망한다. 이에 대해선 별도의 촌평이 필요없을 듯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상황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기' 때문이다. 폭풍전야라 그런가?

 

흥미롭게도 민주노동당을 87년 민중항쟁과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의 산물이자, 노동자민중 정치세력화라는 전략적 과제를 체현한 현실태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히야~~. 민주노동당이 그동안 그렇게 자임해왔던 것은 인정하지만, 외부의 평가조차 이럴 줄은.(그런데 다 이게 롤러코스터 효과를 노린 립서비스라는 거.. )

 

그런데, 당시의 민주노동당은 '민족주의와 사민주의'가 주도해 노동자 민중의 총체적 대응을 정치적으로 조직해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뭐가? 민주노동당은 '통일과 반미', '분배와 복지'문제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그럼 뭘 했어야 하는데? '반자본주의 정치투쟁의 전면화'를 못했단다. 음... 이건 곱씹어봐야겠다.

 

그래서 필자가 보기엔 당시의 시점이 '노동자민주의 새로운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상과 정치노선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해서 다시 현장과 지역으로부터 일어설 때'라고 역설한다. 이 역시, 곱씹어 보자.

 

박성인씨는 진보신당에 대해 우경화된 사민주의 딱지를 붙이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심상정 비대위가 내놓은 종북주의 비판과 사회연대전략이 '반노동자법인 국가보안법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고', '연대전략은 계급해체 전략'이었다 한다. ^^ 재밌으시네. 지금부터 재미있는 부분들이 쏟아진다.

 

뭐 구구절절하게 말하진 않겠지만, 종북주의 비판을 국가보안법 문제와 뒤섞어 버린 것은 당내 다수파의 논점 흐리기 전략이었으며, 그의 단적인 증거로 '다함께'를 포장해서 박성인씨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그래서 뭐하겠다는 건가하고 넘어갔더니, '21세기형 제국주의'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21세기 사회주의/코뮤니즘'을 하잔다. 이쯤에서, 최근 <레디앙>에서 쌩난리 중인 '진보니, 좌파니 하는 논쟁'이 생각하서, 웃음이 나왔다. 하기사 누구의 말대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니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만...

 

그러면서 내놓는 대안이 '반자본 변혁'이다. 민생문제로 드러난 자본주의의 문제는 '변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적어도 난 박성인씨가 "'사회주의', 아직도 그 소니냐고 한다'며 개탄하는 회의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어떤 사회주의고 그 방법론이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넘어갔더니....

 

그냥 반자본 변혁은 현실의 요구이자 역사의 필연이란다. ^^;; 뭔가 좀더 구체적인 상을 보여주세요 하면서 글을 읽어 나갔다. 그러자 명문장이 나왔다.

 

"'21세기 진보의 재구성'은 발전된 생산력 때문에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를 노동자민중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전망을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발전된 생산력 때문'? 몇번이고 다시 읽어봤다. 정말? 현대 자본주의가 생산력 때문이라고? 그럼 석기시대로 돌아가야 사회주의 한다는 걸까? 아니다. 이를 더 나름대로 정밀하게 읽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윤율 저하의 경향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생산력의 증가로 카바하려는 자본주의' !! 그래? 오히려 금융화 경향을 보자면, 이윤율 저하 경향을 해결하는 방식이 바뀐 것 아닌가?(물론 이런 제도주의적 시각에 반론을 표한 정성진 류의 정통마르크스주의자도 있지만)

 

결국, 그냥 넘어갔다. 생산력 때문에 자본주의가 문제라는데 거 참... 그래도 넘어갔다.

 

뒤이어 '가부장제 및 환경파괴적 생산력주의도 극복하는 복합적 사회주의/코뮤니즘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부터, 진보신당 류가 주장하는 '생활 좌파, 진보의 재구성'론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헤깔리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이름만 바꾼 것 아냐? 라는 의심을 못내 꼭꼭 누르면서.

 

그러면서 갑자기, '정당 건설,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출발'이라고 한다. 아휴 깜짝이야. 이제까지 의회주의니 사민주의니, 개령주의니 하셨으면서 정당이라뇨? '전위정당'말인가요? 하면서 쫓아갔다. 그러고 나서 '네트워크 조직'은 안된다. 이르지도 않다, 강령도 준비 다되어 있다, 현재의 노동자게급의 단결은 오히려 당 건설로 가능하다며, 솔직히, 믿어달라고 '강요'한다. T.T 증좌가 없는데 어찌 믿느냔 말입니다요...

 

그러고 나서 글말미에 박성인씨의 정체가 밝혀졌다.

 

'노동자의 힘 중앙집행위원장'

 

나야 <대장정>같이 <노동자의 힘> 잡지를 내는 사람들인 줄 알았더니,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자고 한다. 그런데요, 도대체 누구신데, 갑자기 나오셔서 이런 말씀이세요? 하는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솔직히 말하겠다. 절반은 비아냥이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더라도, 문맥에서 느낄 수 밖에 없으니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애초, 진보블로그에 이사오면서 처음 포스팅했던 것이 '강내희 교수의 글'이었다. 구구절절히 아름다운 말씀이었느나, 당최 뼈대가 없었다. 실체가 없으니, 후 불면 공기중에 날아갈 것 처럼 보였다. 박성인씨의 글도 마찬가지다.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코뮤니즘이니 코뮤-니즘이니 말 장난하면서 세월을 낚는 것까진 좋은데, 제발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주장만은 삼가해주었으면 좋겠다. 난, 노동자의 힘이, 언필칭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중을 상대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건 대중인가, 아니면 그들인가.

 

암튼, <문화/과학>에 이런 글도 실리는 걸 보니 이 잡지도 몸은 가만히 있으면서 뇌만 왼쪽으로 기우는 '좌뇌 측만증' 경향이 다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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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몰락, 같은 길-다른 길

장석원,  <이탈리아좌파는 왜 의회서 사라졌나>, 레디앙

 

 

이탈리아의 총선이 지난 13~14일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에 결과에 대해 언론에서 단편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었다. 대부분 단편적인 내용에다, 그저 언론재벌인 베를루스코니가 역대 최장 총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정도였다. 그러다, <레디앙>의 기사를 복잡한 이탈리아 좌파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1. 공산주의재건당의 몰락

 

내가 공산주의재건당의 이름을 처음알게 된 것은, 윤소영 교수의 '일반마르크수주의' 관련 책에서 였다. 그리고 사회실천연구소에서 낸 '실천'에서도 낯선 이탈리아 명사들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관심 밖으로 쓱~~

 

(그러다 다시 그 이름을 접하게 된 것은, 사회진보연대 회원인 최원씨가 윤소영 교수의 최근작인 '일반마르크스주의와 대안좌파'라는 책에 대한 논평을 보면서다. 평의회운동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줒어들었던 터였지만, 최원씨와 윤소영교수의 접점을 전혀 알고 있지 못한 관계로 '그대도 여전히 나는 윤소영 교수를 존경한다'는 생뚱맞은 제목의 글은 금방 눈이 갔다. )

 

이탈리아는 좌파의 세력이 일반화되어 있는 몇 안되는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로 알고 있다. 그런데 몰락이라니?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2. 생존이 아닌 권력을

 

기고자는 공산주의재건당의 우파적 전략이 민주당의 좌파를 끌어당기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또한 공산주의재건당을 포함한 3개 정당이 연합하여 만든 선거용 프로젝트 정당 '무지개좌파당' 역시 정강 정책의 통일성을 갖추기 힘들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놈의 공산주의재건당은 하원의장이 당대표를 맡고 있고, 무지개좌파당은 46명의 상원의원, 93명의 하원의원, 13명의 유럽의원이 소속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원내정당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미국의 민주당을 벤치마킹한 민주당의 우경화에 반발한 세력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물론, 이들보다 왼쪽에 있는 이들도 많다. 어쨌든, 내가 볼 때 이들이 파병연장안 찬성까지 하면서 오른쪽으로 향한 것은 좌파의 생존전략이라기 보다는 권력장악을 위한 정체성 지우기의 혐의가 더욱 크다고 생각된다.

 

3. 선거제도의 영향과 비판적 지지

 

이 기사를 통해 이탈리아의 독특한 선거제도를 알았다. 지난 2005년에 개정된 것이라 하는데, 정치적 안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제1당이 340석에 미달할 경우 이를 채워주어 전체 54%의 의석을 보장하는 제도가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연립정부의 각종 추문에 의해 코너에 몰려 있던 비우파세력들은, 좌파가 아니라 비우파에게 몰린다. 이른바 비판적 지지다. 마음에 안들더라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

 

결국 하나의 제도가 유권자들의 전략적 행동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표심리'와 같은 것이라고 할까.

 

4. 경제 이슈와 대안 부재

 

이번 이탈리아 선거와 우리 선거가 많이 닮아있다고 한다. 그런데, 낮은 수준의 투표율이 80%가 넘는다니, 40%대를 달리고 있는 우리와 비교하면, 대의제 정치제도에 대한 신뢰는 상당한 수준인가 보다.

 

어쨌든 그렇게 부패도 많았던 베를루스코니가 경제살리기라는 이슈만으로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점 역시 닮아 있다.

 

문제는 좌파세력의 대안이 없었냐는 거다. 있었다. 그들이 버린 정책들이 바로 그들의 대안이었다. 파병연장반대 등은 좌파의 대안이었음에도 이를 전술적으로 버림으로서 전략적으로 패배하게 된 것이다. 대안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단순한 진리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5. 그럼, 진보신당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진보신당 때문이다.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이탈리아 상황을 보고 진보신당의 앞날이 걱정되는 건 순전히 노파심이다.

 

우선 맹목적인 연합체 구성이 걱정이다. 무지개는 다양한 색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이를 대강 합쳐놓으면 검정색이 될 뿐이다. 일각에서 나오는 노힘과 임종인까지 아우르는 대연합이라는 아이디어가 오히려 진보신당의 색깔을 무채색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한다.

 

다음으로 청산주의가 걱정이다. 민주노동당 운동은 그 자체로 역사다. 따라서 이에 대한 명증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청산주의가 진보신당 당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 민주노동당의 방식은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하는데, 이를 단순하게 사후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당대의 배경속에서 다른 방식이 있었나를 따지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라 본다.

 

정치적 가벼움이 걱정이다. 요즘 당내 분위기 좋다는 이야길 심심찮게 듣는데, 그래서 더 걱정하는 목소리도 크다. 에드벌룰의 풍선이 한 마을을 덮을 정도로 크다해도 그 가벼움으로 인해 날라가 버린다. 가벼운 것이 아무리 쌓여도 진중한 문제의식으로 제련되지 않으면, 소비될 것 같아 걱정이다. 어쨋든 당내 리더쉽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몇몇 그룹에서 제출되고 있는 사회운동적 정당 등은 이미 2004년, 2005년부터 많은 전사를 가지고 있는 논란들이다. 문제는 '어떤 제도정당이며, 그곳으로 어떻게 장악해 들어갈 것인가'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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