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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논평, 중요한 사례

구르는돌님의 [조봉암과 박헌영, 다른 길을 간 두 혁명가의 초상] 에 관련된 글.

 

소름이 돋는다. 그래, 조봉암과 박헌영이다라는 생각을 들도록 만드는 잘쓴 글을 보니 몸이 반응한다.


조봉암과 박헌영,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정치의 비전을 그려냈던 활동가였지만 지금의 정치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우리 정치의 불모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뿌리없음이 우리의 정치를 의미없는 이합집산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위의 글에서 보이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존경+중'도 이해한다. 


그런데, 요즘은 왠지 박헌영의 계절이 돌아온 것 같아 마뜩찮다. (뭐 여러가지 이유로..)


에휴. 암튼 재미있고 유익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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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순결하신 당신에게...두번째

marishin님의 [진보신당 말고 진보신당 당원들께] 에 관련된 글.

 

음... 역시 그렇다. 반응이 난데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예상보다 약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있다가 위의 글을 보고 어떻게든 지금의 느낌(고로 논리적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을 기록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지난 블로그 글에 대해서 간단하게 반응을 정리하면,


1. 정말 진보신당 답고, 그래서 싫다


2. 노심이라는 인물빼놓고 당원이나 있나


3. 결국 진보신당 지지지하라는 말인데 손발 쪼그란든다.


맞다. 나도 노빠나 유빠가 써놓은 글을 보면 손발이 쪼그라든다. 아마도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그렇다.


일단 트랙백 글에 대한 느낌에 들어가기 앞서 앞의 1, 2, 3의 입장에 대한 촌편을 하면,


1. 그냥 진보신당다워서 싫다는 데 할말없다. 어떤 대상에 ~답다라는 식으로 관용화를 시키는 것이 꽤나 폭력적인 방식이지만, 그도 그런 인생이니 놔두겠다. 다만 어떤 특징들이 다른 정치세력하고 구분되는 진보신당 다운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듣고 싶은데 뭐 관두자.


2. 노심 인물론이라. 난 좌파라고 인물론을 무작정 거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닌을 떠들어도 누가 레닌과 함께 망명을 함께하며 생사고락을 했던 동지들의 이름을 기억하나? 김일성도 마찬가지다. 쉽게 보면 브라질엔 룰라가 있고 베네수엘라에는 차베스만 있을 뿐이다.


문제는 노심이 그런 인물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일테다. 동의한다. 나조차도 용인이 안되서 '그러면 안됩니다'라고 하고, 때론 대놓고 싫은 티를 박박낸다. 하지만 난 2가지 점에서 노심에게 기대하기보다는 그들을 인정한다. 그래서 단순히 인물론만으로 노심을 비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1.  노심의 지난 역사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우스워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존중하며, 내가 스스로 그 궤적에 내 삶을 투영해 보았을 때 '난 그러지 못한다'에 올인할 수 있다.


-2.  노심의 진심이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약점도 있고, 나름 살아온 과정상 고집도 있고, 그것때문에 갈등하고 욕도 먹고 칭찬도 듣지만 진심은 진짜다. 김제동의 촌철살인은 개념의 증거가 되지만, 노회찬의 촌철살인은 가벼움의 증가가 되는 왜곡된 시선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진보신당에 노심만 있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신과 같이 노심만 보는 풍토가 이쪽이고 저쪽이고 많기 때문에 문제다라는 것이다. 스스로도 노심만 보면서 노심밖에 없다고 하면 이거 우스운 일 아닌가. 당장 진보신당 홈페이지를 가보면, 선거기간임에도 1인 주거권과 관련된 토론회가 열리고, 여성정책을 평가하는 토론회 등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청년노동권 사각지대 문제로 프로게이머의 노동권 문제로 기획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못 알리는 쪽이 잘못이라고?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을 노심의 입을 통해 알리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3. 결국 진보신당 지지하라는 거냐? 맞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것인데, 무지 잘난척하면서 세상의 고민은 다짊어진 놈이 투표날 등산을 가더라. 투표거부도 개인적 권리라나. 맞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게 편하게 살면서 왜 남들에게는 A부터 Z까지 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살라고 하는데? 


그래서 진보신당을 지지않아도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진보신당과 반엠비의 사이에서 갈등하는(글의 맥락에서 드러냈다고 보는데, 앞으로 명시적으로 표현해야 겠다) 사람을 염두에 둔 것이다.(글의 지평은 내가 만난 혹은 접한 이들이 경계를 이룬다) 그 밖에? 찍던지 말던지. 애초부터 내가 그들에게 뭔 할을 할 깜냥도 없을 뿐더러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욕먹어가며 화살표를 제시하기도 싫다. 다만 치사한 변명이나 하지 말라는 거다. 말뿐인 사회주의? 좋다. 말뿐인 혁명? 좋다. 당장 당장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작은 것들이 가시처럼 있는데, 그보다는 가시의 원흉을 찾아 없애야 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가시를 없애야 몸체를 볼 수 있다. 가시 너머에 몸통이 있다는 선험적인 판단은 지지하나, 그것을 가리키는 것만으로는 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뭐, 지난 10년간 반복되는 말을 내가 왜 하나 싶다. 걍~ 서로 하고 싶은대로 하자.


이제 트랙백을 해온 글에 대한 느낌을 밝혀야겠다.


진보신당이 아니라 진보신당 당원에게...라. 괴롭다. 도덕적인 개인과 비도덕적인 사회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니부어의 결론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사회엔 개인 차원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가 존재한다고, 즉 사회적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신당과 당원이 분리된다면, 그리고 훌륭한 당원과 훌륭하지 않은 당이 그렇게 선연하게 구분된다면 당의 논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테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의 구분이 아프지만 동의한다. 내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색하지만 난 그래서 분당이후 지속되어온 진보의 재구성이니 하는 것들이, 외부를 중심으로 사고되는 것에 반대해왔다. 진보신당의 외부는 그 자체로 구태인데, 이합집산을 제외한 어떤 재구성이 가능할까라는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외연의 확대가 아니라 정치의 논리, 운동의 이성을 재평가하고 재구축해야 한다는, 즉 잊혀진 혹은 새로운 '대의'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지난 2년동안 좌충우돌해온 것이 썩 나쁘진 않았다고 본다. 노심과 진보신당은 무주공산이 아니다. 그와 함께 어깨걸이를 하고 있는 적지 않은 당원들이 함께 걸어주기 때문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노대표의 조선일보 방문에 대해선 즉각적인 반발을 낳았고 내부적으론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대한 논란까지 확산되었다. 부산 등의 대연합에 대해선 이미 논란이 지속되고있고, 선거국면에서의 복잡한 정치지형과 어려운 판단의 지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난 갈등이 있는 조직을 사랑한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갈등을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진 않는다. 그동안 운동 자체 정치 자체, 즉 수단이 목적화된 경향성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운동을 만들것이다. 서울의 일년 예산도 모르고, 심지어 자치구 개수도 모르면서 서울선거에 대하여 훈수를 두는 소위 진보주의자들을 봤다. 그들의 로두스는 어디쯤에 있는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와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의 로두스는 바로 여기다. 


내가 참여를 말하는 것은 훈수 뒤에 숨어있는 정치적 계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순진함이 너무 음흉하다. 이상한가. 뭐라 딱 집어 설명할 순없지만 나의 촉이 그렇게 말한다.^^ 내가 민노당 분당했을때 삼일밤낮을 울었던 것처럼 이거아니면 안돼라고 하지 말고 적어도 '애정'이 있다고 자처한다면 뭐라도 해보라는 것이다.


난, 진보신당이 싫다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그래서 '뭐' 하겠다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본적이 없다. 적어도 자기편하자고 싫다는 말만 할 줄 아는 사람은 도덕적까진 몰라도 윤리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참, 부처님 잘오셨어요~~ 이 사바 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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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순결하신 당신에게...

양비론이라면, 이것과 저것 사이에 단차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저것보다 높은 혹은 우월한,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힘이 세다면,

양비론은 그야말로 양비론을 가장한 약자 죽이기가 된다. 


이상하게 소위 '진보운동'판이라는 곳에는 순결한 영혼이 많은바, 이번 민노당이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행태와 사퇴한 후보에게 살아있는 영혼을 부여하신 민주노총의 입장에 대한 시각에서도 그렇다.


내가 봤을때 모호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문제다.


쉽게 97년 이야길 해보자. 국민승리21이라는 듣보잡 단체를 만들어 진보진영의 후보로 권영길 대표를 내세웠다. 그때가 어떤 땐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가 되나 마나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국민승리21의 회원이자 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을 했던 나는 욕을 꽤나 먹었다.


아마 그때 김대중이 떨어졌으면, 나나 국민승리21은 역사의 죄인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2010년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은가? 불과 2년전만 해도 역사상 가장 실패한 정권에 불과했던 노무현 정권과 그 잔당들이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리고 수많은 진보연 하는 이들이 그들의 꽁무니를 쫒고 있다. 국민승리21의 유산인 민주노동당은 아예 투항했다. 


당연한 것이 당시 국민승리21의 못된 놈들은 이미 진보신당이라는 새사림을 차렸고, 당시 김대중을 찍었던 인간들이 민주노동당을 접수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민주노총의 뛰어난 능력? 민주노총은 자격도 안되는 진보정당 통합을 말하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노동자정치세력화가 뭔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를 바라보는 시선들인데, 다들 민도당에 거품물고, 민주노총에 비판한다. 그리곤 한마디를 붙이는데 '그렇다고 진보신당이 잘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대략적으로 이유를 꼽아본면,


- 진보신당도 야권연대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 부산이나 다른 지역은 민주당하고 단일화했는데 뭘


정도인데, 거참 속상하다. 이게 서두에 전제한 양비론의 전형적인 방식인데, 진보신당에게 아주 불리한 구도라는 거다. 문제가 많은, 그래서 동의할 수 없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등가에 놓으면, 선택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당선가능성이 높은 데로 간다. 


즉, 내가 의심하는 것은 그토록 어렵게 한명숙을 찍을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라는 점이다. 물론 혹자는 이쪽 저쪽 다 싫어서 아무도 안찍으련다고 한다. 뭐, 그도 방법이지만 투표장엔 꼭 가서 무효표로 만드시라. 집에서 탱자탱자 놀거나, 친구들이랑 등산이나 가면서, '난 이러저래서 적극적으로 투표를 거부한 거야'라고 마스터베이션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 판이, 민노당하고 진보신당하고 같은 놈 만들어서 뭉게도 되는 판인가라는 점을 고려해보자. 말로만 사회주의하자는 쪽 빼놓고, 현실정치에서 가장 변방의 외연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이번 선거한번으로 접을 것이 아니라면 그 한표를 통해 어떤 '의미'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다.


현재의 국면에서 한명숙을 찍으면, 그 시절 거리에서 섰던 스스로를 정당화할수 있는가? 게다가 그런 민노당과의 진보정치 재구성이라니... 손발이 쪼그라든다.


그래서 말인데, 정말 고민이라면 진보신당을 찍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진보신당을 접수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선거이후의 판짜기에 고민이 많은 진보신당 내부자 중 한명인데, 같이 해보면 어떨까하는 거다. 


뭐, 이 블로그의 글을 몇이나 보겠냐만은 되도 안는 순결한 분들이 창궐하는 걸 보니 역시 운동판엔 변한 것이 없구나는 생각이 들어 기록차원에서라도 남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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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응모용 포스트... 세상이 그렇지 뭐

책 이벤트를 한다.

노빠이신 탁현민씨가 새책을 내놨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공식적으로 서평을 강요하는 이벤트라니 뭐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책 공짜니까.

 

http://blog.naver.com/thenanbiz/150085817606

 

 

<애플 웨이>, <애플 쇼크> 리뷰어 당첨자 공지사항 발표 이후로
다시 한번 이벤트로 인사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여러분께 알려드릴 이벤트는 탁현민 저자의 <상상력에 권력을>로
지난 이벤트와 마찬가지로 리뷰어를 신청 받으려고 합니다.
<상상력에 권력을> 리뷰어 이벤트 역시 10권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대중문화는 대중과 문화는 소외되고 연예산업과 미디어스타만 존재하는 것으로 읽힌다. 
문화는 여전히 보편적 삶의 양식이 아니라 천박하거나 혹은 고결한 판타지만을 그리고 있으며 
대중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미디어와 자본에 구속되어 있다. 
과연 우리는 미디어로부터 자유롭게 우리들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고 있는 것일까? 
각각의 대중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가치가 부여된 문화를 생산해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현대의 대중이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대중으로 서고 문화로 살았던 적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대한민국 대중문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탁현민이 그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 이벤트 기간 : 2010년 5월 7일(금요일) ~ 2010년 5월 13일(목요일) 7일간                            

 

▶ 당첨자 발표 : 2010년 5월 14일(금요일) '더난 EVENT' 게시판에 추첨을 통해 총 10분 게재      

 

                 ▶ 참여 방법 : 1. '[더난 EVENT] 상상력에 권력을 - 리뷰어 신청 이벤트'포스트를 내 블로그에 스크랩한다.       
                            2. '[더난 EVENT] 상상력에 권력을 - 리뷰어 신청 이벤트'포스트에 댓글을 등록한다.(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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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이라...무엇을 바꿀마음이 있었을까?

트랙팩님의 [촛불 1년] 에 관련된 글.

작년 이맘때 즈음이겠다.

진보블로그 트랙팩에서 '촛불이 어떤 의미인가'라는 주제를 내건 적이 있다. 그로부터 1년... 이젠 과거의 그 일에 대해 이야기 해보잔다.

난 이렇게 생각했었다.

결국 우리의 촛불은 정권의 후퇴를 가져오지도 않을 뿐더러, 민주주의의 심화를 가져오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자발적 참여의 힘, 규정되지 않는 그 힘의 발견이 현재 2~30대가 겪는 정치적 무기력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적 신세대의 등장으로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지금은? 난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다고 보지만, 판단을 유보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촛불 정국의 승자와 패자를 꼽는데 분주하지만, 사실상 복수의 사건들로서 촛불은 각자의 입장에서 취사선택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어쨌든 현재의 모습에서 비추어 볼 수 밖에 없을 텐데, 결국 주체의 능동성은 남고 주체들의 결이 바뀌진 못한 사건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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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quot;솔직히 말하라&quot;

 

 

 

 

 

 

 

 

 

 

 

 

  

 

 

 

 

- 역시 문제는 전달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가는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 익숙한 나조차도, 새롭게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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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청수의 장기를 어따 쓸꼬~

어청수가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1월호 표지모델로 등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노컷뉴스 기사: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114800040)

이에 대해 장기기증운동본부는 이렇게 해명을 했다.
(해명: http://www.donor.or.kr/board/board01.aspx?bname=Bd_Rush_Notify&mode=view&boardID=1&thread=15000&pageNum=1&readCount=38&old=Bd_Question)

이와 같은 논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두 가지.

1번. 어청수와 장기기증까지 연결시키는 것이 오버일까?

기증본부의 말에 따르면, 경찰청이 공공기관으로는 유일하게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해주어서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표지모델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럴법한게 위의 기증본부 글을 보니 꽤나 많은 경찰들이 장기기증에 서약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인기부자들이 반발한 것이다. 어청수가 표지모델인것이 기분나쁘다는 거다. 게시판의 글들을 보면 꽤나 감정적인 글에서부터(그냥 어청수 낯짝이 싫다는) 시민들을 폭도로 만든 어청수가 자신과 같이 장기기증을 한다는 데에 대한 심리적 타격을 호소하는 글까지 다양한 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어청수와 장기기증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오버라고 말한다. 특정 사람에 대한 호불호로 장기기증이라는 행동을 부정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생각은 어짜피 장기기증을 택했을 때에도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이었고 그것을 어청수때문에라도 포기하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깃털처럼 가벼운 일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망치처럼 무거운 것이 세상 이치라. ^^

문제는 어떤 이들이 오버하든 말든, 매사에 정치적 옳바름을 실천하고자 하는 행위에 대해 이것과 저것을 다르니 별도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오류다. 사람의 머리는 그렇게 이 영역과 저 영역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시험을 못 본 사람이 주변사람한테 화를 내는 것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가?

해서 다음 문제로,

2번. 어청수의 장기기증운동은 그 자체로 착한일 일까?

서정주 시의 아름다움은 그의 친일행적과 무관하다?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적을 듯. 하지만 이건? 이명박이 참모진에게 알리지 않고 소망교회에서 하는 자선행사에 수억을 기부했다.

자선행사에 주목을 할 것인가, 소망교회에 주목할 것인가, 알리지 않은 선행에 주목할 것인가?

내가 이런 문제를 보는 관점은 일관성의 측면이다. 과연 과거에 이명박이 이런 행동을 한 일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만약 없었다면, 그런 선행 따위야 4년 있다가 해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에 있는 자가 이런 저런 정치사회적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행할 자선행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어청수의 장기기증운동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는 과거 지역청장일 시절엔 하지 않았던 행위를 경찰청장이 되고선 시행했다. 여기서 어청수의 종교적 목적이 의심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분명 기독교인으로서 선택한 선행의 일환으로 장기기증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밑의 경찰들은? 청장이 나서서 '나 장기기증한다'했는데, 그 밑은 자동적으로 '배를 째는 수준'이 아닐까? 재미있는 것은 기증본부의 해명을 보면, 경찰에 자극받아서 해병본부에서도 한단다. ^^

경찰이나 해병과 같은 집단에서 이런 집단헌혈이랄지, 장기기증이랄지가 잘되는 이유가 궁금한가. 그러면 군생활을 한 이에게 물어보면 알것이다.

내 생각엔, 경찰과 해병과 같은 상명하복의 조직문화가 있는 곳에선 최대한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조직의 원리상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는 조직의 논리를 선택할 가능성이 큰 집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증본부 측이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과 함께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만약 기증본부가 소위 '영업' 차원에서 경찰과 해병대와 손을 잡고 있다면... 사실 그것은 조직윤리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왜 장기기증이며 무엇을 위한 장기기증이냐는 것이다.

이번 어청수와 장기기증 논란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고, 나름 정리를 해 보았다. 딱 한 문제가 남았는데, 만약 내가 장기기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하필이면 어청수가 기증한 것 밖에는 없을 때 난 무엇을 선택할까라는 점이다.

솔직히 지금 입장에선, 깨끗하게 죽지 않나 싶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이를 비난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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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노무자의 정체

정부에서 발표한 뉴딜-녹색 일자리때문에 말이 많다. 특히 일자리의 질에 대해 이런 저런 논란이 있나본데, 재정기획부도 맨날 해명 기자회견 하느라 정신이 없나 보다.

 

해명 중 주요 내용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단순노무직'이 다수가 아니다라는 변명이 있었나 본데, 이에 대한 댓글이 기가 막히다.

 

 

 

 

최고의 추천글인, 아, 단순노무직이 아니면 "복잡한 노무직이구나"라는 댓글이다. 눈물을 뺐다.

 

그리고 그 밑에 '용어의 정의'라는 댓글!!

 

사무실에서 눈치없이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즐겁다. 세상이 명랑하다는 증거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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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라는 이름의 몰상식

최근 언론노조 파업과 국회파행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흥미로운 논리가 발견된다. 해서, 당시 내가 말했던 내용을 기억을 위해 가다듬어 놓는다.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에 대해서 가장 대표적인 논리이자 상식으로 통하는 말은 아마도 "시청자의 권리"라는 것이라 본다. 최근 중앙일보도 방송이 재벌에 의해 장악되어 특정 계급의 이해만을 반영할 것이라는 마봉춘의 보도에 '그렇게 되면 시청자들이 보지 않을 것'이라며 반박했다는 글도 보았다.

이른바 '소비자 주권'의 논리.

어제 KBS 뉴스에서 이스라엘의 지상전 투입과 관련한 보도를 하면서 이스라엘 국방부장관을 인터뷰한 미국 언론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 방송이 바로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폭스뉴스다. 모든 매체가 모든 뉴스원에 대해 동등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만 존재하는 가정일 뿐이다. 이명박은 당선 직후 <동아일보>에만 인터뷰를 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았던가.

그동안 매체의 프레임 형성권에 대해 집중하면서, 조중동 찌라시와 같은 행태가 많이 언급되었는데 문제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조중동의 경우에는 사실전달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포기하면서까지 마타도어로 일관하는 비언론인 셈이기 때문에, '언론사의 다양한 입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이미 논외에 속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을 보는 이유다. 내 주변에도 '조선일보를 알기위해 조선일보를 본다'던가 '조선일보의 정보력을 넘어서는 언론이 없다'는 등 다양한 조선일보 찬양론의 버전들이 존재한다. 경제적 영향력이 바로 정보 접근의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왜 이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그것은 삼성이라는 대재벌의 영향력 때문이다. 비공식적인 정보의 집중을 바탕으로 '직접' 관료집단과 소통하고 있는 연구소의 능력을 누가 넘어설 수 있겠는가.

만약 마봉춘이 재벌의 금가락지에 넘어가게 된다면, 여타 지상파에 비해 막대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시청자로 하여금 '볼 수 밖에 없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은 시청자의 선택를 넘어서는 것이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이정도의 재벌방송은 모든 뉴스보도를 '자기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말해, "정부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이런 저런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보도한다면, 며칠 뒤에 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위해 이런 저런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상황이 그렇다면, 아무리 재벌이 소유한 마봉춘이 밉다하더라도 마봉춘을 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쉽게 생각해서 지금 이블로그를 보는 사람 중, 혹은 그 주변에서 여전히 조중동을 탐독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과연 그 사람들이 바보라 그럴까?

시청자의 선택권이란, 비대칭적인 정보량을 지닌 언론 매체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마봉춘의 예능화보다 내가 더 우려하는 것은 이런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언론노조의 파업을 비롯하여 시민들의 투쟁은, 시청자의 선택권을 지키기위한 싸움이다.


다음으로 다수결의 논리.

새해랍시고 김영삼 옹께서 입을 여셨는데, 최근 국회 상황에 대해 '다수결의 원칙'을 강조하셨다 한다.
나름 합리적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꽤나 다수결의 논리를 들어가며 현 국회의 상황을 비판하곤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뭐 이들에게 한나라당도 예전에 그랬어!라고 말하면, '그래서 그렇게 욕하는 한나라당과 똑같은 짓을 해도 된다는 것이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다수결의 정체에 대해서다. 물론 다수결은 소수의견의 존중, 다수결의 관철방식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소소한 제한들이 있지만, 일단 빼자.

국회의원은 국가를 구성하는 3개 주요한 기능 중 하나인 '입법행위'를 위한 대의자다. 유권자는 정치적 성향이나, 후보자와의 이해득실로 자신의 대의자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로 다수당과 소수당이 만들어진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 한나라당에서 "국민들이 만들어준 국정운영의 권한"으로 "엠비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심각한 모순이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다수결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것인데, 이명박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가진 것도 맞고 한나라당이 선거를 통해 다수당이 된 것도 맞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4년이나 5년동안 무슨일이든 '다수의 의지'를 표방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론조사가 참 많다는 점이다. 유권자의 48% 지지로 대통령이 된 이명박의 지지도가 30%라면 합법적인 권력 획득 이후의 권력운용과 관련된 정당성은 없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그들이 말하는 다수결로 보자면, 국민 중 30%만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또한 국민의 60%가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에 반대한다고 하는데, 민주주의의 원칙인 다수결에 따르면 이런 국민들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국회안의 다수와 소수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한나라당이 소수당이면서도 몽니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언론관계법만 놓고 보자면, 한나라당 국회의원 1명은 고작해서 0.6 정도의 국민대표성을 지니고 있고 야당의원들은 1.5에서 1.6 정도의 국민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한나라당 2명 정도 모여야 사람 1명 구실하면서 다수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을까?

조중동이던 한나라당이든 곧잘 이용하는(절대 자신들이 소수일때는 이용하지 않는) 다수결의 원칙은 제도의 원인과 결과에만 존재하는 반푼짜리 원리인셈이다. 과정 속의 다수결을 따져보면, 한번 다수가 지속적으로 다수인 적은 별로 없다. 그게 민주주의 아닌가 말이다.

신년을 맞이하여 보기 힘든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고민해서 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들이 말하는 상식이란 고작 상식처럼 보이는 비상식이자 몰상식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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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라는 행위는 권력에 대한 승인이다

박노자의 "세상의 제일큰 거짓말-이스라엘의 만행을 보면서"(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tb/18058)와 관련된 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은, 뻔하고 뻔한 역사의 반복이다.
영국의 빽으로 현재의 이스라엘을 차지하고 앉았을때부터,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길때부터 폭력적으로 탄생한 나라인 셈이다. (과거의 예를 들어 원래부터 이스라엘 땅이였다고 한다면, 도대체 역사적으로 변해왔던 역사적 국경을 어느 시점에서 고정시켜 판단할 것인가?)

박노자는 이 글에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집단으로부터 배제' 당하는 것이라 했다. 동의한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고독이고, 특히 비존재로서 살게되는 처지라고 생각한다. 해서 대다수의 선량한 이스라엘인들의 침묵을 이해해야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동의할 수 없다. 침묵은 그 자체로 의사의 표현이다.

이를테면, 이번 폭격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 이스라엘 학자가 '세계평화'를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가자 지구의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나라의 국민이면서 아프리카 등의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어떤 선량한 이스라엘 청년의 행동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자신이 속한 집단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무감각하면서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니부어의 말처럼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 속해 있다면, 좀더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사회화하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도덕적 사회의 인정은 현실주의가 아니라 현실순응일뿐이며, 가장 추상적인 관념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아침에 박노자의 글을 보니 어제 국회앞 시국기도회에서 한 대학생이 나와서 했던 말과 겹쳐진다. 그 대학생은 이 정부가 국민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공포에 질린 국민들은 정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용인해버리고 마는 것인데, 또라이당이나 정부의 바보들은 그것을 인정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해서, 날씨가 춥더라도 '그게 아니다'라며 거리에 설 수 밖에 없다. 적어도 침묵으로서 이명박 정부의 오해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이에 대해 침묵하면서 다른 사소한 권력에 분노하는 것은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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