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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땅을 사는 나라

2mb의 압박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출범초기부터 화려한 어록을 남기시는 2mb와 아이들의 공연을 보고 있노라니 앞으로 5년 동안 얼마나 현기증이 일어날까 두렵기 까지 하다.

 

후배 '배용준을 쫓아가고자' 일본 국채를 사들이고 140억원이나 재산을 모으신 문화부 장관,

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절대농지를 땅투기 대상으로 삼으신 환경부 장관 후보자,

신앙을 가지면 빈곤이 극복된다는 '주의주의적' 복지관을 가지고 계신 보건부 장관,

암진단 결과 암이 아니었다는 소식에 오피스텔을 선물받은 여성부 장관 후보자,

모두다 범인들은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내공의 소유자 였으며, 그들의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전신의 혈도가 뒤틀어지는 절대 고수였다. 아~~ 이들을 재야에서 골라내신 2mb의 가공할 만한 전산처리능력은 어떠한가?

 

그런데, 이들을 뛰어넘는 내공의 소유자가 나타났다. 이름하야 최시중. 이 거사께서는 작년 BBK 검찰 수사당시 2mb의 무혐의 결정이 내려지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의 꼬붕거사였다. 이 분께서 흘러넘치는 내공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방송과 통신을 장악하시기로 하였는데, 귀신이 발목을 잡을 줄 누가알았나?

 

수익이 없는 아들이 용산의 900평 땅을 거래한 내역에 대해 묻자, "명의도용 당했다"

이에 대해 "그럼 귀신이 땅투기를 했다는 것이냐"

"귀신이 했다고 본다" 두두둥!!!

 

거룩한 2mb 장로의 시대에 귀신에게 농락당한 불쌍한 영혼이 있었다니... 아무래도 술법이 약한 가보다. 한기총 등이 좀더 분발할 일이다.

 

어쨌든, 그 과정을 지켜본 범인 왈 "씨발 귀신도 땅투기하는데, 난 뭐냐?". 당연한 것 왜 묻나?

 

우린, 2mb 시대에선 투명인간이다아~~~~

 

어쨌든, 국회청문회 보고서도 채택하지 않고, 또다시 임명장을 준다니 가공할 만한 내공의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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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신해철, 멋지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은 대부분 고 3때 결정된 것이고, 이를 10년도 넘게 주구장창 좋아하고 있는 편이다. 아무래도 이래 저래 사람을 바꿔가며 좋아하는 것이 귀찮아서 일텐데... .

 

암튼 내가 태어나서 이제껏 라디오프로에 엽서를 딱 한번 보내봤다. 옛날 옛적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경우에는 여름방학때마다 하는 엽서전시회는 갈 지언정 언감생심 엽서를 보낼 생각은 하덜 못했더랬다. 그럼에도 고3때 벼락같이 들이닥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최근 다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고소영씨다.

 

기억하는 사람은 하겠지만, 93년도에 고소영은 라디오 DJ를 했었다. 그리고 순정에 불타던 한 소년이 그녀에게 절절한 엽서를 써서 보낸다. 지금이나 그때나 악필로 유명했던 탓에, 깍두기 공책에 글을 쓰듯 한 자 한 자 정말 열심히 글씨를 써서 보냈다. 내용은... 생각나지만, 차마 말할 수 없다^^;; 무덤까지 가져갈 내용인지라...흐흐(고3은 몸 이곳 저곳에 털만 난 꼬마다. 지금 생각하면 딱 그 수준이다. 흐흐)

 

 

그리고 한 명이 있었으니 바로 신해철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롹' 좀 듣는다는 친구들은 신해철 광신도들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백두산 아저씨는 쌈빡한 맛이 떨어졌고, 블랙신드룸 등 밴드들은 와닿질 않았다. 오히려 김세황의 기타가 미친듯이 날뛰고, 신해철의 숨가쁜 고음(대신 숨쉬느라 헉헉 대기 일쑤)에 열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넥스트 2집때였나? 친구하나가 공테이프를 하나 들고 와서 넥스트 매니지먼트사에 부탁해서 새 앨범 데모테이프를 구했다고 주장했다. 그 테이프에는 '아버지와 나'가 흘러나왔다.

 

아! 이럴 수가.... 최고, 최고....

 

그런데, 2분정도 지나자 '시간 관계상 여기서 줄이기로 하구요..'하는 디제이의 맨트!! 이 녀석이 그날 새벽에 했던 모 라이오 프로의 노래를 녹음해온 것이다. 그래도 앨범이 출시되기 전이었으니 다들 광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땐 기획사건 음반사건 그렇게 하게 해줬나 보다... 지금 생각하니 신기하네)

 

그런데 그가 인터뷰집을 냈다. 지승호씨가 나섰으니 품질은 보장할 만.

 

<쾌변독설>, 지승호, 부앤리브로, 2008.

 

 

 재미있다. 왜 신해철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구구절절히 말하기 보다는 이 책을 읽어 보시라고 할 수 밖에.

 

다만 이 이야기는 하고 싶다. 최근 영어몰입교육과 관련해서 신해철이 하는 '고스트스테이션' 방송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 역시 고스 식구로 예전 '야후'에서 고스할 때부터, SBS, MBC 등등 굴러먹을 때를 거쳐 지금까지도 듣고 있으니, 어둠의 자식의 구력은 꽤 되는 편이다.

 

신해철이 고스에서 말한 정도의 말가지고 그렇게 까지 하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정도는 약과라고 말하고 싶다. 마왕으로 군림하면서 어둠의 자식들에게 상처대는 말들을 찍찍하기 일쑤이고, 게다가 잊을만 하면 상처 덧나라고 소금가지 뿌려대는 자이니 말이다.

 

그래도 나같은 어둠의 자식들은 마왕을 좋아한다. 최소한 되먹지 않는 거들먹거림은 없다. 그리고 솔직하다. 엄밀하게 따져 '각하'를 외쳐대는 골빈 이덕화같은 이들보다는, 아무런 생각없이 이명박 옆에 서있던 소유진보다는, 낫지 않은가?

 

책 내용에 보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는 (과거의) 민주노동당에 닿아 있는데 집 사람을 생각해서 당 가입은 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는 부분이 있다. 거참. 부르스 스프링스턴은 자신의 콘서트에서 당당하게 반전과 부시반대를 외치고, U2의 보노는 빈국부채탕감을 위한 활동세계경제포럼에서 연설까지 하고 영국 일간지 표지에 까지 등장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진짜 딴따라와 가짜 딴따라를 구분하지 못한다.

 

뭐, 예전 고스 얘기나 U2의 보노 이야기 등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으나 각설하자.(어쨋든 일할 시간이니까!! 헴헴)

 

마왕 만세, 만세, 만세세! 진보넷에서도 어둠의 포자를 널리 퍼트려 바퀴벌레와 같이 생존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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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 우경화, 우경화

* 민중언론 참세상[[정세칼럼] '진보'의 리트머스시험지, 진보신당과 사회주의정당] 에 관련된 글.

한국인권뉴스 대표라는 사람의 소위 '정세칼럼'을 보면서 한 마디는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우경화라는 말과 머리띠에 대한 것이다.

 

우선, 우경화라는 것에 대해.

 

노심당으로 간다고 우경화라고 주장한다면, 역사적으로 진정한 사회주의정당은 없었던 셈이다. 특정한 인물이 부각되지 않고 정당자체로 평가받은 사례가 과연 있었는가? 만약 필자가 그것을 알려주면 고맙겠다.

그런데 문제는 더 심각한데 있다. 일종의 비평의 딜레마라는 점인데, 특정 현상에 대한 비평은 보는 맥락에 따라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이다.

 

보자. 민주노동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진보신당의 생존여부는 결국 이번 총선이다. 이번 총선에서 유의미한 성과 -단 1석의 국회의석 획득이라도 -를 내지 못한다면, 진보신당의 실험은 실패했다는 논평이 줄을 이을 것이 불보듯 뻔하다. 과연 이런 논평에서 필자는 자유로울까?

 

우경화라는 것은, 정치적 이념의 기준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간이 있어야 우와 좌가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게 개인적인 신념의 수준과 제도정치에 대한 개입을 염두에 둔 정당운동의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 요즘에도 청와대에 깃발만 꽂으면 사회주의혁명이 달성된다고 믿는 낭만적 좌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흐름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왼쪽에 놓고 다른 쪽을 우경화되었다고 비판하는 것 만큼 편안한 포지션이 있을까 싶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사회주의당의 실험이 우리 역사에서 실패했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나는 비평가의 기본 소양은 정세적 판단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현존하는 정치세력간의 싸움인 국회의원선거라는 국면에서 우경화하는 딱지를 붙임으로서 필자가 얻을 것은 자그마한 자기위안 정도가 아닌가 싶다.

 

이는 자연스럽게 머리띠의 문제와 연결된다.

 

머리띠와 투쟁조끼를 입지 않으면, 투쟁심이 없는 것인가? 이거야 말로 좌익소아병을 넘어선 불신화아닌가?

울산에서는 같은 투쟁조끼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있으며, 서울광장에 모인 김홍도와 그 무리들도 '구국기도회'하면서 머리띠를 묶지 않나?

 

물론 필자가 머리띠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망가 중심당을 우려하는 것이리라. 그런 연장선상에서 머리띠나 투쟁조끼가 부끄럽냐? 고 일갈하고 싶은 심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순전히 오버다. 정치공간에서, 그것도 제도정치의 개입을 수단으로 삼는 제도정당에서 청바지 입고 투쟁하는 것은 정세적 판단이지 이념 변화의 증거라 몰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수준이라면 평생 개량한복을 입고다니는 사람만이 민족주의자라는 것인가?

 

비평의 미덕은,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데에 있지 주저앉히는데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진보신당을 사회주의정당과 비교하는 것은 '조크'성 발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동아리 수준을 벗어난 사회주의정당이 있기는 한 것인가? 제도를 통한 방법이 아니면, 그들이 무장혁명이라도 할 것이라 말인가?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는 절반 가까운 국민들은 무지몽매한 자가 아니면, 숙청대상인가?

 

도대체, 어떤 정세에 대한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평의 미덕을 한 참 벗어난 글을 보는 것 만큼 고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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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청산은 부역자 청산부터 시작해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부실한 뇌용량의 한계를 드러냈다.

 

- 정부내에 좌파법률을 골라내는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아~~

- 좌파세력이 이명박정부의 개혁에 발목잡기를 하고 있다아~~

 

2MB의 정부에 무뇌충 원내대표니, 최고의 앙상불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꼭 짚어볼 것이 있다. 그것은 과거청산에 있어 기본과 같은 것이다. 바로 부역자들을 먼저 숙청하는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지난 10년간 소위 좌파법률은 좌파 세력의 찬성만으로 통과되지 않았다. 그것은 한나라당 내부에도 좌파법률에 찬성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간자인 셈이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내 생각보다 뇌용량이 1세제곱mm 만큼 더 있다면, 부역자 처단을 우선하는게 좋겠다. 그래야 기승전결, 할 말이 있을 것 아닌가?

 

뭐, 50cc로 시속 150km를 내라는 요구라는 것 안다. 그러니 한심하고 한심하고 한심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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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난데즈, 김부선 그리고 이참

아침안개님의 [필리핀 출신 여성의 국회 입성을 바라며...] 에 관련된 글.

 

창조한국당에서 필리핀 출신 귀화인인 헤르난데즈씨를 비례대표로 공천하겠다고 밝혔다. 뭐, 창조한국당스럽다는 생각이다. 포부를 보면, 외국인노동자들의 차별을 없애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인데... . 비슷한 시기에 한나라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한 이참씨도 있다. 그의 포부도 헤르난데즈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창조한국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라면, 귀화인의 국적이 다르다는 것이며 이는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영어에 뽕간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이참씨는 방송인을 거쳐 사업가로 화려한 생활을 하는 반면, 헤르난데즈씨는 갖은 고초를 겪으며 어려운 타향살이를 해왔다. 이 만큼이 창조한국당과 한나라당의 차이인셈.

 

뭐,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 필리핀 귀화인의 국회입성을 바랄 수도 있겠다. 정치적 판단도 결국 개인적 취향의 형태일 테니... . 그럼에도 난 창조한국당과 한나라당의 귀화인 비례대표 공천이 영 마뜩찮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우선, 당사자주의의 문제이다. 귀화인이 국회의원이 되어야 귀화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그리고 어짜피 귀화인도 한국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다수 비귀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할 자격이 있을까? 난 개인적으로 장애인이 국회의원이 되어야 장애인의 권익을 확대할 수 있고, 노동자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문제는 장애가, 그리고 노동자라는 신분이 공직 진출에 문턱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과연 페르난데즈씨가 4년의 국회의원 임기동안, 낯선 법체계와 국회문화, 그리고 지금껏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외국인 노동자 일반의 문제점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만약 창조한국당의 선택에 신중함이 있다면, 위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공천의 진실성 측면이다. 차라리 국적법 변경이 우선이다. 그리고 지금도 자행되는 외국인노동자 탄압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었냐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국내 노동정책과의 상관성 문제다. 하나씩 따져보자. 창조한국당은 그동안 외국인노동자 인권문제나 귀화인의 문제에 대하여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온 적이 없다. 이 밝혀온 적이 없다는 표현은, 비례대표까지 만들정도로 핵심 공약에서는 벗어났다는 말이다. (솔직히 다문화주의 사회 건설 류의 공약을 내걸지 않은 정당이 어디있는가)

 

그리고 창조한국당에 있는 인사들이 국내에서 탄압받는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적을 본 적이 없다. 문국현이 운영하는 유한킴벌리는 얼마나 우수하게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을까? 그리고 외국인노동자와 국내노동자간의 차별을 없애자고 주장하는데, 이는 국내의 고용정책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한 것일까? 과연 창조한국당이 국내 노동자의 고용조건을 악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없앨 수 있는 묘안이 있는걸까? 이런 고민이 없다면, 이명박 정부의 외국인력 도입을 통한 고용시장 확대정책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 창조한국당의 선택은 보여주기조차 못되는 함량 미달의 졸속-사기성 공천이다.  뭐, 이 정도의 결론을 내는데 중언부언 했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창조한국당 지지자들의 성향이다. 트랙백을 해놓은 글도, 보여주기식이라도 어떻냐고 한다. 결국 낭만적 자유주의자의 성향인 셈인데, 영 불만이다. 왜 창조한국당 지지자 중에서는 까칠한 사람이 없는 걸까? 대선 이후 보여진 행태만 보아도 창조한국당의 제도 정당으로써 한계는 분명한데, 왜 짝사랑은 계속되는 걸까?

 

뭐 그렇다고 너무 까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최근 김부선씨가 진보신당에 가입한 것을 두고, 성을 상품화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의 입당이 타당하냐는 논란이 있었나 보다. 우스운 일이다. 상업영화 제작의 매카니즘 상 영화배우의 자율성이 얼마나 담보가 될까? 만약 트랜스젠더를 상품화한 하리수씨가 진보신당에 가입한다고 해도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일까?

 

그럼에도 선택하라면, 까칠함이 맞다. 그것은 고민이 있다는 증거고, 비판을 함으로써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니 말이다. 트랙백의 필자가 진보신당과 창조한국당 사이에서 갈등하다 창조한국당으로 기운 이유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 끄적여 본다.

 

각자의 생각이 있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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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달리게 하겠다는 말

오늘 신문을 보니, 서울시교육청이 관내 초중학교에 달리기시합을 의무화하겠다고 한다.

 

요지는, 체력이 학업의 기본인데 요즘 학생들은 운동을 하지 않는다 -> 이런 상황에서 학생 관리의 책임이 있는 학교가 방관해서는 안된다 -> 학교가 학생들을 뛰게 해야 하고, 교육청은 이를 학교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것.

 

난 학교다닐 때 달리기를 싫어했다. 달리는 것 자체가 아니라, 기록을 측정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이 싫었다. 물론 내가 잘 달렸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래도 농구를 좋아했고, 여러가지 달리는 놀이는 했었다.

 

그런데, 육상경기를 의무화하라니... 이건 왠 말도 안되는 박통식 교육정책인가.

 

학생들의 체력이 떨어지고, 신체의 균형이 나빠지는 것은 하루 이틀일은 아니다. 이미 서구화된 식습관에 등등의 이유를 너무 잘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 문제가 이것 뿐일까?

 

언제 부턴가 동네 놀이터엔 유아들로 넘쳐나고 한창 뛸 나이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건 단순히 하이들이 놀기 싫어해서일까?

 

서울시교육청의 방법은 너무 쉬운 방법이다. 아이들을 달리기로 내몸으로서 교육기관으로서 스스로 알리바이를 만드는 행위다. 할 만큼 했다는 주장이 가능하겠지.

 

그런데, 다시금 아이들이 달리기 1등에서 꼴찌까지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해법이 될까. 난 지난 번 보다 더 빨라졌다고 느끼면서도 언제나 꼴찌였던 달리기가 죽기보다 더 싫었는데도?

 

우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거 참...

 

우리 아이들은 이제 각종 학원에 이어, 달리기 과외라도 받게 해야될 참인가? 에구구

차라리 하루 정도는 학과공부를 하지 말고, 놀기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 잊혀져간 옛날 놀이들을 아이들에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재미도 있고, 웃고 떠들면서 좋아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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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백의종군' 주장에 대해

심상정, 노회찬 의원에 대해, 그리고 최근의 단병호 의원에 대한 훈수가 줄을 잇고 있는 모양이다.

 

우스운 것은 대부분의 훈수가 '고언'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런 저런 말들로 '백의종군'을 종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우스운가?

 

첫째. 고언이란, 같이 하는 자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충고와 고언의 사전적 의미는 다르다. 그 다름의 핵심에는 말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즉, 말의 대상이 서있는 자리와 말하는 자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느냐 혹은 다른 자리에 서 있느냐로 구분된다. 그런 점에서 같이 하지도 않으면서 고언이랍시고 지껄이는 말들은 짜증난다. 일종의 같은 판에 있지 않냐고?

 

그렇게는 연결되겠다. 그렇다면, 그런 고언과 연결되는 백의종군의 내용을 보자. 백의종군의 유명한 사례로는 이순신의 것과 근래에 박근혜의 것이 있겠다. 이 둘의 백의종군이 가지는 특징은 '신분보장'이다, 이순신의 경우에는 정치적 백의종군에 가까웠다. 당시 조정 내부에서는 유성룡 등 이순신의 중용을 위해 몸을 던지 이들이 있었다. 박근혜의 경우, 더 말할 것이 무엇인가.

 

노회찬, 심상정, 단병호에 대해 백의종군을 이야기하는 하는 것은 쉽다. 일순간 그렇게 말하는 자는 순결한 도덕성의 화신이 되어 버리고, 예의 백의종군을 하지않는 이들은 한 줌 권력의 아집에 사로잡힌 이가 되어버린다. 얼마나 확실한 선인가?

 

하지만 나는 반대다. 여기서 백의종군은 알량한 전략가들의 자기만족에 다름아니다. 내가 정치가로 이 세명을 여전히 신뢰하는 것은 스스로 정치의 바닥에서 몸을 망칠 각오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지방의원의 임금이 노조 전임자의 임금보다 적다는 이유로 선거에 나서지 않는 소위, 노동 활동가들을 보면서 짜증에 앞서 연민이 느껴졌었다. 그럼에도 이런 자들은 나름 노동현장에 복무한다는 위치만으로 아무 말이나 해도 괜잖은 것인가?

 

노동정치는 노동자 정치와 다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정치인 만들기와 다르다. 상식아닌가.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의 장에서 좀더 영약해지는 것이다. 정치에서는 인파이터만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노회찬, 심상정, 단병호는 안에서 싸우는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전 국회의원의 상징을 이용하고 언론플레이를 열심히 해주길 빈다.

 

누구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수한 것에 집착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글쎄,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세상의 때에 더렵혀 있다. 그것이 정상아닐까.

 

노회찬, 심상정, 단병호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주저앉히기 위해 노력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게 맞다. 그들이 지난 4년간의 정치적 자산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용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체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별개다.

 

때 아닌 훈수쟁이들과, 고고한 척하는 이야기들이 판을 치는데 우스운 일이다. 무슨무슨 파라는 이유로 칼을 휘두르고, 사민주의-의회주의라는 말로 깔아뭉게는 초딩 수준의 말들이다. 아무리 싸움을 못해도 링안에서 싸우는 선수에게 욕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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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계속 찝찝했던 건 이 때문이다.

동거

민노당의 자주파 문제는 새로 발견된 문제가 아니다. 처음부터 존재한 문제다. 이번 선거 결과 역시 의외랄 게 없는 그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자주파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방식엔 짚고 넘어갈 데가 있어 보인다. 이번 선거의 실무적인 책임은 다들 말하듯 아둔하고 시대착오적인 행각으로 일관한 자주파에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책임은 그런 자주파와 멀쩡히 동거해 온 평등파에게 있다. 그 동거에 대해 아주 오래 전부터 민노당 밖의 거의 모든 진보정치세력이 비판과 우려를 표시해왔다. 그 문제를 적시하며 민노당을 탈당한 사람도 있다. 민노당의 평등파는 그런 비판과 우려에도 아랑곳없이 자주파와 동거해왔다. 그들은 그 동거가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게 많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선거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안이하고 오만했는가를 명백하게 드러냈다. 이상한 일은, 그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거가 아니라 자주파에게 납치나 감금이라도 되어 있었던 걸까?

 

(http://www.gyuhang.net/mt/mt-tb.cgi/1229. 1413113108)

 

김규항의 글이다.

 

그래, 맞다. 이상하게도 몇달 동안 찝찝했던 것이 이 때문이었나 보다.

이상하게 조승수도, 소위 전진파도 싫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 싶다.

지난 2000년에 '전략적 외연확대'를 비판하는 글을 지역위원회(준) 소식지에 실었다가 운영위에서 공개적으로 욕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젠장.

 

대강 이쪽 저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내게 면피거리를 얻었다. 아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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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라, 민주노동당

예상했던 결과였던 셈.

 

그들의 문법에만 갖혀서 스스로 하고싶은 말만 하고 결국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난무했던 시간들.

 

굳이 사전적인 의미를 갖다 붙인다 하더라도, 과연 '혁신'에 부합하는 내용이었는지 의심된다. 결국 어물쩡 넘어가겠다는 심산인데, '반창고' 하나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걸까.

 

단순하게 따져보면 국민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아직 당에 미련이 있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테고, 여전히 아무생각없는 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국민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면 무색무취해질 테고,

당에 미련있는 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지난번 당대회의 만행이 부끄러울 테고,

그래서 결국 선택한 것이 이 정도이구나 싶다.

 

뭐, 민주동문회 수준의 당이 바라는 것이라면 그대로 하라고 할 수 밖에.

맨날 현장, 현장 떠드는데 그 놈의 현장이란 것이 결국 학교의 학생회 수준이란 말이지.

그러니 무슨 조직이니 이런데선 짱을 먹어도 제도정치에선 3%로 박박기는 것 아닌가?

 

이젠 당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한계가 왔네. 더 할말도 없군. 잘 가라, 2008년의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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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정치적 활동에 장애 구조&quot;가 뭘까

강내희 교수의 '변혁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정세분석'이라는 글을 읽다. 이 글은 지난 1월에 사회실천연구소에서 열린 이론정세토론회에서 제출된 것으로, 비슷한 제목의 김세균 교수 글과 짝글이다.

 

나름 신뢰하는 맑스주의자인 강내희 교수가 진보정당에 대한 글을 썼다기에 찾아서 읽어보았다.

 

솔직히 읽고 난 후의 소감은, '너무나 진지한 마스터베이션'이라는 것?

 

정세적 필요성이 반드시 구체적인 사회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정세적 구부러짐에 과잉인 그의 분석에서 갑자기, 그것도 예상치 못하게 '변혁적 정당건설'로 깡충 뛸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대략의 글 구성은 이렇다. 지금은 정치적 핵분열의 시기 -> 신자유주의 전면화라는 정세적 특징 -> 다수화되는 소수자들 -> 좌+좌 연합의 가능성 -> 변혁적 진보정당 건설.

 

명료하고 간단해 보지만, 그동안 지난하게 논의되었던 계급정당 논의와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면서도 드는 의문.

 

강내희 교수는 '좌파의 정치적 활동에 장애 구조'로 민족주의 + 사민주의 결합체인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글쎄. 사민주의라는 것이 뭘까? 그것도 21세기 현 정세속에서의 사민주의라는 것이 뭘까?

 

정당운동은 제도정치에 대한 개입을 의미하며, 결국 제도정치의 언어구조를 변혁적으로 바꾸는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제도정치에 통용되지 않는 용어를, 중간에 각색하려는 노력도 없이 사용한다면 자기만족 이외에 무엇이 남을까?

 

솔직히 구체적인 정부정책에 대한 분석을 폐기한지 오래된 '문화과학'을 보면서, 결국 진보적 운화운동이라는 것도 동인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강내희 교수가 정직해지려면, 왜 그가 꿈꾸었던 문화사회가 끊임없이 유예되고 있는지를 '문화연대'와 '문화과학'이라는 자신의 활동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솔직한 태도다.

 

그런데, 끈금없이 변혁적 진보정당이라니, 게다가 민주노동당의 존재를 장애 취급이라니?

 

정신적 상쾌함을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휙 날려 버리려는 것 아닌가? 뭐, 이런 저런 논점이 섞여 있긴 하지만, '왜' 이런 글을 썼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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