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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도대체 <인크레더블>은 어떤 영화인가?

(2004년 12월 14일 작성)

 

 

하나의 사건을 두고 분분한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은 ‘자유민주주의’체제의 기본적인 전제이다(이런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빨리 왔음 좋겠다). 해서 책이어도 좋고 행사여도 좋고, 특정한 사회적 이슈여도 이런 저런 생각대로 지껄여도 충분히 타당하다. 그리고 그것을 듣거나 보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이족 저쪽 이야기를 다 들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지라고 맘먹는 기계적 합리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하나의 영화에 두 개의 신문사에서 낸 평가가 사뭇 달라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바로 <인크레더블>. 알려진 바대로 슈퍼히어로가 있었는데 너무나 설친다며 시민들이 이런 히어로를 왕따시키며 결국은 ‘슈퍼 히어로 활동 금지법’이라는 법률을 제정해서 이들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막기에 이른다. 하지만, 어디 시대가 그런 영웅들을 내버려 두는가. 결국 활동을 제기하게 되고 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세 자녀까지 동원하여 세계적인 악당을 쳐부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는 결말이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한겨레>는 전직 슈퍼히어로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다니는 보험회사는 시민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그들의 주머니를 털기 바쁘다. 그것도 체질에 맞지 않는다. 회사에서 잘리기까지 한 밥에게 누군가가 슈퍼히어로 활동을 제안해온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미스터 크레더블도 예외가 아니어서 15년째 보험회사의 상담 직원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자유자재로 몸을 변형시키는 능력을 지닌 그의 부인 역시 전업주부가 됐다.”라고 묘사한다.

<한겨레>의 시각에서는 보험회사의 행태와 영웅의 해고까지 검색의 범위에 들지만, <중앙일보>에게는 ‘조용히’ 살아가는 과정에만 검색을 맞춘다.

 

시각이 어째서 이러냐고. 그것은 <중앙일보>의 도입부와 <한겨레>의 결말 부분을 비교해보면 된다. <중앙일보>의 첫 부분은 “사람들은 ‘법’이라는 수단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일 때가 있다. 사교육을 없애겠다는 이유로 국가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었다. 요즘엔 사람들이 몇몇 신문을 집중적으로 본다는 이유로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도 하다.”이며, <한겨레>의 결론 부분은 “슈퍼히어로를 싫다고 내친 그 사회의 이기심, 자본주의 대기업 보험회사의 횡포와 ‘세계 정복 야욕을 가진 악당’이 어떤 상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이다. 이제 확연해졌다. <중앙일보>는 이 영화의 한 장치 즉, ‘슈퍼 히어로 활동 금지법’에 초점을 두었고, <한겨레>는 영웅이 겪는 일상의 부조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중앙일보>는 자신의 신문이 바로 ‘슈퍼 히어로’로서 주인공인 밥과 동일시 되며 이를 막으려는 시민들이나 국가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신문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 그동안 불법적으로 확대해놓은 <중앙일보>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과 <언크레더블>의 밥에게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어 족쇄를 채우는 것과 동일할 수도 있다. 물론 밥 역시 자신의 능력을 불법적으로 얻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한겨레> 역시, 영화가 굳이 보험회사의 부당성을 극의 핵심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경직된 시각의 강요이다. 물론, 이런 말은 이런 영화평을 쓴 기자가 <인크레더블>의 고향인 헐리우드를 간과하지 않았다는 조건하에서다. 적어도 감독이 ‘마이클 무어’인 것이 확실한 이상, 어떤 사회비판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 영화 <인크레더블>에 대한 평가가 판가름 난다는 점이다. <한겨레>는 “가벼운 게 장점일지도 모르지만 상상력으로 치면 <인크레더블>은 아쉽게도 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점수가 낮은 애니메이션으로 남을 것 같다.”고 평하고 있는 반면, <중앙일보>는 “그때부터 신나는 액션이 풍자를 대신한다. 그래서 어린이 방학 선물로도 손색이 없다.”고 권하는 멘트까지 보태고 있다.

 

뭐 <인크레더블>이 대단한 영화라고 이렇게까지 난리인가 싶지만, 영화평 역시 신문사라는 거대한 조직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지 아닌가 싶어 눈에 띄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일보>의 기사 중제를 보자. “재치로 꼬집은 ‘평등지상주의’”, 하하핫. 자뭇 심각한 <중앙일보> 데스크에 긴장 푸시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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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같이 있자, 같이 쉬자

 (2004년 12월 2일 작성)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소담출판사,2004.

 

 

기현상이라면 기현상이랄까, 이번 서평과 관련하여 예전에 보았던 가오리의 책을 빌리러(책 구입에 관한 한 난 여전히 고루한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 학교의 도서관에 갔다. 저자명으로 ‘가오리’하고 치니 에쿠니 가오리만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오리들도 쑥 쏟아진다. 물론 그 중 가장 많은 책이름을 끼고 있는 이름은 단연 에쿠니 가오리다. 일단 떠오르는 대로, <반짝 반짝 빛나는>을 살펴보았다. 동성애자로 나오는 무츠키와 알콜중독자인 아내 쇼코의 이상하지만, 의외로 잔잔한 결혼생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4권의 책이 대출중이다. 그렇다면,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호흡을 맞춘바 있는 츠지 히토나리와의 공동 작업물인 <사랑>을 볼까하는 생각에 클릭, 하지만 이 역시 5권의 책이 대출중이다. 순간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고, 에쿠니 가오리의 모든 책들을 확인해 보았다. 열종 가까이 되는 모든 가오리의 책들이 대출중이였으며,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나 <울 준비는 되어 있다>같은 책들은 대출 예약조차 초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붐boom'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겨울 초입이고, 지난주에는 서울에 첫눈이 잠깐 비추기도 하였다. 게다가 연말의 핵심인 12월이 아니던가. 느닷없이 확인한 가오리 붐을 확인하면서 퍼뜩 드는 말은 계절이었다. 그건, 내가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를 읽게 된 동기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한참 접어들 무렵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전철을 타고 가는 중에 눈앞에 펼쳐진 책 광고가 눈에 띄었고 당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주말은 몇 개야?”라고 물었었다. 어리석은 행동이었지만, 왠지 그 친구가 하는 대답에 따라 기분이 매우 좋아질 것 같았다.

대답은 “몰라, 왜 그래?”였다. 그냥이라는 답을 남기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을 때 ‘저 책을 꼭 사서 보리라’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는 가오리의 책들 중에서 가장 ‘무난한’ 편이다. 이 무난하다는 평가는 어느 정도는 ‘가오리의 책들 중에서’ 라는 단서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나처럼 경직된 사람에게, 자신을 떠난 남자의 현재 애인과 함께 사는 이야기의 <낙하하는 저녁>이나 앞서 언급한 ‘섹스리스sexless' 부부 이야기의 <반짝 반짝 빛나는>, 실연에 대한 숨 막히는 고백이 흘러넘치는 <울 준비는 되어 있다>는 읽기에 너무 힘든 책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는 결혼이야기이다. 그것도 매우 현실적인.

 

화자인 나는 평범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남편의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그의 남편에 대한 구속은 절대 절명의 서약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여자에게 절대 초콜릿을 선물하지 않기 정도다.

 

 

그러나 가령,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을 하게 되었을 때, 초콜릿을 피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32쪽)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유언이던 무언이던 어떤 약속이 없이 시작되는 관계란 없다. 어떤 존재에 대한 강한 이끌림은 가장 낮은 문턱을 제공함으로써 어서 내게로 오라고 손짓한다. 소설속의 내가 선택한 그 문턱은 초콜릿 선물에 대한 독점이다. 이로써 이 부부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현실적인 전제가 확인된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쩌면 필수적인, 다툼을 없애지는 않는다.

 

 

남편하고도 그렇다. 남편은 어질러 놓기만 하고 치울 줄을 모르는 데다 만사에 무심하고 감정을 경시(한다고 생각한다)하는 경향이 있고, 나는 참을성이 없고 감정적이고 양보를 모른다(고 남편이 그런다). 그래서 우리 부부 사이에는 싸움거리가 끊이지 않는다.(40쪽)

 

 

감정을 경시하는 남편과 사는 감정이 풍부한 나는 남편이란 존재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연애교과서로 베스트셀러에 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구체적인 사례집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런 감상.

 

 

이 사람은 왜 서랍을 열어놓고 닫지 않는 것일까-내 멋대로 닫으면 실례가 될까,하고 생각한 것은 백만 년이나 먼 옛날 일이다. 이 사람은 왜 겨우 손만 씻으면서 온 화장실은 물바다로 만드는 것일까. 게다가 왜 젖은 손을 타월에 닦지 않는 것일까. 이 사람은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 사람은 왜 자기 옷을 어디다 두어야 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사람은 대체 왜... .(55쪽)

 

 

그런데, 이런 문제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실제로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하는 행위는 서로를 껴안고 입맞추는 것보다 더욱 잦다. 그래서 서랍을 제대로 닫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일상에서 중요한 것은 많이 반복되는 행위이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무게감이 아니다.

 

타인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커다란 대의에 공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계기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대의가 사소한 계기들보다 작아 진다기 보다는 잊혀진다. 후회란 나중에 찾아오는 큰 이야기들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서 일단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버려두는 것이 인정은 아니다.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 의해 우리에게 전파된 ‘관용’이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소극적으로나마 용납하는 행위일 때가 훨씬 많다. 해서 결혼이라는 미궁 속에 빠져든 나는 ‘화해’를 택할 수밖에 없다. ‘공존’의 약속을 버리지 않으면서.

 

 

화해란 요컨데 이 세상에 해결 따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인생에서 떠나가지 않는 것, 자신의 인생에서 그 사람을 쫓아내지 않는 것, 코스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 것.(124쪽)

 

 

바로 이 부분이 불편한 소설들을 마구 써내는 에쿠니 가오리의 본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쓰여 졌다는 이 소설은, 그래서 좀더 자세히 읽게 된다. 건국 이해의 최대 분열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같이 사는 사람들’의 수는 줄지 않는다. 도대체들 뭘 믿고. 지금의 상황이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상황’이 되기나 하냔 말이다.

 

 

결혼하고서 딱 한 가지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올바름에 집착하면 결혼 생활 따위 유지할 수 없다. 나는 남편이 내게 어리광을 피우도록 해줬으면 좋겠다. 올바르지 않아도 마음껏 어리광을 피우게, 남편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117쪽)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미 시쳇말이 된지 오래지만, 그래도 사람은 사람을 찾아 해맨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나와 가장 비슷한 종이기 때문이다.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또 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다. 두 발로 서있는 것은 아주 피곤한 일이다. 네 발이 되면 그나마 나아질 지도 모른다. 걷는데 버벅 될지는 몰라도 쉴 때에는 그만 일테니 말이다.

 

‘당신의 저녁은 몇 개입니까’라는 질문은 단지 ‘몇 개’라는 답으로 내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포함된 저녁이 몇 개인지 말해 주어야 한다. 질문하는 사람이 포함된다면 저녁은 한 개이든 두 개이든 상관없지 않은가.(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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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영화 <밥,꽃,양>에 관하여

아래의 글은 약간의 사연이 있다.

2000년 당시 난 한 시민단체의 기관지 기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재미도 재미거니와 마음이 맞는 편집장이 있었던 관계로 꽤나 재미있게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2000년 12월에 입대하기전까지 일을 했다.

10월달에 고 편집장과 함께 울산과 부산 등지에 출장을 갔다. 그 이유는 영화 <밥, 꽃, 양>을 둘러싼 논란을 직접 취재하기 위해서 였다.

부산에 가서는 달맞이 고개 부근에 있던 라넷 작업실에 가서 감독과 스탶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울산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많은 <밥, 꽃, 양> 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울산에 위치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이미 울산인권영화제의 사전검열 논란은 이미 부글부글 끓어 넘치기 일보직전에 와있었다.

출장 후 바로 글을 하나 쓴 것이 밑의 내용이다. 사실 출장의 이유였던 기관지에 싣기도 전에 내가 임의로 써 버린 기사때문에 고 편집장이 곤혹을 치렀다. ^^ 뭐 항의공문 정도?(어디서 왔는지는 당시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알았다. 내가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울산의 모습을. 그 완장의 힘을. 솔직히 이런 임팩트가 큰 기억은,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그 모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놓았다.



처절한, 그러나 아름다운 기록들 : <밥 꽃 양> 사태 관련 일지

정리 : 김상철 (nilblue@orgio.net)

 

9월 7일 라넷 [LARNET-Labor Reporters' Network]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제2회 울산인권영화제 상영을 거부합니다> 발표

9월 8일 영화제 참가 단체였던 '평등세상을 여는 울산여성들' 조직위 탈퇴

9월 9일 라넷 <제2회 울산인권영화제 상영거부에 이르게 된 경위 1> 발표

9월 10일 영화제 집행위 <'밥꽃양' 상영거부 사태에 대한 집행위의 입장> 발표.
9월 10일 영화제 명칭 변경. '표현의 자유 실현을 위한 제2회울산영화제'에서
'평화와 인권을 위한 울산영화제'로 변경

9월 11일 인권운동사랑방 <울산영화제 '밥꽃양' 사태에 대한 인권운동사랑방의 입장> 발표.
9월 11일 평등세상을 여는 울산여성들 <경과 1> 발표

9월 12일 영화제 집행위 <문제제기의 내용에 대하여 밝힙니다>라는 글 발표
9월 12일 현대중공업노동자영상패 <'밥꽃양' 사전검열에 대한 입장> 발표

9월 13일 영화제 참가 단체였던 울산참여연대 ,<밥꽃양 사태에 대한 입장>발표

9월 14일 페미니스트 웹진 달나라 딸세포 "밥꽃양의 상영거부의 핵심은 사전검열 요구에
있다"는 입장표명

9월 15일 김진균 교수 <검열 없는 영화제를 위하여> 발표
9월 15일 삼호중공업 문화패 영상분과 <가짜 인권영화제를 중단하라>발표
9월 15일 사회당 <울산영화제 집행위원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규탄한다> 성명 발표
9월 15일 영화제 개막작 <아시안 블루> 상영 철회

9월 16일 영화제 상영작 <애국자 게임> 집행위 측의 심의는 사전검열이라며 상영 철회
9월 16일 영화제 상영작 <들불의 노래> 논란 있는 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없다며 상영 철회
9월 16일 조성은 <밥.꽃.양 사전검열에 대하여 - 울산의 1998, 그 침묵의 카르텔에 대하여> 발표

9월 17일 진보평론 <인권장사치들의 몸부림 - 사전검열에 대한 입장> 발표

9월 18일 노혜경 <밥.꽃.양보고 와서 잠못 이루는 밤-이것은 말하게 해줄 의무에 관한 영화다> 발표
9월 18일 대우자동차 영상패 '인권영화제 사전심의에 우려를 표하는' 입장 발표
9월 18일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김백영 <누가 인권을 말하는가> 발표

9월 19일 노동문화정보센터, '집행위에서 취한 태도는 명백한 사전검열이며 집행위에 문제제기를 했던 단위는 공개적으로 문제가 뭔지를 드러내길 촉구한다'는 입장 발표
9월 19일 연대를 위한 노래 모임 '좋은친구들', '집행위는 이제라도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외압의 실체를 밝혀야 할 것'이며 '외압을 행한 단위 또한 공개적인 자기 입장을 밝혀야 하며 외 압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 발표.
9월 19일 영화제 집행위, <제2회 울산영화제 개최시기를 연기합니다> 발표. 영화제 개최를 연기 하고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공개토론회를 제안한다는 입장 표명.
9월 19일 김희균, <토론회 보이콧과 역 제안> 발표.
9월 19일 집행위원장, <집행위원장직을 사퇴하며> 발표
9월 19일 집행위원장, <최초의 문제제기자와 제기될 수 있는 문제> 발표. 최초의 문제제기자는 총괄 프로그래머이며, 문제의 내용은 '노노갈등의 문제'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 '영상 자료 사용 문제'였다고 발표
9월 19일 전명산, <7 가지 질문- 집행위원장의 발표에 대한 반론> 발표.
9월 19일 평등세상을여는울산여성들, <집행위는 답해야 합니다> 발표. '밥·꽃·양'에 대한 '상영 결정'은 분명한 사실로서, 다른 작품의 결정과정을 통해서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며, 집행위는 특정장면에 대한 애초의 문제 제기에 대해 책임 있는 답변을 해야 한다는 입장 발표.

9월 20일 라넷, <영화제, 거짓말, 그리고 프라이버시> 발표. 집행위가 새로이 발표한 문제의 내용 와 최초의 문제제기에 대해 문제제기의 실체와 경로를 명확하게 밝힐 것과, '영상 자료 사용 문제'와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는 해당자를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무근의 거짓말 이므로 본질을 은폐하고 제작팀을 모욕하는 음해성 발언은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입장 발표.
9월 20일 문화과학, <울산인권영화제의 사전검열 행위는 반인권적이고 반소수자적이다> 발표.
9월 20일 문화개혁을위한시민연대, <울산인권영화제 집행부는 사전검열 행위에 대해 공개 사과하 라!> 발표.
9월 20일 평등사회를위한민중의료연합, <<밥,꽃,양> 사전검열에 대한 민의련'의 입장> 발표.

9월 21일 사회진보를위한민주연대, <98년, 추악한 기억을 드러내라!> 발표.
9월 21일 제2회울산인권영화제, 갑작스런 영화제 사이트 폐쇄.
울산인권연대 비공식 문건 배표.

9월 23일 항의 사이트 검열영화제(http://larnet.jinbo.net) 개설.

9월 24일 록밴드 천지인 <울산인권영화제에 대한 록밴드 천지인의 입장> 발표.

9월 27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영상패 '창' <울산 인권운동연대 홈페이지 폐쇄에 대한 입장-
'밥·꽃·양'의 울산상영을 제안하며> 발표

9월 28일 평등여성이 울산인권연대의 비공식문건에 대한 <'평화와 인권'을 위한 울산영화제,
정녕 어디까지 가려하는가?>발표

9월 30일 여성주의 공동체 언니네 <울산 영화제 주최측의 반인권적인 행위를 규탄한다.>발표
10월 5일 현자노조식당운영위원회 <<밥.꽃.양>에 대한 현자노조식당운영위원회의 입장>발표

10월 8일 문화개혁시민연대, 민주노동당, 인터넷신문대자보, 진보네트워크센터, 평 화인권연대, 학생행동연대정보통신모임I'm,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 합의 공동 성명서 <울산영화제 조직위원회에 속한 모든 단체들은 <밥꽃양> 사전검열과 홈페이지 폐쇄에 대하여 해명하고 사과하라> 발표

10월 10일 라넷 <밥 꽃 양> 울산 상영계획 발표

10월 12일 현차노조식당 2차 성명서 <마녀사냥의 글에 대한 노조식당의 입장> 발표

10월 14일 역사학연구소 노동사분과 <진정한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라넷'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며> 발표
10월 14일 꽃다지 <라넷의 싸움은 우리 모두의 싸움입니다> 발표

10월 16일 민주노동당 울산지부의 게시판을 통해 17일 공청회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 최초 확인

10월 17일 라넷 <울산인권영화제의 '공청회' 개최는 부당합니다>발표
10월 17일 공청회 연기 발표
10월 17일 노조식당 현장복귀자 모임 38여성회 <<밥꽃양>제작팀에 드리는 공개 제안>을 통해 울산상영회전 사전 상영 요구.
10월 17일 민주노총 울산본부 <인권과 평화를 위한 울산영화제 논쟁에 대한 의견>발표
10월 17일 평화를 여는 울산여성들 <또 하나의 충격!!-공개토론회 파동> 발표

10월 19일 임인애 감독 <38여성회 회장 조희숙님께> 발표. 사전 상영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 음에도 제안서를 띄운 이유에 대한 질문함.
10월 19일 노조식당 현장복귀자 모임 38여성회 <<밥꽃양> 임인애 감독 보세요!!> 발표. 제안에 대한 답변을 재요구.

10월 22일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밥꽃양>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 발표
10월 22일 민중의료연합 <<밥꽃양>은 어떠한 압력도 없이 상영되어야 한다> 발표

10월 23일 페미니스트 웹진 '달나라 딸세포' <<밥꽃양>의 울산상영을 지지합니다>발표
10월 23일 <밥 꽃 양> 울산 상영.

<밥 꽃 양>과 그 사건을 보는 한 독법

 


김상철(nilblue@orgio.net)

 

사진출처: 여성신문

[노동자노래단] '딸들아 일어나라' 노래듣기

[민중연대전선] '전진하는 여성노동자' 노래듣기


1. 말해야 하는 의무

오늘은 23일, <밥 꽃 양>의 울산 상영이 있었던 날이다. 이처럼 글을 쓰면서 시간에 신경이 쓰인 적이 있었던가. 아래의 글들을 쓰면서 몇 번이고 검열영화제 홈페이지(larnet.jinbo.net)의 게시판으로 달음질 쳤는지 모른다. 늦은 시간, '울산상영회 잘 마쳤습니다'라는 글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안도를 하게 된다. 이런 시간이 내가 <밥 꽃 양>을 보았던 그 시간, 아니 각각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을 읽는 대다수 -아직 <밥 꽃 양>을 보지 못한 이들- 에게 미안한 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진심은 '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엄살처럼 들리겠지만, 그것은 노혜경 시인의 말처럼 '말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가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선 전제를 하고픈 것이 있는데, 영화 <밥 꽃 양> 자체와 <밥 꽃 양>을 둘러싼 일련의 논란은 차별적이라는 점이다. <밥 꽃 양>을 둘러싼 논란이 이미 영화로서 <밥 꽃 양>의 함의를 훨씬 넘어서는 논쟁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어쩌면 영화로서 <밥 꽃 양>을 중심에 놓았을 때 놓치게 되는 일종의 권력관계에 신경을 덜 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논란의 불을 당긴 화인으로서 영화 그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분석'하려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영화가 아닌데요!"라고 말했다는 임인애 감독의 말처럼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사실의 '한' 얼개로서 이를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엄밀히 영화가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나타나고 있는 논란의 지류들을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얼키고 설켜 있는 이 논란의 장에 입문을 하려고 하는 이들을 위한 징검다리 혹은 하나의 길이었으면 한다. 나아가 많은 이들이 직접 말하면서 이 논란에서의 장에서 '시민권'을 얻었으면 한다.

 2. 지도 그리기 1: '사전검열' VS '자기검열'

우선 <밥 꽃 양> 사건이 불거진 원인을 살피기 위해서는 간단한 셈에서 시작해야 한다. 9월 2일, 9월 6일, 9월 7일이 그렇다. 9월 2일은 <밥 꽃 양>제작팀인 라넷에서 '외부의 문제제기에 의해 먼저 보면 안되겠냐'는 말을 들은 시점이다. 그리고 9월 6일은 울산영화제에서 작품을 철수하겠다는 라넷의 성명서가 발표된 날이다. 그리고 9월 7일은 영화제집행위에서 말하는 영화 상영작을 결정하는 날로서 제2차 집행위 회의가 열린 날이다. 왜 이 1주일의 시간이 중요할까. 그것은 초기 논란의 핵심이 되었던, '외부의 문제제기가 있어서'라는 말이 '집행위 1인이'로 다시 말해서 '외부의 검열'이 '자기 검열'로 돌아서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제 집행위는 9월 10일 발표된 사건 개요서를 통해서 문제제기의 부분을 "8월 22일 집행위 회의 후 후보작에 대한 상영작 검토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밥 꽃 양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는 제기"가 있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외부의 문제제기가 있어'라는 표현이 '문제제기의 가능성'으로 바뀌는 부분이다. 물론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와전이 있을 수도 있고 맥락을 빼놓을 수도 있다. 또한 지금과 같이 집행위를 구성하고 있던 핵심적인 인사들이 활동을 접은 상황에서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위의 일주일에 나왔던 말들의 진위를 확인하면서 '진실에 가까운 것'을 추려내는 방법만이 남는다. 우선 집행위는 <밥 꽃 양>이 상영작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후보작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울산에서 지난 15일 만난 평등여성의 관계자는 "말도 안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 근거로 울산영화제에 상영 예정이었던 <아시안 블루>와 <1991년 1학년>은 9월 7일 회의 전에 공식홈페이지에 '상영이 확정되었다'고 공지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이중 <1991년 1학년>이라는 작품이 이전에 상영 결정되었다는 것은 울산영화제 게시판을 복구해놓은 현재 검열영화제 첫 화면 하단에 여전히 남아있다) 이 두 개의 영화가 집행위의 공식적인 사전 상영을 거친 것이 아니라 해당 프로그래머의 사전 조율에 의해 '단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십분 집행위의 입장에서 고려했을 때, 다음의 상황이 가능할 수도 있다.  위의 두 작품이 8월 22일 제1차 집행위를 통해서 결정된 것이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밥 꽃 양>이 여성부문 프로그래머와 연락을 한 시점이 7월말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차 집행위 회의 때 <밥 꽃 양>의 상영결정은 왜 안 내려졌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영작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외부의 문제제기'라는 말실수를 주워담기 위한 하나의 트릭으로 읽힐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므로 뒤에 집행위에서 밝힌 '자기검열'이라는 말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이는 '외부의 문제제기에 의한 사전 검열'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그것이 설사 자기검열이라고 하더라도 타 상영작에는 행하지 않은 절차를 <밥 꽃 양>에 강제하게된 것은 분명 진공상태에서 결정한 사항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외부'의 힘이 유형적인 것이었던 무형적인 것이었던 중요한 것은 하나의 '예외'를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존재했으며, 바로 그 점이 이번 <밥 꽃 양>을 둘러싼 논란을 만들어낸 원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3. 지도 그리기 2: <밥 꽃 양> 논란을 가로지르는 몇 가지 것들

그렇다면, 영화제 집행위가 그런 예외를 두게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검열 영화제 게시판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된 바는 없지만, 몇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존재다. 울산에 현지 취재를 갔을 때 놀랐던 대답 중에 하나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울산 지역의 대다수 시민단체는 그 정도가 문제지 현대자동차 노조로부터 자유로운 단체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영화제 집행위를 탈퇴한 단체들이 그나마 자유로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상황을 '그렇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서 한 10배쯤 그 심각성을 높여야지 울산의 '현지'에 대한 정확한 느낌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남한의 노동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상징적이다. 80년대의 '골리앗 투쟁'이 그렇고, 매해 각 단위 사업장의 임단협이 현대차 타결 내용을 기준으로 논의된다는 일반적인 관행에서도 그렇다. 그런 상징물이 실제 작동하고 있는 공간에서는 하나의 '권력'으로 작동한다. 물론 권력 자체를 백안시하는 관점은 위험하다. 특히나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란 것이 대개가 절대적인 우위의 권력에 저항하는 힘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가 우려해야 될 것은 오히려 역편향의 움직임이다. 실제로 게시판에는 '단병호 위원장이 잡혀간 시점에 이런 영화를 개봉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들이 지속적으로 게재된 적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밥 꽃 양> 논란이 불거진 시점이 단병호 위원장의 재구속 시점과는 분명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에 현대자동차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이 실명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맥락과 연관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밥 꽃 양>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위험한 것'들인가. 검열 영화제 홈페이지에 올라온 영상 클립들을 계속 살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화에서는 98년도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서부터 2000년도 1월 노조식당 아주머니들의 단식 투쟁을 마감하는 시점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4분하고 있는 정파들의 핵심간부들이 쏟아낸 말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는 점이다. 98년 당시 7대 위원장에서부터, 99년의 8대, 2000년의 9대까지 적어도 3대에 걸친 노동조합 집행부의 행적들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분명히 노조식당 아주머니의 투쟁을, 그리고 그 시선에서 당시의 사실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임인애 감독이 말했듯이 "당시 사건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일 따름이다."

인터뷰를 해본 결과 문제가 된 장면은 '모모씨가 한 발언이 영화의 전후 관계상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혐의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 영화를 보면서 '문제의 장면'을 보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꼭 그렇게 만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속내야 어떻든 간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이 98년도 정리해고 투쟁에서 제한적이나마 정리해고를 수용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이 같은 조건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던 간에 '외부로부터의 문제제기' 당사자로 지적되는 것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덧붙여 반드시 지적이 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앞서 지나가면서 언급한 것이지만,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문제의식 수준에서 연대의 방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인적 구성의 측면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진보진영 자체를 갉아먹는 한 원인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방식에서 파생된 것이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에 대한 '오해'와 참여연대에서 발행하는 <참여사회> 10월호의 '오보'다. 먼저 인권운동사랑방에 관해서는 울산영화제와의 관계에서부터 풀어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영화제라는 형식을 최초로 공식화시킨 것은 물론, <레드 헌터>상영과 관련된 문제로 인하여 서준식 당시 대표가 형사상의 고발 조치까지 당하는 과정을 겪어왔다. 그 후 각 지역에서 인권영화제 형식의 문화활동이 인권운동의 차원에서 확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원래 울산영화제의 명칭은 울산인권영화제였다. 그것이 인권운동사랑방의 항의에 의해 울산영화제로 변경된 것이다. 그리고 지난 9월 11일 '울산영화제 '밥 꽃 양' 사태에 대한 인권운동사랑방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냈다. 바로 여기까지가 울산영화제와 인권운동사랑방이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은 전부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지난 달 14일과 15일 취재 당시 들었던 얘기는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 1인이 내려와서 공청회를 조직한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실제 울산에 가서 들은 얘기로는 울산대의 모 교수가 "그런 사실 모르고 있었냐."면서 얘기가 흘러나온 것이라고 했다. 라넷의 서은주 감독은 <밥 꽃 양> 상연 소식도 직접적으로 서준식 전 대표의 메일을 통해서 알렸었고, 이 사건이 터진 다음에도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냐는 문의 메일을 보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인권운동사랑방에서는 <밥 꽃 양>이 문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내부의 의사소통 문제가 있을 테니-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생긴다. 검열 영화제 게시판에서 전명산씨는 인권운동사랑방에 '울산에 내려와서 비공개적으로, 그것도 당사자인 라넷이나 평등여성도 만나지 않고 오직 울산인권운동연대만 만나서 공청회 얘기를 한 이유가 뭐냐'는 던진 후, 이에 대한 인권운동사랑방의 답을 올려놓았다. 거기에 따르면, 인권운동사랑방은 '현장조사차 내려간 것이며, 공청회에는 전혀 개입하고 있지 않고 다른 당사자들은 금방 접촉하여 조사 작업을 할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일차적인 질문은 영화제 제목에 관해서는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던 인권운동사랑방이 '공청회 개최에 자신들이 개입했다.'는 오해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해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현재 인권운동사랑방이 서준식 대표의 사임 이후 조직 편제에 대한 고민과 국가인권위 문제로 많은 고충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활동가까지 파견해서 현장 조사를 하고자 했다는 인권운동사랑방의 태도 자체가 모순되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어떻게 초기의 불개입 원칙이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없이 비공개적인 현장 조사로 귀결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도저히 해명이 되지 않는다.

다음은 참여연대에서 발행하는 <참여사회> 10월호에 차미경 편집위원이 쓴 최종희 노조식당 운영위원장 인터뷰에서 나온 '오보'다. 참여연대에서 해명하고 있듯이 이번 인터뷰는 <밥 꽃 양>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종희 위원장 개인에 대한 인터뷰의 형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 기사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인터뷰 말미에 차미경 편집위원이 나름대로 <밥 꽃 양>사태를 해설한 짤막한 내용이다. 해당 부분에서 차미경 편집위원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노조식당의 관계를 '서운한 것은 사실이지만 함께 가야될 대상'이라는 해석을 내리면서, 이번에 불거진 문제를 '외부의 개입'으로 언급했다. 다시 말해서 별 이상이 없는 관계인데도 쓸데없는 논란을 만들어와 불씨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난 달 15일 만났던 최종희 운영위원장은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수많은 전화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분명 자신의 뜻을 잘못 이해한 '오보'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했다. 문제는 차미경 편집위원이 그런 해석을 하게된 배경이다. 울산참여연대의 관계자는 "당시에 해당 편집위원이 어떤 연락도 한 바가 없다."고 전했다. 물론 참여연대가 반드시 울산참여연대에 방문을 해야된다는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울산참여연대가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영화제 집행위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던 몇 안 되는 단체 중 하나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 부분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미경 편집위원의 그러한 해석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과연 단순한 오해였을까. 아쉽지만, 인권운동사랑방과 참여연대의 활동에 대한 궁금증은 여기서 멈춘다. 더 해명할 수 있는 원자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가지 단서는 있다. 각각의 시민단체가 각 지역의 시민단체와 맺고 있는 유대감의 한 속성에 관한 것이다. 그 속성은 인적 구성의 문제, 다시 말해서 친밀함이라고 하는 사적 관계가 공적 관계를 압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다. 우스개 소리로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한다. 진보진영이 아무리 성장했다고 해도 따지고 보면 다 친족관계더라는 것 말이다. 실제로 현지 취재에서 놀란 것은 울산 지역의 시민단체에서 상근을 하는 활동가들은 대개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특정 정파와 혈연 혹은 친분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라는 '거대 노조'의 영향력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런 의혹은 더욱 탄력을 받는다. 솔직히 당시에 들었던 생각은 황당하지만 '진보진영 족보도 그리 수 있겠구나'라는 실없는 것이었다.

4. 지도 그리기 3: '소수자'라는 문제설정의 함정에 대해

그럼에도 나는 이번 <밥 꽃 양>문제를 '소수자'의 문제설정으로 보는 것에 유보적이다. 위에서 언급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도 그렇고 인권운동사랑방도 그렇고 참여연대도 모두다 규모나 영향력의 측면에서 '기득권'이라고 부를 소지는 다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밥 꽃 양>을 둘러싼 논란 특히, 노조식당을 중심에 놓고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소수자'라는 문제설정을 중심에 놓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한 때 검열영화제 게시판에 '월장' 문제가 불쑥 나오거나, '100인 위원회' 얘기가 간간이 썩여 있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이 <밥 꽃 양>을 둘러싼 논쟁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리 적절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선은 최종희 운영위원장을 찾아갔던 '울산 여성의 전화' 얘기를 참조해보자. 최종희 위원장은 9월 중순쯤 '울산 여성의 전화' 활동가 몇 명이 자신을 찾아와서, '사전 검열은 없었으며, 애초의 문제제기는 영화에 나오는 한 여성의 프라이버시 문제 때문이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최종희 위원장은 "다분히 의도적인 질문이었다."고 말하면서 '프라이버시 문제의 당사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미 말한 상태고 더더구나 그런 문제는 당사자끼리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했던 것은 그 전에 서울에서 가졌던 상영회 때문이었다는 것이 공통된 문제제기다. 이때 거론이 된 사람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전직 위원장과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매개가 된 것도 성별로 따지면 여성이었다. 우리가 <밥 꽃 양>의 문제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만 보게 될 때 놓치게 되는 부분은 여성 내부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방향 즉, 폭력이 행사되는 다차원인 층위에 대한 고민이다.

그리고 노조식당의 경우에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비교했을 때 '소수자'의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이지, 기타 수많은 하청 노동자들의 처지와 비교하였을 때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이 점은 최종희 위원장의 분명한 대답에서 얻어진 결론이다. '어떻게 이런 힘든 투쟁을 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거대 노조'의 조합원이었기 때문이다."라는 답을 해줬다. 물론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분명히 한 축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이슈화되는 사건과 이슈화되지 않는 사건이 지니는 차별적인 영향력의 관계다. 우리가 '소수자'의 문제설정을 그렇게 갖다댈 수 있는 것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노조식당 사이에서 찾아질 수 있는 분명한 경계선 때문이다. 하지만 노조식당을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본다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가졌던 관계가 쉽게 역전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소수자'로서 노조식당을 등치시키는 것은, 세밀하게 작동중인 다양한 관계망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기성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경직성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경우 4대 의결기구라는 절차상의 형식- 문제는 소수자의 문제설정에서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설정은 <밥 꽃 양>을 둘러싼 논란과는 한 차원 떨어진 문제로 보인다. 그 이유는 문제 제기가 '그 절차' 자체로 귀속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5. 문제는 덮개를 여는 것이다

10월 23일의 울산 상영회를 기점으로 <밥 꽃 양> 논란은 분명 한 장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영화에 대한 의혹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일이 줄어 들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에서 살펴본 문제들 마저 즉각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밥 꽃 양>은 우리가 잊고 있는 아니, 오히려 잊고자 했던 기억들을 우리 앞에 던져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의 배경은 진보진영의 '은폐성'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남인가'라는 식의 무원칙적인 '패거리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음지의 것들을 양지로 꺼내놓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민단체와 노동단체의 인적인 밀월관계, 그리고 '딴 동네 얘기에 참견하지 마라'라는 식의 배제의 원칙들이 상세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공개적인 논쟁의 장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야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다. <밥 꽃 양>이라는 기록이 담고 있는 '사실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복원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런 기억들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공유되면서 하나의 각인으로 남겨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가 벌써부터 '이론의 마개'로 채워지는 것을 무엇보다 우려된다. 임인애 감독이 바란 대로 <밥 꽃 양>이 좀 더 많은 장에서 보여지고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밖의 것들, 수많은 제2의 제3의 노조식당들이 기억 저편에서 건져지고 우리 눈앞에 던져지기를 기대한다. 그런 측면에서 여전히 <밥 꽃 양>은 진행 중이다.(00.10.24)

※ 이 글은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문화연대』특집기사 차 부산과 울산을 방문했던 내용을 기반으로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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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지식인의 도덕적 합의로서 안티조선

대학끝물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무렵, 정치적으론 '국민승리21'에 가입되어있던 상태였으나, 나의 관심은 안티조선운동에 몰려 있었다.

 

이런 흥미진진한 싸움판에서 조그마한 자리도 얻게 되어 주기적으로 글을 쓰고, 나름 진지한 싸움을 벌였다. 결국, 나의 학위논문 주제가 '강준만'이 되어버린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지 않나 한다.

 

요즘드는 생각이지만, 안티조선운동, 다시 말하면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이라는 것은 상징적 자본의 재분배와 같은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단순히 돈으로 환산되는 경제적 가치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면, 역할에 비해 과잉되어 있는 갖가지 자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때 난, 학교에서 안티조선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그것을 입고 수업에 들어갈 정도로 미쳐 있었다.

 

그리고 그 우상들을 깨기 위해 보고 보고 또 보고, 쓰고 쓰고 했다.

 

뭐, 당시의 치기어린 문장력을 다시금 보자니 쑥스럽지만 잊혀지는 것 보단 낫다.

 

이젠, 흔적도 없는, 우연히 웹사이를 떠돌아 다니던 글을 찾았다. (이미 내글이 실려 있었던 웹페이지는 각종 이미지를 잃어버린체 X 표만 너덜너덜 펄럭이고 있었다.)



지식인의 도덕적 합의로서 안티조선 (2000년)

 

 

0. '안티 조선'의 재설정

 얼마 전 성공회대 한홍규 교수는 남한의 역사에서 진보세력으로 불렸던 이들은 본질상 '자유주의자'에 가까우며, 장준하 같은 이는 오히려 '보수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말장난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갖다 쓰는 진보와 보수의 엄밀한 구분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이 시선을 끄는 것은 '아 그렇게 볼 수 도 있겠구나'의 흥미보다는 진보와 보수를 논할 때 여전히 작동중인 '남한'이라는 제한 때문이다.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자까지도 '진보'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밖에 없는 그 제한은 근본적으로 '진보'의 개념을 협소화시켰다. 굳이 서구의 개념 정의를 가져다 부박한 남한의 현실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에게 '진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고 그렇기 때문에 한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현재의 지식인 논쟁에 있어 '진보적 지식인'의 대응 방식을 살펴보는 작업은 '보수적 지식인'의 방식을 살피는 것 보다 까다롭다. 예를 들어 임지현 같은 지식인이 보수주의자인가, 아니면 진보주의자인가. 임지현 개인의 성향에서 보자면 분명히 좌파까지는 아니어도 좌파 '취향'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안티 조선'의 문제설정에 투과해서 보자면 전형적인 보수적 지식인으로 돌변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안티 조선'의 문제에서만큼은 진보와 보수로 구분 짓는데 특별한 배려가 요구된다.

'안티 조선'의 문제를 '지식인 논쟁'의 시발로 삼을 때 그것은 지식인의 일관성과 책임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어떤 구체적인 대안의 상이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조선일보라는 매체의 도덕성을 묻는 작업이며 이때의 지식인은 '어떤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초반 강준만과 소위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슈를 제기하며 다양한 논의의 축들을 만들어 냈다면, 논쟁이 진행되면 될수록 오히려 하나 하나의 논의 축에서 퇴각하고, 최소한의 근거를 방어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힘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지표를 제공한다고 본다. 또한 '안티 조선' 문제가 모종의 '도덕적 합의'를 최소한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현 지식인 논쟁이 '안티 조선'의 맥락을 벗어나 지식인 자체를 향하게 될 경우 우려가 되는 부분은 바로 '안티 조선'의 이와 같은 성격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인들의 문제로 논의가 한정될 경우, 남한 사회에서 모처럼 제기된 도덕적 이슈에 대한 사회적 논쟁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많은 지식인들이 현 지식인 논쟁에 있어 '대화의 룰'이나 '공통의 규범'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이 부분을 위한 자원이 여전히 '안티 조선'의 맥락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 논쟁으로서 '안티 조선'의 문제 설정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 이 글은 지식인 논쟁을 '안티 조선'이라는 문제설정으로 다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서 이리 저리 얽혀 있는 현 지식인 논쟁의 유의미한 전개에 있어 한 자락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안티 조선'이 지니는 잠재성과 모호성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로 촉발된 일련의 지식인 논쟁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전통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지식인은 어떻게 자신의 지식을 사용을 해야 하는가'라는 축으로 짜여진 듯하다. 이런 문제설정의 방식이 여러 가지 지형에서 발언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혼란을 야기했다. 이런 문제설정의 전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의 독특한 지형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안티 조선'의 지형이다.

안티 조선의 시발은 70년대 중반부터 민중진영에 의해 제기되어온 언론자율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왜곡된 정보를 강요한 권위주의적 체제 내에서 언론의 자율성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은 물론, 권위주의 체체에 대한 불만을 조직하는 관점에서 주장되었던 것이다. 7, 80년대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당시의 대립구도는 물리적 폭력의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립하는 민주화 세력의 틀로 짜여져 있었다. 여기서 언론 자율성의 문제설정은 권위주의적 정부에 기생하는 언론의 속성보다는 보도 지침 등의 다양한 법제적 장치를 통해 통제를 받아온 약자로서의 언론이라는 관점에서 채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90년대에 등장한 회의주의적 전망 속에서 언론에 대한 문제의식이 쉽게 휘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90년대 내내 진보의 구체적인 상을 정립해가는 내포적 과정보다는 다양한 진보들의 스펙트럼을 확장해가는 외연적 과정에 더욱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인 정세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언론의 독자적인 정보 조작 및 언론 자본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강제에 주목하면서, 이를 '안티 조선'이라는 분출구로 첨예화시킨 공은 당연히 강준만에게로 돌려져야한다. 강준만의 전략적 방침은 중요한 논쟁지점들을 형성했으며, '조선일보'에 대한 실질적인 형태의 조직들이 등장할 수 있는, 의식의 인식지평을 재구성해왔다. 사실 '조선일보에 관대한 사람들'이라는 <월간 인물과 사상>의 초기 캠페인에서 주요한 논거는 특정한 지식인들의 정치적 견해라기보다는 특정 지신인의 말과 행위에 있어서 일관성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티조선의 문제 설정은 지식인이 동시대적으로 겪고 있는 혼란 일반을 향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조건은 이른바 '지식 위기론' 이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은 지식의 전통적인 성격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는 지식산업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새로운 자본주의적 재생산 메카니즘의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남한만 하더라도 신정부 들어 불기 시작한 '신지식인론'을 비롯하여,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 놓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지식인' 자체가 문제시 되었다기 보다는 '지식' 자체가 문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지식이 다른 지식과의 관계에서 있어 실제 맺고 있는 양식에 대한 것이 쟁점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신지식인론'은 뒤늦은 반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야 할 것은, 질문에 '지식인'은 빠지고 추상적인 '지식'만을 문제시하는 '의도'에 대한 질문이다.

이와 같은 '안티 조선'의 문제설정이 지닌 토대는 '조선일보'라는 범주를 훨씬 뛰어넘을 수 밖에 없는 조건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점은 '안티조선'이라는 문제설정이 지닌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아래에서 살펴 볼 것처럼 논쟁의 축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현재의 지식인논쟁을 다시 '안티조선'이라는 문제설정을 중심으로 봐야한다는 입장을 개진하고자 한다. 지식인 논쟁 자체가 중심에 놓일 경우, 현재에 있어 논쟁의 축이 사라진다는 점이 첫째 이유이다. 자칫하면 여러 가지 지식인 상들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게 되고, 그 차이들을 다만 '인정'하는 것으로 끝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짐은 '안티조선'을 둘러싼 논쟁이 '지식인 논쟁'으로 둔갑된 시점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흐름은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 능동적으로 개입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절에서 길게 서술할 내용에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현재의 논쟁이 제도 정치권의 지형을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당 친화적인 지식인군과 한나라당 친화적인 지식인군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로 촉발된 논쟁으로 현재의 '지식인 논쟁'을 한정시킬 경우 개혁 대 보수의 이원적 지형을 그대로 투영하게 된다. 나는 '안티조선' 논쟁이 궁극적으로 남한 사회에 대한 본질적인 대안의 가능성까지도 거세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관련기사] 구본준, 압도적 보수, 보수주의자는 없다, 한겨레21, 370호.

 

2. '조선일보의 의식조작: 분열된 지식인?

언론사 세무조사를 중심에 놓았을 때, 지식인 논쟁은 '분열'이라는 화두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질문 이전에, '분열'이라는 용어의 적절함에 대한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식인 논쟁이 깔려 있는 지식인 사회의 대략적인 지도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전문분야와는 무관하게, 특정 사회적 이슈에 대해 도덕적 개입을 하는 이들을 지칭해왔다. 이러한 정의가 너무 고리타분한 것이라면, 적어도 지식인이라는 것이 머리에 든 지식의 양으로 자격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부정적 정의에서 합의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분열'이라는 말이 지니는 남한의 공통적인 정서 문제다. 가치판단을 떠나서, '분열'이라는 말에 긍정적인 투사를 보이는 이들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가치관 속에서는 이미, 분열이라는 말을 존재 조건을 위협하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의 분열이라는 현상 분석은 어떠한 담론보다는 가치지향적인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식인 분열이라는 담론을 누가 유포하는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언론사 세무조사 과정에서 첨예한 반대의 시각을 보였던 한겨레의 기획 <신문을 위하여>와 조선일보의 기획 <위기의 지식인 사회>를 비교해보자. 이 둘의 기획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선, 현 상황에서 지식인 문제를 다룬 다는 것은 '언론사 세무조사'라는 맥락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이고 두 번째는 어찌되었던 지식인들의 자기 드러내기가 이 둘을 포괄하는 신문언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 때문이다.

위의 기획에서 흥미로운 것은, 동일한 현상에 대해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방식, 즉 문제설정의 방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난 7월 18일자 조선일보에서부터 시작된 <위기의 지식인 사회>기획은 7월 24일 긴급 좌담회에까지 총 5회에 걸쳐 연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겨레의 <신문을 위하여>는 7월 17일에서 8월 14일까지 총18회에 걸쳐 연재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기획은 교수나 문인을 중심으로 짜여졌던 것에 반해, 한겨레의 기획은 교수, 가수, 학생, 교사, 작가 등의 다수 직종의 사람들로 짜여졌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시종일관 '양비론으로 치닫고 있는 지식인사회'라는 규정을 견지하면서, "한국 지식사회를 위협하는 적들은 ·양극화 ·폭력화 ·천박화 ·폐쇄화 등 네 가지로 압축된다"(김기철 기자, 7월 23일자 조선일보 )는 입장을 확대시킨다. 반면 한겨레는 시종 '언론'의 문제설정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인 사회의 위기라는 담론은 궁극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이면에 두고 확대 재생산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조선일보의 기획에서는 '언론사 세무조사'와 같은 현안은 교묘하게 거세되어 있다. 이는 각각의 기고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무장한 대중적 지식인만이 판을 친다."(이진우)는 개탄이나,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톨레랑스'의 미덕"(조규익)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전제되지 않고 있다. 어떻게 언론사의 세무조사로 촉발된 논쟁이 지식인 사회의 분열로까지 확대될 수가 있었을까. 이 이면에는 교묘하지만, 매우 단순한 조작 장치가 있으며, 이를 구분할 경우에만 지금은 혼탁해진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회가 균질화되고 일원화될 수 없는 복잡성의 산물이라면, 사회는 궁극적으로 많은 '다름'들로 체워져 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지식인이 다른 지식인과 입장이 같지 않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분열이라고 평하는 것은 '위기 의식'을 이용한 교묘한 여론 조작의 발로인 셈이다. 물론, 이의 선봉에는 지식인의 분열을 가장 많이 가슴 아파하는 조선일보가 놓여져 있다.

3. 현재 '지식인 논쟁'의 허구성

하나의 논쟁을 정리하는데 많은 전제를 달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지식인 논쟁을 정리하는데는 많은 각주들이 필요하다. 이는 현재의 논의가 불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교묘히 작동하는 권력의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현재의 논쟁에서 추려 볼 수 있는 교묘한 장치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자.

- 맥락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일반화만 남는다.


기본적으로 지식인 -여기서는 지식 혹은 정보 사용에 대한 고급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에서의- 은 추상적 개념을 다루는 엔지니어이다. 또한 추상적 도구를 다루는 지식인은 특정 현상에 대한 적용과 배제의 선택에 놓인다. 현재의 논쟁에서 많이 언급되는 '다양성', '자유민주주의의 원칙', '관용', '상호인정' 등의 용어는 바로 이 맥락에 놓인다. 그 보다 이러한 추상적 일반화를 통해 작동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개념축은 '좌파와 우파'라는 것이다.  

 

지난 8월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신동아>의 특집은 '좌파냐 우파냐'는 선정적인 제목이었다. 이 특집은 현재의 논쟁을 '김대중 정부의 이념적 성향'을 둘러싸고 발생했다는 기본적인 전제에서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좌파냐 우파냐의 구분이 언론사 세무조사 과정에서 특별히 공격을 받았다고 느끼는 측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진보가 살기 위해서는 보수도 살아야지, 보수는 다 죽고 진보만 살면 나라가 무슨 꼴이 될 것인가."(김동길, 조선일보 6월 27일자)는 주장은 오히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서 우선적으로 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언론사 세무조사의 사안을 이념논쟁으로 볼 수나 있는 것인가의 의문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안을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볼 수 있는 계급적 의식이 조선일보에 더욱 투철한 것 같다는 점이다. '점입가경...한국판 문혁 시작됐나?'(주간조선 7월12일자 1662호)라는 기사는 시종일관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원장의 '페로니즘', '포퓰리즘'이라는 말에 주석을 달고 있다. 그 표제가 지니고 있는 선정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공당의 정책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집권여당의 정책에 '~주의'딱지를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 호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조선일보는 다른 인사들의 입을 빌어 이념 중심적으로 지식인사회가 분열되어 있디고 성토한다. 차인석 서울대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의 다양성'이나 '지식인의 내적 설찰'을 운운하면서 나름대로 옳은 말을 하기는 하는데, 자신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장의 논리에 약한 이해를 범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말을 조선일보 지면에 선사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는 통일 정책을 독점하고 제멋대로 하는 바람에 '통일독재'란 말이 나온다. 그 탓에 지식인 사회에 치사한 싸움이 벌어지고, '홍위병'이란 말까지 나왔다. 일부 지식인들이 치열한 내적 반성 없이 수구니 반동이나 반통일 세력이니 하는 말을 뱉어냄으로 해서 '홍위병'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차인석, 조선일보 7월 24일자)

이제까지 정부에서 통일 정책을 독점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또한, 정치인들이 '빨갱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인가? 차인석 교수는 아마도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 독점을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 인양 알고 있는가 본데, 한국 현대사에 문외한이면서도 철학을 할 수 있는 우리 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다. 사실 차인석 교수는 70-80년대에도 '사회과학의 철학'등의 책들을 편집하면서 비판 사회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리고 지난 해 진보평론에 '혁신자유주의를 되돌아보며'라는 글을 기고했다. 차인석은 해당 글을 통해 제 3세계의 사회변화는 "어떤 이유든지 간에 대중적 참여가 결여된 상황에서는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연합정치가 기성 정치 과정에 혁신적인 압력을 행사해야"하며, 특히나 "교사, 교수, 성직자, 문필가, 예술가, 언론인들과 같은 지식인 집단들의 동맹에 의해" 시민의 권력 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그가 조선일보의 좌담에서 위의 얘기를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은 남한 지식인의 유아적 사고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그 배경에는 추상적 일반화가 현상 파악을 위한 준거로서 작용하는데, 그것이 독단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권력의 이해와 시민사회의 이해가 지니고 있는 유사성만으로 '홍위병'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면, 나치 치하 프랑스의 독립적 레지스탕스는 드골 망명정부의 '홍위병'이 되는 것이다. 더 심하면 3.1운동은 형태상 나치스의 유겐트와 비슷한 전체주의적 성격의 운동이 되어버리고, 이완용과 같은 이들의 자기 결단은 존중되어야할 사적 행위로 전락된다는 사실을 놓치고 만다.

이렇게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은 맥락을 배제한 글쓰기를 하는 사이에 애매한 이원론으로 빠지게 된다. 즉, 적과 아군의 구분을 바탕으로 지식인 논쟁을 재단하려는 움직임이다. 사실 한겨레의 <신문을 위하여>에서 어떤 이들도 그들과 나의 구분에 '지식인 영역' 자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겨레가 명민하게도 논쟁을 언론사 세무조사로만 한정시키려는 전략을 펼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지식인 사회의 이분화에 대한 우려는 조선일보의 기자 손에서 생산되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이들이 확대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다음의 기사들이 보이는 시차에 주목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권력의 눈치를 살피느라 한 사회가 건강하기 위한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이념의 시장'은 전혀 형성되지 않고 있다."(이하원, 홍영림 기자, 조선일보 2000년 1월 12일자)

"입장의 차이는 있었지만 지난 30여 년 지성계를 양분하며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창비'와 '문지'가 '문화권력'으로 낙인찍혀 그 '패거리주의'를 매도당했다."(김태익 문화부장, 조선일보 6월 7일자)
이런 입장을 두고 많은 이들은 조선일보의 입장이 변덕스럽고 자사의 이익에 맞춰 말을 바꾼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행태를 끊임없이 반복할 만큼 조선일보의 기자들이 바보일까.  

- 권력의 물신화로서 정치지상주의

 일단 시각을 바꿔 조선일보 나름의 일관성을 인정한다고 할 때 조선일보 나름의 논리중 하나가 불거지게 된다. 이 역시 애매한 이원론에 기댄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앞서의 '권력'이라는 규정과 뒤의 '문화권력'에서의 권력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개 조선일보는 권력이라는 말을 부정적인 어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권력은 대개가 '정권'과 동의어가 된다. 그러므로,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논쟁의 와중에도 끊임없이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언론 당사자가 자신의 본령을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찾는 것은 인정할 수 있는 바다.

"지금 세무조사에 검찰조사까지 받으며 존립을 위협받고 있는, 약자인 언론에 곡학아세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이규태, 조선일보 2001.7월 6일자)

곡학아세의 논쟁 가운데서 나온 이규태의 위와 같은 말도, 나름의 애교성을 가지는 것도 이 측면에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애매한 이원론을 재생산하는 지식인들이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이문열이 추미애 의원과의 논쟁과정에서 언급한 내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세무조사를 비판하는 칼럼을 쓴 것은 이번 세무조사가 언론자유를 침해할 개연성이 아주 높으며, 권력이 합법성을 가장해 신문에 강요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론과 정권이 충돌로 승패를 가름해야 한다면 나는 언론 쪽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이문열, 동아일보 7월 5일자)

이문열의 진정성을 1%라도 인정할 수 있다면, 위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때다. 이문열이 생각하는 그 '개연성'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언론 쪽의 승리를 기원한다는 데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논리가 사회과학을 하는 지식인에게는 어떻게 해석이 될까. 한림대 사회학과의 전상인 교수는 이점에서 주목할 만한 지식인이다. 그는 지난 4월 17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은 관점을 밝혔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인 사회의 반지성화는 김대중 정권과의 친소를 기준으로 한 지식인 집단의 줄 세우기 및 편가르기와 무관하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다음의 문장 뒤에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실명비판' 혹은 '안티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지식인 사회의 게릴라식 내전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독선적이며 또한 선동적이다. 물론 지식인 사회라고 성역과 금지의 영역은 아니다."

전상인은 올해 초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 안티조선운동을 겨냥하고 있으며, 강준만을 필두로 하는 일련의 실명 비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을 교묘히 정권과의 친소관계로 치환시킨다. 이런 말장난이 어디 있는가. 그런 그가 남한의 지식인 담론을 분석하는 최근의 글을 통해서 '지식인들의 본령은 거리 두기'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물론 전상인 같은 이들은 '지적 스토킹'하며 기겁을 하겠지만, 이런 방식이 글쓰는 사람에게 결코 쉬운 글쓰기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자신이 예전에 무슨 글을 썼는지도 모르는 이에게 '이런 글을 썼다'고 찾아다 보여주는 일은 상당히 귀찮은 일에 속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전상인과 같은 지식인이 조선일보의 논조를 재생산하면서 오히려 복잡한 사회의 다양한 권력지도를 일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의 권력관은 언론기관으로서의 직능적 특징에서는 용인될 수 있지만, 전상인 같은 사회과학 전문가가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지식인 사회의 논쟁을 재단하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좋은가.

전상인을 비롯하여, '홍위병' 논의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지식인들은 공통적으로 정부의 권력을 물신화하는 정치지상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이미 남한 사회를 김대중 정부를 정점으로는 위계적 망(網)으로 구성해놓고,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이 그 위계적 망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문열은 용감하게도 언론사 세무조사를 정권 대 언론의 대립축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그간 시민사회에서의 개혁 움직임은 도외시한 채 정부의 주장과 시민사회의 주장을 일차원적으로 비교해 '홍위병' 딱지를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과거 박정희나 전두환의 군사정권시절에 정권에 빌붙어 기생하던 지식인이나 언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가. 사실 이 질문이 위에서 거론된 차인석이나 전상인, 이진우 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

- 비판의 유일한 자격으로서 전문가주의

안티 조선을 두고 오가는 논쟁에서 특히나,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지식인의 분열'을 개탄하는 사람들과 권력을 정치권력으로만 한정시켜 바라보는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전문가주의'를 근저에 깔고 있다. 9월달에 나온 신동아에서는 지식인 21명을 대상으로 김대중 정부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실려 있다. 이 중, 유석춘 교수는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에 관한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문가가 문제점을 지적하면 반개혁이고, 시민단체가 좋은 취지만 내세워 시행을 주장하면 무조건 개혁인가. 전문가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단체의 논리만 앞세우다 보니 '홍위병' 얘기가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김만제 의장이 '인민 재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냐."

위의 말에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결과로만 판단하는 유석춘의 논리 추론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말처럼 구체적으로 "그 때 지식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한국일보 7월 19일자)하는 점이 지적되었어야 했음에도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의료정책에 관한 논쟁 중 무엇이 핵심이었고, 어떤 정책이 문제였다는 것을 밝혔어야 했다. 하지만 유석춘은 단선적으로 전문가와 시민단체를 대립시킴으로써 문제를 간단하게 만든다. 물론 유석춘의 봉건적인 정치적 지향성 자체를 문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 문제인 것이, 이론상에서의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이 실제 현상에 대해서는 완고한 무관심으로 대체되는 상황이다. 오히려 시민사회 자체보다는 몇몇 시민단체를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전상인이든 유석춘이 강조하는 전문가대 대중의 짝개념을 중심으로 보자면, 그들에게서 어떤 일관성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전상인의 경우, 지난 98년 발표한 [양반과 부르주아]라는 글을 통해 남한의 부르주아가 조선시대의 양반과 달리, 사회적 통제력의 측면에서 미약한 이유를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주된 분석틀로 제시되는 것이 그람시의 시민사회론이며, 그 중에서도 헤게모니라는 관점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지식인은 그 시민사회의 요소일 따름이다. 이 점에서 이들이 강조하는 전문가주의는 순수한 의미의 엘리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시민사회세력을 겨냥한 편향적 언사인 것이다. 다른 예를 보자.   

정과리는 지난 조선일보에서 제정한 동인문학상과 관련된 논쟁에서 고종석과 의미 있는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여기서 의미 있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로서 정과리가 자신의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직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어정쩡하게 조선일보의 그늘에 서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나름의 전략을 제시했다. 고종석의 "지금 안티조선일보 운동의 싸움이 정면돌파라면 외곽돌파는 어떤 걸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 중 대표적인 게 동인문학상이다. 작품을 통해 조선일보에 반하는 생각을 갖게끔 해줄 수 있고, 조선일보사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전략의 목적이 '보수우익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는 우리 마음속'에 어떤 자극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과리의 말은 언뜻 보기에 '세련된' 조선일보 활용론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을 움직이는 순문학의 힘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조선일보가 일궈놓은 모종의 뿌리를 흔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지난 7월 20일자 조선일보에 '일류-권위 배척하는 천박'이라는 제하의 글을 기고하면서 밝힌 바는 '과연 그의 진의가 무엇인가'라는 혼란을 느끼게 한다. 그는 "쪼가리 지식들, 얄팍한 지혜들이 창궐하면서 한국의 지식은 광복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간신히 심어온 역사적 뿌리가 뽑힐 지경이다."고 개탄하면서 곧 이어 "일류가 일급 대접을 못 받고 조롱 당한다."고 통탄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역사적 뿌리'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며, 자신이 말하는 '일류'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대체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과리는 맥락적으로 말하는 이다. 자신의 텍스트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절대 다 드러내는 바가 없다. 특히,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약간 '거리'를 둔 채 일반화의 방식으로 싸잡아 거론한다. 이를 통해 자신은 자신에게 향할 수 있는 비판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정과리의 이 말은 조선일보 6월 7일자 김태익 문화부장의 다음 글과 같이 놓았을 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지식사회의 새조류'라는 칼럼을 통해, 문지논쟁과 미당논쟁, 그리고 박종홍에 대한 재평가를 거론하면서, 다음의 전제 조건을 비판의 전제로 내세운다.

"창비와 문지, 미당과 박종홍을 어디까지 부정할 것인가. 그들이 없는 한국 현대지성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기존의 권위를 대체하려면 그걸 뛰어넘는 실력과 도덕적 자질과 전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과리는 이런 맥락에서 시민사회를 지식인들의 사회와 명확하게 분리하면서,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의 성곽을 짓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전문가주의는 시민사회 중심의 사회개혁운동에 대한 반비판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조선일보가 '자유실천시민연대'나 혹은 그 비슷한 시민단체를 다룰 때에는 '시민사회의 다양성' 운운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시민사회의 민주적 역량과 판단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면, 부수로서만 권위를 내세우는 조선일보의 논리는 자승자박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과리도 마찬가지고 유석춘도 마찬가지고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서는 독자의 선택을 운운하면서, 시민사회나 시민운동단체에 대해서는 그것의 아마추어리즘을 타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아마도 수동적이면서 몰개성적인 군집체로서 '대중'은 매력적이지만. 능동적이고 참여하고자 하는 의미에서의 '시민'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 스스로가 다수의 대중을 주장할 때는 중요한 논거가 되고, 시민단체를 위시한 능동적 시민들이 말할때는 홍위병이 되는 것인 아니겠는가. 여기서 조선일보나 유석춘이나 정과리가 말하는 전문가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레토릭으로 전락하는 순간을 찾을 수 있다. 서강대 이태동 교수의 다음 글을 보자. '이문열과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이문열이 이러한 사태를 두고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홍위병들의 발호에 비유했던 것도 '말없는 다수'의 일치된 의견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문화일보 7월 11일자)라고 말하고 있다. 말을 하는 이들은 홍위병이고, 이문열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은 '말없는 다수'이다. 이로써 유석춘이나 정과리, 이태동이 말하는 '전문가로서 지식인'은 자신들을 향하는 수사로 전락한다. 그리고 시민은 어떤 입장의 제시를 통해 능동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구성해나가는 이들로서 아니라, '말없이' 전문가의 판단에 따르는 신민이 되고 만다.

4. 조선일보를 넘어 대안논쟁으로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 '안티조선'이라는 쟁점을 이끌어온 대략적인 지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간략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신문선택의 문제 → 비판의 형식문제(강준만과 인터넷 게시판을 중심으로) → 정권과 언론의 대립 문제(언론사 세무조사) → 시민사회의 문제(홍위병의 문제의식) → 지식인 사회의 분열 → 전문가주의 및 '말없는 다수'

시계열상의 문제보다는 문제제기의 중점을 중심으로 구분했을 때 대략적으로 위의 순서를 따르는 것 같다. 사실, 조선일보라는 하나의 족벌신문을 두고 일어난 사회적 파장의 수위가 너무도 높다. 그만큼 '안티 조선'이라는 의제가 가상의 의제로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에 뿌리를 둔 구체적인 의제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소위' 진보적 지식인군들의 대응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유의미할 것이다. 3절에서 살펴보았듯이, 교묘한 말의 전제들과 함의들이 고정된 것도 아니라, 시시각각 쟁점을 바꿔가면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 함정들에 대해 대응해나가는 일단의 지식인군을 살펴가면서, 좀더 진전시켜나가야 할 부분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먼저 이를 살펴 볼 때 하나의 시금석으로 박홍규 교수의 글을 채택하고자 한다. 이는 우선, '안티 조선'의 문제 설정을 이념적인 수준에서는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홍규는 어느 정도 이념적인 구분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둘째로는 '안티조선'의 문제설정에서는 각 진영간의 삼투 형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 형성된 일종의 전선이 중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홍규 교수와 같이 다소 관망적 자세를 견지하다가 '싸움닭이 되기'를 결심하는 사례는 양 진영의 삼투가 왜 어려운지에 대한 기초적인 '변화'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홍규의 입장에서 개혁대 보수의 축으로 '안티조선' 문제를 해석하는 입장의 한계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박홍규 영남대 법학과 교수는 지난 7월 <교수신문>에 '지식인의 글쓰기를 비판한다: 오십에 싸움닭 될 결심을 하며'라는 제하의 글을 기고했다. 박홍규는 전상인과 신일철, 조성기, 송호근의 글을 예시로 그들의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무슨 말을 하건 '선동'으로 낙인찍힐 것이 뻔한 상황이 오히려 그를 선택으로 몰고 있으며, 오히려 그 '선동'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싸움닭이 될 능력도 없는 무능한 사람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언제나 다수에 의해 '선동'으로 낙인찍히는 대화에 나설 생각이 없다."

사뭇 비장한 말투지만,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는 시원한 문장이다. 사실 대화라는 것은 상대방의 선동까지도 '대화'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한데도 '자세가 안되었다'는 극히 주관적인 잣대로 '선동'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의 실명비판에 얼굴 빨개지는 이진우나 임지현 같은 이들에게 '대화'란 쨍한 여름 큰 그늘 아래 앉아 천하를 논하는 것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특이나, 이들이 옹호하는 조선일보의 문화부 차장이라는 사람이 쓴 다음의 '문화적인 글'보다 더 심한 글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는지도 묻고 싶다.

"성마른 정치인과 전사 로봇을 닮은 지식인들이 말을 난사하고 있다. 그들은 취해 있기 때문에 파괴를 개혁으로 오해한다. ... 언어 내적인 논리보다는 언어 외적인 공포분위기 조성이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 말을 부드럽게 곡면으로 다듬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낫으로 창처럼 깍는다. 그 말은 상대의 이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고 상대의 심장에 꽂히는 것이 목적이다."(김광일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 7월 12일자)

결국 이름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이지, 말품새 등은 하나 문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홍규가 싸움닭이 되고자 맘을 먹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선택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방식은 '안티조선'에 참여하는 이들의 주요한 활동 자원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진중권식의 글쓰기가 문장과 문장사이를 가깝게도 하고 멀게도 해서 숨겨진 의미를 돋아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박홍규와 같이 초기에 '안티조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주요한 전략이다. '독립군'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옥천군의 안티조선운동이 그렇게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를 '친일 전력'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넓게 보면 텍스트 분석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이런 분석은 궁극적으로 제한된 선택지의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박홍규는 싸움닭이 될 결심을 밝히면서 곧 "나는 언론 개혁을 추진하는 정권과 그것을 지지하는 한겨레와 극소수의 지식인을 전폭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안티조선'이라는 네가티브한 운동이 지니고 있는 최대한의 포지티브한 측면은 '현재 여기서'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안티조선' 운동 초기에서부터 '조선일보를 비판하면 대안은 뭐냐'는 질문에 취약성을 보인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대개가 최소한의 정의와 윤리성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나갈 뿐이다.

김우창이 최근 당대비평에 발표한(2001. 8) '진실, 도덕, 정치'는 이러한 한계를 명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는 진실이라는 것이 단순히 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점에서 진실은 언제나 상대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 도덕 역시도, 그것이 큰 도덕일수록 작은 도덕의 부정을 정당화하는 모순을 가지게 된다고 본다. 이런 것이 정치라는 세상살이의 한 축과 연결이 되었을 때는 상당히 복잡되고 때로는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김우창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덕적 실천은 아무래도 '안티조선' 쪽의 지식인들을 가르키는 것이며, 전반적으로 그 지식인들이 범할 수 있는 우려투의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글의 말미에서 제시되는 결론이 "우리가 나무를 나무로서 있게 하려면 우리 스스로를 버리면서, 내면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공간을 나무에 던져야 한다"는 릴케 식의 문학적인 언급으로 끝나는 것이다. 김우창의 글쓰기가 워낙 당면의 글쓰기를 보편의 수준에서 논하는 특징이기에 나름의 효과는 있으나 한계 역시 명확히 드러난다. 그것은 실제 구체적인 삶에서 사는 사람들의 경험은 언제나 그대로 '보도록'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며 다른 편으로 '가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우창의 문제의식에서 유의미한 부분은 '도덕의 과잉'이 가져 올 수 있는 담론의 붕괴에 있다. 박홍규의 사례에서처럼 당면의 선택을 일종의 '도덕적 자기결정'으로 제한할 경우, 논쟁은 그 '도덕성'의 수준에서만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인물과 사상>에서 강준만이 최근의 논쟁을 '친김대중 정권'에 대한 축이 아니라 '친개혁'이라는 축으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이러한 방향의 전환이 오히려 '안티 조선' 문제를 이념화시키고자 하는 조선일보의 의도에 적절한 빌미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현 상황에서 개혁은 곧 김대중 정부의 정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친권력적'이라는 혐의를 부추긴다. 만약 지식인 논쟁으로 범위를 한정해보았을 때 오히려 효과적인 것은 추상 수준에서의 논쟁일 수 있다. 실제로 텔레비전에서 '언론개혁'을 주제로 하는 토론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언론개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사들은 '다원성'이니 '민주주의의 질서'니 하는 말들을 하는 반면에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조세정의나 역사의 왜곡, 각종 여론조사의 지표를 거론하는 전형성을 발견할 수 있다. 김우창의 말을 빌면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인사들의 이와 같은 말법은 논쟁이 시작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로서 '진실'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일반인들은 단순명료한 개념어 사용이 더 익숙하다는 점이다. 언론 개혁을 반대하는 인사들이 '언론자유'를 말하는 것은 일반인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논쟁에서 주요한 논거로서 이용된다. 반면,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내놓는 그 많은 사실들은 수용자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낳는다. 이 점을 '안티 조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지식인들간의 논쟁에 유비시켜 본다면,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세정의와 언론의 자유가 대립되는 개념쌍으로 변질된 상황 자체를 반전시키지 않는다면, 논쟁은 수평을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3절에서 보았듯이 이미 유용한 개념어를 선점하고 이를 활용하는 측은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다. 사립학교법 개정 운동에도 평등주의를 갖다 붙이고, 노사정위원회에 대해서 사회주의를 갖다 붙이고, 세무조사에도 좌파를 갖다 붙이는 것은 언제나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말의 추상수준을 교묘히 조정해 본말을 전도시키고 논쟁의 축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측도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일보와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기는 '위기'에 대해 "편가르기, 혹은 키재기는 그 휴유증까지를 포함해서 오히려 현금의 우리 사회가 겪어내야 할 계몽과 성숙의 일단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새롭게 전유하는 김영민의 방식은 유의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현재의 지식인논쟁을 '안티조선'의 문제설정을 중심으로 다시 재해석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지식인논쟁이 지니고 있는 현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그것의 뿌리에는 안티조선의 문제설정이 자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안티조선의 문제설정을 포기하게 될 경우에는 다음의 고려대 현택수 교수 말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지금 이 땅에서 전개 중인 문화권력들의 논쟁은 그 내용의 천박성과 함께 사유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맹목적이고, 감정적 비판은 막말과 욕이 오가는 언어폭력을 낳고, 비방과 폭로의 인신공격은 논쟁을 저급한 언쟁으로 변질시킨다. 논객들의 적절치 못한 비유를 실제와 혼동하고 수사에 감정적으로 대응해 논리싸움이 감정싸움으로 비화하곤 한다. 깊은 사유와 정치한 분석으로 논리 대결을 하기보다는 도식적이고 왜곡된 흑백논리와 혐의 씌우기식 비난으로 편가르기에 급급하다."(뉴스메이커 7월 19일자 433호)

하지만, 이를 '안티조선'의 맥락에서 보게 될 경우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른 지평에 놓이게 된다. 우선 '문화권력들'이라고 집합적으로 불릴 때 안티조선과 조선일보와 그 지식인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만다. 다만 구구절절 옳은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현택수는 '관전평'만 할뿐이지 자기의 입장에 기반한 평가를 내리지 못한다. 더더군다나 부르디외의 미디어 지식인 비판을 그렇게 많이 소개한 이가, 조선일보에 의해 지식인사회가 쥐락 펴락되는 상황에 눈을 감은 채 말이다. 현택수가 이해하고 있는 부르디외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이문열의 말이 타당한가.

"신문이 지식인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다 자란 지식인을 신문이 활용하는 측면이 더 강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내가 글을 실어달라고 부탁한 것보다는 신문사가 나에게 청탁한 적이 대부분이었다."(동아일보 7월 5일)

이 부분에 대답하지 않고, 지식인들간의 논쟁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면 현택수가 보여준 것과 같은 '관전평'만이 다시 난무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추상의 수위자체가 아니라, 추상의 목적에 있는 것이며 그보다는 추상 자체가 지니는 효과에 핵심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안티 조선'이라는 문제 설정 자체가 희석되면 될수록 논쟁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지현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 대한 서평 한 꼭지를 통해서도 대담하게 다음과 같은 조소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사의 어디에나 끼어 있는 어리석음에 대해 현명함이 베푸는 예의이기도 하다. 예의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 해도,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차별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멱살잡이나 이전투구의 핏대 싸움을 논쟁이라 착각하는 이 땅의 나 같은 지식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동아일보 8월 11일자)

'나 같은'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면서 한 켠으로 물러서는 흉내를 내지만, 그가 웃으면서 화를 내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안티 조선'의 문제설정을 넣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런 '안티 조선'이라는 문제설정의 재생만으로 현재의 논쟁을 뛰어 넘을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대안을 바탕으로 하는 '안티 조선' 자체의 핵분열이 필요하다. 지금과 같이 '개혁'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집중하기보다는,  적어도 지식인 사회는 어떤 개혁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느슨한 핵분열을 할 필요가 있다. 서준식이 한겨레에 '나, 사회주의자'라는 칼럼을 통해서 김만제 식의 농담에 반응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거시적인 대안의 모색이라는 '좌파'의 본령에서 '안티조선'의 문제의식이 구체화되길 바란다. 하지만 이 '좌파'의 규정이 김영민을 포함한 모든 성찰적 자유주의자들보다 무조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동향과 전망>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거시적 대안으로 들고 나온 장상환과 민중사회론을 들고 나온 김세균의 차이를 눈여겨보자. 장상환은 지난 6월 조선일보 반대 2차 지식인 선언에 서명하면서 "나는 사주 1인지배 체계가 부당내부거래, 과당경쟁 등의 고질적인 경제왜곡을 낳았"으며, "최근에는 이들 언론이 약육강식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약자들에게 주입해 자기모순에 빠지게 했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김세균과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주도적으론 내고 있는 <진보평론>에서는 조선일보 문제와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해서 단 하나의 논문만이 소개될 뿐이다.

현실을 이루는 세부적인 결에 대해서 민감한 좌파만이 현실성 있는 대안을 형성할 수 있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현장 투쟁분석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진보평론>이 노동자들의 열독률이 높은 편인 조선일보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모순이다. 시민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김세균이 그 시민사회를 쉽게 부르주아의 손에 놓아 버리는 것은 너무나 편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장상환이 보여주는 교조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문제에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과의 접면'을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긴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장상환은 '친 정권'이라는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는 그가 구체적으로 견지하는 거시적 대안 속에서 '안티 조선'의 문제 설정이 자리 매김 했기 때문이다.

추상화 수준의 개념 싸움도 매우 중요하고, 이를 위해 행해지는 텍스트 분석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견고한 성의 거울 이미지로 재생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울이미지는 어쨌건 거울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풍경에 넋을 잃으면 내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를 잃기 마련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움직이는 차안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그리고 들고 있는 차표를 계속 확인하면서 버스에서 내릴 때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오가고 있는 지식인 논쟁을 '안티 조선'이라는 문제설정을 배제한 채 논의하다보면, 우리는 그 풍경에 넋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리곤, 김창호 중앙일보 전문기자가 정리한 바와 같이 "지식사회 위기의 본질은 이처럼 기존 지식권력이 해체되고 있음에도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찾지 못한데 있다. 과거와 같은 기능적, 관료적 지식인과 저항적 지식인이라는 이분법은 이제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중앙일보 8월 23일자)라는 종합적 결론밖에는 즉,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티 조선'의 문제설정 하에서는 현재의 지식인논쟁이 '안티 조선'을 두고 일어나는 2, 3 라운드쯤 되는 긴 경기의 한 과정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지형도 분명해 질 것이다. 새로운 거시적 대안을 바탕으로 친김대중이냐 반김대중이냐는 단선적인 선택의 장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들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은 먼저 '김대중'과 '이회창',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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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산업의 (보이지 않는) 굴뚝

 

이런 이야기는 들을 적 있다.

 

2004년에 부안 방폐장 건설 반대투쟁을 할 때가. 당시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공사 였던가?)의 홍보물에는 핵발전소가 석탄이나 석유보다 더욱 환경친화적이라며 난리를 쳤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당시 평범한 부안주민들마저 알고 있었던, 사용가능한 '핵'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었다. 뭐 씨알도 안먹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최 핵발전소라는 것도 시동을 걸려면, 석유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리저리 해도 석유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는 좀처럼 낮아질 수 없다는 문제의식. 곧! 에너지 소비를 낮추는 것외엔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오늘 또 이런 이야길 보았다.

 

<경향신문>에 난 기산데, 우리가 굴뚝없는 산업으로 알고 있는 iT산업 역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글 검색 1건에 전구 45분을 켤 수 있는 에너지가 소비된다!

 

믿기나? 난 이 기사를 여러번 곱씹어 보았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편리함이라고 여기는 모든 물건들은 이렇게 에너지를 많이 사용해서 만들거나, 유지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든다.

 

결국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법이라는 것.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추세다. 내가 진보넷에 이렇게 블로그를 운영하기 위해 드는 석유에너지는 과연 그 효율을 제대로 내고 있는 걸까? 헉.. 하고 나니 무서운 질문이다.

 

오일피크에 대해 이런 저런 경고들이 나오고 있다. 위기는 내 자식들을 겨냥하고 있다. 나만 빠져나가면 되는 세상이 아니기에 더둑 경각심이 든다.

 

(사족) 세상의 모든 허위와 편견을 까발리겠다는 책이 있었다. 그 책에선 지구온난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장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지구가 생겨나고 지금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결코 위험한 수준이 아니다. 지구는 온도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왔다. 그러니 지금 올라가고 있는 지구의 온도도 곧 내려갈 것이다."

 

읽어 보고, 그래프도 보고...'끄덕, 끄덕'하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그 온도가 내려간다는 지점의 조건이 혹시, 인류가 없어진다는 조건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젠장! 인류가 살아남지 못하고 지구의 온도가 내려가면 무슨 소용이냐구!

 

하긴, 그런것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경제학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경제학도들이 일반 사람에 비해 이기적인 이유를 알 수밖에 없군. 음하하, 타도하자 경제학과!!



IT산업 ‘굴뚝만 없을 뿐’ 항공업보다 환경 더 파괴
ㆍ구글 1건 검색 소비전력이면 전구 45분 켜


‘비행기보다 위험한 컴퓨터?’

대표적 친(親)환경 산업으로 여겨져온 정보기술(IT) 산업이 실제로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항공 운수 산업보다 더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독일 주간 슈피겔은 최신호에서 IT 산업의 에너지 소비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지구 전체 발생량의 2%로 항공기가 배출하는 온실가스와 같은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항공산업이 바이오 연료 사용 등 온실가스 절감에 노력하는 반면, 급성장 중인 IT 산업은 직접적인 오염물질 배출이 없다는 이유로 환경 문제에 둔감하다는 데 있다.

IT 산업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막대한 전력 소비량 때문이다. IT 산업은 대용량 서버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엄청난 전력을 쓰고 있다. 인터넷 접속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서버는 24시간 쉼 없이 작동해야 하고 중요한 정보 손실을 우려해 항상 ‘열 받지 않도록’ 냉각팬을 돌려야 한다.

독일 뮌헨 지역 대학의 전산망 연결을 위해 지어진 라이프니츠 컴퓨터 센터는 2011년 도입을 목표로 슈퍼 컴퓨터를 주문했다. 이 슈퍼 컴퓨터를 유지하려면 ‘짐을 가득 실은 채 멈춰있던 400t짜리 고속열차가 시속 300㎞를 낼 때’와 같은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지금도 한 달 12만유로(약 1억8700만원)에 이르는 이 센터의 전기요금은 슈퍼 컴퓨터가 도입되면 더욱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구촌에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전산망 운영 업체들은 수만대의 서버를 운영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IDC에 따르면 2000~2005년 사이 네트워크 서버의 전력 소비량은 2배로 늘어났다. 비평가들은 이를 ‘열풍기’에 비유하며 에너지 절약형 컴퓨터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인터넷 검색엔진 구글에서 1건을 검색할 때 소비되는 전력이면 에너지 절약형 전구를 45분 동안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IT 기업들은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주된 목적은 ‘환경 보전’보다 ‘비용 절감’이다. 구글은 최근 인터넷데이터센터를 미국 오리건주 댈즈 댐 인근에 새로 지었다. 캘리포니아주에 지불하는 돈의 5분의 1 가격에 수력발전으로 생산된 전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IBM은 160여개의 전산센터를 7곳으로 통·폐합했다.

슈피겔은 ‘굴뚝 없는’ IT 산업이 오히려 지구 온난화를 부추긴다는 점은 산업화 초기의 철강 산업을 연상시킨다고 전했다. 철강 산업과 IT 산업 모두 초창기 폭발적인 성장과 그 과실만 주목받았을 뿐, 이들 산업이 유발하는 오염과 자원 소비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 정환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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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이 투표한다

재미있는 기사입니다. 영화잡지 <프리미어>에 실렸던 것이라네요..^^

글씨가 깨지는데, 밑의 그림을 한 번 클릭하면 제대로된 그림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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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난데즈씨 어디 계세요?

이 글은 1달전에 썼던 글과 연관이 있다.(클릭)

 

짧막한 글의 주고받음이었지만, 결국 확실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요즘은 '한반도 대운하' 반대를 주장하니 지지한다는 말들이 들린다. 에휴~~

 

좀 신랄하게 들리겠지만, 창조한국당을 지지하는 멘탈리티와 노무현을 지지했던 멘탈리티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대운하반대하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으었으나, 너무 빨간 색이어서 가까이하기 어려웠는데 그나마 창조한국당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니깐 부담없다. 이런 것 아닐까?

 

이는 연예계에서 흔히 존재하는 '팬'적 광신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특정인을 좋아할땐 단점도 장점으로 보이다가, 아니면 단점은 작게보이고 장점이 크게보이다가, 애정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런 광신적 태도 말이다.

 

내가 이렇게 까칠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헤르난데즈씨의 영입에 침을 튀어가며 칭찬했던 이들이 결국 7번에 머물고 만 비례순번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대운하 반대로 몰려가고 있다. 허허 참.

 

마치, 조중동 적당히 때려주면서 한미FTA 추진하던 노무현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감성적인 만족감은 얻되, 실속은 없는 정치적 게임에 빠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묻는다.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것으로 치면, 한나라당을 제외하고 다 포함된다. 진정성으로 보자면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도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다고 본다. (참고로 작년 대선때 경부운하 반대에 대해 최대로 언급한 곳은 민주노동당이었다. 모두 경제살리기로 뛰어 다닐때 였다)

 

그런데도 창조한국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의 합리적 이성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들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노무현과 문국현이 그렇게 다른가? 난 차이점보다는 핵심적인 공통점을 더욱 많이 본다.

 

마지막으로 묻자. 헤르난데즈씨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그 때 신문을 장식했던 사진의 잉크도 아직 증발되지 않았다. 박근혜 사당에 불과한 '친박연대'와 무엇이 다른가? 지지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일성이 더 크지 않나?

 

참 어려운 사실이다.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학교 다닐때 운동좀 했다고 하는 인간들이 창조한국당에 버글댄다는 사실이다. 그럼 운동경력이라도 말하지 말던가, 아니면 선배라는 이유로 학교나 들쑤시고 다니지 말던가. 거 참. 운동은 몸으로만 하면 이런 부작용이 생긴다니깐.(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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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그저 색깔일뿐인가

* 민중언론 참세상[“‘작가주의 초록’과 단절..연대?통합 적극 고려”] 에 관련된 글.

 

 

환경주의나 환경운동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환경운동도 환경주의 운동도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내가 지지하는 진보신당은 녹색후보를 내놓지 못했다고 핀잔을 듣고, <참세상>에서는 초록정치연대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다.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상종가를 치고 있는 희귀한 상징재라고나 할까.

위의 기사를 보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초록'이나 '녹색' 영역에 대해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다음은 초록의 가치가 과연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아우를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앞의 것은 운동권내에서 초록이나 녹색이 지니고 있는 기득권에 대한 문제제기고 뒤의 것은 초록의 정치화와 관계된다.

 

아주 짧은 생각이지만, 위의 두가지 질문을 가지고 인터뷰를 차분차분 뜯어보려 한다. (605)



우선, 시작부터 보자. 댓글로 말이 많은 기자답게 질문도 상당히 정치적이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한국사회당과의 초록정치위와 진보신당과의 초록네트워크는 위상에 어떤 차이가 있나. 초록정치연대는 진보신당보다 한국사회당에 더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질문이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기자는 사람아닌가? 그런데 이건 유도질문 아닌가? 어쨋든 이에 대해 답을 하면서,

한국사회당은 쉽게 말해 소수자고 약자다. 진보정치 진영 내에서 민주노동당이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이들은 비주류로서 설움을 많이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진보가 뭔지, 사회주의가 뭔지 모색하고 성찰할 시간을 많이 가졌다고 본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아니 언제부터 소수자나 약자의 개념이 상대적이고 미시적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나? 우리집안에선 나혼자 남자니까 난 소수자고, 사무실 남자들 중에선 힘이 가장 약하니깐 난 약자인가? 

아니 정치적으로 볼 때에도, 그럼 친박연대는 소수자이고 약자인가? 이것 너무 우스운 코미디 논법아닌가? 그냥 정책면에서 건강하고 함께 할 만하다고 말하면 되지, 약자여서 소수자여서 생각이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도인' 흉내로 보인다.

어쨌든 지나가자. 아직 본론이 아니다. 초록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는 부분은 다음부분이다.

초록은 노자대립이 우리 사회 핵심적인 모순이라 보지 않는다. 노자대립도 우리가 안고 있는 주요 모순 중 하나지만 환경 위협도 우리가 안고 있는 전선 중 하나다.

노자대립을 제일 모순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전혀 함께 할 수 없는 세력과 연대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진보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국민의 메시지는 노자 문제로 용해시킬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그런가? 나도 노자갈등이 모든 문제를 덮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답변자는 너무 나이브하다는 인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노자갈등 혹은 계급갈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내재적이다. 이는 모든 문제가 노자갈등을 해결할 때 해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제자체가 그렇게 직조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는 초록의 문제라 해도 다르지 않다. 개발이데올로기는 바로 자본주의적 모순에 기대고 있지 않나? 이도 아니라면, 우린 채렵사회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이런 초록의 정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지금, 한국지형에서의 초록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초록이 지나치게 현실정치에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위원장 직위를 떠나 초록정치연대의 한 활동가로서 전 찬성하지 않는다. 진보의 재구성을 요구받는 것은 진보가 우리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국민에게 현실적인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초록 정치에 대한 재모색이 필요하다. 반성 중 한 가지는 기존 초록이 ‘작가주의 초록’이었다는 데 있다. 초록에게 이론적 정합성은 있지만 국민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우리는 그에 대한 모색을 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 귀 닫고 우리 내부만 바라보고 정치를 할 수 없다. 진보 내 다양한 정치 세력과 부딪치고 토론하며 적어도 2년 내, 2010년 안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기회로서 ‘진보의 재구성’이 떠오른 것인데 우리 정치만 한다는 것은 한가한 발상이다. 주요섭 전 집행위원은 초록이 기존 진보와 차별화된 ‘등대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반대한다.

 

 흥미로운 것은 인터뷰 내내, 환경운동연합이든 녹색연합이든 시민사회영역을 넘어 사회적인 녹색의제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력에 대한 평가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초록의 가치가 중요하고, 자신들은 그것을 해결한 해법을 가지고 있다는 자기 최면식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그럼, 묻자. 오세훈 서울시장과 유인촌 장관은 10년도 넘게 환경단체에서 활동해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초록의 가치와 당신들의 가치는 다른가?

 

이미 대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환경재단의 문제에 대해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회에서 초록의 의제만 퍼뜨릴 수 있으면 도구와 과정은 어찌해도 상관이 없는가?

 

참 답답하다. 구의원까지 해봤다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보고싶은 것만 보는 정치비젼을 가질 수 있는가?

 

난 진보신당 당원으로서, 모든 정책에 녹색이 녹아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빨간색과 녹색은 따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공동체는 중요하지만, 그것을 옭죄고 있는 국가의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정치적 무능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초록정치연대는 제갈길을 갔으면 한다. 참, '영성'에 기대는 '그노시시즘'은 좀 버리면 안되나? 그러다 초록교단이 만들어질까 두렵다.

 

참, 구태여 구분하지 않았는데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

 

1, 초록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없다. - 맞다.

2. 초록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넓을 수 있나 - 그렇다

 

난 위의 답안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록정치연대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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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세상을 지키겠다

어제 종영된 쾌도 홍길동의 대사다.

 

사실 이 별볼일 없는 드라마를 꽤나 열심히 보았다.

 

각종의 패러디도 볼 만 했지만, 홍길동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바꿔나가는 능동적인 모습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 때 동지였던 왕과 대결을 맞이한 홍길동은, 왕에게 말했다.

"넌 너가 왕인 세상을 지키기위해 싸우고 나는 그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세상은 어짜피 꿈이 아니냐는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서있는 곳이 바로 내가 원하는 세상이다. 너에겐 꿈일지도 나에겐 현실이다"

결국 죽게될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기억될 것"

 

결국, 홍자매의 각본이 훌룡한 것이겠지만, 드라마의 캐릭터들도 마음에 든다.

 

다들 뉴하트 볼 때 '난 길동이 팬이야'했다가 집단 왕따를 경험하고, 히히덕거리며 드라마를 볼 때 옆에 있던 아내가 "재밌냐"고 핀잔도 줬다. 그래도 난 한 두번을 제외하곤 본방을 사수했다. ^^

 

뭐랄까? 요즘 세상을 꿈꿀 건더기도 없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당장 당장의 하루살이가 버거운 마당에 꿈꿀 새가 어디있겠는가. 누군가의 말처럼 "잠이라도 자야 꿈을 꾸지!!"

 

그럼에도 내가 홍길동에게 열광한 것은,

 

절망하고 있는 나에게도 홍길동과 같은 만화적 상상력과 근거없는 낙관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싸우는 사람은, 이길거라는 생각이 없으면 다치기만 한다.

 

다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일 매일 즐거운 생각, 두 주먹 불끈 쥐고,

 

"난 나와 우리의 세상을 위해 싸운다" 빠샤 빠샤  아오오오~~~(3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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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억 달러를 감수할 수 있는 힘

* 민중언론 참세상[‘미드’ 작가 파업 "6, 7년 전부터 준비했다"] 에 관련된 글.

 


참 시의 적절했다. 뭐, 세상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이 파업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고 있는 즈음 나온 기사라는 점에서 말이다.

인터뷰 기사가 2편으로 나뉘어 나온다니,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봐야 하겠지만 꼭 첨언을 하고 싶은 것은 '그런 파업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하겠는가'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무산되었다. 뭐, 대단하냐고? 미국의 연예시장에서 각종 시상식은 자본이 넝쿨처럼 굴러다니는 금광이다. 간단한 셈법만 해봐도, 전세계에 방송되는 시상식 행사, 그로 파생되는 각종 협찬제품들과 광고수익, 게다가 관광수입까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이번 작가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임금 손실액만 3억 5천달라에 연관산업까지 감안하면 20억달러 정도가 된다고 한다. 뭐, 이 기간에 우리나라에서도 열광하는 미드의 다음편은 계속 다다음, 다다다음으로 연기 되었으니...

특히, 중소 매니지먼트사의 도산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과장된 수치겠지만 수만명이 일자리에서 쫒겨났다고 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배우들이 동참하고 화물운전자들이 연대했다. 그것도 우리가 '자본주의의 천국'이라고 부르는 미국에서 말이다.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라면?' 하하하, 너무 당연한 질문인가?

택도 없겠지. 매일 매일 경제적 손실 얼마 얼마 외쳐대는 보수언론이 넘쳐나고, 저질 드라마를 계속 보게 해달라는 드리마 매니아들의 인터넷 테러에, 일자리를 잃은 연관산업 노동자들의 '이기적인 파업'이라는 공세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특히 파업엄단이 정부 모토인 2메가짜리 정부에선 말 다했지 뭐. 잘하면, 전국의 문창과 학생들이 대체근무를 하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자본이 100일 투쟁에서 결국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이 없으면 배우도 없고, 화물노동자도 없다'는 부담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론이 그들에게 나쁘지 만은 않았다는 것도 중요하다.

파업하는 이유 대신 파업하는 현상만을 가지고 왈가불가하는 우리의 상황에선 언감생심 꿈도 못꿀 이야기다. 시장의 여건이 바뀌면 파이를 나누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에서 단지 '임금' %만 따지는 것으론 '파이의 적절한 분배'를 할 수 없다. 결국 사회적 파업과 정치적 파업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최소한 파업의 손실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는 '국가적 손실 얼마'라는 기준은, 파업의 이유를 밝힐 때에도 '국가적 차원의 원인'을 따질 때도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영화산업노조가 이 분야의 최초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단체협약을 타결한 것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하지만, 스텦들이 파업한다면, '죽어가는 한국영화'에 죽어라 고사지내는 것이란 비난을 피할 수 있을까? 

결국 해법은 연대인데, 그것이 점차로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단 말이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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