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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도대체 <인크레더블>은 어떤 영화인가?

(2004년 12월 14일 작성)

 

 

하나의 사건을 두고 분분한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은 ‘자유민주주의’체제의 기본적인 전제이다(이런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빨리 왔음 좋겠다). 해서 책이어도 좋고 행사여도 좋고, 특정한 사회적 이슈여도 이런 저런 생각대로 지껄여도 충분히 타당하다. 그리고 그것을 듣거나 보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이족 저쪽 이야기를 다 들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지라고 맘먹는 기계적 합리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하나의 영화에 두 개의 신문사에서 낸 평가가 사뭇 달라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바로 <인크레더블>. 알려진 바대로 슈퍼히어로가 있었는데 너무나 설친다며 시민들이 이런 히어로를 왕따시키며 결국은 ‘슈퍼 히어로 활동 금지법’이라는 법률을 제정해서 이들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막기에 이른다. 하지만, 어디 시대가 그런 영웅들을 내버려 두는가. 결국 활동을 제기하게 되고 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세 자녀까지 동원하여 세계적인 악당을 쳐부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는 결말이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한겨레>는 전직 슈퍼히어로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다니는 보험회사는 시민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그들의 주머니를 털기 바쁘다. 그것도 체질에 맞지 않는다. 회사에서 잘리기까지 한 밥에게 누군가가 슈퍼히어로 활동을 제안해온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미스터 크레더블도 예외가 아니어서 15년째 보험회사의 상담 직원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자유자재로 몸을 변형시키는 능력을 지닌 그의 부인 역시 전업주부가 됐다.”라고 묘사한다.

<한겨레>의 시각에서는 보험회사의 행태와 영웅의 해고까지 검색의 범위에 들지만, <중앙일보>에게는 ‘조용히’ 살아가는 과정에만 검색을 맞춘다.

 

시각이 어째서 이러냐고. 그것은 <중앙일보>의 도입부와 <한겨레>의 결말 부분을 비교해보면 된다. <중앙일보>의 첫 부분은 “사람들은 ‘법’이라는 수단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일 때가 있다. 사교육을 없애겠다는 이유로 국가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었다. 요즘엔 사람들이 몇몇 신문을 집중적으로 본다는 이유로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도 하다.”이며, <한겨레>의 결론 부분은 “슈퍼히어로를 싫다고 내친 그 사회의 이기심, 자본주의 대기업 보험회사의 횡포와 ‘세계 정복 야욕을 가진 악당’이 어떤 상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이다. 이제 확연해졌다. <중앙일보>는 이 영화의 한 장치 즉, ‘슈퍼 히어로 활동 금지법’에 초점을 두었고, <한겨레>는 영웅이 겪는 일상의 부조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중앙일보>는 자신의 신문이 바로 ‘슈퍼 히어로’로서 주인공인 밥과 동일시 되며 이를 막으려는 시민들이나 국가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신문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 그동안 불법적으로 확대해놓은 <중앙일보>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과 <언크레더블>의 밥에게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어 족쇄를 채우는 것과 동일할 수도 있다. 물론 밥 역시 자신의 능력을 불법적으로 얻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한겨레> 역시, 영화가 굳이 보험회사의 부당성을 극의 핵심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경직된 시각의 강요이다. 물론, 이런 말은 이런 영화평을 쓴 기자가 <인크레더블>의 고향인 헐리우드를 간과하지 않았다는 조건하에서다. 적어도 감독이 ‘마이클 무어’인 것이 확실한 이상, 어떤 사회비판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 영화 <인크레더블>에 대한 평가가 판가름 난다는 점이다. <한겨레>는 “가벼운 게 장점일지도 모르지만 상상력으로 치면 <인크레더블>은 아쉽게도 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점수가 낮은 애니메이션으로 남을 것 같다.”고 평하고 있는 반면, <중앙일보>는 “그때부터 신나는 액션이 풍자를 대신한다. 그래서 어린이 방학 선물로도 손색이 없다.”고 권하는 멘트까지 보태고 있다.

 

뭐 <인크레더블>이 대단한 영화라고 이렇게까지 난리인가 싶지만, 영화평 역시 신문사라는 거대한 조직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지 아닌가 싶어 눈에 띄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일보>의 기사 중제를 보자. “재치로 꼬집은 ‘평등지상주의’”, 하하핫. 자뭇 심각한 <중앙일보> 데스크에 긴장 푸시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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