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김진석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1/11
    기계적 균형에 대해
    평발
  2. 2008/03/13
    2008/03/13-1
    평발

기계적 균형에 대해

한창 촛불 정국이 하나일때 하나의 글을 읽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정기적으로 메일로 구독하는 메일링 중에 '다산연구소'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고려대학교 김민환교수도 글을 쓰는데, '어떤 신문을 볼 것인가'(391번 글)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100%는 아니어도, 그의 말에 일리가 있겠다싶어 집에서는 경향신문을 구독하고 사무실에 와서는 한국일보를 찾아본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김민환 교수가 말하는 균형이란 그야말로 기계적 균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자(11일자) 한국일보 6면에는 '부동산 정책'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다.

"정부 구닥다리 처방에 거꾸로 가는 시장"

적절한 헤드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용은 그것이 아니었다. 소위 시장전문가랍시고 등장하는 부동산업자들의 말을 인용해 '중소건설사 무주택자 등 배려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정부의 경기부양대책에 찬성입장을 보이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에 일정정도 영향력을 발휘해온 -특히 종부세관련해서- 서강대 김경환 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

"현 위기 상황이야말로 왜곡된 규제 없앨 기회"

가 헤드라인이다. 그런가? 촛불집회땐 바로 그런 위기가 집회를 그만둬야할 이유가 되었으나, 지금의 위기는 오히려 정부의 실패하고 있는 정책을 지속할 때라고? 게다가 김경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종부세 등) 한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이지만 필요를 다했으니 없애야 한다". 좋다 이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다시는 바뀌지 않을,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 사람이 교수맞나?

제도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없앨 수 있는 것이라면, 종부세, 분양가 제한 등은 한국의 필요에 의한 제도인 것이고, 따라서 그 필요가 다했다고 생각하면 없앨 수 있다. 하지만 다시는 바뀌지 않을이라니...

나중에 새로운 필요가 발생되어도 바뀌지 않을 제도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건 뭐, 거의 강마에 톤으로 "똥덩어리" 수준아닌가?

그리고 신문을 넘기는데 10면에 "오바마-부시 정권이양 벌써 파열음"이라는 헤드라인이 보였다.

오바마 인수위 사람들이 부시 대통령의 훈령 200여개를 취임즉시 파기하겠다는 것이었다. 법령이 아니라 훈령 정도면 대통령이 바뀐 마당에 당연한 조치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를 '파열음'이란다.

그러면, 이명박이 정권잡고 좌파 10년 법안을 다 뜯어고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주 '아싸리 판' 아닌가? 그런데 한국일보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선 이렇게 평가하지 않았다. 결국 드는 생각은 당파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았다. 앞서 내가 존중했던 김민환 교수의 균형감각이라는 것이 결국은 기계적 균형감에 불과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한겨레의 당파성이 조선일보의 그것만큼 거슬리지만 그럼에도 가운데 점인 '한국일보'가 균형일 순 없다고 말이다.

뭐 그렇다는 거다.

스펙트럼을 만든 후 자로 좌, 우를 재고 가운데 점을 균형이라고 칭하기는 싶다. 하지만 그것은 균형이 아니라 가운데 점에 불과하다. 가운데 점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어떤 의미도 없다.

아침에 출근해서 지난 금요일 토론회 결산보고서를 쓰는 참에. 집어든 한국일보 덕분에 아주 기분이 상해버렸다. 균형은 말이다, 김진석 선생이 말한대도, 기우뚱한 것이란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3/13-1

김진석, 민주주의 문화는 폭력의 다중적 상징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시대와 철학 2007 제18권 3호

 

 

- 거꾸로,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그 자체로 목적합리적인 제도나 상황으로 설정하며, '공적인 공간'을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이성적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이상적 공간으로 해석한다. 곧, '공적인 공간'을 마치 폭력이 사라진 공간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공간으로 이해한다.(423-424)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민주주의 문제는 결국 폭력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라는 제도 밑의 폭력과 제도 위의 폭력이 거론될 뿐이다. 결국 현실의 민주주의체제를 응당 '이래야 한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혼동하는 것 아닌가 싶다.

 

- 나는 민주주의를 '협의적 민주주의'로 정의하려는 이론적 시도들과도 거리를 취하고 싶다. 그 시도들은 현재처럼 갈등이 많은 사회에서 다른 어떤 관점보다 협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장점을 갖기는 하지만, 그 이론에서는 여전히 폭력적 상황에 대한 주의가 부족하거나 없다. 담론을 통해 발화되고 주장된 이야기들은 그 담론들이 권력이나 폭력과 맺는 관계를 떠나서는 제대로 분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428)

 

[ 법의 지배 문제]

 

- 법에 의한 정의를 민중의 직접적 의지의 표현이나 실행이 아니라 특정 시험을 통해 선발된 소수 엘리트에 의한 정의의 해석이라고 할 때, 문제는 복잡해진다.(429)

 

- 한 예로 월린은 헌법을 통한 제도화가 민중적 동력을 통제 혹은 억압하는 계기이자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온다고까지 말한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민중이 중심이 된 반란적 계기를 의미하며, 그런 관점은 극단적으로 민중적 민주주의에 닿는다. ... 여기서 형식적인 헌정주의와 민중적 동력을 강조하는 관점 사이에서 정치적 균형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게 떠오른다. (430-431)

 

소위 민중헌법 제정을 통한 혁명을 골자로 하는 '21세기 혁명'의 양상은 베네수엘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활용하는 것은, 다른 어떤 맥락에서 보다 과거의 지배계급을 억누를 수 있는 정당성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런 점에서 헌정주의는 그 자체로 초기적인 양상을 띤다. 김진석이 이 한계를 지적한 것은 옳지만, 시계열상에 배치해 사태의 선후를 구별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헌정주의의 초기단계가 민중적 역동성으로 수렴될 수 있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 물론, 21세기 현재의 조건에 한정지어서.

 

[민주주의의 속성]

 

-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자신의 근거를 삼는 정치적인 것 내부에서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고, 또 정치적인 것의 지배와 법적인 것의 비재 사이에서도 심각한 균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사회의 복잡한 권력 및 폭력관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434)

 

[폭력의 상징화 전략]

 

- 사람들은 한쪽으로는 시장을 통한 과도한 경쟁을 당연하고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반면에, 다른 쪽 사람들은 오히려 그 경쟁이 나쁜 폭력을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배제하려고 한다. 사회적 폭력의 성격에 대한 평가나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평가하는 것을 끝없이 미루기만 한다. 그러면서 그것의 상징적 추상화에 기댄다. 다르게 말하면,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폭력'이라는 이름은 금기로만 존재하는 듯하다. 보수적 집단에게는 그것은 시장적 경쟁이나 질서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고, 진보적 집단에게는 그것은 거꾸로 무조건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만 여겨진다. (444)

 

폭력의 상징화는 결국 지배계급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진보나 보수의 양자는 폭력을 금기시하는 입장을 강화해나간다. 문제는 폭력이 발생하는 맥락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렇게 은폐되어진 폭력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도외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전략에 있어 실망일 수 있다.

 

- 사실 민주주의 제도는 정치적으로 약자들의 이 원한을 '정당하게' 만들면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는 이 '원한'을 그렇게 이름 부르지 않는다. 폭력이 금기의 대상이듯, 원한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사회는 폭력적 원한을 '정의'로 호명한다. 여기서 폭력은 상징적으로 배제되고 '정의'라는 추상적 명칭이 유통된다. 강자의 폭력이나 그것에 대항하는 약자의 폭력적 원한이 적나라하게 호명되지 않는 상황에서, 추상적 상징화가 팽배해진다.(446)

 

 - 현재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들, 혹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사회적 구조들이 이미 피할 수 없이 폭력적이라고 비판되거나 비난될 때, 우리는 해결하거나 극복할 방법도 모른 채 구조와 제도의 폭력적 미로에 같히게 될 것이다.(448-449)

 

- 만일 교육적 문화적 복지적 폭력이 기존의 사회적이고 경제적 계급차별을 더욱 은밀하게 만들고 세련되게 승화시킨다면, 결국 이 차별들은 극복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징적 수단을 통하여 보이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더 극복하기 어렵게 된 것일 게다.(450)

 

김진석이 사회제도적 폭력을 폭력의 상징화라는 맥락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를 가능케하는 의의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상징화된 폭력, 그것이 이념적 구분선을 뛰어넘는 현재 정치구조내에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구조적 맥락이라는 것. 역사적으로 보면, 폭력 문제에 대한 감수성이 결국 볼세비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되지 않을 까?

 

 

- 국가의 존재를 기본전제로 삼는 대부분의 정치학자들이 국가의 폭력을 근대화 과정에서 생기는 피할 수 없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개별 국가의 폭력을 당연하게 혹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와, 국가의 폭력을 민주주의의 발생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관찰하는 태도는 다른 것이다.(451)

 

- 그렇다면 소위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것도 이상적 목적으로서의 인권이나 평등의 깨끗한 '발견'이나 '승리'라기보다는, 인간 행위들에 내재하는 폭력을 조절하는 단순한 코드들과 체계들을 복잡한 코드들과 체계들로 대체하는 과정의 산물에 가까운 듯하다. 다르게 말하면, 비민주적 폭력을 민주적 폭력으로 대체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얻어진 다소 '긍정적'이며 휴머니즘적 산물의 하나일 것이다. 그와 달리 '불길한' 산물이 있다. 폭력이 똑바로 응시되기 보다는 자꾸 타자의 시선 속으로 도망가고, 자꾸 추상적 구조의 틀에 떠넘겨지고, 자꾸 상징의 애매모호함으로 뒤덮인다는 것이다. 이 인식은 매우 중요하며 새로운 성찰과 진단을 요구한다.(45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