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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가난한 자의 꿈을 이용한 약탈적 머니게임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가난한 자의 꿈을 이용한 ‘약탈적 머니게임’
ㆍ‘모기지 피해자’ LA서민 루세로 이야기

# 빚내서 산 집들, 화재로 타 버려

로스앤젤레스의 국제공항에 도착했던 지난 15일 밤 9시. 백발의 택시 운전기사는 “좋지 않은 시기에 LA를 찾았다”며 “경제도 좋지 않은데 북쪽 지역에 큰 불이 나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화재 소식부터 전했다.

플로리다, 네바다주 등과 더불어 미국 전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이 가장 많았던 곳으로 꼽히는 캘리포니아주. 뉴욕 월가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반으로 한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돈을 버는 동안 이곳의 많은 가난한 이들은 다른 꿈을 키웠다. 돈이 별로 없어도 내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월가가 몰락하자 그 알량한 집은 빚더미로 변했고, 길거리로 쫓겨나야 할 판이 되었다.

한인타운까지 가는 약 15분 동안 택시 기사는 “불이 난 지 벌써 3일째인데 불길이 쉬이 잡히지 않고 오히려 번져가고 있다”며 뉴스를 전해주었다. 속수무책으로 가치가 하락해 주인들의 가슴을 까맣게 태우던 집들. 그 집들이 화마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 압류’ 딱지 붙은 채 방치 미국 로스앤젤레스 외곽 신도시 란초쿠카몬가의 한 주택이 지난 17일 은행의 ‘압류’ 간판이 세워진 채 방치돼 있다. 이 지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했던 사람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한 채 떠나면서 빈집들이 속출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 유희진기자>
# 저소득층 거주지가 바로 금융자본의 표적

16일 ‘뉴 스타’ 부동산의 중개인을 만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피해 현장을 묻자 몇군데를 꼽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부실은 복잡한 파생상품 시장 구조와 맞물리며 전세계에 금융 위기를 몰고 온 근원으로 지목됐지만 피해 지역은 제한적이었다.

뉴 스타의 남문기 회장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자체가 소득이 적고 신용이 나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대출이지 않았느냐”며 “예외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저소득층들이 특히 많이 모여 살던 지역에서 문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17일 찾은 캘리포니아 남부에 위치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란초쿠몬가(Rancho Cucamonga)시.

이곳은 남 회장이 지적한 ‘저소득층이 많이 살았던 지역 중의 하나’이자 일본의 저널리스트 쓰쓰미미카가 그의 책 <빈곤대국 아메리카>에서 말한 ‘과격한 시장 원리로 경제적 약자가 희생당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뜨고 지는 동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집을 지켰지만, 경제적 약자들은 3~4년의 단꿈 끝에 영원히 희망을 잃었다.



# 희망이 꺾인 자리, 황량한 ‘신도시’

동네 입구 쪽에 위치한 2층 집 앞 잔디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누렇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나무들은 제멋대로 뻗었다. 시들어버린 잔디밭 위로 솟은 집 세일 광고판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광고판에는 은행의 전화번호가 선명했다. 부동산 중개인 주디 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집을 샀던 사람이 은행에 대출금을 내지 못해 압류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집을 포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에 살고 있던 사람이 포기를 선언하면, 집은 대출을 해줬던 은행으로 넘어간다.

이 동네에 이런 식으로 은행차압매물(REO·은행소유집)이 매물로 나와있는 게 약 7채 중 하나 꼴이었다. 그는 “은행집으로 나와있는 빈집이 이 동네에만 무려 250채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빈집이 많은 동네는 사람 냄새보다는 냉기가 돌았다. 동네를 돌아보는 동안 5분 단위로 집을 내놓은 은행의 광고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집들은 전부 빈집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새집 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집의 유리창이 깨져 있기도 했다. 그는 “비싸게 산 집을 뺏기고 나가니까 화가 난 사람들이 분을 삭이지 못해 유리창을 깨거나 집을 부수고 나간다”고 설명했다.


# 말 한 마디 걸기 힘든 냉랭한 동네

오가는 사람들은 말 한 마디 걸어보기 힘들 정도로 냉랭했다. 겨우 한마디 나눌 수 있었던 동네 주민 얄루(43·여)는 “지나가다가 잔디가 죽어서 누렇게 된 집을 보면 자연스럽게 저 집도 버티지 못하고 어디론가 쫓겨났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며 “이 집도 은행집, 저 집도 은행집, 이렇게 늘어나는 은행집들을 보다보면 서브프라임 대상이 아닌데도 대출을 끼고 집을 산 나까지 불안해진다”고 말했다.

빈집 내부는 더욱 엉망이었다. 벽면 가득 써 있는 알아보기 힘든 낙서들. 주먹으로 몇번이나 내려쳤는지 우그러져 있는 곳곳의 벽면. 이사가는 사람들이 붙박이 형태로 되어 있는 에어컨과 가스 오븐레인지를 억지로 떼어가 칠이 벗겨진 벽도 흉하게 드러났다.

란초쿠카몬가는 본격적으로 주택 공급이 시작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신도시다. 로스앤젤레스 도심부에서 약 한 시간가량 떨어져 있어 도심에 비해 집값이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됐다. 게다가 대량으로 주택이 한꺼번에 공급되자 이 주변의 집들은 30만달러에서 50만달러 사이의 비교적 저렴한 수준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한창 미국 주택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던 2004년. 은행은 앞다투어 사람들에게 이 집들을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이용해 팔았다. 란초쿠카몬가뿐만이 아니었다. 로스앤젤레스 외곽 지역의 팜데일·코로나·폰타나 등의 신도시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주택들이 완공되어 매물로 나왔다. 은행은 주택 공급은 계속되는데 집을 살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중산층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자 자연히 집 없는 저소득층을 향해 공격적인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민자와 저소득층 미국 시민들은 생애 첫 주택의 꿈을 이곳에서 이뤘다. 이들은 저소득층이 밀집해 살던 도시를 탈출해 이 신도시에 새 집을 얻었고, 안전을 얻고, 자녀들은 좋은 학군을 얻었다. 한때나마 신도시들은 환희가 가득하던 땅이었다.


#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리사츠 루세로(37·여)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팜데일에 처음 집을 사던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녀는 띄엄 띄엄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했다. “행복했고…흥분됐고…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버거운지 처음 몇분 동안 루세로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마리사츠는 1989년 남편과 과테말라에서 이민왔다. 가진 돈이 없었던 그녀는 15년 가까이 월 1500달러에서 2000달러 되는 월세 집을 전전했다. “미국에 이민와서 살면서 내 집을 갖는다는 것은 ‘꿈’ 그 자체였어요. 삶을 살아가는 최종 목표이기도 했죠. 그런데 4년 전에 저처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는 거예요. 나도 가능할까? 은행에 문의를 해봤죠.” 조바심을 냈던 것과 달리 은행에서는 빠르게 서류 작업을 끝냈다. 마침내 35만달러짜리 집을 샀다. “정말 꿈이 이루어지던 순간이었어요.”


# 가난한 자의 꿈을 이용한 약탈적 금융

은행과 모기지 업체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저소득층에게 팔면서 집요하게 그들의 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이 집을 사는 꿈을 포기할 수 없도록 유혹하기 위해 사려는 집의 담보 가치를 100%로 잡아 대출을 해주는가 하면 처음 2년 간은 획기적으로 낮은 이자율을 매겼다. 대출 불가능한 요소들은 모두 없앴다. 저소득층을 겨냥한 약탈적 금융 게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달에 1000달러 안팎의 돈을 지불하면 됐어요. 은행에서는 집 값이 오르면 그 오른 돈으로 대출이 가능하니까 제 사업도 더 잘될 거라고 격려했어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루세로와 남편은 집을 산 후 수입의 절반을 대출금으로 냈다. 다행히 페인트 칠을 하며 집 리모델링 일을 하던 남편은 주택 경기 붐을 타고 호황을 맞았다. 우편물을 포장해 보내는 일을 하는 루세로의 수입도 나쁘지 않았다. 평생 살 내 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돈을 아끼고 아껴 정원을 꾸미고 아이들 놀이방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7년초부터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2005년 정점을 찍은 집 값은 서서히 하락세를 보였고 늘어난 대출금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포기하고 사라졌다. 루세로도 대출 상환 압박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집 값이 하락하면서 은행은 기존에 내던 대출금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 “한달간 남편과 벌어들이는 돈을 고스란히 대출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생활이 불가능해졌어요. 우리도 먹고 살아야 했고, 세 아이들의 교육비도 만만치 않았는데 말이죠.”


# 친철하던 은행이 느닷없이 집을 가압류

주택경기 침체는 남편의 수입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2008년 1월부터 4개월 동안 대출금을 내지 못했다.

“제일 화가 나는 건 은행의 태도였습니다. 처음 대출을 받을 때는 집값은 계속 오를 테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확신을 심어주었죠. 아무것도 몰랐으니 믿었지요. 아니 믿고 싶었습니다. 수입이 줄어 한달에 1000달러씩 내는 게 힘들다고 하니까 500달러로 낮추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한달에 500달러 지불로 서류 작업까지 끝냈는데 느닷없이 2주 후에 집은 가압류될 테니 나가라고 했어요. 은행은 더 이상 저에게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포기할 수 없었던 루세로는 그 때부터 필사적으로 대출금 막기를 시작했다.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며 임시변통을 했다. 카드에서 더 이상 돈을 뺄 수 없을 때가 됐을 때는 삼촌에게 돈을 빌리며 버텼다. 그러나 이미 집은 루세로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은행에 집을 빼앗기고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빨리 집을 팔려는 은행이 집 가격을 낮춰 급매물로 내놓으면서 동네 집값은 평균적으로 40%나 떨어졌다.


# 눈물로 기도하던 나날들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매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다섯이나 되는 가족들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필사적으로 버텼죠. 남편과 저는 열심히 일했고, 집에도 계속 정성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제편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집을 떠나고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동네에 도둑이 들끓었습니다. 한번 도둑 맞았을 때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두번째 도둑이 들어 집이 엉망이 됐습니다. 그 때 확실히 알았어요. 이제 집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떠날 때라는 것을.”

그렇게 루세로는 올해 초 집에 대한 포기를 선언했다. 집은 은행 소유로 넘어갔다.

전미 모기지은행가협회(MBA)는 2007년 말 기준으로 주택소유자 중 300만명가량이 대출을 연체 중이며 마리사츠의 경우처럼 주택을 가압류당한 경우는 100만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올해는 전년에 비해 가압류 당한 수가 50%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캘리포니아주는 주택 242가구 가운데 1가구 꼴로 가압류 절차가 진행중이다. 10월20일 발행된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이렇게 쫓겨난 이들이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온타리오 텐트촌에서 텐트를 치고 난민처럼 살며 1930년대의 대공황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다른 사람처럼 길거리 쫓겨나지 않아 다행

루세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 사무실에 딸린 방에서 몰래 살고 있을 때 건물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도움을 줬어요. 미국에서는 가족 다섯명이서 한 방에 살 수 없게 금지하고 있거든요. 지금은 외곽 지역에 월 1300달러의 집을 얻어서 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길거리로 나앉지 않았죠. 우리 사랑하는 아이들과 헤어지지도 않았어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 그러나 앞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이제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다시 집을 살 수는 없겠죠. 제 신용은 이제 엉망이거든요. 하지만 그 건 당장 큰 걱정이 아니에요. 크리스마스가 오고 연말이 오면 제가 하는 우편물 사업은 더 잘 될 텐데 빈털터리가 된 저는 당장 사무실을 얻을 돈도 없네요.”

이야기를 마친 후 루세로는 한참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운을 뗐다. “당신은 한국인이죠. 한국인은 똑똑한 것 같아서 부러워요. 이곳에 이민와서도 다들 좋은 집을 사서 잘 살아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왜 그렇게 안될까요. 열심히 살아도 안좋은 일만 따라다니네요.”

<로스앤젤레스 | 유희진기자 worldh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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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미국을 가다..파생상품 판매인 코그네티의 증언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1부-2. 미국을 가다…파생상품 판매인 코그네티의 증언
ㆍ“전 세계가 탐욕에 눈멀어 빚잔치를 벌였다”
ㆍ과도한 차입 의존 투자방식이 화근…“시스템의 위기”
ㆍ사무실 대출 등 터질 문제 많아…‘L자형 침체’ 예상

월가 생활 7년째인 코그네티(37)는 서브프라임 문제가 터지기 직전까지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미 국내 최대 규모로 꼽히는 은행의 판매부서가 그의 자리였다. 부서 내의 트레이더들이 주택저당증권(MBS)을 사들여 그것을 섞고 짜깁기해(구조화) 상품을 만들면, 그 상품을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모기지 부실이 드러나며 일하던 회사의 부서가 구조조정돼 없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월가를 나와 새출발을 한 그는 적응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온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금융위기의 진원지를 미국과 월가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부채담보부증권(CDO)의 경우만 해도 그렇죠. 월가에서 이것을 만들고 팔았지만, 누가 사갔습니까. 전 세계 사람들이 사갔거든요. 그들도 이게 위험자산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월가 사람들처럼 많은 돈을 벌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욕심이 모이다 보니 전 세계에서 위험한 금융자산의 비율은 점점 더 커져간 거죠.”

이번 금융위기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탐욕에 빠진 결과라고 그는 강조했다. “월가 밖의 사람들도 빚을 내서 투자를 하는 것에 대해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월가 사람들의 탐욕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저 역시 세계 각지의 사람들도 탐욕스러웠다고 말하고 싶네요.”

“그동안 월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었죠. 저 역시도 1년에 20만달러 이상의 돈을 받는 것에 대해 한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특권을 누리고 살았어요. 하지만 월가의 금융회사는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치열했어요.”
월 가에 켜진 ‘빨간불’ 지난 14일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횡단보도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세계 금융의 심장부로 호황을 누리던 월스트리트는 전 세계 금융위기의 진원지로 전락하면서 금융기관들이 연이어 파산하고 있다. 뉴욕 | 유희진기자

밥먹을 틈도 없이 일했던 당시의 상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서로 경쟁하면서 많은 수익을 내려고 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심했죠. 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죠. 개인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겪은 월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이 위기를 초래한 것은 월가 사람이라기보다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과도한 레버리지(leverage·차입)에 의존한 투자방식이 문제였죠.”

그는 위험하게 질주하는 월가를 보며 “언젠가는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동안의 월가는 돈 놓고 돈 먹는 카지노 판이나 다름없었어요.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레버리지를 활용해 공격적으로 투자했죠. 월가에서는 레버리지로 돈을 버는 게 투자의 정석처럼 여겨지고 있었어요. 너도 나도 빚잔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심지어 자본력이 약한 사람들조차 빚을 내서 돈을 벌려고 했어요.”

막상 문제가 터지자 정신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고, 나에게 이렇게 빨리 그 불똥이 튈 줄은 더더욱 몰랐다”고 했다. “올해 초 회사에서 근무하던 부서가 구조조정으로 없어지고, 최종적으로는 그 거대한 금융회사가 다른 회사로 넘어가는 것까지 보면서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넋놓고 며칠을 보내다가 어떻게든 다시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올해 3월 그는 부동산 관련 회사에 다시 직장을 잡았다. 그는 “지금도 사실 적응 중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별 수 있나요. 이제는 일한 만큼 버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는 지금의 경제 상황에 대해 낙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도 터질 게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을 직접 팔았고, 또 그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도 잘 알고 있어요. 내가 취급했던 그 상품들이 다 드러났나 하고 생각해보면 아직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주택 외에도 사무실 대출이 남아 있다는 것도 알아야죠.”

한창 이야기를 하던 그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공중에 영어 알파벳 L자를 그렸다. “보통 U자형을 이야기하죠. 바닥을 찍었다가 회복세를 보인다고. 하지만 저는 이번 위기는 L자형 침체의 지속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대공황까지의 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주 긴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진행이 될 것으로 봅니다.”

<뉴욕 | 유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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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아이슬란드가 문제? 제어할 시스템 부재로 몰락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아이슬란드가 문제? 제어할 시스템 부재로 몰락
미국식 금융자본주의 모델의 모범생 아이슬란드는 한때 그 놀라운 성장으로, 이제는 붕괴의 깊이와 속도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지난해에도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유엔 주도 설문에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히면서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았지만 이번은 사정이 다르다. 아이슬란드는 ‘1976년 영국 이후 최초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서방국가’라는 치욕적인 ‘가시 면류관’을 쓰게 됐다.

아 이슬란드의 급속한 도약, 그 도약보다 더 급속한 추락은 지난 30여년간 ‘시대정신’으로 군림해오다 그 지위를 도전받고 있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이처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 아이슬란드는 수산자원과 전력자원, 온천과 간헐천, 빙하를 중심으로 한 관광자원 외엔 이렇다할 자원이 없는 나라였다.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물가상승이 항상 골칫거리였고, 정부는 금융을 철저히 통제해 왔다.

그러나 90년대 다비드 오드손 총리 주도의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아이슬란드 중앙은행장인 그는 91년부터 14년 동안 총리로 재임하면서 공격적인 금융 자유화를 추진했다.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각종 규제를 완화했다. 법인세도 순차적으로 내려 90년대까지 50%였던 법인소득세율이 현재는 18%다. 97년부터는 정부 소유 대규모 은행의 지분매각이 시작됐다. 총리실이 진두지휘한 주요 은행들의 민영화는 2003년 완료됐다. 세계 각지에서 높은 이자율을 쫓아 돈이 몰려들었다. 외국자본이 넘쳐났고, 아이슬란드 크로나화는 강세를 보였다.

민영화된 은행들은 아이슬란드 내부 시장이 너무 작아 성장에 한계를 느끼자 영국·네덜란드·노르웨이 등 유럽으로 나가 몸집을 키워나갔다. 정부는 사실상 투기에 가까운 은행들의 영업행태를 용인했다. 카우프싱·란츠방키·글리트니르 등 3대 은행의 자산규모는 아이슬란드 국내총생산(GDP)의 12배가량에 달했다. 그러나 이 중 70%는 해외 자산이었다.

하지만 국내 제조업 기반이 낮은 아이슬란드는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의 2008년 2·4분기 대외채무는 약 1205억달러로 GDP의 7.3배를 기록했으나 외환보유액은 36억7000만달러(9월말 기준)에 불과했다.

결국 아이슬란드 은행들은 자신들이 복제했던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자금 회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졌다. 토르올브르 마티아손 아이슬란드 국립대학 교수는 “아이슬란드 위기는 금융 자유화에 따른 은행의 과잉성장과 그것을 제어할 시스템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김재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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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공포로 변해버린 금융허브의 꿈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공포로 변해버린 ‘금융허브의 꿈’
ㆍ1부 - (1) 아이슬란드를 가다

싼이자로 빌린 외국돈이 재앙의 부메랑으로
건설업체 줄도산 신축건물 대부분 공사중단


아 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북쪽의 항구 근처에서 지난 12일 바라본 대규모 빌딩 건설 현장. 아이슬란드는 지난 몇년간 부동산 거품을 타고 주택과 빌딩 신축이 활발했으나 국가부도 직전까지 내몰리면서 곳곳에서 공사가 중단된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 | 김재중기자>

지난 7일 자정 무렵 아이슬란드 유일의 국제공항 케플라비크 공항에 도착한 기자를 차에 태운 현지 가이드는 “상황이 어떠냐”는 첫 질문에 “엉망이죠”라고 짧게 답하고 시동을 걸었다. 수도 레이캬비크로 향하는 왕복 4차선 고속도로는 부슬비에 젖어 가로등 불빛을 튕겨내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외신을 통해 아이슬란드 주민들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취재일정 중 그런 곳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가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환율이 폭등하면서 물가가 엄청나게 뛰었지만 아직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외국 돈을 빌려 집을 산 사람들과 부동산 업자들은 다 죽게 생겼습니다.”

레이캬비크 외곽지역의 한 쇼핑몰에서 전자제품 액세서리 가게를 하고 있는 피욜라(37·여).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남편과 그는 지난 4월 큰 맘먹고 2400만 크로나(당시 환율로 약 4억8000만원)를 대출 받아 집을 샀다.

실제로는 크로나화가 아닌 미국 달러, 일본 엔, 스위스 프랑, 유로 등 네가지 외국 돈을 섞어서 받았다. “1년 전부터 집 살 돈을 빌리기 위해 은행을 찾아가 상담을 하기 시작했는데 외국 돈을 빌리는 것이 훨씬 더 저렴하다고 조언을 해줬어요. 크로나화는 금리가 무척 비쌌지만 이자율이 싼 외국 돈들을 소개해줬죠.”

대화 도중 손님이 찾아오자 상냥한 미소로 맞이하던 그녀는 손님이 나가자 이내 심각해졌다. “그런데 지금 집을 판다고 해도 처음 대출 받았던 금액은 그대로 남아요.” 두딸을 키우고 있는 피욜라가 갚아야 할 대출금은 현재 4100만 크로나로 부풀었다. 거의 두배가 된 것이다. 매달 상환할 대출금도 두배가 됐다. 그러나 4000만 크로나에 산 집의 가격은 40% 가까이 떨어졌다. “일단 생활비를 4분의 1로 줄이기로 했어요. 처음엔 될까 했는데 어떻게 살아지긴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북유럽 민족 특유의 회색 섞인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환율! 환율!

금 융위기 이후 아이슬란드는 순식간에 반토막이 돼 버린 크로나화 가치의 공포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누구든지 몇마디만 나누면 환율과 통화 이야기부터 했다. 금융위기 이전 1달러 당 65크로나 정도 하던 환율이 순식간에 137크로나로 폭등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중앙은행에 따르면 2008년 4월 현재 아이슬란드 가계부채의 23~24%가 외환대출이다. 금융위기 이전 2100억 크로나이던 아이슬란드 전체 가계의 외환대출 규모도 현재 3300억~3500억 크로나가 됐다.

금융위기전 아이슬란드에서는 집값의 100%까지 가능했던 은행돈을 빌려 새 집을 짓거나 사는 게 유행이었다. 레이캬비크 외곽의 경우 고급주택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부촌’으로 지도가 바뀌었고, 시내 중심가 곳곳에는 사무용 빌딩 신축 붐이 일었다. 레이캬비크에서 3개의 호텔을 경영하고 있다는 올라브르 토르파손(57)은 “당시 20년도 안 된 집을 허물고 더 고급스러운 집을 짓는 게 유행이었어요. 미친 짓이었죠”라고 말했다. “하기야 당시엔 그게 미친 짓이 아니었어요. 2004년부터 레이캬비크의 주택가격은 매년 20~30%씩 뛰어올랐으니까요.” 주택뿐 아니다. 대학이나 동네마다 있는 실내체육관 건물도 지어진 지 2~3년밖에 되지 않은 새 건물 냄새가 났다.

아이슬란드 중앙은행 이사인 에르나 지슬라도티르는 “건설업계는 모두 끝났고, 다른 기업들도 절반이 살아남는다면 천만다행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내 곳곳에는 타워크레인이 우뚝한 건물 신축 현장이 쉽게 눈에 띄었다. 물론 대부분 공사를 중단한 상태다.

10일 초저녁 레이캬비크 중심가 레이가베구르 거리의 한 레스토랑 앞에서 독일인 모녀 관광객 2명이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이슬란딕 퓨전 메뉴’라는 부제가 달린 메뉴판을 꼼꼼히 살펴보던 이들은 “생각보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며 어깨를 으쓱인 뒤 길 반대편 레스토랑 쪽으로 사라졌다. “크로나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관광객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는 하지만, 지금 전세계가 위기인 상황이라 그리 만만할 것 같지는 않다”라는 토르파손의 말이 생각났다.

전통적으로 실업률이 1%대에 머물던 아이슬란드에서 실업의 공포는 서서히 검은 심연을 드러내고 있다.

시장점유율 12%의 자동차 수입회사 ‘비앤엘(B&L)’의 현대차 담당 매니저 브자르니 시구르드손을 11일 만났다.

시민 쇼핑카트엔 우유만 두팩뿐
실업 대란 예고 전국민의 1% 실업자 될판
살인적 물가에 “자본주의 끝났다” 탄식도


그 는 컴퓨터 마우스를 몇번 클릭하더니 모니터를 보여줬다. 현대차 판매 추이였다. 모니터 중간쯤에 그어졌던 선이 10월을 기점으로 곤두박질쳤다. “현대차를 한달에 60~100대가량 팔았지만 지난달엔 겨우 16대가 나갔습니다. 회사는 40% 감원계획을 세웠습니다.”

회사를 그만둔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시구르드손은 대답 대신 사무실 유리창 너머 번쩍이는 새차들로 가득차 있는 매장으로 시선을 보내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회사 80여곳에서만 모두 3000명을 감원한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노동인구가 아닌) 아이슬란드 전체 인구의 1%가 거의 동시에 실업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노동법은 해고전 3개월의 여유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나 내년 초쯤 되면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의 사무실을 나오자 지난달 국유화된 글리트니르 은행의 지점이 눈에 띄었다. 창구에 있는 중년의 여직원에게 은행 내부 사진을 찍을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상냥했던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노”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주일 내내 은행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매번 이런 식이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기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한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은행과 은행 경영진들, 정치인들은 금융위기를 불러온 주범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중앙은행의 지슬라도티르 이사가 말했다. “금융은 아이슬란드의 문화를 바꿔 놓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비린내 나는 수산업을 과소평가하는 대신 높은 임금을 주고 깨끗한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는 은행들을 칭송했죠. 이제는 사고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 한발 늦기는 했지만요.”

아이리쿠르 다그비아르트손(43)은 레이캬비크 남서쪽에 있는 조그만 수산도시 그린다빅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수산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아이슬란드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그는 6년 전까지 선장으로 배를 탔었다. “수산업계는 지난 10~15년간 작은 업체들을 사들이며 외국 돈을 빌려다 썼고 그 결과 우리의 재무구조도 은행과 비슷해졌습니다.”

12일 퇴근길에 대형매장 ‘보누스’를 찾은 오타 오스프 욘스도티르(40·여)는 두바퀴째 돌았는데도 쇼핑 카트에는 우유만 두 팩뿐이다. 그는 과일 코너를 가리키더니 “두 달 전까지만 해도 1㎏에 150크로나였던 사과가 359크로나, 159크로나였던 바나나가 268크로나가 됐어요”라며 도리질을 했다. 그를 따라 매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계란, 통조림, 밀가루 등 순식간에 올라버린 식료품 값에 대한 ‘증언’이 계속됐다. 그는 268크로나 하는 밀가루 봉지를 보더니 “저게 전에는 100크로나였어요”라고 말했다. 현재 아이슬란드 물가는 연초 대비 15~20% 올랐지만 중앙은행은 최대 30%까지 뛸 것으로 보고 있다.

골프용품점을 운영하는 시구르 기슬리(57)는 매장 뒤편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요청에 “그 재미난 얘기를 들으러 왔습니까”라고 농담을 하더니 커피를 권했다. 그의 둘째 아들은 노르웨이의 대학에서 유학중이다. “한달에 9만크로나를 부치고 있는데 내가 보내는 돈은 그대로이지만 애가 받는 돈은 반토막이 됐습니다. 애가 일자리를 구해본다고 하는데, 안되면 잠시 들어와 있으라고 할 생각입니다.”

기슬리는 점원 야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 친구 주장처럼 이제 자본주의가 끝난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련 공산주의가 끝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나는 자유시장경제가 맞다고 봐요. 그렇지만 이전과 같은 모습은 안됩니다. 뭐랄까, ‘규제되는 자본주의’여야 한다는 거죠”라고 말했다.

아이슬란드를 떠나기 전날인 13일 기자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구드문드손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아이슬란드의 온천이나 자연경관에 대한 사진이 필요하면 언제든 e메일로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명예한국총영사다. 관광지 사진 얘기를 몇차례 더 하기에 “취재목적이 관광지 소개가 아닌 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밍크고래 고기 한 조각을 집으며 말했다. “잘 압니다. 하지만 당장 아이슬란드가 기댈 곳은 수산업과 관광산업입니다.” 이것이 금융 허브의 신기루가 사라진 아이슬란드의 알몸이었다.

<레이캬비크·그린다빅(아이슬란드) | 김재중기자 hermes@kyunghyang.com>

아이슬란드 경제의 몰락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슬란드 경제학자들은 감시·감독 없는 금융의 과대성장을 경제붕괴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들은 “이 위기가 언제 끝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환율·금리 정책실패가 위기의 원인”

■ 토르올브르 마티아손
아이슬란드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위기의 시발점은 어디인가.

“1996~2003년 은행들이 차례로 민영화됐다. 2001년엔 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중앙은행은 물가가 목표치보다 높을 경우 이자율을 올렸다. 이자율이 오르자 일본 엔화를 비롯한 외국 자본들이 몰려왔고 크로나화가 강세를 띤 게 위기의 시작이다.”

- 현재 외환시장 상황은 어떤가.

“외환거래가 매우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 금융허브로 불리던 아이슬란드가 외환거래에 있어 북한과 비슷한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한국 정부도 금융허브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이 자국 통화 대신 일본 엔화를 선택할 수 있겠나. 그게 아니라면, 엄청나게 많은 외환을 축적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허브를 시도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규모의 통화를 가지고 금융부문이 과대성장하면 결국 붕괴한다.”

“이 위기는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라”

■ 올라브르 이슬레이프손
레이캬비크 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 왜 은행을 민영화했나.

“정부가 은행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에서는 은행이 민영화될 당시 큰 비난을 받았다. 정치권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에게 은행이 넘어갔고, 은행 경영이 전문성이 없는 젊은 사람들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과도한 금융자유화가 문제라고 지적되고 있다.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은행소유주와 관련이 있는 기업들에 많은 돈이 대출되면서 은행을 약화시켰다.”

- 위기가 언제 끝날까.

“반대로 내가 물어보자. 세계적인 위기가 언제 끝날 것인가. 현재로선 세계적인 위기가 언제 끝날 지 전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지 않은가. 아이슬란드도 오히려 위기가 심화되는 조짐만 보이는 상황이다.”

-금융허브의 꿈은 살아날 수 있을까.

“금융허브의 꿈은 악몽으로 끝났다. 그 대가는 비싸다.”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 | 김재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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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quot;뭐든 대출로 살수 있었다, 이젠 평생 빚갚아야 할 판&quot;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뭐든 대출로 살수 있었다 이젠 평생 빚갚아야 할판”
ㆍ국가부도 위기 아이슬란드 - 보험판매원 올라프스도티르

잉기비요르크 올라프스도티르(49·여)는 요즘 시간이 나는 대로 전에 일하던 레스토랑 몇 곳에 전화를 걸어본다. 주말 파트타임 자리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보험판매원인 그는 최근 남편이 다니던 건설회사의 부도로 실직하자 생계 유지를 위해 일을 하나 더 찾기로 결심했다. 지난 12일 자신이 일하는 보험회사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올라프스도티르는 “한달 수입이 약 65만크로나(금융위기 전 환율로 1200만원가량)였는데 남편이 얼마전 일자리를 잃으면서 약 30만크로나(현 환율로 300만원가량)로 줄었다”고 말했다.

아 이슬란드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아이슬란드는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달러를 넘는 유럽의 금융허브였다. 지난해 유엔 설문에서 가장 살고 싶은 나라로 꼽힌 ‘지상의 천국’이었다. 올라프스도티르는 이 꿈의 나라의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금융위기 전만 해도 뭐든지 대출로 살 수 있었어요. 저 역시 외국 돈을 빌려 집을 샀죠. 차도 대출받아 산 거예요.”

방 4개가 딸린 110㎡ 아파트에 사는 그는 부부가 각각 4륜구동 SUV를 굴리고 있다. 최근 몇년간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오면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쇼핑여행을 갔었다. “전에도 크리스마스 쇼핑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5년 전쯤부터 해외여행이 흔해졌어요. 우리는 소비를 즐겼죠. 아이슬란드 크로나화가 강세였고 돈이 넘쳐났으니까요.”

이미 1987년에 1인당 GDP가 2만달러를 넘었지만, 대체로 검소하게 살던 아이슬란드인들은 2000년대 들면서 금융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국민소득이 수직상승하자 씀씀이가 커졌다. 금융 중심의 팽창을 거듭하면서 비린내 나는 ‘수산대국’이란 별명 대신 ‘금융허브’라는 근사한 이름을 얻었다. 외국 돈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돈을 누구나 싸게 빌릴 수 있었다. “보통사람들도 전엔 럭셔리카라고 불리던 차들을 탈 수 있게 됐어요. 저만해도 중고차를 주로 탔는데 2004년 제너럴모터스의 신차를 샀으니까요.”

그러나 실물 경제의 기반없이 빚더미 위에 세워진 ‘북유럽 강소국’이라는 아이슬란드의 명성은 미국 금융위기에 가장 빨리, 가장 쉽게 무너져 내렸다.

지난 7~14일 방문한 아이슬란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디디고 있는 땅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를 뼈를 깎는 고통과 함께 깨닫고 있었다. 크로나화는 10월에 전년 대비 82.7%까지 폭락,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10월 이후에만 80%가 사라졌다. 한때 1% 정도였던 실업률은 내년 5.7%로 급등할 것이라고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내년 성장률 전망치는 마이너스 9.6%이다. 결국 국가부도 위기를 맞은 아이슬란드는 지난 20일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IMF로부터 21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차를 살 때 200만크로나를 대출받았는데 4년 뒤인 지금 380만크로나로 늘어났습니다. 전에는 은행에 월 5만크로나를 냈는데 지금은 9만크로나가 넘어요.”

그는 이것이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고 했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가 어마어마한 빚을 갚는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다음 세대는 평생을 살면서 빚을 갚아야 할 겁니다.”

올해 크리스마스 해외여행은 엄두도 못낸다. 남편의 실직으로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준 것도 그렇지만,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의류비·식비 등 생활비를 절반 정도 줄여야 한다.

“우리도 언제부턴가 거품이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처럼 파국적일 줄 몰랐어요. 우리는 생선처럼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 증권과 종이 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 | 김재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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