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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뭐든 대출로 살수 있었다, 이젠 평생 빚갚아야 할 판"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뭐든 대출로 살수 있었다 이젠 평생 빚갚아야 할판”
ㆍ국가부도 위기 아이슬란드 - 보험판매원 올라프스도티르

잉기비요르크 올라프스도티르(49·여)는 요즘 시간이 나는 대로 전에 일하던 레스토랑 몇 곳에 전화를 걸어본다. 주말 파트타임 자리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보험판매원인 그는 최근 남편이 다니던 건설회사의 부도로 실직하자 생계 유지를 위해 일을 하나 더 찾기로 결심했다. 지난 12일 자신이 일하는 보험회사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올라프스도티르는 “한달 수입이 약 65만크로나(금융위기 전 환율로 1200만원가량)였는데 남편이 얼마전 일자리를 잃으면서 약 30만크로나(현 환율로 300만원가량)로 줄었다”고 말했다.

아 이슬란드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아이슬란드는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달러를 넘는 유럽의 금융허브였다. 지난해 유엔 설문에서 가장 살고 싶은 나라로 꼽힌 ‘지상의 천국’이었다. 올라프스도티르는 이 꿈의 나라의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금융위기 전만 해도 뭐든지 대출로 살 수 있었어요. 저 역시 외국 돈을 빌려 집을 샀죠. 차도 대출받아 산 거예요.”

방 4개가 딸린 110㎡ 아파트에 사는 그는 부부가 각각 4륜구동 SUV를 굴리고 있다. 최근 몇년간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오면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쇼핑여행을 갔었다. “전에도 크리스마스 쇼핑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5년 전쯤부터 해외여행이 흔해졌어요. 우리는 소비를 즐겼죠. 아이슬란드 크로나화가 강세였고 돈이 넘쳐났으니까요.”

이미 1987년에 1인당 GDP가 2만달러를 넘었지만, 대체로 검소하게 살던 아이슬란드인들은 2000년대 들면서 금융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국민소득이 수직상승하자 씀씀이가 커졌다. 금융 중심의 팽창을 거듭하면서 비린내 나는 ‘수산대국’이란 별명 대신 ‘금융허브’라는 근사한 이름을 얻었다. 외국 돈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돈을 누구나 싸게 빌릴 수 있었다. “보통사람들도 전엔 럭셔리카라고 불리던 차들을 탈 수 있게 됐어요. 저만해도 중고차를 주로 탔는데 2004년 제너럴모터스의 신차를 샀으니까요.”

그러나 실물 경제의 기반없이 빚더미 위에 세워진 ‘북유럽 강소국’이라는 아이슬란드의 명성은 미국 금융위기에 가장 빨리, 가장 쉽게 무너져 내렸다.

지난 7~14일 방문한 아이슬란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디디고 있는 땅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를 뼈를 깎는 고통과 함께 깨닫고 있었다. 크로나화는 10월에 전년 대비 82.7%까지 폭락,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10월 이후에만 80%가 사라졌다. 한때 1% 정도였던 실업률은 내년 5.7%로 급등할 것이라고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내년 성장률 전망치는 마이너스 9.6%이다. 결국 국가부도 위기를 맞은 아이슬란드는 지난 20일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IMF로부터 21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차를 살 때 200만크로나를 대출받았는데 4년 뒤인 지금 380만크로나로 늘어났습니다. 전에는 은행에 월 5만크로나를 냈는데 지금은 9만크로나가 넘어요.”

그는 이것이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고 했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가 어마어마한 빚을 갚는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다음 세대는 평생을 살면서 빚을 갚아야 할 겁니다.”

올해 크리스마스 해외여행은 엄두도 못낸다. 남편의 실직으로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준 것도 그렇지만,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의류비·식비 등 생활비를 절반 정도 줄여야 한다.

“우리도 언제부턴가 거품이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처럼 파국적일 줄 몰랐어요. 우리는 생선처럼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 증권과 종이 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 | 김재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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