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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지식인의 도덕적 합의로서 안티조선

대학끝물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무렵, 정치적으론 '국민승리21'에 가입되어있던 상태였으나, 나의 관심은 안티조선운동에 몰려 있었다.

 

이런 흥미진진한 싸움판에서 조그마한 자리도 얻게 되어 주기적으로 글을 쓰고, 나름 진지한 싸움을 벌였다. 결국, 나의 학위논문 주제가 '강준만'이 되어버린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지 않나 한다.

 

요즘드는 생각이지만, 안티조선운동, 다시 말하면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이라는 것은 상징적 자본의 재분배와 같은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단순히 돈으로 환산되는 경제적 가치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면, 역할에 비해 과잉되어 있는 갖가지 자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때 난, 학교에서 안티조선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그것을 입고 수업에 들어갈 정도로 미쳐 있었다.

 

그리고 그 우상들을 깨기 위해 보고 보고 또 보고, 쓰고 쓰고 했다.

 

뭐, 당시의 치기어린 문장력을 다시금 보자니 쑥스럽지만 잊혀지는 것 보단 낫다.

 

이젠, 흔적도 없는, 우연히 웹사이를 떠돌아 다니던 글을 찾았다. (이미 내글이 실려 있었던 웹페이지는 각종 이미지를 잃어버린체 X 표만 너덜너덜 펄럭이고 있었다.)



지식인의 도덕적 합의로서 안티조선 (2000년)

 

 

0. '안티 조선'의 재설정

 얼마 전 성공회대 한홍규 교수는 남한의 역사에서 진보세력으로 불렸던 이들은 본질상 '자유주의자'에 가까우며, 장준하 같은 이는 오히려 '보수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말장난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갖다 쓰는 진보와 보수의 엄밀한 구분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이 시선을 끄는 것은 '아 그렇게 볼 수 도 있겠구나'의 흥미보다는 진보와 보수를 논할 때 여전히 작동중인 '남한'이라는 제한 때문이다.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자까지도 '진보'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밖에 없는 그 제한은 근본적으로 '진보'의 개념을 협소화시켰다. 굳이 서구의 개념 정의를 가져다 부박한 남한의 현실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에게 '진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고 그렇기 때문에 한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현재의 지식인 논쟁에 있어 '진보적 지식인'의 대응 방식을 살펴보는 작업은 '보수적 지식인'의 방식을 살피는 것 보다 까다롭다. 예를 들어 임지현 같은 지식인이 보수주의자인가, 아니면 진보주의자인가. 임지현 개인의 성향에서 보자면 분명히 좌파까지는 아니어도 좌파 '취향'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안티 조선'의 문제설정에 투과해서 보자면 전형적인 보수적 지식인으로 돌변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안티 조선'의 문제에서만큼은 진보와 보수로 구분 짓는데 특별한 배려가 요구된다.

'안티 조선'의 문제를 '지식인 논쟁'의 시발로 삼을 때 그것은 지식인의 일관성과 책임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어떤 구체적인 대안의 상이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조선일보라는 매체의 도덕성을 묻는 작업이며 이때의 지식인은 '어떤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초반 강준만과 소위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슈를 제기하며 다양한 논의의 축들을 만들어 냈다면, 논쟁이 진행되면 될수록 오히려 하나 하나의 논의 축에서 퇴각하고, 최소한의 근거를 방어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힘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지표를 제공한다고 본다. 또한 '안티 조선' 문제가 모종의 '도덕적 합의'를 최소한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현 지식인 논쟁이 '안티 조선'의 맥락을 벗어나 지식인 자체를 향하게 될 경우 우려가 되는 부분은 바로 '안티 조선'의 이와 같은 성격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인들의 문제로 논의가 한정될 경우, 남한 사회에서 모처럼 제기된 도덕적 이슈에 대한 사회적 논쟁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많은 지식인들이 현 지식인 논쟁에 있어 '대화의 룰'이나 '공통의 규범'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이 부분을 위한 자원이 여전히 '안티 조선'의 맥락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 논쟁으로서 '안티 조선'의 문제 설정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 이 글은 지식인 논쟁을 '안티 조선'이라는 문제설정으로 다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서 이리 저리 얽혀 있는 현 지식인 논쟁의 유의미한 전개에 있어 한 자락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안티 조선'이 지니는 잠재성과 모호성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로 촉발된 일련의 지식인 논쟁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전통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지식인은 어떻게 자신의 지식을 사용을 해야 하는가'라는 축으로 짜여진 듯하다. 이런 문제설정의 방식이 여러 가지 지형에서 발언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혼란을 야기했다. 이런 문제설정의 전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의 독특한 지형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안티 조선'의 지형이다.

안티 조선의 시발은 70년대 중반부터 민중진영에 의해 제기되어온 언론자율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왜곡된 정보를 강요한 권위주의적 체제 내에서 언론의 자율성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은 물론, 권위주의 체체에 대한 불만을 조직하는 관점에서 주장되었던 것이다. 7, 80년대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당시의 대립구도는 물리적 폭력의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립하는 민주화 세력의 틀로 짜여져 있었다. 여기서 언론 자율성의 문제설정은 권위주의적 정부에 기생하는 언론의 속성보다는 보도 지침 등의 다양한 법제적 장치를 통해 통제를 받아온 약자로서의 언론이라는 관점에서 채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90년대에 등장한 회의주의적 전망 속에서 언론에 대한 문제의식이 쉽게 휘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90년대 내내 진보의 구체적인 상을 정립해가는 내포적 과정보다는 다양한 진보들의 스펙트럼을 확장해가는 외연적 과정에 더욱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인 정세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언론의 독자적인 정보 조작 및 언론 자본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강제에 주목하면서, 이를 '안티 조선'이라는 분출구로 첨예화시킨 공은 당연히 강준만에게로 돌려져야한다. 강준만의 전략적 방침은 중요한 논쟁지점들을 형성했으며, '조선일보'에 대한 실질적인 형태의 조직들이 등장할 수 있는, 의식의 인식지평을 재구성해왔다. 사실 '조선일보에 관대한 사람들'이라는 <월간 인물과 사상>의 초기 캠페인에서 주요한 논거는 특정한 지식인들의 정치적 견해라기보다는 특정 지신인의 말과 행위에 있어서 일관성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티조선의 문제 설정은 지식인이 동시대적으로 겪고 있는 혼란 일반을 향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조건은 이른바 '지식 위기론' 이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은 지식의 전통적인 성격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는 지식산업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새로운 자본주의적 재생산 메카니즘의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남한만 하더라도 신정부 들어 불기 시작한 '신지식인론'을 비롯하여,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 놓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지식인' 자체가 문제시 되었다기 보다는 '지식' 자체가 문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지식이 다른 지식과의 관계에서 있어 실제 맺고 있는 양식에 대한 것이 쟁점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신지식인론'은 뒤늦은 반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야 할 것은, 질문에 '지식인'은 빠지고 추상적인 '지식'만을 문제시하는 '의도'에 대한 질문이다.

이와 같은 '안티 조선'의 문제설정이 지닌 토대는 '조선일보'라는 범주를 훨씬 뛰어넘을 수 밖에 없는 조건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점은 '안티조선'이라는 문제설정이 지닌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아래에서 살펴 볼 것처럼 논쟁의 축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현재의 지식인논쟁을 다시 '안티조선'이라는 문제설정을 중심으로 봐야한다는 입장을 개진하고자 한다. 지식인 논쟁 자체가 중심에 놓일 경우, 현재에 있어 논쟁의 축이 사라진다는 점이 첫째 이유이다. 자칫하면 여러 가지 지식인 상들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게 되고, 그 차이들을 다만 '인정'하는 것으로 끝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짐은 '안티조선'을 둘러싼 논쟁이 '지식인 논쟁'으로 둔갑된 시점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흐름은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 능동적으로 개입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절에서 길게 서술할 내용에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현재의 논쟁이 제도 정치권의 지형을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당 친화적인 지식인군과 한나라당 친화적인 지식인군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로 촉발된 논쟁으로 현재의 '지식인 논쟁'을 한정시킬 경우 개혁 대 보수의 이원적 지형을 그대로 투영하게 된다. 나는 '안티조선' 논쟁이 궁극적으로 남한 사회에 대한 본질적인 대안의 가능성까지도 거세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관련기사] 구본준, 압도적 보수, 보수주의자는 없다, 한겨레21, 370호.

 

2. '조선일보의 의식조작: 분열된 지식인?

언론사 세무조사를 중심에 놓았을 때, 지식인 논쟁은 '분열'이라는 화두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질문 이전에, '분열'이라는 용어의 적절함에 대한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식인 논쟁이 깔려 있는 지식인 사회의 대략적인 지도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전문분야와는 무관하게, 특정 사회적 이슈에 대해 도덕적 개입을 하는 이들을 지칭해왔다. 이러한 정의가 너무 고리타분한 것이라면, 적어도 지식인이라는 것이 머리에 든 지식의 양으로 자격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부정적 정의에서 합의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분열'이라는 말이 지니는 남한의 공통적인 정서 문제다. 가치판단을 떠나서, '분열'이라는 말에 긍정적인 투사를 보이는 이들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가치관 속에서는 이미, 분열이라는 말을 존재 조건을 위협하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의 분열이라는 현상 분석은 어떠한 담론보다는 가치지향적인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식인 분열이라는 담론을 누가 유포하는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언론사 세무조사 과정에서 첨예한 반대의 시각을 보였던 한겨레의 기획 <신문을 위하여>와 조선일보의 기획 <위기의 지식인 사회>를 비교해보자. 이 둘의 기획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선, 현 상황에서 지식인 문제를 다룬 다는 것은 '언론사 세무조사'라는 맥락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이고 두 번째는 어찌되었던 지식인들의 자기 드러내기가 이 둘을 포괄하는 신문언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 때문이다.

위의 기획에서 흥미로운 것은, 동일한 현상에 대해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방식, 즉 문제설정의 방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난 7월 18일자 조선일보에서부터 시작된 <위기의 지식인 사회>기획은 7월 24일 긴급 좌담회에까지 총 5회에 걸쳐 연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겨레의 <신문을 위하여>는 7월 17일에서 8월 14일까지 총18회에 걸쳐 연재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기획은 교수나 문인을 중심으로 짜여졌던 것에 반해, 한겨레의 기획은 교수, 가수, 학생, 교사, 작가 등의 다수 직종의 사람들로 짜여졌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시종일관 '양비론으로 치닫고 있는 지식인사회'라는 규정을 견지하면서, "한국 지식사회를 위협하는 적들은 ·양극화 ·폭력화 ·천박화 ·폐쇄화 등 네 가지로 압축된다"(김기철 기자, 7월 23일자 조선일보 )는 입장을 확대시킨다. 반면 한겨레는 시종 '언론'의 문제설정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인 사회의 위기라는 담론은 궁극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이면에 두고 확대 재생산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조선일보의 기획에서는 '언론사 세무조사'와 같은 현안은 교묘하게 거세되어 있다. 이는 각각의 기고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무장한 대중적 지식인만이 판을 친다."(이진우)는 개탄이나,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톨레랑스'의 미덕"(조규익)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전제되지 않고 있다. 어떻게 언론사의 세무조사로 촉발된 논쟁이 지식인 사회의 분열로까지 확대될 수가 있었을까. 이 이면에는 교묘하지만, 매우 단순한 조작 장치가 있으며, 이를 구분할 경우에만 지금은 혼탁해진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회가 균질화되고 일원화될 수 없는 복잡성의 산물이라면, 사회는 궁극적으로 많은 '다름'들로 체워져 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지식인이 다른 지식인과 입장이 같지 않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분열이라고 평하는 것은 '위기 의식'을 이용한 교묘한 여론 조작의 발로인 셈이다. 물론, 이의 선봉에는 지식인의 분열을 가장 많이 가슴 아파하는 조선일보가 놓여져 있다.

3. 현재 '지식인 논쟁'의 허구성

하나의 논쟁을 정리하는데 많은 전제를 달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지식인 논쟁을 정리하는데는 많은 각주들이 필요하다. 이는 현재의 논의가 불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교묘히 작동하는 권력의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현재의 논쟁에서 추려 볼 수 있는 교묘한 장치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자.

- 맥락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일반화만 남는다.


기본적으로 지식인 -여기서는 지식 혹은 정보 사용에 대한 고급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에서의- 은 추상적 개념을 다루는 엔지니어이다. 또한 추상적 도구를 다루는 지식인은 특정 현상에 대한 적용과 배제의 선택에 놓인다. 현재의 논쟁에서 많이 언급되는 '다양성', '자유민주주의의 원칙', '관용', '상호인정' 등의 용어는 바로 이 맥락에 놓인다. 그 보다 이러한 추상적 일반화를 통해 작동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개념축은 '좌파와 우파'라는 것이다.  

 

지난 8월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신동아>의 특집은 '좌파냐 우파냐'는 선정적인 제목이었다. 이 특집은 현재의 논쟁을 '김대중 정부의 이념적 성향'을 둘러싸고 발생했다는 기본적인 전제에서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좌파냐 우파냐의 구분이 언론사 세무조사 과정에서 특별히 공격을 받았다고 느끼는 측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진보가 살기 위해서는 보수도 살아야지, 보수는 다 죽고 진보만 살면 나라가 무슨 꼴이 될 것인가."(김동길, 조선일보 6월 27일자)는 주장은 오히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서 우선적으로 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언론사 세무조사의 사안을 이념논쟁으로 볼 수나 있는 것인가의 의문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안을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볼 수 있는 계급적 의식이 조선일보에 더욱 투철한 것 같다는 점이다. '점입가경...한국판 문혁 시작됐나?'(주간조선 7월12일자 1662호)라는 기사는 시종일관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원장의 '페로니즘', '포퓰리즘'이라는 말에 주석을 달고 있다. 그 표제가 지니고 있는 선정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공당의 정책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집권여당의 정책에 '~주의'딱지를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 호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조선일보는 다른 인사들의 입을 빌어 이념 중심적으로 지식인사회가 분열되어 있디고 성토한다. 차인석 서울대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의 다양성'이나 '지식인의 내적 설찰'을 운운하면서 나름대로 옳은 말을 하기는 하는데, 자신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장의 논리에 약한 이해를 범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말을 조선일보 지면에 선사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는 통일 정책을 독점하고 제멋대로 하는 바람에 '통일독재'란 말이 나온다. 그 탓에 지식인 사회에 치사한 싸움이 벌어지고, '홍위병'이란 말까지 나왔다. 일부 지식인들이 치열한 내적 반성 없이 수구니 반동이나 반통일 세력이니 하는 말을 뱉어냄으로 해서 '홍위병'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차인석, 조선일보 7월 24일자)

이제까지 정부에서 통일 정책을 독점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또한, 정치인들이 '빨갱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인가? 차인석 교수는 아마도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 독점을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 인양 알고 있는가 본데, 한국 현대사에 문외한이면서도 철학을 할 수 있는 우리 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다. 사실 차인석 교수는 70-80년대에도 '사회과학의 철학'등의 책들을 편집하면서 비판 사회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리고 지난 해 진보평론에 '혁신자유주의를 되돌아보며'라는 글을 기고했다. 차인석은 해당 글을 통해 제 3세계의 사회변화는 "어떤 이유든지 간에 대중적 참여가 결여된 상황에서는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연합정치가 기성 정치 과정에 혁신적인 압력을 행사해야"하며, 특히나 "교사, 교수, 성직자, 문필가, 예술가, 언론인들과 같은 지식인 집단들의 동맹에 의해" 시민의 권력 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그가 조선일보의 좌담에서 위의 얘기를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은 남한 지식인의 유아적 사고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그 배경에는 추상적 일반화가 현상 파악을 위한 준거로서 작용하는데, 그것이 독단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권력의 이해와 시민사회의 이해가 지니고 있는 유사성만으로 '홍위병'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면, 나치 치하 프랑스의 독립적 레지스탕스는 드골 망명정부의 '홍위병'이 되는 것이다. 더 심하면 3.1운동은 형태상 나치스의 유겐트와 비슷한 전체주의적 성격의 운동이 되어버리고, 이완용과 같은 이들의 자기 결단은 존중되어야할 사적 행위로 전락된다는 사실을 놓치고 만다.

이렇게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은 맥락을 배제한 글쓰기를 하는 사이에 애매한 이원론으로 빠지게 된다. 즉, 적과 아군의 구분을 바탕으로 지식인 논쟁을 재단하려는 움직임이다. 사실 한겨레의 <신문을 위하여>에서 어떤 이들도 그들과 나의 구분에 '지식인 영역' 자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겨레가 명민하게도 논쟁을 언론사 세무조사로만 한정시키려는 전략을 펼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지식인 사회의 이분화에 대한 우려는 조선일보의 기자 손에서 생산되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이들이 확대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다음의 기사들이 보이는 시차에 주목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권력의 눈치를 살피느라 한 사회가 건강하기 위한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이념의 시장'은 전혀 형성되지 않고 있다."(이하원, 홍영림 기자, 조선일보 2000년 1월 12일자)

"입장의 차이는 있었지만 지난 30여 년 지성계를 양분하며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창비'와 '문지'가 '문화권력'으로 낙인찍혀 그 '패거리주의'를 매도당했다."(김태익 문화부장, 조선일보 6월 7일자)
이런 입장을 두고 많은 이들은 조선일보의 입장이 변덕스럽고 자사의 이익에 맞춰 말을 바꾼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행태를 끊임없이 반복할 만큼 조선일보의 기자들이 바보일까.  

- 권력의 물신화로서 정치지상주의

 일단 시각을 바꿔 조선일보 나름의 일관성을 인정한다고 할 때 조선일보 나름의 논리중 하나가 불거지게 된다. 이 역시 애매한 이원론에 기댄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앞서의 '권력'이라는 규정과 뒤의 '문화권력'에서의 권력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개 조선일보는 권력이라는 말을 부정적인 어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권력은 대개가 '정권'과 동의어가 된다. 그러므로,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논쟁의 와중에도 끊임없이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언론 당사자가 자신의 본령을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찾는 것은 인정할 수 있는 바다.

"지금 세무조사에 검찰조사까지 받으며 존립을 위협받고 있는, 약자인 언론에 곡학아세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이규태, 조선일보 2001.7월 6일자)

곡학아세의 논쟁 가운데서 나온 이규태의 위와 같은 말도, 나름의 애교성을 가지는 것도 이 측면에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애매한 이원론을 재생산하는 지식인들이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이문열이 추미애 의원과의 논쟁과정에서 언급한 내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세무조사를 비판하는 칼럼을 쓴 것은 이번 세무조사가 언론자유를 침해할 개연성이 아주 높으며, 권력이 합법성을 가장해 신문에 강요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론과 정권이 충돌로 승패를 가름해야 한다면 나는 언론 쪽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이문열, 동아일보 7월 5일자)

이문열의 진정성을 1%라도 인정할 수 있다면, 위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때다. 이문열이 생각하는 그 '개연성'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언론 쪽의 승리를 기원한다는 데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논리가 사회과학을 하는 지식인에게는 어떻게 해석이 될까. 한림대 사회학과의 전상인 교수는 이점에서 주목할 만한 지식인이다. 그는 지난 4월 17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은 관점을 밝혔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인 사회의 반지성화는 김대중 정권과의 친소를 기준으로 한 지식인 집단의 줄 세우기 및 편가르기와 무관하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다음의 문장 뒤에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실명비판' 혹은 '안티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지식인 사회의 게릴라식 내전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독선적이며 또한 선동적이다. 물론 지식인 사회라고 성역과 금지의 영역은 아니다."

전상인은 올해 초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 안티조선운동을 겨냥하고 있으며, 강준만을 필두로 하는 일련의 실명 비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을 교묘히 정권과의 친소관계로 치환시킨다. 이런 말장난이 어디 있는가. 그런 그가 남한의 지식인 담론을 분석하는 최근의 글을 통해서 '지식인들의 본령은 거리 두기'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물론 전상인 같은 이들은 '지적 스토킹'하며 기겁을 하겠지만, 이런 방식이 글쓰는 사람에게 결코 쉬운 글쓰기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자신이 예전에 무슨 글을 썼는지도 모르는 이에게 '이런 글을 썼다'고 찾아다 보여주는 일은 상당히 귀찮은 일에 속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전상인과 같은 지식인이 조선일보의 논조를 재생산하면서 오히려 복잡한 사회의 다양한 권력지도를 일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의 권력관은 언론기관으로서의 직능적 특징에서는 용인될 수 있지만, 전상인 같은 사회과학 전문가가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지식인 사회의 논쟁을 재단하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좋은가.

전상인을 비롯하여, '홍위병' 논의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지식인들은 공통적으로 정부의 권력을 물신화하는 정치지상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이미 남한 사회를 김대중 정부를 정점으로는 위계적 망(網)으로 구성해놓고,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이 그 위계적 망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문열은 용감하게도 언론사 세무조사를 정권 대 언론의 대립축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그간 시민사회에서의 개혁 움직임은 도외시한 채 정부의 주장과 시민사회의 주장을 일차원적으로 비교해 '홍위병' 딱지를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과거 박정희나 전두환의 군사정권시절에 정권에 빌붙어 기생하던 지식인이나 언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가. 사실 이 질문이 위에서 거론된 차인석이나 전상인, 이진우 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

- 비판의 유일한 자격으로서 전문가주의

안티 조선을 두고 오가는 논쟁에서 특히나,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지식인의 분열'을 개탄하는 사람들과 권력을 정치권력으로만 한정시켜 바라보는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전문가주의'를 근저에 깔고 있다. 9월달에 나온 신동아에서는 지식인 21명을 대상으로 김대중 정부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실려 있다. 이 중, 유석춘 교수는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에 관한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문가가 문제점을 지적하면 반개혁이고, 시민단체가 좋은 취지만 내세워 시행을 주장하면 무조건 개혁인가. 전문가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단체의 논리만 앞세우다 보니 '홍위병' 얘기가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김만제 의장이 '인민 재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냐."

위의 말에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결과로만 판단하는 유석춘의 논리 추론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말처럼 구체적으로 "그 때 지식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한국일보 7월 19일자)하는 점이 지적되었어야 했음에도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의료정책에 관한 논쟁 중 무엇이 핵심이었고, 어떤 정책이 문제였다는 것을 밝혔어야 했다. 하지만 유석춘은 단선적으로 전문가와 시민단체를 대립시킴으로써 문제를 간단하게 만든다. 물론 유석춘의 봉건적인 정치적 지향성 자체를 문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 문제인 것이, 이론상에서의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이 실제 현상에 대해서는 완고한 무관심으로 대체되는 상황이다. 오히려 시민사회 자체보다는 몇몇 시민단체를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전상인이든 유석춘이 강조하는 전문가대 대중의 짝개념을 중심으로 보자면, 그들에게서 어떤 일관성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전상인의 경우, 지난 98년 발표한 [양반과 부르주아]라는 글을 통해 남한의 부르주아가 조선시대의 양반과 달리, 사회적 통제력의 측면에서 미약한 이유를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주된 분석틀로 제시되는 것이 그람시의 시민사회론이며, 그 중에서도 헤게모니라는 관점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지식인은 그 시민사회의 요소일 따름이다. 이 점에서 이들이 강조하는 전문가주의는 순수한 의미의 엘리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시민사회세력을 겨냥한 편향적 언사인 것이다. 다른 예를 보자.   

정과리는 지난 조선일보에서 제정한 동인문학상과 관련된 논쟁에서 고종석과 의미 있는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여기서 의미 있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로서 정과리가 자신의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직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어정쩡하게 조선일보의 그늘에 서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나름의 전략을 제시했다. 고종석의 "지금 안티조선일보 운동의 싸움이 정면돌파라면 외곽돌파는 어떤 걸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 중 대표적인 게 동인문학상이다. 작품을 통해 조선일보에 반하는 생각을 갖게끔 해줄 수 있고, 조선일보사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전략의 목적이 '보수우익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는 우리 마음속'에 어떤 자극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과리의 말은 언뜻 보기에 '세련된' 조선일보 활용론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을 움직이는 순문학의 힘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조선일보가 일궈놓은 모종의 뿌리를 흔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지난 7월 20일자 조선일보에 '일류-권위 배척하는 천박'이라는 제하의 글을 기고하면서 밝힌 바는 '과연 그의 진의가 무엇인가'라는 혼란을 느끼게 한다. 그는 "쪼가리 지식들, 얄팍한 지혜들이 창궐하면서 한국의 지식은 광복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간신히 심어온 역사적 뿌리가 뽑힐 지경이다."고 개탄하면서 곧 이어 "일류가 일급 대접을 못 받고 조롱 당한다."고 통탄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역사적 뿌리'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며, 자신이 말하는 '일류'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대체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과리는 맥락적으로 말하는 이다. 자신의 텍스트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절대 다 드러내는 바가 없다. 특히,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약간 '거리'를 둔 채 일반화의 방식으로 싸잡아 거론한다. 이를 통해 자신은 자신에게 향할 수 있는 비판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정과리의 이 말은 조선일보 6월 7일자 김태익 문화부장의 다음 글과 같이 놓았을 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지식사회의 새조류'라는 칼럼을 통해, 문지논쟁과 미당논쟁, 그리고 박종홍에 대한 재평가를 거론하면서, 다음의 전제 조건을 비판의 전제로 내세운다.

"창비와 문지, 미당과 박종홍을 어디까지 부정할 것인가. 그들이 없는 한국 현대지성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기존의 권위를 대체하려면 그걸 뛰어넘는 실력과 도덕적 자질과 전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과리는 이런 맥락에서 시민사회를 지식인들의 사회와 명확하게 분리하면서,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의 성곽을 짓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전문가주의는 시민사회 중심의 사회개혁운동에 대한 반비판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조선일보가 '자유실천시민연대'나 혹은 그 비슷한 시민단체를 다룰 때에는 '시민사회의 다양성' 운운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시민사회의 민주적 역량과 판단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면, 부수로서만 권위를 내세우는 조선일보의 논리는 자승자박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과리도 마찬가지고 유석춘도 마찬가지고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서는 독자의 선택을 운운하면서, 시민사회나 시민운동단체에 대해서는 그것의 아마추어리즘을 타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아마도 수동적이면서 몰개성적인 군집체로서 '대중'은 매력적이지만. 능동적이고 참여하고자 하는 의미에서의 '시민'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 스스로가 다수의 대중을 주장할 때는 중요한 논거가 되고, 시민단체를 위시한 능동적 시민들이 말할때는 홍위병이 되는 것인 아니겠는가. 여기서 조선일보나 유석춘이나 정과리가 말하는 전문가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레토릭으로 전락하는 순간을 찾을 수 있다. 서강대 이태동 교수의 다음 글을 보자. '이문열과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이문열이 이러한 사태를 두고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홍위병들의 발호에 비유했던 것도 '말없는 다수'의 일치된 의견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문화일보 7월 11일자)라고 말하고 있다. 말을 하는 이들은 홍위병이고, 이문열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은 '말없는 다수'이다. 이로써 유석춘이나 정과리, 이태동이 말하는 '전문가로서 지식인'은 자신들을 향하는 수사로 전락한다. 그리고 시민은 어떤 입장의 제시를 통해 능동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구성해나가는 이들로서 아니라, '말없이' 전문가의 판단에 따르는 신민이 되고 만다.

4. 조선일보를 넘어 대안논쟁으로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 '안티조선'이라는 쟁점을 이끌어온 대략적인 지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간략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신문선택의 문제 → 비판의 형식문제(강준만과 인터넷 게시판을 중심으로) → 정권과 언론의 대립 문제(언론사 세무조사) → 시민사회의 문제(홍위병의 문제의식) → 지식인 사회의 분열 → 전문가주의 및 '말없는 다수'

시계열상의 문제보다는 문제제기의 중점을 중심으로 구분했을 때 대략적으로 위의 순서를 따르는 것 같다. 사실, 조선일보라는 하나의 족벌신문을 두고 일어난 사회적 파장의 수위가 너무도 높다. 그만큼 '안티 조선'이라는 의제가 가상의 의제로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에 뿌리를 둔 구체적인 의제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소위' 진보적 지식인군들의 대응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유의미할 것이다. 3절에서 살펴보았듯이, 교묘한 말의 전제들과 함의들이 고정된 것도 아니라, 시시각각 쟁점을 바꿔가면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 함정들에 대해 대응해나가는 일단의 지식인군을 살펴가면서, 좀더 진전시켜나가야 할 부분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먼저 이를 살펴 볼 때 하나의 시금석으로 박홍규 교수의 글을 채택하고자 한다. 이는 우선, '안티 조선'의 문제 설정을 이념적인 수준에서는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홍규는 어느 정도 이념적인 구분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둘째로는 '안티조선'의 문제설정에서는 각 진영간의 삼투 형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 형성된 일종의 전선이 중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홍규 교수와 같이 다소 관망적 자세를 견지하다가 '싸움닭이 되기'를 결심하는 사례는 양 진영의 삼투가 왜 어려운지에 대한 기초적인 '변화'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홍규의 입장에서 개혁대 보수의 축으로 '안티조선' 문제를 해석하는 입장의 한계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박홍규 영남대 법학과 교수는 지난 7월 <교수신문>에 '지식인의 글쓰기를 비판한다: 오십에 싸움닭 될 결심을 하며'라는 제하의 글을 기고했다. 박홍규는 전상인과 신일철, 조성기, 송호근의 글을 예시로 그들의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자기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무슨 말을 하건 '선동'으로 낙인찍힐 것이 뻔한 상황이 오히려 그를 선택으로 몰고 있으며, 오히려 그 '선동'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싸움닭이 될 능력도 없는 무능한 사람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언제나 다수에 의해 '선동'으로 낙인찍히는 대화에 나설 생각이 없다."

사뭇 비장한 말투지만,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는 시원한 문장이다. 사실 대화라는 것은 상대방의 선동까지도 '대화'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한데도 '자세가 안되었다'는 극히 주관적인 잣대로 '선동'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의 실명비판에 얼굴 빨개지는 이진우나 임지현 같은 이들에게 '대화'란 쨍한 여름 큰 그늘 아래 앉아 천하를 논하는 것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특이나, 이들이 옹호하는 조선일보의 문화부 차장이라는 사람이 쓴 다음의 '문화적인 글'보다 더 심한 글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는지도 묻고 싶다.

"성마른 정치인과 전사 로봇을 닮은 지식인들이 말을 난사하고 있다. 그들은 취해 있기 때문에 파괴를 개혁으로 오해한다. ... 언어 내적인 논리보다는 언어 외적인 공포분위기 조성이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 말을 부드럽게 곡면으로 다듬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낫으로 창처럼 깍는다. 그 말은 상대의 이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고 상대의 심장에 꽂히는 것이 목적이다."(김광일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 7월 12일자)

결국 이름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이지, 말품새 등은 하나 문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홍규가 싸움닭이 되고자 맘을 먹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선택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방식은 '안티조선'에 참여하는 이들의 주요한 활동 자원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진중권식의 글쓰기가 문장과 문장사이를 가깝게도 하고 멀게도 해서 숨겨진 의미를 돋아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박홍규와 같이 초기에 '안티조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주요한 전략이다. '독립군'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옥천군의 안티조선운동이 그렇게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를 '친일 전력'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넓게 보면 텍스트 분석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이런 분석은 궁극적으로 제한된 선택지의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박홍규는 싸움닭이 될 결심을 밝히면서 곧 "나는 언론 개혁을 추진하는 정권과 그것을 지지하는 한겨레와 극소수의 지식인을 전폭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안티조선'이라는 네가티브한 운동이 지니고 있는 최대한의 포지티브한 측면은 '현재 여기서'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안티조선' 운동 초기에서부터 '조선일보를 비판하면 대안은 뭐냐'는 질문에 취약성을 보인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대개가 최소한의 정의와 윤리성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나갈 뿐이다.

김우창이 최근 당대비평에 발표한(2001. 8) '진실, 도덕, 정치'는 이러한 한계를 명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는 진실이라는 것이 단순히 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점에서 진실은 언제나 상대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 도덕 역시도, 그것이 큰 도덕일수록 작은 도덕의 부정을 정당화하는 모순을 가지게 된다고 본다. 이런 것이 정치라는 세상살이의 한 축과 연결이 되었을 때는 상당히 복잡되고 때로는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김우창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덕적 실천은 아무래도 '안티조선' 쪽의 지식인들을 가르키는 것이며, 전반적으로 그 지식인들이 범할 수 있는 우려투의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글의 말미에서 제시되는 결론이 "우리가 나무를 나무로서 있게 하려면 우리 스스로를 버리면서, 내면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공간을 나무에 던져야 한다"는 릴케 식의 문학적인 언급으로 끝나는 것이다. 김우창의 글쓰기가 워낙 당면의 글쓰기를 보편의 수준에서 논하는 특징이기에 나름의 효과는 있으나 한계 역시 명확히 드러난다. 그것은 실제 구체적인 삶에서 사는 사람들의 경험은 언제나 그대로 '보도록'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며 다른 편으로 '가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우창의 문제의식에서 유의미한 부분은 '도덕의 과잉'이 가져 올 수 있는 담론의 붕괴에 있다. 박홍규의 사례에서처럼 당면의 선택을 일종의 '도덕적 자기결정'으로 제한할 경우, 논쟁은 그 '도덕성'의 수준에서만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인물과 사상>에서 강준만이 최근의 논쟁을 '친김대중 정권'에 대한 축이 아니라 '친개혁'이라는 축으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이러한 방향의 전환이 오히려 '안티 조선' 문제를 이념화시키고자 하는 조선일보의 의도에 적절한 빌미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현 상황에서 개혁은 곧 김대중 정부의 정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친권력적'이라는 혐의를 부추긴다. 만약 지식인 논쟁으로 범위를 한정해보았을 때 오히려 효과적인 것은 추상 수준에서의 논쟁일 수 있다. 실제로 텔레비전에서 '언론개혁'을 주제로 하는 토론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언론개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사들은 '다원성'이니 '민주주의의 질서'니 하는 말들을 하는 반면에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조세정의나 역사의 왜곡, 각종 여론조사의 지표를 거론하는 전형성을 발견할 수 있다. 김우창의 말을 빌면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인사들의 이와 같은 말법은 논쟁이 시작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로서 '진실'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일반인들은 단순명료한 개념어 사용이 더 익숙하다는 점이다. 언론 개혁을 반대하는 인사들이 '언론자유'를 말하는 것은 일반인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논쟁에서 주요한 논거로서 이용된다. 반면,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내놓는 그 많은 사실들은 수용자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낳는다. 이 점을 '안티 조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지식인들간의 논쟁에 유비시켜 본다면,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세정의와 언론의 자유가 대립되는 개념쌍으로 변질된 상황 자체를 반전시키지 않는다면, 논쟁은 수평을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3절에서 보았듯이 이미 유용한 개념어를 선점하고 이를 활용하는 측은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다. 사립학교법 개정 운동에도 평등주의를 갖다 붙이고, 노사정위원회에 대해서 사회주의를 갖다 붙이고, 세무조사에도 좌파를 갖다 붙이는 것은 언제나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말의 추상수준을 교묘히 조정해 본말을 전도시키고 논쟁의 축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측도 조선일보와 그의 지식인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일보와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기는 '위기'에 대해 "편가르기, 혹은 키재기는 그 휴유증까지를 포함해서 오히려 현금의 우리 사회가 겪어내야 할 계몽과 성숙의 일단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새롭게 전유하는 김영민의 방식은 유의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현재의 지식인논쟁을 '안티조선'의 문제설정을 중심으로 다시 재해석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지식인논쟁이 지니고 있는 현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그것의 뿌리에는 안티조선의 문제설정이 자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안티조선의 문제설정을 포기하게 될 경우에는 다음의 고려대 현택수 교수 말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지금 이 땅에서 전개 중인 문화권력들의 논쟁은 그 내용의 천박성과 함께 사유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맹목적이고, 감정적 비판은 막말과 욕이 오가는 언어폭력을 낳고, 비방과 폭로의 인신공격은 논쟁을 저급한 언쟁으로 변질시킨다. 논객들의 적절치 못한 비유를 실제와 혼동하고 수사에 감정적으로 대응해 논리싸움이 감정싸움으로 비화하곤 한다. 깊은 사유와 정치한 분석으로 논리 대결을 하기보다는 도식적이고 왜곡된 흑백논리와 혐의 씌우기식 비난으로 편가르기에 급급하다."(뉴스메이커 7월 19일자 433호)

하지만, 이를 '안티조선'의 맥락에서 보게 될 경우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른 지평에 놓이게 된다. 우선 '문화권력들'이라고 집합적으로 불릴 때 안티조선과 조선일보와 그 지식인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만다. 다만 구구절절 옳은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현택수는 '관전평'만 할뿐이지 자기의 입장에 기반한 평가를 내리지 못한다. 더더군다나 부르디외의 미디어 지식인 비판을 그렇게 많이 소개한 이가, 조선일보에 의해 지식인사회가 쥐락 펴락되는 상황에 눈을 감은 채 말이다. 현택수가 이해하고 있는 부르디외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이문열의 말이 타당한가.

"신문이 지식인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다 자란 지식인을 신문이 활용하는 측면이 더 강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내가 글을 실어달라고 부탁한 것보다는 신문사가 나에게 청탁한 적이 대부분이었다."(동아일보 7월 5일)

이 부분에 대답하지 않고, 지식인들간의 논쟁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면 현택수가 보여준 것과 같은 '관전평'만이 다시 난무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추상의 수위자체가 아니라, 추상의 목적에 있는 것이며 그보다는 추상 자체가 지니는 효과에 핵심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안티 조선'이라는 문제 설정 자체가 희석되면 될수록 논쟁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지현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 대한 서평 한 꼭지를 통해서도 대담하게 다음과 같은 조소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사의 어디에나 끼어 있는 어리석음에 대해 현명함이 베푸는 예의이기도 하다. 예의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 해도,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차별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멱살잡이나 이전투구의 핏대 싸움을 논쟁이라 착각하는 이 땅의 나 같은 지식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동아일보 8월 11일자)

'나 같은'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면서 한 켠으로 물러서는 흉내를 내지만, 그가 웃으면서 화를 내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안티 조선'의 문제설정을 넣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런 '안티 조선'이라는 문제설정의 재생만으로 현재의 논쟁을 뛰어 넘을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대안을 바탕으로 하는 '안티 조선' 자체의 핵분열이 필요하다. 지금과 같이 '개혁'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집중하기보다는,  적어도 지식인 사회는 어떤 개혁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느슨한 핵분열을 할 필요가 있다. 서준식이 한겨레에 '나, 사회주의자'라는 칼럼을 통해서 김만제 식의 농담에 반응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거시적인 대안의 모색이라는 '좌파'의 본령에서 '안티조선'의 문제의식이 구체화되길 바란다. 하지만 이 '좌파'의 규정이 김영민을 포함한 모든 성찰적 자유주의자들보다 무조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동향과 전망>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거시적 대안으로 들고 나온 장상환과 민중사회론을 들고 나온 김세균의 차이를 눈여겨보자. 장상환은 지난 6월 조선일보 반대 2차 지식인 선언에 서명하면서 "나는 사주 1인지배 체계가 부당내부거래, 과당경쟁 등의 고질적인 경제왜곡을 낳았"으며, "최근에는 이들 언론이 약육강식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약자들에게 주입해 자기모순에 빠지게 했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김세균과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주도적으론 내고 있는 <진보평론>에서는 조선일보 문제와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해서 단 하나의 논문만이 소개될 뿐이다.

현실을 이루는 세부적인 결에 대해서 민감한 좌파만이 현실성 있는 대안을 형성할 수 있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현장 투쟁분석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진보평론>이 노동자들의 열독률이 높은 편인 조선일보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모순이다. 시민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김세균이 그 시민사회를 쉽게 부르주아의 손에 놓아 버리는 것은 너무나 편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장상환이 보여주는 교조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문제에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과의 접면'을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긴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장상환은 '친 정권'이라는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는 그가 구체적으로 견지하는 거시적 대안 속에서 '안티 조선'의 문제 설정이 자리 매김 했기 때문이다.

추상화 수준의 개념 싸움도 매우 중요하고, 이를 위해 행해지는 텍스트 분석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견고한 성의 거울 이미지로 재생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울이미지는 어쨌건 거울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풍경에 넋을 잃으면 내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를 잃기 마련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움직이는 차안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그리고 들고 있는 차표를 계속 확인하면서 버스에서 내릴 때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오가고 있는 지식인 논쟁을 '안티 조선'이라는 문제설정을 배제한 채 논의하다보면, 우리는 그 풍경에 넋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리곤, 김창호 중앙일보 전문기자가 정리한 바와 같이 "지식사회 위기의 본질은 이처럼 기존 지식권력이 해체되고 있음에도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찾지 못한데 있다. 과거와 같은 기능적, 관료적 지식인과 저항적 지식인이라는 이분법은 이제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중앙일보 8월 23일자)라는 종합적 결론밖에는 즉,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티 조선'의 문제설정 하에서는 현재의 지식인논쟁이 '안티 조선'을 두고 일어나는 2, 3 라운드쯤 되는 긴 경기의 한 과정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지형도 분명해 질 것이다. 새로운 거시적 대안을 바탕으로 친김대중이냐 반김대중이냐는 단선적인 선택의 장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들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은 먼저 '김대중'과 '이회창',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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