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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12
    우경화, 우경화, 우경화
    평발

우경화, 우경화, 우경화

* 민중언론 참세상[[정세칼럼] '진보'의 리트머스시험지, 진보신당과 사회주의정당] 에 관련된 글.

한국인권뉴스 대표라는 사람의 소위 '정세칼럼'을 보면서 한 마디는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우경화라는 말과 머리띠에 대한 것이다.

 

우선, 우경화라는 것에 대해.

 

노심당으로 간다고 우경화라고 주장한다면, 역사적으로 진정한 사회주의정당은 없었던 셈이다. 특정한 인물이 부각되지 않고 정당자체로 평가받은 사례가 과연 있었는가? 만약 필자가 그것을 알려주면 고맙겠다.

그런데 문제는 더 심각한데 있다. 일종의 비평의 딜레마라는 점인데, 특정 현상에 대한 비평은 보는 맥락에 따라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이다.

 

보자. 민주노동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진보신당의 생존여부는 결국 이번 총선이다. 이번 총선에서 유의미한 성과 -단 1석의 국회의석 획득이라도 -를 내지 못한다면, 진보신당의 실험은 실패했다는 논평이 줄을 이을 것이 불보듯 뻔하다. 과연 이런 논평에서 필자는 자유로울까?

 

우경화라는 것은, 정치적 이념의 기준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간이 있어야 우와 좌가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게 개인적인 신념의 수준과 제도정치에 대한 개입을 염두에 둔 정당운동의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 요즘에도 청와대에 깃발만 꽂으면 사회주의혁명이 달성된다고 믿는 낭만적 좌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흐름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왼쪽에 놓고 다른 쪽을 우경화되었다고 비판하는 것 만큼 편안한 포지션이 있을까 싶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사회주의당의 실험이 우리 역사에서 실패했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나는 비평가의 기본 소양은 정세적 판단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현존하는 정치세력간의 싸움인 국회의원선거라는 국면에서 우경화하는 딱지를 붙임으로서 필자가 얻을 것은 자그마한 자기위안 정도가 아닌가 싶다.

 

이는 자연스럽게 머리띠의 문제와 연결된다.

 

머리띠와 투쟁조끼를 입지 않으면, 투쟁심이 없는 것인가? 이거야 말로 좌익소아병을 넘어선 불신화아닌가?

울산에서는 같은 투쟁조끼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있으며, 서울광장에 모인 김홍도와 그 무리들도 '구국기도회'하면서 머리띠를 묶지 않나?

 

물론 필자가 머리띠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망가 중심당을 우려하는 것이리라. 그런 연장선상에서 머리띠나 투쟁조끼가 부끄럽냐? 고 일갈하고 싶은 심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순전히 오버다. 정치공간에서, 그것도 제도정치의 개입을 수단으로 삼는 제도정당에서 청바지 입고 투쟁하는 것은 정세적 판단이지 이념 변화의 증거라 몰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수준이라면 평생 개량한복을 입고다니는 사람만이 민족주의자라는 것인가?

 

비평의 미덕은,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데에 있지 주저앉히는데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진보신당을 사회주의정당과 비교하는 것은 '조크'성 발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동아리 수준을 벗어난 사회주의정당이 있기는 한 것인가? 제도를 통한 방법이 아니면, 그들이 무장혁명이라도 할 것이라 말인가?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는 절반 가까운 국민들은 무지몽매한 자가 아니면, 숙청대상인가?

 

도대체, 어떤 정세에 대한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평의 미덕을 한 참 벗어난 글을 보는 것 만큼 고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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