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공장소녀 The Match Factory Girl

아키 카리우스마키 Aki Kaurismaki | 1989 | 70min | 핀란드

 

 


   아키 카리우스마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시리즈를 통해서 이 감독을 알게 됐고, 그래서 이 사람 무쟈게 웃긴 괴짜감독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독하기가 그지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차갑고, 냉소적인 영화의 어조는 보는 내내 아니 보고 나서도 아직까지 으스스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성냥공장소녀>는 아키 카리우스마티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 <천국의 그림자>(86), <아리엘>(88)에 이은 세 번째 영화이며, 또 카리우스마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첫 장면, 공장에서 성냥이 완제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기계의 분업 과정을 배경음악 없이 현장음만으로 무미건조하게 나열한다. 그리고 공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기계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소녀 이리스를 보여준다. 이리스는 공장과 집만을 오가며 기계처럼 일한다. 부모와 함께 사는 집으로 와도 그녀는 공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가사노동을 반복한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마을 댄스홀에 나가는 것 뿐이다. 그러나 못생긴 그녀에게 어떤 남자도 춤을 청하지 않고, 늘 그래왔다는 듯 이리스는 댄스홀이 문을 닫을 무렵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던 어느날 이리스는 거리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빨간 드레스를 발견하고 월급을 털어 옷을 산다. 집으로 돌아온 이리스, 월급이 모자란 걸 어머니에게 들키고 빨간드레스를 보여주자 아버지는 '창녀'라는 한 마디와 함께 그녀의 뺨을 때린다. 옷을 돌려주기 위해 상점으로 가기 전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빨간 드레스를 입고 댄스홀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난 남자와 밤을 보내고 임신을 하게 된다. 임신 사실을 안 남자는 그녀를 버리고(사실 그 전에도 이 남자에게 이리스는 하룻밤 상대일 뿐이었다), 부모는 그녀를 집에서 내쫓는다. 이리스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도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은 쥐약을 사서 자신을 버린 남자와 우연히 만나 자신을 유혹하는 술취한 남자를 독살하고 집으로 돌아와 같은 방법으로 부모를 죽인다.

  마지막 장면, 이리스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표정과 동작으로 성냥을 만들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경찰이 다가오고 그녀는 묘한 미소를 띄며 그들을 따라 나간다.  

 

  이리스는 공장에서 집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남자에게까지 철저히 자신의 감정과 노동을 착취당한다.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성냥공장소녀>를 켄 로치가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봤다. 80년대 후반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영화(영화 속에서는 tv뉴스를 통해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모순과 폐해에 대한 내용이 반복해서 삽입된다)가 켄 로치의 손을 거쳤다면 아마도...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와 같은 아프지만 그래도 울컥한, 희망을 움켜쥐게 만드는 그런 내용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끼 카리우스마키의 <성냥공장소녀>는 소외된 인간의 절망에 대해 창백하다 못해 아주 노골적으로 냉소적이다. 제목에서부터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연상하게 되는 이 영화는 아마도 동화의 가장 잔혹한 각색 버젼이 아닐까 싶다.

  감독은 대사를 철저하게 절제한 가운데 소외된 인간의 절망을 건조한 영상으로 표현해낸다. 날선 면도날처럼 치밀하게 계산된 카메라 앵글과 군더더기 하나 없는 컷과 컷 사이의 편집. 이렇게 군더더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자신의 할말만 하는 화법으로 일관하는 이 영화는 비참한 현실을 절망적으로 인식하고, 다시 이것을 영상이라는 이미지로 만드는 연출자의 시선과 태도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참에 아끼 카리우스마키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봐야겠다.

 

 

Aki Kaurismaki filmography

 

<텐 미니츠 - 트럼펫 Ten Minutes Older: The Trumpet> 2002년 독일,영국(옴니버스)
<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 2002년, 핀란드  
<유하 Juha> 1999년, 핀란드
<어둠은 걷히고 Drifting Clouds> 1996년, 핀란드
<타타아나, 당신의 스카프를 조심하세요 Take Care of Your Scarf, Tatiana> 1994년, 핀란드
<토탈 발라라이카 쇼 Total Balalaika Show> 1994년, 핀란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모세를 만나다 Leningrad Cowboys Meet Moses> 1993년, 핀란드,독일,프랑스

<장화 These Boots> 1992년, 핀란드 
<그날들 Those Were The Days> 1992년, 핀란드
<보헤미안의 삶 Bohemian Life> 1992년, 스웨덴,핀란드,프랑스,이탈리아 
<나는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했다 I Hired A Contract Killer> 1990년, 스웨덴,핀란드,독일,영국
<성냥 공장 소녀 The Match Fac> 1989년, 스웨덴,핀란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1989년, 스웨덴,핀란드
<아리엘 Ariel> 1988년, 핀란드
<철망을 뚫고 Thru The Wire> 1987년, 핀란드 
<햄릿 장사를 떠나다 Hamlet Gets Business> 1987년, 핀란드 
<천국의 그림자 Shadows In Para> 1986년, 핀란드
<록키 6 Rocky VI> 1986년, 핀란드
<오징어 노동조합 Calamari Union> 1985년, 핀란드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1983년, 핀란드
<사이마 제스처T he Saimaa Gesture> 1981년,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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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3 14:18 2010/11/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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