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루 生きる : Living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각본: 하시모토 시노부, 구로사와 아키라, 오구니 히데오
촬영: 나카이 아사카즈
ADDITION  1952 | 35mm  | 143min  | 일본  | b&w |

출연: 시무라 다카시, 히모리 시니치, 다나카 하루오, 치아키 미노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청 공무원인 와타나베는 자신이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1년 남짓.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던 그는 적당한 안정과 적당한 존경을 누리고 있었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그 간의 자신의 삶을 '미이라'라고 말한다. 와타나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 속에서 더욱더 절망할 뿐이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여공에게 매료되 그녀의 뒤를 쫓던 와타나베는 그녀에게 그녀의 매력인 활력의 이유를 묻고 여공은 "단지 내 손으로 일하고, 먹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 뿐"이라고 대답한다. 와타나베는 죽기 전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자신의 삶의 가치를 단 한 번만이라도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직장인 시청으로 돌아가 흐지부지 폐기되었던 '공원조성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심한다.


  5개월 후... 와타나베의 장례식장에서 공원이 건설되기까지의 이야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와타나베의 변화에 대한 의문들이 조문 온 사람들에 의해 다시 이야기된다. 

 

  이 영화는 와타나베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영화의 전반부가 주인공이 자신의 시한부 인생을 알게되고 절망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보여주고 있다면 후반부는 공원건립까지의 죽은 주인공의 행적을 각각의 조문객들의 회상으로 조각조각 나누고, 나뉘어진 각각의 장면을 다시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식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절망감을 묘사하는 영화의 전반부도 빼어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후반부이다. 평범한 공무원이 죽음을 앞두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빈민가에 공원을 만들었다라는 표면적인 줄거리의 밋밋함을 구로사와는 주인공이 죽은 그 시점에서 다시 쪼개고 들추어가며 해부해 들어가는 것이다.

  시청이라는 조직 안에서의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모습이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해관계들에 구로사와의 칼날이 본격적으로 날을 세우면서 공무원이라는 조직사회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시스템의 축소판으로 은유되며 감독은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예의 그 통찰력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재구성해나간다.

 

  장례식장, 공원건립의 공을 자신의 몫으로 챙기는 부시장의 세련됨. 그런 부시장의 논리에 손발이 되어주는 와타나베의 동료들. 부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조문객들이 빈민가 주민들의 조문 후에 어정쩡 물러간 후 와타나베의 동료들은 다시 그 자리를 채우고 앉아 와타나베에 대한 상사들의 비난을 조롱으로 이어간다. 조직 내에서, 조직 속의 구성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와타나베의 행동. 하지만 공원건립에 매달려 그들을 불편하게 했던 그의 행동은 다시 의문으로 이어진다. 왜 와타나베는 갑자기 변한 걸까... 그도 우리와 같았는데...

 

  결국 여러사람들의 기억들이 퍼즐처럼 하나로 합쳐지면서 그들은 와타나베의 변화된 행동이 그의 질병(죽음에 대한 예측)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동료들은 와타나베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일에 헌신했다는 것에 감동하고 숙연해한다.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은 와타나베의 뜻을 받들자며 들썩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장면. 와타나베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그의 뜻을 기리자며 오열하던 동료들은 다음날 전날의 숙취가 가시기도 전에 그들의 관성과 일상 속으로 나란히 줄을 선다.

 

  그들은 삶이 아닌 죽음에 숙연해했던 것이다. 삶은 비껴 놓고 내 것이 아닌 아직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에 죽음에 고개를 숙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와타나베를 이해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자신의 삶에서, 삶에 대한 수치심에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찾은 것이다... 마치 우리가 죽은 열사나 지나간 역사에 대해 기념하고 애도하듯이...

 

  와타나베의 장례식은 한 사람의 죽음이, 죽은 이의 행적이 남은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더도 덜도 아닌 이만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게 아닐까싶다. 살아있었더라면 와타나베 역시 그랬을 것이다. 단지 그에게는 죽음을 예측할 수 있었던 하나의 사건과 죽기 직전 자신의 삶을 움켜쥐고자 했던 열정이 있었을 뿐이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다만 적당히 유예하고 미룰 뿐이다. 죽음은 예측되지 않기 때문에... 삶이 진행되고 있기에... 아마도 와타나베는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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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30 00:06 2010/09/3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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