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은 자기가 잡은 "동물들의 삶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박제했다고 말한다. "야생에서 어차피 죽을 동물들을 정당하게 돈을 내고 사냥했다"라는 확신에 찬 인터뷰도 이어진다. 그 정도만 보여줬어도 시청자들에게 생각 거리를 충분히 주었을 텐데, 프로그램은 더 깊이 들어간다. 사냥꾼과 아프리카 사냥 여행에 동행한다.
아프리카에서 야생 동물 사냥은 중요한 산업임을 보여주듯 다양한 장비와 도우미들이 사냥꾼을 위해 동원된다. 도우미들은 사냥감을 찾고 사냥꾼이 조준하기 쉽게 총 받침대도 놔 준다. 카메라는 사냥감이 된 동물을 렌즈로 주시한다. 마치 총으로 겨누듯 앵글과 초점을 맞춘다. 영상 속 사냥감은 무슨 낌새를 느낀 듯 카메라 쪽을 멀뚱히 쳐다본다. 잠시 후 울리는 한 발의 총성. 화면은 동물이 총소리와 함께 털썩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까지였어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아들었을 텐데, 카메라는 사냥꾼 일행과 함께 쓰러진 동물에 다가간다. 아까의 일격에 그 사냥감은 죽었다. 눈은 감지 못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눈물을 흘렸는지 그 동물의 눈망울은 촉촉했다. 죽임을 당해서 슬펐을까. 아니면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게 죽어가서 안타까웠을까. 혹은 포식자뿐 아니라 경계 너머 멀리 숨어 있는 사냥꾼도 피해야 했다는 걸 미처 몰라서 억울했을까.
사냥꾼과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죽은 동물의 자세를 이리저리 바꾼다. 포즈를 바꿀 때마다 죽은 동물의 관절은 힘없이 꺾이고 목과 사지는 아직 경직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손과 중력에 내맡기곤 축 늘어진다. 그 모습이 역설적으로 중력을 지탱했던 생명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죽은 동물을 보고 사냥꾼이 던진 말이 귀에 와 박혔다. "저녁거리는 만들었군." 고기는 현지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사냥꾼은 가죽을 챙긴다. <휴머니멀>은 이런 과정을 보여주며 사냥꾼들이 주장하는 트로피 헌팅의 이유와 원칙을 들려준다. 물론 반대하는 측의 의견도 함께 다룬다. 양측은 나름의 논리로 자기주장의 정당함을 피력한다.
<휴머니멀>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직접 이야기하진 않지만 출연한 연예인의 감정선을 시청자들도 따라가게 만든다. 자신의 쾌락과 이권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런 위험에서 동물을 구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연예인 프레젠터들의 감정에 이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것의 무게는 얼마일까?
로버트 뉴턴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미국 어느 가난한 농장의 소년과 그가 키우던 돼지와의 관계를 다룬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아동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한다.
주인공 소년은 이웃으로부터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선물 받는다. 한 해 소산물로 겨울을 나고 다음 해 수확 전까지 먹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은 새끼 돼지를 겨울을 나기 위한 비상식량으로 여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소년은 새끼 돼지를 특별히 공을 들여서 키운다. 품평회에서 상이라도 받으면, 혹시 새끼라도 배면, 무사히 겨울을 넘길 수 있을까 해서. 상은 받게 되지만 새끼는 배지 못하고 농사는 망쳤다. 그리고 겨울은 혹독했다. 소설은 마지막 부분에서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가 돼지를 잡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대목이 <휴머니멀>의 사냥 장면만큼이나 사실적이다. 돼지를 잡아야 하는 소년의 아버지와 그 과정을 도와야 하는 소년의 심리가 절절하게 묘사된다. 물론 돼지의 마지막 모습도. 식량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서 친밀하게 키웠던 돼지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곤궁함과 미안함이 글자와 행간에 가득하다. 생명을 잇기 위해서 생명을 앗는다는 역설이 아프지만 슬프지만은 않게 표현되었다.
<휴머니멀>에서 사냥꾼이 내뱉은 '저녁거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소설의 마지막 그 대목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러 생각으로 이어졌다. '먹고 살기 위한 도살'과 '쾌락을 위한 살상', '인간의 식량이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동물을 잡는 것'과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 전문가도 결론 내기 어려운 서사를 내가 다룰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은 끊임없이 떠올랐다.
작은 생명은 그 무게도 가벼울까
▲ 2019 화천산천어축제가 개막한 지 두번째 주말을 맞은 12일 강원 화천군 화천천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이 맨손잡기 체험을 하며 겨울 추억을 만들고 있다. 2019.1.12 | |
ⓒ 연합뉴스 |
그때 겨울 축제의 이면을 돌아보자는 외침이 들렸다. 그들은 겨울 축제에 동원되는 물고기들의 권리를 외친다. 물고기 수십만 마리가 오락용으로 죽어가는 겨울 축제가 학살의 현장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감성적인 외침이 아니라 '동물보호법'의 '동물 학대'에 해당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린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가족들의 추억을 위해서 굶주린 물고기들은 얼음 아래에서 혹은 웅덩이에서 이리저리 쫓기다 잡힌다. 잡힌 물고기들은 질식하며 죽어간다. 그러다 마침내는 생으로 썰리거나, 통째로 구워지거나, 매운탕으로 요리되는 축제 현장의 물고기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생각이 또 깊어졌다.
미국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쓴 르포 <랍스터를 생각해봐>에서 '레저로써 동물을 먹는 축제'를 비판하는 측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미국 메인주(Maine) 어느 도시에서 벌어진 '랍스터 축제'에서 살아 있는 랍스터가 진열되고, 관광객은 먹을 랍스터를 고르고, 그 랍스터가 커다란 솥에서 요리되는 생생한 광경을 지켜본 작가는 어떤 비유를 한다.
"(유명한 축제인) 네브라스카 소고기 축제에서 행사의 일환으로 산 소를 트럭에 싣고 와서는 차에서 내린 소를 즉석으로 도축한다면 어떨까."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랍스터를 생각해봐> 본문 중)
생물 개체에 따라서 생명의 가치와 무게가 다르다고 믿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종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지만, 그 생명의 가치와 무게는 다르지 않고 상대적이지도 않다는 이야기다. 인간을 위해 식량이 되는 동물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자는 것이다.
물론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 세상인데 말 못 하는 짐승들의 안위까지 생각해야 하냐는 비판도 분명 있다. 하지만 말 못 하는 작은 생물의 생명을 고민해 보는 것에서부터 어쩌면 생명 존중이 시작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생명이라고 가벼이 보다 보면 큰(?) 생명도 가벼이 볼 수도 있기에.
오락과 쾌락의 도구로 생명을 빼앗는 것에 대해 조금씩 고민을 해 보면 어떨까. 그 어떤 작은 생명이라도 소중히 다루고 놀잇거리로 만들지 않아야 우리 인간의 생명도 소중히 다뤄지고 놀잇거리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클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