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 대선 후보자에 대한 비호감도가 먼저 주목받는 유례없는 대선과정에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을 두고 혼선을 넘어 기이하다고 할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DJ 햇볕정책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실용적 방향'을 앞세워 '사실상의 통일 상태'가 젊은 세대가 동의하는 '통일상'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각에서 수구 반통일세력이라고 외면하는 국민의힘의 윤석열 후보는 '안보태세 확립'을 강조하면서도 '궁극적인 지향점은 평화통일'이라고 강조해 대비를 보였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 이종걸)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위원장 김동명),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회장 이기범)이 공동주최해 6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21 통일정책포럼.
'제20대 대선주자가 말하는 통일·외교정책'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서 서면으로 축사를 보내온 이재명 후보는 "통일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지만, 평화공존과 평화협력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 상태로 만드는 것이 당면한 목표"라며, "이것이 통일된 미래를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들이 동의하는 통일상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대전환의 시대에 맞추어 우리의 대북·통일정책은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어 글로벌 협력을 강화하고, 남북 상생을 도모하며, 국민의 삶에 기여하는 실용적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분단 75년을 지나면서 남북이 서로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대북정책의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 됐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지난 달 20일 충청권 대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통일을 지향하긴 이미 너무 늦었다"고 한 발언과 궤를 같이 한다.
이 후보에 이어 영상으로 포럼 축사를 보내 온 윤석열 후보는 "남북간에 개방하고 소통하여 우리가 나아가려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바로 평화통일"이라며, "통일의 길은 험난하지만 반드시 준비하고 이루어내야 할 우리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민적 합의와 헌법정신에 따라 통일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하면서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대로 자유민주 평화통일을 추구하는데 사명을 다할 것이다. 8천만 한민족 모두의 진정한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고 복리를 증진하는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뒤로 하고 남북간 신뢰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면서 △굳건한 자주국방 태세 △한·미 대북 확장억제력 강화 등 '확고한 안보태세'를 전제로 하는 기존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각 당 후보자를 대신해 발표에 나선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외교통일정보위원장과 김천식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외교안보대북정책위원장도 이 분야에서 서로 다른 주장으로 맞붙었다.
김경협 위원장은 "이재명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은 이념과 체재논리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위상에 맞는 '국익중심 실용외교'를 통해, 우리 안보를 위협하고 경제성장을 가로막아 온 분단과 대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76년이 넘는 분단과 대결의 과정에서 형성된 불신과 적대감을 넘어 남북한의 평화로운 공존과 번영을 위해 남북 주민의 민생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관계를 만들겠다"고 이 후보의 입장을 설명했다.
"민족주의와 역사적 당위성만으로 통일을 부르짖기에는 우리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주된 논거로 내세웠다.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규모의 국가이자 유엔무역개발회의가 처음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를 격상한 국가가 되었으며, 지금은 분단 이전 단일국가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대다수를 차지하여 남북관계와 통일에 대한 인식도 변했다는 것.
반면, 김천식 위원장은 사회 일각의 '양국체제론'과 일제 식민지 시대 '자치론'까지 거론하면서 "비록 어렵더라도 통일의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소년들만 통일에 관심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양국체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지식인들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이 지금 분단 고착, 양국체제로 가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윤석열 캠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민족정체성, 특히 언어의 동질성을 유지해야, 그리고 통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장차 어떤 상황이 왔을 때 통일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김 위원장은 "이제 통일될 것 같지 않으니까 통일은 포기하고 두 나라로 가자고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통일포기론'이 일제때 이광수 등이 주장했던 자치론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얼핏 이율배반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른바 민주당의 '평화론'과 국민의힘의 '통일론'이 현재의 내용과 명칭을 유지하면서 계속 두 당과 후보의 입장으로 자리잡을 것인지, 또는 앞으로 각 담론의 진정성이 구체화되면서 변화가 일어날지 주목된다.
이날 포럼에서 가장 두드러진 쟁점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및 통일정책 실패 원인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의 정책방향, 그리고 임기말의 문재인 정부가 강력 추진하고 있는 종전선언 제안에 대한 두 당 후보의 입장에서 드러났다.
김경협 위원장은 "북의 비핵화 조치와 그에 상응하는 제재완화를 동시적이고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조건부 제재완화와 단계적 동시행동'"을 남북관계 해법으로 제시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만나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를 위한 고리를 풀겠다고 했다.
또 △경제협력이 평화를 더욱 공고히 하는 선순환체제인 '한반도 평화경제체제' 구축 △남북이 합의한 협력사업을 이행하고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를 제도화하여 남북간 상호신뢰를 쌓아가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인도적 지원, 보건의료 협력 등 유엔제재대상 아닌 사업부터 적극 추진 △제재대상인 개성공단, 철도·도로 연결사업 재개 및 현실화를 위한 UN 포괄적·상시적 제재면제 추진 등을 앞으로 정책방향으로 제시했다.
이어 "북의 일방적 합의 위반이나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대처하고 변화를 요구하겠다"고 하면서 "북과의 경제협력과 교류 및 인도적 지원을 활성화하겠지만 북의 호응이 없는 일방적 정책 추진은 없을 것"이라고 남북협력에 대한 원칙도 밝혔다.
김천식 위원장은 일관되게 '북한의 비핵화'를 강조했다.
"지난 5년동안 문재인 정부가 줄기차게 평화를 내걸고 노력했지만 그 결과 평화 진전은 없고 남북관계는 후퇴했으며 군비경쟁이라는 현실이 우리 눈앞에 진행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세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이 핵무장을 했고 그것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제정세의 격변과 북핵위협의 복합 위기속에서 안보를 지키는 일이 우선적인 과제"라고 하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이 비핵화를 결심하면 발전을 위한 도움을 줄 수 있다',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는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자로 참가한 허권 한국노총 통일위원장은 두 당의 발표가 솔직한 진단에 기반해 있지 않다며 미국을 정조준했다.
그는 "남북 정상간 합의문이 6개나 있지만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용기와 노력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걸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점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시절 골드만삭스를 방문해 '미국은 한반도 분단 상황을 선호한다', '북한이 주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미국에 굳이 나쁘지 않다'고 한 발언들을 언급하고는 지금도 그러한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
허 위원장은 "두 당이 대미인식을 분명히 밝힌 가운데 비핵화든, 제재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2020년 총선 당시 민주당이 4.27판문점선언 국회비준과 함께 세계 군사 5위국가를 만들겠다고 했던 공약도 잘못된 것이며, 국민의힘이 남북정상 합의 이행을 한미워킹그룹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성명서 한장 내놓지 않다가 이제와서 비핵화, 교류협력, 제재완화 등 순서를 제시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공박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김천식 위원장이 북핵 문제를 중점적으로 언급한데 대해 "한반도 평화안보에 중요한 것이 북핵이지만 이 문제는 관리가능한 수준에서 논의되어야지, 한치도 나갈 수 없는 문제로 과도하게 강조하면 남북관계 진전의 발목을 붙드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에는 종전선언 제안이 아무리 제도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 정치적 의제이자 선택의 문제라고 하지만 한반도 분단체제와 현황을 일거에 변화시키고 블랙홀로 빠져들게 하는 병뚜겅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만큼 추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물었다.
이주성 북민협 사무총장은 "통일이 당위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통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국가적 비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며 "차기정부는 어떤 통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통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신뢰가 중요하다며,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이 정치 군사 문제와 별개로 일관되게 추진될 수 있도록 법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들의 질문에 김경협 위원장은 "1953년 정전협정에서는 '본 협정'(종전협정 또는 평화협정)을 통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체결되지 않았다.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정전체제가 68년째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전쟁을 확실히 끝내야 할 때"라고 했다.
그러면서 종전선언을 △국제사회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 △본격적인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출발 △북을 비핵화 협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마중물 △(북)체제안전 장치 등의 의미로 풀이했다.
종전선언은 국제적인 공표일 뿐 '본 협정' 체결전까지는 정전협정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에 유엔사가 해체되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주한미군은 정전협정과 관계없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규제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김천식 위원장은 "정부는 종전선언이 안보체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치적 선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치적 선언이어도 문제가 있고 그 이상의 효과가 있어도 문제가 있다"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정치적 선언이어서 문제라는 건 '남북기본합의서를 비롯해 지금까지 14번 정도의 합의가 있었고 그런 것들이 다 정치적 선언이지만 그런 걸 한번 더 한다고 해서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선언을 넘어서는 효과가 발생한다면 종전이 안된 상태에서 만든 '정전협정'체계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을 우려한다'뜻이다.
기본적으로는 "종전선언을 비핵화선언의 입구라고 했지만 출구가 열리지 않으면 수렁에 빠지게 되며, 지금가지 북의 행태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는 불신이 깔려있다는 걸 감추지 않았다.
이날 포럼에 앞서 공동주최측인 민화협과 한국노총, 북민협은 △남북관계 및 통일정책의 실패원인과 정책방향 △통일비전과 범 국민적 합의도출 △정전협정과 평화협정, 종전선언에 대한 입장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정상화에 대한 입장 △감염병, 기후위기 등 공동위기 대응을 위한 남북공동개발 협력사업 방향 △통일에 관한 정부부처 개혁 방안 △대북인도협력의 지속성, 안정성 보장을 위한 정책 방안 △대북인도협력 활성화를 위한 민관협력 확대 및 제도개선 방안 △남남갈등 해결을 위한 통일부의 역할 △미래세대의 '통일인식'개선을 위한 정책 방안 등의 공통질의를 두 당 후보 진영에 사전 전달했다.
포럼 1세션에서는 '문재인 정부 통일외교정책 평가와 과제'를 주제로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과 이승원 시사평론가의 발표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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