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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꿈치가 부서져"... 김근태 고문사실은 어떻게 미국에 알려졌나

[김근태 10주기] 전두환 정권 인권유린을 미국에 알린 인재근의 영문성명서 전문공개

21.12.29 06:02l최종 업데이트 21.12.29 06:02l
2011년 12월 30일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  2011년 12월 30일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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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은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아래 호칭 생략)이 서거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1947년에 태어난 김근태는 1985년 9월 전두환 정권 시절 자행된 야만적인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2011년 12월 30일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지도자로서 한창 활동할 수 있는 시기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그는 한국 정계에서 도덕성과 품격 그리고 실력까지 3박자를 고루 갖춘 정치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갑작스러운 별세는 한국 정치에 있어서도 큰 손실이었다.

김근태는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된 국가테러, 국가폭력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고난과 억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인사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거 10주기가 되는 올해 그의 삶과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 특히 김근태에 대한 국가폭력이 이뤄지던 시기에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지난 11월에 90세 일기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고난과 투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김근태 별세 10주기를 맞이해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아래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자료는 의미가 있다. 김대중도서관은 김근태의 고문 사실을 최초로 폭로한 김근태의 배우자 인재근(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영문 성명서를 공개했다. 1985년 9월 26일 김근태로부터 고문 사실을 전해들은 인재근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에서 이 사실을 폭로했다. 이 자료에는 인재근이 김근태로부터 직접 들은 참혹하고 충격적인 고문 사실이 그대로 나와 있다.


이 자료는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자료는 영문으로 작성돼 있으며 미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권문제연구소(김대중이 1983년 2차 미국 망명 기간 중에서 설립한 단체)는 이를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렸다. 그래서 미국에서 김근태 고문 사실이 공론화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이 자료는 김근태의 고난과 투쟁이 한국 민주화와 한미관계에 준 영향 등을 분석하는 데에 있어서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인재근이 김근태의 고문 사실을 폭로하게 된 과정
 
1987년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김근태와 인재근을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지만, 한국 정부가 인재근의 출국을 거부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다음 해인 5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상을 수여했다. 당시 축사를 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습.
▲  1987년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김근태와 인재근을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지만, 한국 정부가 인재근의 출국을 거부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다음 해인 5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상을 수여했다. 당시 축사를 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습.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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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성명서는 어떻게 작성된 것일까? 이를 위해서 먼저 김근태 고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부터 살펴봐야 한다. 김근태는 1985년 8월 24일 체포돼 민청련 제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한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구류 기간 동안 일반적으로 허용되던 가족 면회가 이뤄지지 않는 등 이상조짐이 있었다. 결국 구류 마지막 날인 9월 4일 새벽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9월 20일까지 17일 동안 폭행,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가혹행위를 당했다.

김근태에 대한 고문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필자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 기사 작성을 위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는데, 보고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김근태는 마음 속으로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버티는만큼 고문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김근태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고문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무참히 파괴한다는 점에서 야만적이고 반인권적인 국가폭력이다. 만약 피해자가 고문에 굴복하면 신체에 대한 파괴는 줄일 수 있지만 정신은 파괴되고, 고문에 굴복하지 않으면 정신은 지킬 수 있으나 신체는 파괴되고 만다. 결국 고문피해자는 어떤 경우든 가혹한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김근태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동안 외부에 있는 가족과 동지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근태의 행방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이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수감된 사람은 언젠가는 조사받는 곳에서 검찰로 이관될 것이라는 한 법조인의 조언에 따라서 김근태의 배우자 인재근은 검찰청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이 적중해 9월 26일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인재근은 극적으로 김근태와 마주치게 됐다. 그리고 5층에서 4층으로 내려가는 1분여 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이때 김근태는 고문 사실을 인재근에게 알렸다. 김근태는 훗날 '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같은 것이었다'고 회고했었다.

김근태로부터 끔찍한 사실을 전해들은 인재근은 기독교회관으로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그래서 김근태에 대한 야만적인 고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당시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던 사람은 주변 동지들을 포함한 소수였다. 왜냐하면 군사독재 정권 시절 이와 같은 사실은 국내 언론에 제대로 보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근태 고문 사실은 국내보다 오히려 미국에서 더 빨리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인재근의 폭로 내용은 바로 미국에 있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 전해져서 미국 사회에 알려지게 됐다. 김대중도서관이 이번에 공개한 자료가 당시 미국 사회에서 유포된 것이다.

이 영문 자료의 생산 과정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국제전화로 내용을 파악한 미국의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서 직접 영문으로 작성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작성된 문서가 인편이나 우편을 통해서 미국으로 전달됐을 가능성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사안의 시급성을 감안할 때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인재근이 밝힌 김근태 고문 사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영문으로 작성된 이 자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인재근(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배우자 김근태의 고문 사실을 알린 영문 성명서.
▲  인재근(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배우자 김근태의 고문 사실을 알린 영문 성명서.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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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온 문서

1985년 9월 27일.
김근태의 아내 인재근 

제 남편이 경찰의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 의장을 지냈고 현재 이 단체의 자문 역할을 하고 있는 김근태의 부인입니다.

남편은 9월 4일 오전 5시 30분, 경찰의 대공수사국 요원들에게 끌려가서 7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습니다. 20여 일 동안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조급해진 저는 검찰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가 9월 26일, 오후 2시 30분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교도관들의 도움을 받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는 걷기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많이 다쳤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심합니다, 너무 심하게 맞았어요." 그는 계속해서 9월 4일부터 20일까지 약 10번의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단단히 묶인 그의 몸을 향한 전기 충격, 고추와 소금 등을 넣은 물을 삼키도록 강요당하는 등의 물고문은 한 번에 5시간에서 7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이 기간 동안 전혀 잠을 잘 수 없었고, 고문을 당한 날에는 음식 또한 얻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고문에 그의 건강이 악화된 관계로 고문 시간은 3시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검찰청사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남편으로부터 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대기실에서 나는 남편의 발뒤꿈치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낯익은 발뒤꿈치가 너무 심하게 부서져서 내 가슴을 울렸습니다.

비록 저는 제 눈으로 남편의 몸을 볼 수는 없었지만(남편이 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그의 팔꿈치 주변에는 상처가 가득하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은 9월 20일에서 26일 사이에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아마 제가 남편을 만났을 때 전보다 상태가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피투성이인 고문실에서 어떤 일을 겪어야 했는지 신은 알고 계시겠죠!

저를 두려움과 분노에 떨게 만든 것은 남편에게 간신히 전달한 옷들 중에서 속옷이 한 벌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남편의 속옷이 피로 얼룩진 것이 확실합니다. 이제 저는 왜 제 남편이 검찰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는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왜 그것들을 감옥으로 데려가야 했는지요.

공식적으로 등록된 이 잔인한 폭력배 집단이 어떻게 우리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이 끔찍한 고문을 실행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누가 "대한민국"을 법아래 있는 국가로 지칭할 수 있을까요?

무고한 사람들을 조종하고 고문을 통해 범죄를 만들어 내는 수사기관들이야말로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남편이 겪는 고통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한국 국민들에게 심각한 위협이자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 폭력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7살짜리 아들에게 이 무서운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미국에 알려진 김근태 고문 사실

당시 미국에서 이 자료를 널리 알린 곳은 김대중이 2차 미국 망명 기간 중에 설립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다. 전두환 정권 시절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김대중의 대미창구 역할을 함과 동시에 한국 민주화와 관련된 주요 내용을 미국의 정치인과 지식인 등에게 알리면서 한국 민주화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미국 사회 내에서 형성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이중에서 후자와 관련된 대표적인 활동 중의 하나가 미국 사회에 김근태 고문 사실을 알린 것이다.

당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김근태 고문 사실을 미국의 정계, 학계, 종교계 그리고 언론과 시민사회 단체 등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군사독재 정권이 자행하는 학살과 고문은 끔찍한 반인권적인 행위로서 미국 국민들에게 큰 거부감을 준다.

그래서 반공을 이유로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 정부도 이와 같은 문제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큰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이 점을 노려서 미국 사회 내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조성되도록 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활동은 성과를 거뒀다. 미국 하원 의원들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서 김근태 고문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를 비판하고 김근태의 인권회복이 이뤄질 수 있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김근태는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김근태 고문 사건은 한국 국내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어 한국 민주화, 한미관계 등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김근태 선생 서거 10주기를 맞이해서 공개된 이 자료는 미국 사회에서 김근태 고문 사건이 공론화되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미국 사회 내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조성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도 높여준다. 이처럼 김근태 고문 사건은 전두환 정권 시절 한미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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