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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노동자의 '반도체 직업병'은 죽어도 병이 아니었다

[암에 걸린 반도체‧디스플레이 청소노동자 ②]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병

이상현 기자/최용락 기자  |  기사입력 2022.03.29. 07:31:59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에서는 누가 일할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오퍼레이터다. 설비 앞에 머물며 제품을 생산한다. 다음은 엔지니어다. 설비를 유지・보수하는 장비 엔지니어와 특정 공정 전반을 관리하는 공정 엔지니어가 있다.

그들 곁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또 있다.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투명인간, 청소노동자다. 이들은 오퍼레이터, 엔지니어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며 바닥과 벽면의 먼지와 약품을 닦고 방진복, 방진화 등을 정리한다.

첨단산업의 유해화학물질이 사람을 가려가며 영향을 줄 리는 없다. 그런데도 청소노동자의 위험은 주목받지 못했다. 2019년 산업안전보건공단이 반도체 노동자 20여만 명의 암 발병률을 일반인과 비교한 역학조사를 발표할 때도 청소노동자 이야기는 없었다. 

2020년 8월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삼성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 5명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그중 산재 인정을 받은 이는 한 명뿐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들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위험에 맞닥뜨리고 있을까. 이들의 병이 산재로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반올림의 소개로 지난달 삼성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세 명의 청소노동자, 그리고 그들을 대리한 두 명의 노무사를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 암에 걸린 반도체‧디스플레이 청소노동자 ① : 반도체 청소노동자는 '알 수 없는' 성분의 가루와 약품을 치운다) 

유방암, 백혈병, 림프종…. 삼성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들이 질병에 걸렸다. 이들의 질병은 반도체 공장의 오퍼레이터, 엔지니어와 유사했다. 소위 '반도체 직업병'이라 불리는 질병이다. 5명의 청소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그중 1명만 산재 승인을 받았다. 

공단이 이들의 산재 인정에 인색한 이유는 뭘까. 삼성 청소노동자의 업무상질병판정서와 역학조사보고서와 산재를 신청한 청소노동자, 그리고 이를 대리한 노무사들을 만나 산재 신청 과정의 어려움, 역학조사와 공단 판정의 문제점을 들었다. 

입증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지만...자료는 '기밀' 

"하루는 배관에서 액체가 똑똑 떨어졌어요. 그럴 때 접근하지 말고 리트머스 시험지를 던져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던졌더니 빨갛게 변했어요. 3년 정도 지나 역학조사 하면서 현장에 가봤을 때 같은 자리에 그(액체가 떨어져 부식된) 자국이 아직도 있어요. 그런데 뭐가 떨어졌는지는 몰라요. 회사에서 그런 설명은 따로 안 해주거든요." 삼성 아산공장 OLED 생산 공정 청소노동자로 일했던 김은주 씨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재 입증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다. 하지만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공정 청소노동자들이 자신이 일하던 곳에서 어떤 약품과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기업이 해당 정보를 '산업 기밀'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청소노동자가 회사가 기밀로 분류한 정보를 확보할 방법은 없다. 질병 산재 인정의 첫 번째 걸림돌이다. 많은 삼성 청소노동자가 일하다 병에 걸리고도 산재 신청을 포기했다. 반올림에 직업성 질병 피해를 제보한 삼성 청소노동자 14명 중 산재를 신청한 이는 5명뿐이다. 

그중 유방암에 걸린 2명과 피부질환을 앓은 1명은 산재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회사가 공정 내 유해물질 농도를 측정해 작성한 작업환경측정 결과와 '청소노동자가 다룬 위험 물질은 없다'는 회사의 주장 등을 토대로 낸 결론이었다. 공정에서 쓰이는 유해물질 자료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청소노동자들이 이를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췌장암에 걸린 1명은 판정 결과를 기다리던 중 사망했다. 유일하게 산재를 인정받은 유방암이 걸린 청소 노동자는 위험 물질이 아닌 장시간의 야간근무 이력을 근거로 산재를 승인받았다. 

▲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공정 청소노동자들이 자신이 일하던 곳에서 어떤 약품과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기업이 해당 정보를 '산업 기밀'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삼성디스플레이

2년 넘게 기다려 역학조사 받았지만, 결과는 산재 불승인 

회사의 '기밀' 자료에 접근할 수 없는 노동자가 산재 입증 책임을 지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기회가 있다. 

산업재해보상법(이하 산재보상법)에 따른 전문기관의 역학조사다. 산재보상법 시행규칙상 공단은 업무상 질병에 대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등 전문기관에 자문을 요청할 수 있다. 자문을 요청받은 기관은 노동자 조사와 면담, 현장 조사, 현장 시료 채취 및 분석 등을 통해 역학조사를 수행한 뒤 공단에 제출한다. 전문성을 갖춘 제3자에게 사업장의 위험을 직접 조사할 권한을 부여한 셈이다. 

삼성 청소노동자 중 역학조사를 받은 이는 삼성디스플레이 아산공장 OLED 생산 공정에서 일하다 유방암에 걸린 김은주 씨가 유일하다. 2019년 3월 산재를 신청한 김 씨는 그로부터 2년이 넘어 2021년 7월 역학조사 결과를 받았다.

장시간에 걸친 김 씨의 역학조사 결론도 불승인이었다. 공단으로부터 자문을 요청받은 직업환경연구원(이하 연구원)은 역학조사 뒤 김 씨의 병은 업무상 질병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공장 내 유해 물질의 농도가 노출 기준보다 낮고, 방사선 노출도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문의 근거는 회사가 작성한 작업환경측정 결과와 일상적 생산 과정에 대해 수행한 현장 조사 등이었다. 

연구원이 회사를 통해 확보한 자료도 산재 신청 당사자에게는 모두 공개되지 않았다. '반올림'이 공단으로부터 받은 김 씨의 역학조사 보고서 곳곳은 빈칸이다. 회사가 수행한 작업환경측정결과, OLED 공정에 사용되는 물질, 심지어는 청소노동자의 일반적인 작업 과정조차 가려져 있다. 회사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공단은 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를 핵심 근거로 삼아 지난해 9월 김 씨의 병은 산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를 뒤집으려면, 또 몇 년이 걸릴지 모를 행정소송 절차를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반도체 산업에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프레시안

과거 노출 위험, 위험한 상황 여부 알 수 없는데…역학조사에만 기대는 근로복지공단

청소노동자와 이들을 대리한 노무사들은 노동자와 기업 간 정보 격차뿐 아니라 역학조사 역시 적어도 질병 산재에 대해서는 산재 승인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보 비대칭뿐만 아니라 역학조사를 바탕으로 한 공단의 업무상 질병 판단 과정에도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의 다양한 위험 물질 노출 수준과 업무환경이 역학조사에서 모두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김 씨가 일을 처음 시작한 2011년은 삼성 아산공장에 OLED 생산 설비가 들어오기 시작한 '셋업'(설치) 기간이었다. 셋업 기간은 노동자들이 위험 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안정적으로 양산에 들어간 시기보다 높을 때로 여겨진다. 설비가 들고나는 탓에 공장 내 상황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 김 씨는 반도체 설비 주변 청소도 맡았다.

특수한 위험 상황에 노출된 경우는 김 씨만이 아니다. 삼성 기흥공장에서 일한 이미경(가명, 59)씨는 반도체 생산 공정 설비 철거 작업이 이뤄지는 중에도 청소 업무를 했다. 이 씨는 복잡한 설비와 배관을 뜯어내는 작업을 할 때면, 평소보다 약품 냄새가 더 심하게 났다고 기억했다. 

"설비를 철거할 때는 약품 냄새가 훨씬 심하게 났었어요. 약품이 누출됐는지 삼성 직원이 철거 협력업체 직원을 막 야단치는 걸 보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계속 청소를 했어요. 처음 일할 때 30여 명의 오퍼레이터가 근무했는데 철거 작업을 시작하자 한 명, 두 명 빠졌어요. 나중에는 저랑 동료 한 명만 남아서 청소를 했어요. 남들보다 오래 철거 현장에 있었죠." 

철거 공정은 이 씨의 근무 기간 중 2년 동안 지속됐다. 철거 과정을 이유로 추가로 지급되는 보호장구는 없었다. 현장 곳곳의 철거가 끝나면 방진비닐, 철거 과정에서 나온 물질 등을 치우면서 청소 업무를 지속했다.

정작 역학조사에서는 철거 기간이나 셋업 기간의 위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조승규 노무사도 공단이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내 '위험한 상황'을 역학조사 과정에서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전자 산업 공정의 평상시 유해물질 노출 수준은 높지 않으리라 추정하고 있어요. 반도체 공정에서 일하다가 병을 얻어 산재로 인정받기 시작한 생산직 작업자들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특히 위험한 상황을 주목해야 해요. 배관을 뜯는다거나, 라인을 청소한 면포를 턴다거나 이런 상황을 체크해야 하는데 역학조사에서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어요. 어떤 상황이 위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도 자료에 나오지 않아요."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질병 산재 어려움 돌파 극복 방안은 '추정의 원칙' 확대 

정보 격차와 역학조사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전문가들은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의 다른 노동자의 직업성 질병 산재 심사에 적용되고 있는 '추정의 원칙' 확대를 주장한다. 

2018년 8월, 정부는 '반도체 및 LCD 생산 등 작업 공정, 관련 시설의 설치, 정비 및 수리에 종사하는 근무자', 즉 오퍼레이터와 엔지니어의 질병 산재 판정 과정에 '추정의 원칙'을 도입했다. 기존에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 8개 질병에 대해 역학조사를 생략하고, 동일·유사 공정 종사 여부만 판단한 뒤 빠르게 산재 여부를 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8개 질병에는 청소노동자에게 발병한 백혈병, 림프종, 유방암 등도 포함됐다. 

그러나 '추정의 원칙'은 오퍼레이터와 엔지니어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는 청소노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조 노무사는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가 직업성 질병에 걸릴 위험이 다른 근무자에 비해 결코 낮지 않다며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데 청소노동자의 직업성 질병만 추정의 원칙 적용에서 배제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비판했다.

"클린룸 청소노동자는 펩층(생산설비가 있는 층)에서만 일하는 오퍼레이터와 달리 엔지니어처럼 펩층과 알피층(펩층에서 내려온 오폐수나 공기 등을 배출하는 장치가 있는 층)에서 모두 일해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생산 공정에 머무는 엔지니어와 달리 오퍼레이터처럼 긴 시간 생산 공정에서 일하고요. 여러 공정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다양한 위험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될 수도 있어요." 

실제로 청소노동자들은 공장 전체를 돌아다닌다. 게다가 김 씨는 순환 근무를 통해 삼성디스플레이 아산 A2 공장 모든 층에서 근무했다. 특히 생산직 근무자인 오퍼레이터들은 출입하지 않는 보조설비층에도 출입했다. 보조설비층의 경우 반도체 생산장비에서 쓰이는 화학물질이 걸러지는 스크러버(scrubber)나 가스가 통과하는 배기관 등이 있다. 김 씨는 이 곳에 떨어져있는 액체나 가루들을 쓸고 닦았다. 

생산 라인에 들어가기 전 방진복 착용, 탈의 등을 하는 작업 준비공간인 '스막룸' 청소노동자도 위험물질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다. 2012년 산업보건연구원의 3개 반도체 사업장에서 수행한 <반도체 제조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작업환경 및 유해요인 노출특성 연구>를 보면, 반도체 생산 공정의 유해 물질은 "이온주입 공정을 제외한 모든 공정에서 검출됐고 근로자들이 작업복을 갈아입는 스막룸에서도 검출됐다"라고 보고됐다. 

김 씨를 대리한 노무법인 '참터' 충청지사 김민호 노무사는 "기존 반도체 공장 근무자들의 산재에 '추정의 원칙'이 인정된 것은 국가가 예산을 투입해서 연구하고 연구 결과물이 나와서 공인된 것"이라며 "삼성 측에서 지금부터라도 직종, 사업장, 질병 등 자체적으로 직업성 질병 통계를 작성해 이를 근거로 추정의 원칙을 확대하면 청소노동자도 굳이 긴 역학조사를 할 필요 없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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