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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일가는 어떻게 영남대를 장악했나

 

박정희 일가는 어떻게 영남대를 장악했나
 
이병철이 ‘밀수사건’ 때 헌납...‘헌법기관 대통령’이 ‘개인 박정희’로 둔갑
 
편집부 | 등록:2012-10-19 10:12:53 | 최종:2012-10-19 10:15:4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시사블로거 오주르디 님이 18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필자의 양해를 얻어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편집자)

<최준 선생과 최해청 선생>

김동영(민주당 의원):고 박정희 대통령이 재단에 출연한 자금은 얼마입니까?

조일문(영남학원 이사장): 문서상 나타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김동영(민주당): 현재 재단이사로 박근혜씨가 되어 있는데, 박근혜씨가 재단에 출연한 액수는 얼마입니까?

조일분(영남학원 이사장): 그것도 나타나 있는 것이 없습니다.

(1988년 10월 18일 문화공보위 국정감사)

5.16 만난 대구대학과 청구대학

대구대학은 1947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경주 최부잣집’ 장손 최준이 중심이 돼 설립된 학교다. 최준은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아 상해 임시정부에 거액의 자금을 쾌척하는 등 전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쏟아부은 독립운동가다. 김구 선생이 공개한 일제하 독립자금 기부자 명단에 최준이 최고 기부자로 기록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최준 선생 생가>

청구대학은 가난해서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는 근로자들을 위한 야간대학으로 출발했다. 설립자 최해청은 부친이 청도군수를 지내는 등 넉넉하게 살 수 있었던 집안이었으나 부친이 워낙 청빈한 탓에 돈이 없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한을 교육자가 되어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풀어보겠다는 취지에서 설립한 대학이 바로 청구대학이다.

두 대학은 50년대를 거치며 지역의 대표적 대학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5.16쿠데타는 이들 대학에 악재였다. 박정희의 이른바 ‘대학정비사업’ 때문이었다. 쿠데타 정권은 대학의 수적 팽창으로 인한 교육의 질 저하, 경영자의 사유재산화와 각종 부조리 등을 일소하겠다는 명문을 내세워 대학에 자신들의 ‘혁명정신’을 주입시키려 했다.

<옛 영남대 전경>

정원이 감축되고 일부 학과가 폐과되는 과정에서 두 대학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대구대는 당시 재단 이사였던 신현확(후일 국무총리)의 주선으로 새로운 재단 운영자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남은 전 재산을 팔아 대구대학 설립자금으로 내놓았던 최준에게 대학을 위해 투자할 돈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사정권 ‘대학정비사업’, 대구대 경영난으로 삼성에게

최준은 신현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학교 발전을 위해서라면 더 잘 운영할 사람에게 조건 없이 맡기겠다’며 1964년 12월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재단 이사장 자리를 내어 준다. 대구대학이 삼성에게 넘어간 것이다.

야간대학으로 출발했던 청구대학은 대구대학보다 상황이 열악했다. 학교 교사와 설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2년제로 격하되기도 했다. 4년제로 회복되기는 했지만 군사정권의 대학정비사업으로 인해 설비투자를 늘려야 했다. 와중에 재단 경리직원들의 비리사건이 일어나자 설립자 최해창은 학장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1967년 6월 청구대학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터진다. 본관 신축공사 현장에서 건물이 무너져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형참사였다. 회계 비리에다가 대형사고까지 어어지자 잔뜩 겁을 먹은 새 임원진이 황당한 결정을 한다. 설립자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군사정권에게 대학을 헌납하는 것으로 죄를 탕감받으려 했다. 군사정권에게 청구대학이라는 진상품이 올라온 것이다.

<청구대 본관 신축 건물 붕괴사고>

청구대의 비운과 박정희의 욕심

박정희와 최해청은 구면이었다. 다급해진 최해창은 교육분야 자문을 요구해 종종 접촉했던 박정희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하지만 청구대 교수였던 노산 이은상을 통해 ‘백년 대통령 할 수 있느냐? 대통령 그만 두면 할 수 있는 게 총장이 좋다’’라는 제안을 받고 이미 대학을 손에 넣으려 마음을 굳힌 박정희가 그를 만나 줄 턱이 없었다.

청구대학 접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박정희는 최해청을 적당히 달래기 위해 이후락을 보내 몇 가지 제안을 한다. 하지만 최찬식(최해창의 차남)은 박 정권이 ‘박정희를 고문’으로 할 것과 ‘청구공전은 합병에서 제외하고 최해창에게 맡길 것’ 등을 약속했지만 모두 이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구대학을 소유하게 된 삼성 이병철에게 매우 곤란한 일이 터진다. 1966년 9월 <경향신문>은 삼성이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는 한국비료가 사카린 55톤을 건설자재로 위장해 들여와 판매하려다가 들통 났지만 세관에 벌금만 내고 무마됐다고 보도한다. 야당이 들고일어나고 여론이 험악해지자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사카린 밀수 난리 통에 ‘진상품’이 된 대구대

그러자 이병철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것과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가 구속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지만 장준하는 박정희를 ‘밀수 왕초’라고 부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이유는 ‘사카린 밀수사건’의 현장 지휘를 했던 이맹희(이병철의 장남)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있다.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현 CJ그룹 회장)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경영 퇴진과 한국비료 헌납을 약속하는 이병철>

이 와중에 이병철은 대구대학을 박 정권에게 넘긴다. 자신을 경영에서 퇴진한 상태였고, 아들은 구속 중이었다. 이맹희의 회고록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삼성이 대구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후락씨가 어느 날 대구대학을 정부에 넘기라고 요구했다...그대로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권력으로 대구대를 차지하고, 상대의 약점을 빌미로 청구대를 차지한 다음 영남대를 만들었다.”

대구대를 상납했기 때문일까.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병된지 3개월 뒤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이병철의 복귀가 이루어졌다.

1967년 12월 25 드디어 자산가치 20억원(당시)의 대구대학과 15억원의 청구대학이 송두리째 박정희 정권의 손에 들어간다. 이렇게 영남대학교가 만들어졌다. 영남대 출범할 당시 임원현황을 보면 가관이다. 박정희 측근들이 대부분이다. 잠시 이사로 이름이 올랐던 대구대 설립자 최준은 수년 후 조용히 등기부에서 삭제된다.

<1967년 12월 당시>

28세 박근혜의 영남대, 재단 부실 심각

박근혜가 영남대 이사로 취임 한 건 박정희 사망 5개월 뒤인 1980년 3월이다. 취임 한 달만에 이사장에 선출됐으나 7개월 뒤 사임하고 그냥 이사로 남는다. 이사장 취임을 반대하는 학생과 교직원들의 시위 때문이었다. 1981년 7월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난다. 이사들이 모여 ‘학교법인영남학원 정관’을 개정해 제1장 제1조 설립목적에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라는 구절을 추가했다.

이를 의결한 이사들의 면면도 가관이다. 박근혜가 당시 비록 이사였지만 영남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는 게 한 눈에 들어온다. 이사들 모두 ‘박근혜 관련자들’이었고, 정수장학회와 육영재단과 얽히고설켜 있었다.

영남대는 박근혜가 이사로 있던 8년 동안 재단 운영은 매우 부실했다. 부정입학 사건과 각종 비리가 터지며 1988년 사학 최초로 국정감사를 받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후 2009년까지 20년 동안 영남대는 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된다. 박근혜는 국정감사가 실시되자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대구대 설립자 최준의 장손자 최염은 2007년 6월 기자회견 당시 박근혜의 이사직 사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1988년 국정감사가 있은 후 박근혜는 국감의 지적에 정곡을 찔렸는지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진 전체의 사표를 제출케 하고, 6-7 트럭 분의 박정희 유품과 서류 등을 싣고 학교 당국도 모르게 야간도주하듯 영남대학교를 떠난 후 오늘날까지 아무런 반성이나 사죄가 없었습니다.”

2009년 영남대 정상화, 사실상 복귀한 박근혜

2009년 영남대 정상화가 결정되자 박근혜의 영남대 복귀여부가 도마 위에 오른다. 부담을 느낀 학교 측은 묘안을 냈다. 7명의 이사 중 4명에 대한 추천권을 박근혜에게 부여했다. ‘박근혜 분위기 이사회’에서 두 가지 일을 했다. 논란이 됐던 ‘교주 박정희’를 ‘설립자 박정희’로 고쳤고,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을 설립했다. 대학원장은 박 캠프의 기획조정특보이자 한국문화재단 이사인 최외출이다.

‘박근혜의 그림자’로 불리던 최태민의 흔적이 영남대에서도 발견된다. 영남대 비리로 시끄러울 당시 재단운영을 좌지우지해온 4명 중 두명이 최태민의 인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남학권 산하 영남투자금융을 관리해온 재단의 실세 조순제는 최태민 처의 전남편 아들이었고, 영남대병원 관리부원장으로 비자금 총책이었던 손윤호는 조순제의 외삼촌이었다.

청구대학 설립자인 최해청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경북지부 공동대표를 맡아 박 정권의 독재와 맞서 싸우면서 말년을 보냈다. 생전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었다.

“....영남(대학교)에 대해서는...그들이 나의 요구대로 기록해 줄지도 의문이고, 내가 장물학교(贓物學校)를 상대하기도 싫다.”

'개인 박정희'에게 헌납된 것 아니다

대구대학 설립자 최준은 독립운동을 한 집안의 돈으로 세운 대학을 하필이면 만주군관인 박정희에게 빼앗겼다며 타계할 때까지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강제력 없이 헌납된 것이라 해도 이는 정부에, 더 정확히는 헌법기관인 대통령에게 헌납된 것이다. 그렇다면 영남대는 개인 박정희와 박근혜와 상관없는 것이어야 한다. ‘교주’가 될 수 없을뿐더러, 개인 사유물인 양 자신의 사람들로 이사진을 구성할 권한도 없어야 한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미래로 가자’고 말하는 박근혜. 과거에 매인 사람은 야당이나 국민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한국문화재단 뿐만 아니다.영남학원에도 ‘이사 추천권’을 통해 과거와의 끈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에게 과거를 보지 말라고 조르지 말고 스스로 과거와 단절하는 용단을 내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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