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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 장창준 객원기자
  •  
  •  승인 2023.11.0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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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비극사 ④

누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 한다. 또 누구는 ‘민주’ 이스라엘과 ‘테러’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7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억압사, 팔레스타인 비극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도와 숫자, 국제 협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정리한다.<편집자주>

① 지도가 보여주는 것들

②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③ 국제 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④ 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하마스와 헤즈볼라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시작했고, 헤즈볼라가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우리 언론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라고 소개되는 하마스는, 가자지구의 집권당이다. 즉 하마스는 정당이다.

헤즈볼라(Hezbollah)는 1982년 무렵에 레바논에서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바논은 오랜 기간 내전을 겪었다. 그 내전 과정에서 헤즈볼라가 생긴 것은 맞다. 그러나 구성은 복잡하다. 우선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헤즈볼라에 참여했다. 1948년 1차 중동 전쟁이 일어나자, 팔레스타인 지역 북쪽의 1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레바논으로 피신했다. 전쟁은 끝났으나 이스라엘이 봉쇄하여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레바논 지역에 피신해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 중 일부가 헤즈볼라에 참여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의 근거지인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는 과정에서 레바논 사람들도 헤즈볼라에 참여했다.

한편 레바논은 오랜 기간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사이에 내전을 벌여왔다. 헤즈볼라는 내전에 참여했고, 레바논 무장 조직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무장 조직이기도 하고, 레바논의 이슬람교도 무장 조직이기도 하다. 그래서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치에도 관여하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도 관여한다.

▲ 2006년 헤즈볼라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마스(HAMAS)는 ‘순수’ 팔레스타인 정당이다. 1987년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대규모 봉기(1차 인티파다) 시기 조직되었다. 반(反)이스라엘 기치를 내걸고, 팔레스타인 독립을 주장하는 팔레스타인 저항조직 중 하나다.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가 이스라엘과의 협력 노선으로만 일관하자, 하마스는 강경노선을 채택했다. 하마스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지지가 높아졌다. 2006년 가자지구에서 진행된 선거에서 하마스는 1당의 자리에 오른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동지적 관계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사실상 앙숙이 되어 있다.

PLO는 1950년대 말 파타(Fatah, 팔레스타인의 한 정당)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조직이다. PLO는 결성 직후 요르단을 근거지로 했다가 1970년대 레바논으로 본부를 옮겼고,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자, 이스라엘의 공격을 피해 근거지를 옮겨 다녔다. 1987년 결성된 하마스 역시 PLO에 가입했다. PLO는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대표하는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PLO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포기하는 입장을 취한다. 오슬로 협정을 통해 PLO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자치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확보했다. 그래서 PLO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팔레스타인 내에서 PLO의 온건 노선에 대한 비판 여론이 급증했다. 무력 항쟁을 통해 가자지구와 서안, 동예루살렘을 수복해야 하고,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구 추방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주장을 대표했던 세력이 하마스였다. 하마스는 PLO를 탈퇴하고, 무장 단체들을 흡수하면서 힘을 키웠다. 하마스가 이탈하자 PLO는 사실상 파타당만 남게 되었다.

▲ PLO의 초대 의장 슈케이리(Ahmad Shukeiri), 2대 의장 함무다(Yahia Hammuda), 3대 의장 아라파트(Yasser Arafat), 4대 의장 압바스(Mahmoud Abbas). 오슬로 협정 이후 PLO 의장은 팔레스타인자치정부 대통령도 맡는다.

2006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했다. 국가수반은 파타가 맡고, 총리는 하마스가 맡는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하마스는 파타를 부정부패 집단이라고 공격했고, 파타는 하마스를 독립 방해 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팔레스타인 세력들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하마스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집단”이라고 비난하고, 파타에 1억 달러에 가까운 군사원조를 제공했다. 하마스가 연정에 참여하면 팔레스타인을 봉쇄하겠다는 협박도 하면서, 두 세력의 분열을 부추겼다.

결국 연정은 깨지고 두 세력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었다. 그 후 파타는 서안지구에서,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정권을 행사하는 이중 권력 구조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하마스 제거 공작

2006년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하자 미국은 하마스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에 착수한다. 당시 미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서안으로 날아가 자치정부 수반 아바스를 만나 하마스 축출을 제안했다. 파타에 무기까지 제공하려 했으나, 미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해 결국 실패했다.

2007년 미국의 지원 아래 이집트에서 훈련을 마친 파타 보안군 500명이 가자지구를 침입했다. 하마스와 파타 사이에 가자지구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며칠 만에 하마스가 이들을 제압하면서 미국의 구상은 실패한다.

2008년 이런 내용이 담긴 문서가 공개되었고, 미국 정치잡지 <베니티 페어>와 아랍언론 <알자지라>가 이 문서를 입수하여 보도하면서 미국 공작 실상이 드러났다. 미국 정부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 미국 잡지 베니티 페어는 2008년 4월호에서 하마스를 제거하는 미국의 공작을 폭로했다.

인티파다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공급하는 물에 의존해야 했고, 일터로 가기 위해 이스라엘군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1987년 12월 8일 이스라엘 탱크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돌진하여 4명이 즉사하고, 7명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마침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6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장례를 마친 후 이스라엘의 사과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1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것이다.

인티파다(Intifada)는 '봉기', ‘진동’, ‘전율’ 등을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이다. 이스라엘 봉쇄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봉기와 저항 운동을 인티파다라고 부른다.

▲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다.

인티파다가 일어나자, 이스라엘군은 가자 거리를 봉쇄했고, 중무장한 이스라엘 병사들 앞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탱크 앞에서 돌멩이를 들고 서 있는 사진은 1차 인티파다를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협상이 시작되면서 중단되었다.

2000년 9월 28일, 이스라엘 극우 정당인 리쿠드당(이스라엘 현 총리 네타냐후가 소속된 당)의 대표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의 무슬림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 근처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즉각 반발하고 시위를 벌였다.(2차 인티파다) 2주 동안 9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죽고, 2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2차 인티파다는 2005년까지 계속되었다.

1차 인티파다가 이스라엘군의 점령과 억압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라면, 2차 인티파다는 7년 동안 진행된 평화 협상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2차 인티파다는 1차와는 달리 무장 투쟁의 성격이 짙었다. 오슬로 협정 결과 팔레스타인 경찰들은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인티파다의 원인을 제공한 샤론은 2001년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다. 샤론은 오슬로 협정 효력 상실을 선포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면적 공격에 착수했다. 2차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분리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그리고 동예루살렘

가자지구는 길이 41km, 폭 10km의 좁은 지역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위치한다. 그 좁은 땅에 200만 명이 거주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보이는 곳이다.

1948년 1차 중동 전쟁 이후 이집트가 가자지구를 관리했으나, 1967년 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점령한 후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서안지구가 위치한다. 1948년 1차 중동 전쟁 이후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관리했는데,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서안지구도 이스라엘 점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2차 인티파다 기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이 두 지역은 이스라엘군이 발행한 특별허가증 없이는 마을간 통행도 금지되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무장 투쟁이 생길 때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진행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한 감옥’이며, 이스라엘군의 ‘살아서 움직이는 표적’이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의 성지이다. 1947년 유엔에서조차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 넘겨주지 않고, 국제 개방 구역으로 남겨놓은 이유이다.

1948년 1차 중동 전쟁 이후 예루살렘의 88%에 해당하는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12%에 해당하는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관할했다.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 현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점령지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이스라엘 정착촌(파란색 세모 표시)이 건설되고 있다.

1967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점령하자 유엔안보리는 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242호 결의안)을 채택했으나 이스라엘은 그 결의안을 따르지 않고 있고, 결의안 채택에 찬성했던 미국은 결의안을 이행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군사·경제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귀환권과 이스라엘 정착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그리고 동예루살렘은 1948년 건국 당시 이스라엘 땅이 아니었으나, 중동 전쟁이 계속되면서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곳의 다수를 차지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쫓겨나서 난민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왔고,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거주지는 점차 줄어들었고, 이스라엘 정착촌은 점점 늘어났다.

전쟁으로 거주지를 벗어났던 사람이 전쟁 종료 후 다시 돌아가는 것은 국제법이 정한 권리이다. 이를 ‘귀환권’이라고 한다.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 역시 194호 결의안을 채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은 허용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들의 귀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정착촌을 건설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돌아올 터전을 없앴다. 이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등에 임시 거처인 캠프를 설치하여 고난하고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귀환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목적은 분명하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완전히 내몰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순수한’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려는 것이다.

 

▲ 이스라엘 정착촌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 대문에 적힌 “Gas the Arabs!”(아랍인들을 질식사시키자!)라는 페인트 문구를 빈번하게 볼 수 있다. JDL은 이스라엘 극우 단체이다.

그렇다면 오슬로 협상 이후 ‘정직한’ 중재자를 자처한 미국은 어떤 입장인가. 1991년 미국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정착촌 활동을 반대해 왔으며, 앞으로도 반대할 것이라는 확약 서한을 PLO에 보냈다. 이 확약 서한을 받은 후 PLO는 미국이 중재하는 평화 협상에 임했고, 그 결과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9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역시 “이스라엘의 정착촌 활동은 평화 구축에 파괴적인 요인”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의 정착촌은 몇 배로 증가했고, 미국의 원조금은 정착촌 건설에 사용되었다. 겉으로는 이스라엘 정착촌을 반대한다면서, 속으로는 정착촌 확대를 지원했다.

중동지역을 담당하는 미국무부 차관인 로버트 펠트로(Robert Pelletreau)의 의회 진술(1994년 10월)은 미국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오슬로 협정 이후 정착촌 확대는 더 이상 평화의 장애물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정착촌 확대가 오슬로 협정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발언이다. 미국의 중재는 펠트로의 입장에 기반해 진행되었다. 미국은 ‘정직한’ 중재자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은밀한 지원자’였을 뿐이다.

그 결과 2000년 무렵, 이스라엘의 정착촌은 200곳이 되었고, 20만 명의 이스라엘 정착민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거주한다. 7년의 평화 협상 기간 이스라엘은 정착촌 확대를 위해 27만 4천 핵타아르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땅을 몰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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