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티파다가 일어나자, 이스라엘군은 가자 거리를 봉쇄했고, 중무장한 이스라엘 병사들 앞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탱크 앞에서 돌멩이를 들고 서 있는 사진은 1차 인티파다를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협상이 시작되면서 중단되었다.
2000년 9월 28일, 이스라엘 극우 정당인 리쿠드당(이스라엘 현 총리 네타냐후가 소속된 당)의 대표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의 무슬림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 근처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즉각 반발하고 시위를 벌였다.(2차 인티파다) 2주 동안 9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죽고, 2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2차 인티파다는 2005년까지 계속되었다.
1차 인티파다가 이스라엘군의 점령과 억압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라면, 2차 인티파다는 7년 동안 진행된 평화 협상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2차 인티파다는 1차와는 달리 무장 투쟁의 성격이 짙었다. 오슬로 협정 결과 팔레스타인 경찰들은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인티파다의 원인을 제공한 샤론은 2001년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다. 샤론은 오슬로 협정 효력 상실을 선포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면적 공격에 착수했다. 2차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분리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그리고 동예루살렘
가자지구는 길이 41km, 폭 10km의 좁은 지역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위치한다. 그 좁은 땅에 200만 명이 거주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보이는 곳이다.
1948년 1차 중동 전쟁 이후 이집트가 가자지구를 관리했으나, 1967년 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점령한 후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서안지구가 위치한다. 1948년 1차 중동 전쟁 이후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관리했는데,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서안지구도 이스라엘 점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2차 인티파다 기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이 두 지역은 이스라엘군이 발행한 특별허가증 없이는 마을간 통행도 금지되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무장 투쟁이 생길 때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진행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한 감옥’이며, 이스라엘군의 ‘살아서 움직이는 표적’이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의 성지이다. 1947년 유엔에서조차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 넘겨주지 않고, 국제 개방 구역으로 남겨놓은 이유이다.
1948년 1차 중동 전쟁 이후 예루살렘의 88%에 해당하는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12%에 해당하는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관할했다.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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