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에릭 로맥스의 <레일웨이 맨>을 다시 펼쳤다. 나는 1942년 태평양 전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멀쩡해 보이는 군대 조직도 공세를 받게 되면 홍수에 무너지는 둑처럼 속절없이 붕괴된다. 장군들은 우유부단에 빠지고 부대들은 고립되며 전투 의지는 소멸된다. 홍콩,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싱가포르에 주둔하던 수만 명의 영국군, 오스트리아군, 미군들은 고스란히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 이들 포로들은 아시아 전역에 급조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비교적 운이 좋았던 일부 영국과 오스트리아 군 포로들은 조선으로 이송돼 본소인 경성 포로수용소와 분소인 인천, 흥남의 세 곳으로 분산 수용됐다.
경성으로 배정된 포로들은 43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중 360여 명은 싱가포르에서 온 군인들이었다. 포로들은 서울역과 남영역 사이 철길 옆 현재 신광여중고 자리에 마련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포로들은 연합군이 경성 폭격을 시도할 경우 수용소 인근 일본군 사령부를 보호하기 위한 인간방패용 인질이었다. 연합군 포로들은 일본군 육군 창고에서 노역을 하거나 경성(서울)역이나 한강 다리로 불려 나가 강제노동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해방은 용산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문도 열었다. 3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친 연합군 수감자들은 해방의 기운이 가득한 경성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방콕 주변으로 이송된 연합군 포로들은 운이 나빴던 축에 속한다. 조선과 달리 태국은 남방전선 최전방 지역의 허브였기 때문이었다. 에릭 로맥스의 증언을 들어보자.
"다른 포로 24명과 함께 기차 화물칸에 올랐다. 열린 창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푸른 들판과 진흙탕이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일렬로 심어놓은 고무나무들이 수십 킬로미터씩 질리도록 이어졌다......기차가 잠깐 멈춘 사이 나는 밖으로 얼른 뛰어나가 엔진부터 살펴보았다. C56이었다. 내가 아는 한, 원래 오사카에서 만들어진 기관차지만 말라야-시암 트랙 운행을 위해 더 협소한 미터 게이지로 변경한 게 틀림없다. 기차를 식민지까지 옮겨온 것으로 보아 이곳에 오래 머물 의도가 분명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다. '기본생리 해결'문제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옆 동료에게 마지못해 도움을 청했다. 양동이로 쓸만한 물건도 없어 결국 네 명이 달리는 화차 문간에서 나를 붙잡아주는 동안 겨우겨우 일을 볼 수 있었다. 신체 접촉을 꺼리는 나로서는, 더군다나 이 공개적인 '친밀함'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일을 내 생애 가장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싱가포르에서 1,600킬로미터 이상 달린 끝에 드디어 반퐁역에 도착했다. 하차 명령을 받고 내려서는 순간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제 원하든 원치 않든 철도노동자가 된 것이다."
싱가포르를 출발해 말레이반도를 종단, 방콕 서쪽 외곽 반풍역까지 이동한 여정이 담겨있다. 연합군 포로들은 반퐁역과 농플라독, 칸차나부리, 남톡 등 버마로 향하는 철도 노선 곳곳에 배치되었다.
한겨울 추위를 뒤로하고 6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방콕의 공기는 방문자를 뜨겁게 감쌌다. 80여 년 전 전략적 요충지였던 태국은 이제 세계적 관광지로 탈바꿈했음을 보여주듯 입국심사대 앞으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줄 세웠다. 공항에서 예약한 유심을 찾아 갈아 끼우고 숙소로 향하는 차량을 기다리는 중에도 세계 곳곳의 언어가 대기를 채웠다. 오후 4시가 안 돼 공항에 착륙했지만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깔렸다. 체크인을 마치고 방콕의 유명한 여행자거리 카오산로드를 목적지로 택시 서비스 그랩을 호출했다.
한때 배낭여행자들의 성지로 유명했던 카오산로드는 밤이면 뜨거운 유흥가로 변신하는 곳이다. 300미터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에 방콕의 밤을 압축해놨다. 마사지샾, 기념품점, 주점이 들어서 있고 길을 따라 온갖 물건과 음식을 파는 노점 수레가 이어져있다. 길을 걷다 보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가 태국어와 뒤섞여 돌림노래처럼 울린다. 아마도 이토록 짧은 거리에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모아 놓은 국제적 용광로는 전 세계를 통틀어 몇 군데 되지 않을 듯싶다. 어쩌면 태국의 근대사를 생각하며 걷기에 적합한 장소는 국제거리 카오산로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세계 최강 미국 군대와 싸워 이겼다는 자부심을 갖는다면 태국은 역사상 한 번도 외세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다는 긍지를 갖고 있다. 태국이 자랑하는 독립의 역사는 고도로 복잡한 국제정치가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 태국의 외교는 밤부(Bamboo) 외교, 즉 대나무 외교로 불린다. 태국은 국제 정치 역학에 따라 대나무처럼 극단적으로 휘어지는 외교전략을 펼쳤다. 물론 전략의 기준은 국익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의 승전 퍼레이드에 시암 정부가 파병한 태국군 병사들도 참가했다. 영국과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시암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프랑스와 함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싸웠다. 덕분에 베르사유 평화회의의 한 자리를 차지한 시암 정부는 시암의 완전한 주권 회복을 주장했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1939년 국호를 시암에서 태국으로 바꾼 정부는 1942년 12월 그동안의 중립 정책을 포기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말레이반도를 장악하자 태국 정부는 일본을 선택했다. 태국은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음으로서 2차 대전 추축국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일본은 말레이반도와 버마 침략의 근거지로 삼을 태국이 필요했다. 일본군은 태국 곳곳에 군사 기지를 두고 버마로 향하는 태국 서부 종단 철도 건설에 나섰다. 태국은 자국 내 일본군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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