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모르는 유대인들
팔레스타인이 지금도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곧장 유대인을 비판하고 나섭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비판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먼저 '왜'라는 질문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투쟁하는 게 아니듯이 유대인들도 식민 지배를 찬성하거나 묵인하는 데에는 나름의 연유가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잘못 알려져 있을 뿐이지요.
세간에는 흔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욕심내는 이유가 신으로부터 약속받은 땅이라서 그런 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급될 때마다 다른 경계가 제시되고 구체적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인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와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믿으려면 종교적으로 매우 신실해야 하는데 정작 이스라엘 유대인의 약 80%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통계에 따르면 45%가 세속적이고, 30% 이상은 유대교를 단지 전통적 문화로 간주합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때 종교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고대에 유대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획득한 역사적 권리를 옹호합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역사란 학자들이 연구해서 사실로 밝혀낸 고증적 역사가 아닌,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뜻합니다.
성경학, 역사학, 고고학계에서는 이미 1970-80년대부터 고대 유대 왕국의 위상이 성경의 묘사에 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정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성경을 근거로 고대 팔레스타인 땅의 지배자는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며 비유대인들의 존재와 권리를 철저히 감춥니다.
유대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전 세계를 떠도는 이산 생활을 시작합니다. 비록 이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것은 2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이지만, 강제로 추방됐던 것이니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권리가 있다고 주장됩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다릅니다. 로마는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만 쫓아냈습니다. 로마를 비롯해 2000년 동안 그 어떤 국가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거주를 금지한 적이 없습니다.
이산이 시작된 이후로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 사실은 선명하게 확인되며 오직 점차적으로만 수가 줄어드는데, 박해를 피해 떠나거나 개종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6세기 이후부터 유대교 랍비들이 메시아가 도래하기 이전에 팔레스타인으로 집단 이주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를 정립한 것도 인구 감소에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한편, 이산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매우 많은 유대인이 유럽이나 중동에서 '자발적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개종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유대 인구의 90%를 이루는 유럽의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그러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전자 연구 결과 유럽 유대인은 아랍 유대인보다는 유럽인과 유전적으로 더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2000년 만에 나타나 토착민보다 우선하는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산이 시작된 이후로도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계속해서 살아왔습니다. 이들은 십자군 시기를 제외한 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무슬림의 지배를 받습니다. 세간에서는 무슬림들이 유대인을 심각하게 박해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분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중세에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남긴 고문서 40만 부를 연구한 유대인 역사학자들은 기독교 유럽에서보다 이슬람권에서 유대인들이 '상대적으로' 권리를 잘 보장받았고, 팔레스타인에서 공통의 성지 예루살렘으로 인한 종교적 갈등이 없었던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박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빈도나 정도가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슬람권과도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분쟁이 발생하기 직전인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럼, 팔레스타인에서 왜 분쟁이 생긴 걸까요? 18~19세기에 유럽에서 유대인의 권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타자'로 차별하던 기독교가 더 이상 사회적 기준이 아니게 된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기독교를 대신할 새로운 공동체의 기준으로 국가 단위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다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국가마다 하나의 민족만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독일에도 살고 영국에도 살고 프랑스, 러시아 등등 곳곳에서 발견되는 데다가 다른 유럽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후진적인 유대인들이 유럽에 동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1880년대에 동유럽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동화를 포기하고 유대인만의 민족을 만들고,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국가를 건국하자는 시온주의자가 나타납니다.
시온주의자들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의 반대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럽 유대인은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생각했고 유럽 국가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유대 국가가 만들어지게 된다면 유럽에서 쫓겨나게 될까봐 걱정했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메시아가 도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교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교를 믿지 않는 세속주의자들이었기에 교리 위반을 신경 쓰지 않았으나,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이 부닥친 또 다른 문제는 팔레스타인에 토착민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랍인의 수가 얼마 안 될 것이고, 모든 아랍인은 유목민이라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없고, 유대인들이 이주해 가서 경제가 발전하면 식민화를 반길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촌을 만들고 소작농을 추방할 때마다 아랍인들이 반발하는 것을 보며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뜻을 굽히지는 않았습니다. 아랍인들은 미개해서 힘으로만 평화를 말할 수 있다며 총기로 무장한 불법 자경대를 만들고, 식민화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에는 팔레스타인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고 아랍인들이 식민화를 반기며 평화롭게 지낸다고 거짓 선전했습니다.
100년이 훨씬 넘게 지난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처음 식민촌을 만든 1882년부터 토착민을 추방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역사적 기록들이 친이스라엘 사관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 왜곡은 당연히 논리적 흠결을 만듭니다. 시온주의자들은 1897년에 대회(congress)를 열어 유대 국가가 아닌 "유대 민족의 고향"을 공식적인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대다수의 유대인이 유대 국가에 반대하고, 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이 시온주의를 경계했기 때문에 이목을 속이기 위한 기만책이었습니다.
친이스라엘 사관에서는 이를 전략적 행동이라고 추켜세우면서도 시온주의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 국가를 원했고 토착민들이 식민화를 환영했다는 주장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역사 서적에서, 특히 친이스라엘 서적에서 유대인과 시온주의자들은 사실상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1000만 유대인 중 시온주의자는 10만 명 내외에 그칩니다. 시온주의는 사상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정말로 극단적인 사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1948년에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영국의 제국주의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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