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사령부는 또 “김대중은 8.15해방직후부터 좌익활동에 가담한 열성 공산주의자로서 73년 8월에는 반국가단체인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연맹(한민통)을 발기, 수괴인 의장으로 추대돼 북괴 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반국가 활동을 했고 북괴 또는 조총련으로부터 받은 불순자금을 불법으로 반입해 사용했으며 계엄기간 중 포고령을 의도적으로 위반”했으며 “10.26사태가 자신의 집권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 신민당 복귀를 통한 합법적 집권투쟁과 사조직을 통한 대중선동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합법적 비합법적 투쟁의 양면전략을 추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계엄사령부의 수사발표와 함께 언론과 방송도 거들고 나섰다.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씌우기 위한 특집 보도가 이어진 것이다.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경향신문) 등 그를 좌익 공산주의자이며 북괴를 도와 반국가 활동에 나선 인물이자 각종 비위를 일삼아 온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사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에게 씌워진 반국가 등 부정적 이미지는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 지금도 수구보수세력 가운데 일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향한 이런 주장을 아직도 되풀이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전두환 정권이 찍은 반국가 낙인의 위력은 대단했다.
여소야대 국회로 주춤했던 노태우 정권
문익환 목사 방북 등 빌미 공안정국 조성
“대한민국 안전 위태롭게 한 반국가활동”
1987년 6월항쟁 이후 직선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노태우는 1988년 2월 취임사를 통해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를 구실삼아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등한시되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강압과 밀실 안에서의 고문이 묵인되던 날들도 이젠 지나갔습니다”라고 밝혔다. 말뿐일 수 있지만, 과거 정권과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정권이 자신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반국가’ 낙인을 찍는 시대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 1988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면서 국가보안법 개정 시도 등 세상이 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금방 허물어졌다. 1989년 통일운동의 열기가 거세지며 황석영 작가(3월20일), 문익환 목사(3월25일), 임수경 한국외대 학생(6월30일), 문규현 신부(7월25일)가 잇따라 방북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정부만 대북 접촉을 할 수 있다면서 창구단일화론 주장하고 있었고, 이런 정부의 방침을 벗어나 북한과 대화하거나, 북한을 방문하는 등의 행위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며 처벌했다. 아울러 공안정국을 조성해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을 향해 전방위적인 압박에 나섰다.
당시 재판부는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해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고 호칭하고, 북한과 함께한 만찬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동지의 만수무강을 위해 축배하자”는 축배사를 하며 함께 잔을 들었다는 이유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찬양고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정부의 승인없이 잠행입북해 북한의 연방제통일안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팀스피리트훈련 반대 등 북한 주장에 동조한 것은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 반국가활동”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문익환 목사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최초로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사노맹’
“무장봉기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 건설하려 했다”
검찰 박노해 백태웅에 사형 구형
민간의 통일운동을 빌미로 노태우 정권은 공안몰이에 나섰다. 1989년부터 크고 작은 조직사건을 발표했고, 1990년 여소야대 국회를 뒤엎고,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창당된 뒤엔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급증했다. 3당 합당에 항의하는 대학생 등의 시위가 거세졌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동원한 것이다.
거대 여당 민자당의 행보는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유명 드라마 제목을 따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계파간 갈등이 심했다. 민자당 창당 직후 벌어진 4월 재보궐선거에서 텃밭인 대구에서 겨우 과반을 넘겼고, 충북 진천·음성에선 3당 합당에 동참하지 않은 민주당 계 정당인 이른바 ‘꼬마민주당’에게 의석을 넘겨주는 등 참패했다. 이후 내부 갈등을 더욱 커져만 갔고, 이런 민자당의 위기 속에서 노태우 정권은 대규모 조직사건을 발표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