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 거부권 행사: 권한과 의무와 책임의 불일치?
“‘정치권’을 단순히 입법기관으로서의 국회가 아니라 대통령실과 여당 등 집권 세력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본다면, 사실상 대부분의 정책 결정 권한이 정부 관료들에게서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관료가 겪는 권한과 의무의 불일치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관료의 정책 결정 권한은 약해졌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부와 관료에게 사회 문제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을 묻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 이는 정책 결정 권한의 대부분을 휘두르는 정치권조차 마찬가지다. 공직사회의 문제 중 많은 부분이 여기서 비롯된다. 관료가 가진 권한은 약한데 결과에 대한 책임만 져야 하는 신세이니 자연히 업무에 무기력해진다.”
“어쨌거나 세상은 공무원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묻는 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의 ‘월성원전 자료삭제 사건’이나, 방송통신위원회의 ‘TV조선 재승인 심사 점수 조작 사건’에선 국장급 이하 공무원부터 구속했다. 윗선의 지시를 이행한 공무원의 책임이 징계 등에 머무르지 않고 형사 처벌 등 법적 책임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일단은 나중에라도 책임질 만한 소지가 있는 일은 최대한 맡지 않으려고 하고, 맡더라도 책임 소재를 남기는 일에 열성을 다한다. 예를 들어 국·과장이 보고서를 수정하면 실무자는 ‘과수원’(과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 ‘국수원’(국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 등을 파일명에 추가하여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 남긴다. 몰래 휴대폰을 사용하여 회의를 녹음하는 사례도 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업무수첩에 누가 어떤 지시를 했는지 빼곡히 적는 것은 이제 공직사회에서 기본 중의 기본으로 통한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중
최 권한대행은 26일 현재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6개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여야 합의가 없었다’거나, ‘위헌적 요소가 있다’ ‘정부 재정에 부담을 준다’ 등의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모두 정부·여당이 반대해온 법안입니다. 야당 주도로 통과한 법안들 대부분은 행정부가 안 하려는 ‘무언가를 새로 하겠다’는 것으로 관료들에게 현상 유지 대신 부담과 책임을 증가시킵니다. 책은 권한은 줄어드는데 공무원에게 책임을 묻는 정도가 커지는 것도 공직사회의 무기력을 야기한다고 지적합니다.
최 권한대행 쪽 관계자들은 ‘권한대행의 권한의 범위와 구체적 내용에 대한 명문화된 조항이 없고 명확하지 않아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야는 각각 최 권한대행에게 정반대의 시각으로 권한을 행사하라고 압박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권한이 없고, 그래서 책임을 최소화하겠다’는 최 권한대행의 선택은 여야 뒤에 숨어 정치 현안에 대한 개입과 결정은 피하되, 거부권 행사는 이어가겠다는 거로 보입니다. 거부권을 행사해도 국회서 재의결 절차를 한 번 더 거치고, 여야가 한 번 더 협상할 여지가 있다 보니 책임을 분산시킬 수 있기도 합니다. 당장 최 권한대행은 설 연휴 뒤 야당 주도로 통과한 ‘내란 특검법’에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이제는 결단이 필요하다. 불필요한 일을 걷어내고, 관료가 본래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을 꿰뚫어 볼 때 비로소 가능하다. 관료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공직사회의 자기방어적인 거짓말을 들춰내야 한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중
저자는 책 막바지에서 공직 사회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며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을 꿰뚫어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12·3내란 사태에 따른 불확실성과 혼란을 수습 해야 하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을 주는 말 같습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이승준 기자
사람의 마음이 늘 궁금합니다. 눈높이를 맞추고 듣고 또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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