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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진보의 '권력 중독'을 경계한다
기사입력 2013-10-30 오전 7:46:13
"이명박 정권의 '반인륜'까지 계승했으니…"
28일 즐겨 읽던 진보 언론의 기사를 훑어보다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평소 인터넷 언론이나 포털사이트 뉴스 제목의 선정성을 질타하더니, 결국은 대세를 따르는 것인가? 혀를 차면서 기사를 읽다 보니, 편집국장을 역임한 선임 기자의 기명 칼럼이다. '용산 참사' 때의 경찰 지휘관이었던 김석기의 한국공항공사 사장 임명을 세게 조졌다.
짧은 칼럼의 내용은 인상적이다. 김석기의 한국공항공사 사장 임명을 밀양 송전탑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반응으로 연결한 부분("용산에서처럼 밀어 버려…")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독자들 특히 이 신문을 주로 읽는 진보 성향의 독자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데 칼럼을 읽다 보니, 이 신문에서 한 7년 전에 읽었던 또 다른 칼럼이 하나 떠올랐다. "지율, 박 대표 그리고 근본주의." 당시는 노무현 정부가 부실한 환경영향평가에 근거해 경부고속철도 천성선 터널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데 맞서, 지율 스님이 목숨을 건 단식을 진행 중이었다. 그 때 그 칼럼은 그런 단식을 '근본주의'라고 조졌다.
그 칼럼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지난 5일, 승려 지율이 세영 스님한테 업혀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 사진을 보다 갑자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떠올랐다. 12월 27일 의원 총회에서 눈물을 비치던 모습이 지율의 사진에 겹쳐졌다. (…) 서둘러 지우려 했다. 그러나 연상의 이유만 또렷해졌다.
우선 두 사람은 지금 목숨을 걸고 있다. 한 사람은 경부고속전철 천성산 터널 공사를 막기 위해서, 다른 한 사람은 개정 사립학교법을 무효화하는 데 걸었다. 둘째, 게다가 두 사람은 생명을 자주 거는 편이었다. 한 사람은 단식만 다섯 번째이고, 다른 사람은 지난해에도 비슷하게 생명을 걸었다. 셋째, 비타협적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 넷째, 자신의 신념과 판단의 무오류성에 대한 믿음이 확고부동하다. 이들에게 다른 신념이나 원칙은 공존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 칼럼은 지율 스님과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의 공통점을 '근본주의'로 요약했다. 근본주의는 "다른 사상 종교 신념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해체하려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칼럼의 마지막 문장은 압권이다. 알고 보니,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 타령은 원조가 따로 있었다.
"여성은 근본주의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성은 상생과 조화, 그리고 창조를 상징한다. 나는 지율과 박 대표의 '목숨을 거는' 행위들이 지배적인 남성성에 휩쓸려 잠시 곁길로 빠진 탓이라고 믿고 싶다."
이 칼럼을 읽고서 많은 이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부당한 국가 폭력에 맞서서 아무런 힘이 없는 비구니가 나 홀로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있는데, 평소 진보 언론의 맏언니라고 자처하던 언론의 선임 기자가 대놓고 이를 조롱했으니…. 그리고 이런 지율 스님을 향한 국가 폭력은 창원(배달호), 남산(허세욱), 용산 그리고 밀양에서 정권을 가리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두 칼럼은 같은 사람이 쓴 것이다. 지금 여기서 한 개인을 놓고서 '당신은 창원, 남산 그리고 지율 스님에 대한 국가 폭력에는 침묵하더니…' 하고 탓하려는 게 아니다. '진보' 혹은 '개혁'이라는 수식어 뒤에 숨어 있는 지극히 천박한 진영 논리를 한 번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만약 (노무현 정부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지율 스님이 부실한 환경영향평가를 이유로 정부가 주도하는 토목 공사를 가로막는다면, 그 때도 앞의 그는 지율 스님과 박근혜 대통령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둘 다 '근본주의'라고 읊조릴 수 있었을까? 좀 더 고약한 질문을 하자면, 만약 문재인 의원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면 그는 밀양 노인의 처절한 싸움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민주당이 집권했다고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사정이 달랐을까?)
일찌감치 정치의 핵심을 적과 동지를 가르는 일이라고 통찰한 이들이 동서양에 부지기수다.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지식인이라면 혹은 공론을 책임지는 언론이라면 최소한 조지는 데도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이 정부를 조져대는 언론과 일부 지식인의 행태에서 10년간 권력을 잃어 어쩔 줄 모르는 지극히 조·중·동스러운 '권력 중독자'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나뿐인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혹시 지금 우리는 다 같은 괴물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지옥을 들여다보면 지옥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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