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형인명부 발굴로 정부 책임을 끌어내다
그는 김민웅 교수와 나눈 대담집 <추미애의 깃발>에서 수형인명부에는 재판절차 없이 형을 매기고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던 교사∙농부∙학생 등 사상범이라고 추정할 수 없는 2530명이 기록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형인명부가 발굴되면서 제주4.3의 진상규명을 공식화할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첫째는 정부가 제주4.3을 인정하고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공식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법적으로 재심 재판을 열 수 있는 근거가 되었지요. 이걸 근거로 22년이 지난 2021년 3월,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던 333명의 희생자에게 재심 재판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제주4.3 발발로부터 73년 만에 희생되신 영령들을 자유롭게 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주4.3평화재단 강봉효 기념사업팀장에게 문의했더니 올 11월 4일 기준으로는 재심을 거쳐 무죄선고를 받은 제주4.3 수형인이 2132명에 이른다고 답했다.
4.3평화포럼에서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제주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의의를 설명했고, 이용우 동덕여대 교수는 엄격했던 프랑스의 독일협력자 숙청 사례를 소개했다. 해방 전후에 8천~9천 명의 나치협력(혐의)자가 레지스탕스에 의해 정식 재판 없이 처형됐고, 재판을 통해서도 9만 8천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1500명이 처형됐다. 공무원은 2만 1천명, 장교 등 군인은 1만 5천명이 축출됐다.
나치 협력 프랑스 언론 900종 발행 금지
특히 언론은 나치에 협력한 신문 900종의 발행이 금지되고 538개 언론사가 기소됐다. 그중 115개 사는 유죄 선고를 받아 재산이 몰수되기도 했다. 특히 언론인에게 엄정하게 책임을 물었던 것은 영향력이 컸고 물증도 남았기 때문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9월호에 소개한 바와 같이, 프랑스는 포고령으로 ‘언론인 신분증 없이는 기자로 일할 수 없다’고 못박은 뒤 긴 설문지를 주고 나치 점령기간의 활동내역을 적어내도록 요구했다. 드골 대통령은 숙청을 밀고 나가면서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더라도 다시는 반역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4.3평화포럼에서 발제된 폴란드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례는 ‘위르겐 슈트로프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게토 봉기 진압작전을 지휘한 독일군 사령관 위르겐 슈트로프가 작성한 것이었다. 국립추모연구소의 마렉 돈브로프스키 기록보관소 부소장은 슈트로프가 허영심과 야망에 사로잡혀 너무나 잔혹하게 진압한 상세 보고서를 남겼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슈트로프는 역설적으로 반인륜 전쟁범죄에 영원히 경종을 울린 장본인이 됐다.
폴란드는 이 보고서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저장해 뒀는데 내용을 검색해보니 그는 5만 6천 명 유대인을 체포했고, 작전중에 7천 명을 사살했으며 수용소로 이송중에 6929명을 처형하는 등 모두 13929명을 죽였다. 화재와 유탄에 맞아 숨진 폴란드인도 6천 명이 넘었다.
피해자의 진술이 아니라 가해자가 남긴 이 드문 보고서는 나치 체제가 저지른 범죄를 고발할 뿐 아니라 변론조차 불필요해진 최종 기소장이 됐고 자신도 처형됐다. 보고서에 첨부된 유대교회 폭파 장면을 찍은 사진 등은 유대인 대량학살의 보편적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돈브로프스키 부소장은 발제를 마무리하면서 “고통스러운 내용이 담긴 기록을 보존함으로써 전 세계에 걸쳐 회복탄력성을 구축하고 기억이야말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어책임을 확인한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넬슨만델라기념관 건립과 아카이브 작업, 시민교육과 대외홍보 등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민주주의 발전의 주춧돌로 삼았다.
아직도 아득하게 먼 한국의 과거사 청산
프랑스 독일 폴란드 남아공의 과거 청산 노력과 성과에 견주면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다. 제주4.3만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제주4.3항쟁’과 같은 온전한 이름을 쓰지 못하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 전시장 안에 있는 비석은 비문이 없는 ‘백비’ 상태로 누워 있다. 평화공원 행방불명인묘역에는 유해를 찾지 못한 실종자들의 표석이 4078기나 서 있다. 제주항 근처 주정공장에 갇혀 있다가 재판절차도 없이 앞바다에 수장되거나 단기 징역형을 받고도 육지 형무소로 이감된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처형된 사람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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