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년전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 집행을 당한, 순국일이다. 

형제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안 의사의 유언은 116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사형 집행 후 유해가 어디에 매장되어 있는지 조차 명확치 않다. 일제가 철저히 은폐한 탓도 있지만 노력이 부족했다는 자책을 피할 길 없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중국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마잉푸(馬營浦) 위쪽 산 중턱의 지하 약 2.1미터 깊이에 매장되어 있다는 사료가 최초로 확인됐다.

이규수 전 일본 히토츠바시대학 특임교수는 1910년 9월 10일 '방외생'(方外生, 기자 고마츠 모토고(小松元吾)의 필명)이 일본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에 기고한 '안중근의 묘'라는 제목의 르포기사를 발굴해 안 의사 순국 116주기를 앞두고 공개했다.

지금까지 국내외에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 사료이다.

안중근 의사 순국(1910.3.26) 5개월여 뒤에 나온 '고마츠 모토고' 기자의 기사는 안 의사의 매장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만큼  결정적인 단서가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뤼순감옥 소장의 증언과 현지 답사를 통해 작성된 기사의 신뢰도 높고, 매장지의 구체적인 위치와 거리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묘사가 구체적이다. 특히 안 의사와 바로 이웃해 묻힌 일본인 및 중국인 사형수의 실명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확인할 경우 안 의사의 매장지를 1~2m내로 좁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1910년 9월 10일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의 '안중근 의사 묘' 관련 기사 [사진-이규수 교수 제공]
1910년 9월 10일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의 '안중근 의사 묘' 관련 기사 [사진-이규수 교수 제공]

"실은 당시 안중근의 형제가 너무나 유해를 원했던 점과 우리 일본인들의 격앙이 심했던 탓에 신중하게 고려했다. 다른 죄수들처럼 그 묘표(墓標, 무덤 표시)라고 하기에는 정말 간단한 나무 표식으로, 높이는 지상 1척(약 30cm) 남짓, 폭 4촌(약 12cm) 가량의 널빤지 겉에는 성명을, 뒤에는 사망 연월일을 기록한 것을 묘표로 세우지 않고, (관과 함께) 묻어서 흙을 덮고, 그 위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어, 일부러 매장 지점의 형태와 흔적을 완전히 감추어 버렸다.

이 때문에 유해에 관한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고, 지금도 그 억측을 믿는 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실상은 당시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보도와 같이 특별히 들여온 백목(白木, 원목을 제재하여 표면을 가공하지 않은 목재) 두꺼운 판자의 좋은 재목으로써 파격적인 일본식 침관(寝棺, 시신을 눕히는 관)을 만들었고, 또한 만에 하나 발굴되는 일이 없도록 일반 죄수와 같은 지하 4척(약 1.2m) 이내에 묻지 않고, 특별히 7척(약 2.1m) 아래로 깊이 묻었으며, 매장한 장소는 물론 이 감옥 부속 수인 묘지 안이다."

안 의사 수감 당시 뤼순감옥의 전옥(典獄, 교도소장)이며, 고마츠 기자가 취재할 당시에도 소장으로 근무하던 구리하라 사다키치(栗原貞吉)의 증언이다.

구리하라 소장은 안 의사가 순국 직전 "어머니가 보내주신 흰 한복을 입고 죽고 싶다"고 한 요청을 흔쾌히 허락하고 사형집행 현장에서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인물.

항아리 모양의 관에 세로로 세워 묻은 일반 죄수들과 달리 안 의사의 유해는 백목으로 침관을 만들어 뤼순감옥 부속 수인묘지 구역 안에 매장했으며, 불의의 발굴을 예방하기 위해 약 2.1m 깊이에 묻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고마츠 기자는 이에 대해 "안중근의 유해는 실은 감옥 묘지에 매장되지 않았다거나, 일단 매장되었으나 지금은 그곳에 없다"는 등의 소문이 있었으나 구리하라 전옥의 이야기를 듣고 의구심이 눈녹듯 풀렸다고 기록했다.

뤼순감옥 묘지로 알려진 이 구역은 현재 뤼순감옥박물관과 민간단체 등에서 유력한 매장지로 추정하는 일명 '동산파'(東山坡) 지역이다.

국가보훈부가 △1910년 3월 26일 관동도독부 작성 『사형집행보고』(안중근 금일 사형집행. 유해는 뤼순에 매장함) △조선통감부 1910년 작성 『사형집행보고서』(안의 사체는 감옥서에서 제작한 침관에 넣고 백포를 덮어 (중략) 오후 1시 감옥서의 묘지에 매장하였다) △오사카아사히신문 1910년 3월 27일자(안의 시체는 침관에 안치되는 대우를 받고 감옥묘지에 매장되었다) △만주신보 1910년 3월 29일자(사체는 오후 감옥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등 단서를 근거로 안 의사 매장지를 뤼순감옥 묘지로 지목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결론이다.

이어 고마츠 기자는 구리하라 소장이 특별히 동행시킨 안내자와 함께 감옥으로부터 약 10정(약 1km) 떨어진 묘지로 향했다.

"안내자는 두 산이 서로 근접해 길이 막 끝나려 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이곳이라고 알려 주었다"며, 묘지의 위치를 설명했다.

"묘지는 자세히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그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울타리도 담도 없는 산 중턱, 무성한 잡초 사이에 규칙적으로 두 줄을 이루어 50~60기의 무덤이 서 있었다. 산은 높지 않아서 약 1정(약 109m) 앞까지는 마차도 다닐 수 있고 골짜기는 깊지 않아 건장한 남자라면 오르내릴 수 있다. 

고개를 들어 보면 정면 마주 보이는 산등성이 정상에 청나라 통치 시대의 기병영(騎兵營) 터가 거의 흙담이 완전한 형태로 있고, 고개를 숙이면 오른편으로 마잉푸(馬營浦)라 불리는 작은 부락 거리의 한쪽 끝으로 약 1정(약 109m) 남쪽 산기슭과 가깝고, 눈앞 바로 아래에는 개인 소유의 화약고와 그 파수막 등 빈집이 각각 한 채씩 계곡에 임하여 서 있다."

묘지의 위치는 감옥에서 약 10정(약 1km) 떨어진 곳. 감옥 담장 옆이 아니라 감옥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산중턱에 있는데, 정면의 언덕 정상에는 청나라 시대 기병영의 흙담 잔해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마잉푸라 불리는 작은 부락의 끝자락이 산기슭에 닿아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계곡을 굽어보는 위치에 개인 소유의 화약고와 파수꾼의 빈 오두막이 있다는 것.

묘지에서 바라 본 전망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칭하기를 감옥의 공동묘지라 하나, 그 실상은 하등(下等) 중국인의 버려진 무덤(廢墳)과 거의 맞닿을 만큼 근접해 있고, 그 수는 20~30기에 불과하다. 그중에는 아주 오래되지 않은 것도 1~2기가 있다. 지명과 산의 이름은 미상이나, 이름을 붙이자면 '마잉푸(馬營浦)의 위쪽'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3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오직 남쪽만이 마잉푸 마을을 넘어서 멀리 황금산(黄金山)과 라오후웨이(老虎尾)를 마주하고 있어, 그 사이로 항구 밖의 바닷물(海水)을 바라보고, 조금 서쪽으로 치우쳐 백옥산(白玉山) 꼭대기의 표충탑(表忠塔)이 우뚝하니 하늘에 솟아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잡초 아래 침관(浸棺) 크기라고 인정할 만할 형태를 희미하게나마 지상에 드러내고 있으나, 한 조각의 나무 표식도 세우지 않고, 한 덩어리 돌멩이(石卵)도 놓지 않은 곳, 바로 이곳이 그해 천하를 뒤흔들었던 광한(狂漢) 안중근의 형여(刑餘, 처형된 몸)가 영원히 누워 있는 곳"이라며, 안 의사의 매장지를 확인한다.

고마츠 기자는 "2~3년전 다롄에서 중국인 환전상을 꿰어내어 2천엔을 강탈한 뒤 교살한 모토야마 겐이치(本山謙市)와 야마무라 세이이치(山村精一), 그리고 불과 얼마 전 처형된 중국인 살해범 혼다 오토마쓰(本田音松), 일본인 살해범 위안광가오(袁廣高) 등 두 강도의 흙이 마르지 않은 새 무덤과 인접한 지점"이라고 안 의사의 자리를 특정했다.

"이(李), 오(呉), 원(袁), 유(劉), 형(邢) 등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처형된 마적들이 나란히 있는 그 열 바로 아래, 즉 앞 열"이라고 덧붙였다.

사료를 발굴한 이규수 교수는 뤼순감옥 '옛터'(舊址, 구지)를 기점으로 반경 약 1km 지점에 대해 위성지도 및 고지도와 대조해 청나라 기병영 터와 마잉푸 부락의 위치를 확인해 산 중턱 골짜기의 실제 매장지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발굴범위를 획기적으로 좁혀주는 좌표이기 때문이다.

또 안 의사 주변에 묻힌 것으로 명시된 모토야마 겐이치, 야마무라 세이이치, 혼다 오토마츠, 위안광가오의 판결문과 사형집행 및 매장보고서는 일본 법무성이나 외무성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이들의 묘지번호(매장 위치) 등을 확인하면 안 의사의 묘는 바로 그 옆으로 특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하 2~3m 심도를 탐색하는 고성능 GPR(Ground Penetrating Radar, 지표투과레이더) 탐사를 통해 두꺼운 소나무관 등의 이질적인 신호(Anomaly)를 탐지하면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며, 중국측에 탐사 협조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마츠 모토고 기자 [사진-이규수 교수 제공]
고마츠 모토고 기자 [사진-이규수 교수 제공]

한편, 이 글을 쓴 고마츠 모토고 기자는 1875년 일본 고치현 우사기다(兎田) 태생으로 24살부터 28살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다롄의 요동신보(遼東新報)에 입사했으며, 이때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의 특파원으로 안중근 의사 재판을 방청하고 법정 스케치를 남긴 인물이다.

고마츠 기자는 당시 일본의 국익을 대변하는 취재진의 일원으로 안 의사를 '광한'(狂漢, 미친 사내)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사형이 예견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안 의사가 보여준 당당한 기개와 논리 정연한 '동양평화론', 그리고 적국 일본의 천황이나 민중을 증오하기보다 동양의 진정한 평화를 역설하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사뿐만 아니라 당시 법정의 모습을 정밀하게 묘사한 삽화를 남기며 안 의사의 마지막 투쟁을 충실히 기록했다.

사형집행을 앞둔 1910년 3월, 고마츠 기자는 안 의사를 면회해 평소 품었던 경의를 표시하며 글씨를 청했고, 안 의사가 그에게 써 준 유목과 가족사진첩은 그의 외손자인 고마츠 료지가 2016년 11월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일본어 원문 번각》(전문)

○ 安重根の墓

○ 於旅順

○ 方外生

○ 《大阪每日新聞》 1910年 9月 10日

毒彈一射、我伊藤公の生命を哈爾賓に奪ひて一時天下の視聴を其一身に集めたる狂漢安重根は、爾来月を閲する滿五の本年三月二十六日を以て刑に就き、茲に關東州未曾有の大裁判も局を結び、世人の記憶漸く將に弱からんとする今日、忽ち韓國併合條約成立して故公の遺業殆んど完きを告げんとす、予は一種の感に打たれつゝ、大連より旅順に來り、故公を弔する心を以て重根の墓を探り兼ねて、當時の共犯三囚の現狀を見るべく旅順監獄を訪へり。

重根の遺骸は處刑の當時、其骨肉數名旅順に來り、故郷に葬らんことを哀訴愁願する所あり。我官憲は陽に之を諒として陰に之を拒みたるも、彼等は尙之を覺らず最後に斷然其哀訴を排斥せらるゝや安の二弟は忽ち獄門に怒號憤泣して誓つて日本に報ひんと揚言せり。

然るに後に到りて說の耳より耳に傅へらるゝものあり曰く重根の遺骸實は監獄墓地に埋められず否一たび埋められたるも今や無しと、予輩心窃に其必無を斷ずべからざるを思ひ其眞相を知らんと期したり。

而も顧みて假令其眞相を探究するとも輕々しく之を發表すべきにあらざるを思ひ其儘打過ぎしが、今や此探究に適當なる時機とはなれり。

當時の主任者にして現に尙其職に在る栗原典獄は終に口を開きて曰く「實は當時餘りに安の兄弟が遺骸を欲しがりたると邦人の激昂甚しかりしに慮る所ありて他囚の如く其墓標と言つてもホンの簡單なる木標で高さ地上一尺餘幅四寸許の板に表は姓名、裏は死亡年月日を記したるを立てず埋めて土を着せ、其上を雑草の生ひ茂るに任せて、故らに埋葬地點を明にせず、全く形跡を糊塗し去りたるより、種々の臆說行はれ、現に依然臆說を信ずる者少からざる由なれど、其實當時貴紙報道の如く、特に取寄せたる白木厚板の良松材を以て、破格の日本式寢棺を作り、且萬一發掘せらるゝが如きことなきやう、一般囚は地中四尺以下に埋むる例なるを以て、特に七尺以下となしたり。其場所は勿論當監獄附属の囚人墓地内なり」と。

予輩の愚かなる疑念は此一言にて容易に氷解したり。乃ち予は典獄が特に附し吳れたる案内者に從ひ、監獄より約十町なる墓地に向ひ、兩山相逼つて道將に盡きんとする所、案内者歩を停めて「此處です」と告ぐ。  

墓地は細視して後始めて其れと知られたり柵なく墻なき山腹菁々たる雜草の間に、規律正く二列となりて五六十基立てり。山高からず一町程手前迄馬車を通じ得べく谷深からず屈強の男ならば下りて又上るべし。

仰げば正面對崗の頂上に清治時代の騎兵營の残墟略ぼ土墻を完うし。伏せば右方馬營浦と稱する小部落市街の一端となりて約一町の南なる山脚に迫り、眼前直下には私人の火薬庫と其番小屋の空家各一棟溪に臨みて立つ。

稱して監獄の共同墓地となすも其實下等支那人の廢墳と殆んど相觸るゝばかりに接近し、其數は二三十個に過ぎざるも二三個甚だしく古からぬものあり。地名山名共に詳ならず、假に名くれば馬營浦の上手とも稱すべきか。三方塞がり唯南方のみ馬營浦を越えて遙に黄金山と老虎尾とに對し、其間より港外の海水を望み、少しく西に偏して白玉山頭の表忠塔屹として天空に聳立するを見る。

立て列ねたる墓標の主は、何れ關東州內外、我行政圈を騷がせたる馬賊、強盗、殺人犯の類ならぬは無きが中に李、呉、袁、劉、邢など一時に刑せられたる馬賊の並べる其列の眞下卽ち前列にして二三年前大連に於て支那人の兩替商人を誘き出し二千圓を奪ひて之れを絞殺したる本山謙市、山村精一等を始め纔に此程刑せられたる許りの支那人殺し本田音松、日本人殺し袁廣高兩強盗の土未だ乾かざる新墓と隣接せる地點に雜莠の下、正に寢棺大と認めらるゝ形を覺束なげながら地上に現はし、一片の木標も立てず、一塊の石卵も置かざる所、卽ち是れ當年天下を聳動したる狂漢安重根の刑餘の身体が永く横はる所なり

秋漸く深くして蟲晝鳴く、知らず唧々たる聲亦大韓獨立を叫ぶや否や。(번각 : 이규수, 감수 : 최세경)  * 쉼표와 마침표 등은 번각자가 편의상 삽입한 것입니다.

 

《기사 한국어 번역》(전문)

○ 안중근의 묘(安重根の墓)
○ 장소 : 뤼순(旅順)에서
○ 필자 : 방외생(方外生, 기자 고마쓰 모토고의 필명)
○ 출전 :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大阪每日新聞》 1910년 9월 10일

흉탄 한 발로 하얼빈에서 우리 이토 공(公)의 생명을 앗아가, 한때 천하의 이목을 그 한 몸에 집중시킨 광한(狂漢) 안중근은 그 후 해를 넘겨 만 5개월이 되는 올해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에 관동주(關東州) 미증유의 대재판도 종결되고 세인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려 하는 작금, 홀연 한국 병합조약이 성립되어 고(故) 이토 공의 유업이 거의 완성을 고하려 한다. 

나는 감회에 젖어 다롄(大連)에서 뤼순(旅順)으로 와 고인을 애도(이토 히로부미를 의미함-이규수)하는 마음으로 안중근의 묘를 찾고, 동시에 당시 공범이었던 세 수인(囚人,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이규수)의 현황을 살피고자 뤼순감옥을 방문하였다. 안중근의 유해는 처형 당시 그 혈육 몇 명이 뤼순에 찾아와 고향에 안장하기를 애소하고 애원했는데, 우리 관헌은 겉으로는 이를 승낙하는 체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이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했고 결국 그 애소가 단호히 거절당하자, 안중근의 두 동생(안정근, 안공근–이규수)은 돌연 감옥 문 앞에서 분노하여 울부짖고 통곡하며 맹세코 일본에 보복하겠노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훗날 귀에서 귀로 전해지는 소문에 따르면, 안중근의 유해는 실은 감옥 묘지에 매장되지 않았다거나, 일단 매장되었으나 지금은 그곳에 없다고 한다. 나는 내심 정말로 없다고 단정할 수 없어 그 진상을 알고자 하였다.

게다가 돌이켜보건대, 가령 그 진상을 탐구한다 해도 경솔하게 이를 발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지나쳐 왔으나, 이제야말로 탐구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되었다. 

당시 감옥의 주임으로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 직에 있는 구리하라(栗原) 전옥(典獄, 교도소장)은 마침내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은 당시 안중근의 형제가 너무나 유해를 원했던 점과 우리 일본인들의 격앙이 심했던 탓에 신중하게 고려했다. 다른 죄수들처럼 그 묘표(墓標, 무덤 표시)라고 하기에는 정말 간단한 나무 표식으로, 높이는 지상 1척(약 30cm) 남짓, 폭 4촌(약 12cm) 가량의 널빤지 겉에는 성명을, 뒤에는 사망 연월일을 기록한 것을 묘표로 세우지 않고, (관과 함께) 묻어서 흙을 덮고, 그 위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어, 일부러 매장 지점의 형태와 흔적을 완전히 감추어 버렸다. 이 때문에 유해에 관한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고, 지금도 그 억측을 믿는 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실상은 당시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보도와 같이 특별히 들여온 백목(白木, 원목을 제재하여 표면을 가공하지 않은 목재) 두꺼운 판자의 좋은 재목으로써 파격적인 일본식 침관(寝棺, 시신을 눕히는 관)을 만들었고, 또한 만에 하나 발굴되는 일이 없도록 일반 죄수와 같은 지하 4척(약 1.2m) 이내에 묻지 않고, 특별히 7척(약 2.1m) 아래로 깊이 묻었으며, 매장한 장소는 물론 이 감옥 부속 수인 묘지 안이다”라고 말하였다. 

나의 어리석은 의구심은 이 한마디로 눈 녹듯 쉽게 풀렸다. 이에 나는 전옥이 특별히 붙여준 안내자를 따라 감옥에서 약 10정(약 1km) 떨어진 묘지로 향했다. 
안내자는 두 산이 서로 근접해 길이 막 끝나려 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이곳이라고 알려 주었다. 묘지는 자세히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그곳임을 알 수 있었다. 

울타리도 담도없는 산 중턱, 무성한 잡초 사이에 규칙적으로 두 줄을 이루어 50~60기의 무덤이 서 있었다. 산은 높지 않아, 약 1정(약 109m) 앞까지는 마차도 다닐 수 있고, 골짜기는 깊지 않아 건장한 남자라면 오르내릴 수 있다. 고개를 들어 보면 정면 마주 보이는 산등성이 정상에 청나라 통치 시대의 기병영(騎兵營, 기병대 병영) 터가 거의 흙담이 완전한 형태로 있고, 고개를 숙이면 오른편으로 마잉푸(馬營浦)라 불리는 작은 부락 거리의 한쪽 끝으로 약 1정(약 109m) 남쪽 산기슭과 가깝고, 눈앞 바로 아래에는 개인 소유의 화약고와 그 파수막 등 빈집이 각각 한 채씩 계곡에 임하여 서 있다. 

칭하기를 감옥의 공동묘지라 하나, 그 실상은 하등(下等) 중국인의 버려진 무덤(廢墳)과 거의 맞닿을 만큼 근접해 있고, 그 수는 20~30기에 불과하다. 그중에는 아주 오래되지 않은 것도 1~2기가 있다. 지명과 산의 이름은 미상이나, 이름을 붙이자면 ‘마잉푸(馬營浦)의 위쪽’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3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오직 남쪽만이 마잉푸 마을을 넘어서 멀리 황금산(黄金山)과 라오후웨이(老虎尾)를 마주하고 있어, 그 사이로 항구 밖의 바닷물(海水)을 바라보고, 조금 서쪽으로 치우쳐 백옥산(白玉山) 꼭대기의 표충탑(表忠塔)이 우뚝하니 하늘에 솟아 있는 것을 본다. 

줄지어 선 묘표의 주인은, 모두 관동주 안팎에서 우리 행정권을 어지럽힌 마적, 강도, 살인범의 부류가 아닌 자가 없는 와중에 이(李), 오(呉), 원(袁), 유(劉), 형(邢) 등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처형된 마적들이 나란히 있는 그 열 바로 아래, 즉 앞 열에는 2~3년 전 다롄에서 중국인 환전상을 꾀어내어 2천 엔을 강탈하고 그를 교살한 모토야마 겐이치(本山謙市), 야마무라 세이이치(山村精一) 등을 비롯해, 불과 얼마 전 처형된 중국인 살해범 혼다 오토마쓰(本田音松), 일본인 살해범 위안광가오(袁廣高) 등 두 강도의 흙이 마르지 않은 새 무덤과 인접한 지점에, 잡초 아래 침관(浸棺) 크기라고 인정할 만할 형태를 희미하게나마 지상에 드러내고 있으나, 한 조각의 나무 표식도 세우지 않고, 한 덩어리 돌멩이(石卵)도 놓지 않은 곳, 바로 이곳이 그해 천하를 뒤흔들었던 광한(狂漢) 안중근의 형여(刑餘, 처형된 몸)가 영원히 누워 있는 곳이다. 가을이 점차 깊어져 벌레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알지 못하겠구나, 찌르르
우는 소리 또한 대한독립을 외치는 것일까 아닐까. (번역 : 이규수, 감수 : 최세경)

*3월 27일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현황과 남북 공동대응 과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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