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의 한계와 '숙의 민주주의'의 필요성
대리운전 같은 현행 대의제는 구조적으로 '현재의 유권자'만을 대변한다. 30년 후 이 땅의 주인일 미래 세대는 오늘 투표권이 없다. 원전, 기후위기, 연금 문제는 모두 미래의 몫을 현재가 가로채는 구조적 모순 속에 방치되어 왔다.
이미 세계는 이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아일랜드는 무작위로 추출된 시민 99명이 수개월간 전문가와 숙의하여 낙태권 같은 초장기적 사회 갈등을 해결했다.
우리 역시 에너지 전환 30년 로드맵을 단순한 정쟁의 도구로 두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거쳐 로드맵을 확정하고, 이를 어떤 정권도 뒤집지 못하도록 헌법적 수준으로 법제화하는 '에너지 헌법'이 절실하다.
'기명(記名) 투표', 역사 앞에 선 주권자의 명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필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에너지 전환 로드맵에 대한 국민투표를 '기명(記名)'으로 실시하자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비밀투표의 원칙은 신성시되지만, 이는 과거 권력의 압박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는 초장기 과제에서 익명성은 때로 '무책임'의 가면이 된다. 19세기 미국 민주주의 초기에는 시민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투표하며 주권자의 자부심을 드러냈다. 지금도 스위스의 일부 지역(란츠게마인데)에서는 광장에 모여 손을 들어 공개적으로 정책을 결정한다.
우리에게는 '족보(族譜)' 문화가 있다.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이고자 하는 마음, 내 이름 석 자에 책임을 지는 명예 문화가 DNA 속에 흐르고 있다. 기명 투표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익명의 그늘에 숨어 현재의 편익만 좇는 나를 버리고, 역사와 미래 세대 앞에 선 주권자로서의 나를 소환하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56인이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걸고 이름을 남긴 것처럼, 우리도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하는 계약서에 당당히 이름을 남겨야 한다.
세대 간의 신성한 계약
"30년 후 우리는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를 지금 결정하는 것은 단순한 에너지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진화이며 세대 간의 신성한 계약이다. 기명 투표를 통해 남겨진 기록은 훗날 우리 자손들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런 미래를 꿈꾸며 책임 있는 선택을 하셨구나"라고 확인하는 역사적 유산이 될 것이다.
국가의 명운은 5년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국민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핵지뢰의 공포를 걷어낼 대장정의 첫걸음을 떼어야 할 때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근 댓글 목록